[고문서와 옛편지] 파묘(破墓), 허탕칠 수도 있어 게시기간 : 2024-04-17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4-04-15 10:1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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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파묘’라는 단어가 인터넷을 달구었다. 최근에 한국 영화의 관객수는 적었는데 과연 파묘가 관람객 천만 명이란 선을 돌파할 수 있는지 사람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2월 22일 개봉한 이후 한달 만에 천만을 넘었고 4월 14일까지 누적 관람객 수는 1156만 9310명이라고 한다. 여기에 ‘파묘’라는 소재가 조상 숭배나 풍수와 관련되고 일본 요괴까지 등장하여 사람들의 호기심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파묘란 묘를 파헤친다는 말이다.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묻거나 묘를 고치기 위해 땅속에 묻힌 관을 꺼내려면 무덤을 다시 파야한다. 이장(移葬)이나 묘 고치기는 조선시대에도 늘 있었다. 파묘보다 파총(破塚)이란 말을 썼다. 파총은 조상의 시신을 더 좋은 곳으로 옮기거나 묘를 다시 다듬어서 한층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다. 조선시대 유교 성리학의 사상이 보편화되면서 조상을 존숭하는 의식이 높아졌고 조상을 드높이려는 위선(僞先) 풍조가 널리 퍼졌다. 조상 중 어떤 한 분의 후손들이 한데 뭉쳐 결속하게 되고 문중의 크기나 영향력도 강해졌다. 조상을 좋은 곳에 묻어야 후손이 잘 된다는 동기감응설도 힘을 받았다. 후손들은 조상의 관을 좋은 묫자리로 옮겨 묻거나 무덤을 새로 단장했다. 더불어 조상의 묘 찾기에도 열심이었다. 묘를 찾아 파내어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옮길 수 있다면 좋은 일이었다. 파묘가 의미있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상의 묘를 제대로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몇 백년 이상 지났다면 파묘가 허탕이 될 가능성도 높았다. 문씨 집안도 허탕을 피해가지 못했다. 조상 묘 소식에 벌떡 일어난 문약연
을미년 어느 여름날 문약연(文躍淵)은 손님을 맞았다. 문약연의 본거지는 남평 장암인데 일이 있어 잠깐 동안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그를 찾아 온 이는 유영근(柳永根)이었다. 유영근은 문약연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양주 묘적산(妙積山)에 대장(大葬)한 묘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문씨 집안의 문 부원군 묘라는 말들이 전해져 온다고 했다. 문약연은 깜짝 놀라서 유영근과 함께 묘적산으로 가 살펴보고 돌아와 즉시 남평의 집안 어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름 사이에 한 친구가 와서 해준 말입니다. 양주 묘적산 속에 예부터 문씨 집안 무덤이라고 전해오는 묘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묘가 문 부마의 묘라고도 하고 문 부원군의 묘라고들 한답니다. 묘의 모습은 예장(禮葬)한 듯하며 짧은 비갈이 지금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름이라 너무 더워 즉시 가 보지 못했다가 며칠 전에야 비로소 그 사람과 함께 가 보았습니다. 과연 대장(大葬)한 오래된 묘가 있는데 광명대, 석인, 곡장 등의 흔적이 있으나 갈석(碣石)은 없었습니다. 