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처가 조상의 시험 합격증을 훔쳐 판 사위 게시기간 : 2024-05-22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5-2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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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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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합격증, 공신록권을 찾아 주십시오 1821년 장흥 관아에 소지(所志) 하나가 접수되었다. 8월이라 여름 더운 기운이 아직 끝자락을 거두어 가지 않아 정무에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백성의 탄원이 들어왔으니 아니 살필 수 없었다. 접수자는 강진에 사는 임백우(林伯雨)와 그 집안 사람 4명이었다. 임백우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여묘살이를 해서 효자로 이름이 났었다. 서울로 가 연천 홍석주(洪奭周)로부터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와 초당을 지어 강진과 장흥 부근의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장흥에서 훌륭한 선비라고 명성이 높았다. 그의 조상 중에 서곡 임분(林蕡, 1501-1556)과 죽곡 임회(林薈, 1508-1573)가 있는데 둘다 장흥 기양사에 배향되었다. 장흥의 명문가에서 나온 소지인지라 더욱더 아니 볼 수 없었다. 소지 내용은 간