용미(龍尾) 뒤쪽 땅에 10여 년 전에 양주의 상한(常漢) 한 사람이 장사지냈는데 그때는 갈석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집안 족보에 의하면 무덤이 심하게 허물어졌고 상석은 앞면만 겨우 보일 뿐이고 작은 갈석이 그 앞에 쓰러져 있다고 했는데 그 내용과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상한이 장사 지낸 후에 치워 버린 듯한데 증거가 없습니다. 지금 할 일은 묘지(墓誌)를 캐보는 일인데 이는 제가 감히 함부로 결정할 수 없기에 이리저리 듣고 본 것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문약연은 여름에 이야기를 들었지만 가을이 되어서야 묘적산에 가서 살펴 보았다. 무덤에는 광명대, 석인, 곡장 등의 흔적이 있다고 했다. 광명대는 불을 밝히는 도구를 올려 놓는 대이다. 무덤 앞에 놓는 광명등일 듯하다. 석인은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운 석물이다. 문인을 본뜬 문인석(文人石), 무인을 본뜬 무인석(武人石), 아이를 본뜬 동자석 등이 있다. 문약연은 석인이 어떤 모습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석인 흔적을 보았다. 곡장(曲墻)은 무덤 뒤쪽과 좌우쪽에 걸쳐 둘러쳐진 담이다. 직선형이 아니라 무덤을 반 정도 빙둘러 싸고 있어 굽은 형태다. 문약연이 본 무덤에는 이런 곡장 흔적도 있었다. 광명등, 석인, 곡장 등이 갖추어졌으니 평민이나 낮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의 묘가 아닐 터였다. 사람들은 그 무덤을 두고 대장, 예장이란 말을 했다. 대장(大葬)은 예장(禮葬)이라고도 한다. 나라에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예장은 대개 왕족인 대군, 문무관 종1품 이상이나 공신들에게 허용되었다. 예장을 3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신하들은 3등급에 속했다. 세종 때 신하의 무덤에 장명등이나 석마(石馬) 설치를 금지했고, 성종 때에는 석인(石人)만 설치하도록 했다. 석수(石獸) 곧 양, 호랑이, 말 등의 형상을 본떠 만든 석물 설치는 왕족만 쓰도록 했다. 그런데 묘적산에 있는 무덤에는 곡장을 비롯하여 광명등, 석인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원군의 묘라고도 했고, 부마라고도 말했으며, 그 성씨는 아마도 문씨라고 추측했을 터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이런 말들이 전해지고 문약연도 듣게 되었다. 그도 가서 보고서는 그 묘에 묻힌 이는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도 문씨의 묘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묻힌 이의 신분을 알려줄 갈석 곧 무덤 앞에 세우는 묘비가 없어 문씨 집안 묘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누구의 묘인지 분명하게 알기 위해 문약연은 묘지(墓誌)를 파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묘비나 묘지의 내용은 비슷하다. 무덤에 묻힌 사람의 본관, 조상, 조부모, 부모, 죽은 이의 생애, 후손 등에 관한 내용을 담는다. 묘지는 그 내용을 묘비보다 더 간략하게 쓰기도 한다. 묘비는 무덤 앞에 세우고, 묘지는 땅에 묻는다. 땅 위 묘비가 없어져도 땅속 묘지는 남아 있다. 무덤 한편을 파서 묘지를 꺼내면 누구 묘인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보았다고 했던 묘비가 없어졌기 때문에 남은 일은 묘지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덤을 파는 일을 혼자 결정할 수 없었다. 집안 어르신들께 알리고 그들의 결정에 맡겼다. 문중에서 논의하고 묘지를 파보기로 했다면 일을 전담할 사람을 서울로 보내달라는 요청까지 덧붙였다.
‘혹시’, ‘역시’, 희망 부풂에서 꺼짐으로 문약연은 긴가민가하는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을미년에 고향에 편지를 보냈지만 무덤을 파는 일까지 진행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8년 뒤 임인년에 사릉령(思陵令)으로 발령받아 양주로 갔다. 사릉과 묘적산은 약 8km 정도 떨어져 있다. 지금 남양주에 있는 묘적산은 백봉산(柏峯山) 또는 잣봉산이라고 불리며, 산 표지석에도 백봉산이라 쓰여 있다. 바로 그 산자락에 문 부원군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문약연이 파악한 묘 위치를 보면, 묘가 마주 대한 안산은 일자봉(一字峰)이고 손방(巽方) 곧 동남쪽으로 멀리 용문산이 보인다고 했다. 사릉과 묘적산은 거리가 가까워서 탐문하기가 훨씬 쉬웠다. 그는 본격적으로 소문들을 찾아 나섰다. 김일묵(金一黙)이란 사람은 또 다른 정보를 주었다. 김일묵은 지난 정사년에 묘적사에 있던 거사가 해준 말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무덤에 관해 말했다. 그 거사는 김창흡 문하생인 춘금의 제자인데, 당시 거사는 문 부원군 무덤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 수사 이제면(李濟冕)의 제각이 있는 곳은 옛날 신도비가 있던 자리라고 했다. 이제면은 전라 좌수사를 역임하면서 진남관을 재건했다. 이건명(李健命)이 이제면의 묘갈명을 써 주었는데 그에 의하면 이제면은 묘적산 자좌(子坐) 언덕에 묻혔다고 했다. 김일묵 말에 따르면 이제면을 묘적산에 장사지낼 때 문 부원군의 비석 곧 신도비가 허물어졌다는 것이다. 훗날 계해년에 김일묵이 다시 와 보니 윤가네가 이미 장사지낸 상태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까지 아직 남아 있던 짧은 비갈(碑碣)에 새겨진 글자라도 보려고 물로 씻어내고 밀랍으로 찍어 보기도 했지만 알아낸 정보는 없다고 했다. 그나마 을해년 이후로 단갈을 더 이상 못 봤다고 했다. 문약연은 을미년부터 임인년까지 수집한 정보를 종합하여 결론을 냈다. 신도비는 이제면 장례 때에없어졌고, 묘갈은 윤가네가 장례 지낼 때 없앤 것이라고. 무덤 한편을 직접 파서 묘지라도 얻어 보고자 했다. 긴가민가하며 물음을 남긴 채로 그냥 있느니 차라리 지금 묘를 파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흙에 묻힌 상석을 들어냈는데 혼유석이나 향로석은 없었다. 혼유석(魂遊石)은 무덤과 상석 사이에 놓는데 영혼이 와서 놀 수 있게 배려한 공간이다. 문약연은 본격적으로 무덤을 파기 위해 날을 잡아 파묘하겠다고 알리는 예를 올렸다. 그리고 무덤의 남쪽부터 팠다. 파면서 흙을 한쪽으로 치워내니 관이 조금 보였다. 관 아래쪽을 조금 더 파니 황토, 가는 모래, 흑탄, 백토 등이 보였다. 하지만 묘지는 없었다. 흙으로 구덩이를 메우고 봉분을 원래 모양으로 되돌렸다. 허탈했다. 순평군이 묻혔을 때는 고려가 끝난 때였는데 그때 묘지 묻는 법이 시행되지 않은 걸까. 옛날 일이어서 다 알지는 못하겠다. 우리 집안이 시골로 내려가면서 남쪽으로, 서쪽으로 각각 흩어져 살고 있고 근거로 삼을 만한 글이 있으니 뒷날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 세대가 더 멀어지면 이곳 사람들도 더 이상 말을 전하지 않게 되어 지금 들었던 내용들도 모두 없어질 터이다.
무덤을 파헤치기 전에는 ‘혹시나’ 기대했지만 역시 묘지는 없었다. 그 묘가 문 부원군 묘 또는 그 묘터였는지 아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묘지가 없는 이유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순평군이 묻혔을 때는 고려가 망할 때 즈음이라고 하면서 그때에는 묘지를 만들어 묻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인지도 되물었다. 고려 때에도 묘지를 묻었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말기에 살았던 문약연 입장에서 보면 무덤에는 묘지가 당연히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없으니 ‘혹 그때 묘지의 예법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인가 의심했다. 유영근에게서 순평군의 무덤 이야기를 들은 이후 거의 8, 9년 동안 그것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탐문했다. 하지만 파묘 기획의 기대와 희망은 거품이었고 이내 꺼졌다.
맨 왼쪽에 사릉, 가운데 묘적산, 오른쪽에 용문산이 있다. 1842년 문약연은 사릉령으로 발령 받아 양주에 가게 되자 묘적산 부근을 중심으로 무덤에 관한 정보를 탐문했다. 다시 기대한 문약연, <묘적기>를 쓰다 문약연은 다시 ‘혹시나’ 기대했다. 조상 무덤 찾기 과정과 결과를 <묘적기(妙積記)>로 남겼다. 비록 순평군 무덤은 찾지 못했지만 후대에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놓지 않았다.
문약연이 순평군을 묻은 때를 고려가 끝나갈 무렵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순평군(順平君)은 문달한(文達漢)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일생을 서술한 글이 고려사 열전에 있다. 문극겸(文克謙)의 6대손, 문유필(文惟弼)의 5대손이다. 신우(辛禑) 때 왜적을 물리쳤고 최영(崔瑩)은 그의 우직함을 높이 평가했다. 공양왕 4년에 순평군에 봉해진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1392년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을 알린 해이다. 고려가 망한 해에 문달한이 죽었으므로 문약연은 장례에 묘지를 묻는 법이 잘 시행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고려했던 것이다. 또한 김일묵에게 얻어낸 정보에 의하면 이제면이 죽은 지 140여 년 정도 지났다고 했다. 이제면은 숙종 44년(1718년)에 죽었다. 문약연은 1830, 40년대에 묘에 대해 수소문했다. 순평군이 죽은 지 450년이나 지난 때였다. 이제면의 무덤이 생긴 후에 또 양주에 사는 윤 아무개의 무덤도 새로 생겼다. 세 무덤이 서로 바짝 붙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으니 분간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도 문약연은 파묘라는 어려운 과제를 과감하게 해냈다. 그리고 뒤를 이어갈 이들이 조상을 잊지 않고 혹 그 무덤을 찾아 볼 수 있도록 기록도 남겼다. 파묘하는 마음 영화 <파묘>는 기이한 병이 대물림되는 집안이 그 이유를 찾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조상 묫자리가 나빠 집안에 불행이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좋은 묫자리로 옮기기 위해 파묘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살아 있는 이들의 불행을 없애기 위해 파묘를 결정한다. 영화 속 후손의 속내는 조상으로 인해 불행을 제거하거나 복을 받으려는 데 있다. 그래서인지 감상 댓글에 ‘조상을 잘 모셔야겠네요.’라고 한 이도 있었다. 문약연이 묘적산의 묘에 집착한 속내를 지금 알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오랫동안 그 묘의 문제를 놓지 않고 수소문하며 파묘까지 단행한 마음은 하나였을 것이다. 조상을 기억하고 챙기겠다는 마음. 파묘하고자 할 때 문약연의 마음과 같다면 조상님도 흐뭇해하지 않을까. <도움 받은 글들> 한국고전종합 DB, https://db.itkc.or.kr/
『고려사』, https://www-krpia-co-kr.libproxy 한국고문서자료관, https://archive.aks.ac.kr/ 김건태(1999), 「1743년-1927년 전라도 영암 남평문씨 문중의 농업경영」, 『대동문화연구』 35,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김세호(2021), 「남양주 묘적산의 역사와 문화공간적 의미」, 『한국고전연구』 55, 한국고전연구학회. 김형수(2019), 「조선시기 영남 사족들의 조상 찾기와 先祖관련 기록물의 편찬」, 『한국사학보』 74, 고려사학회. 장우정(2023), 「고려시대 토광묘의 장송의례 시설과 배경 - 양광도지역을 중심으로 」, 『중앙고고연구』 42, 중앙문화유산연구원. 정해득(2014), 「조선시대 묘제 연구」, 『조선시대사학보』 69, 조선시대사학회. 정해득(2023), 「조선시대 묘소 관리와 묘사(墓舍)의 확산」, 『대구사학』 153, 대구사학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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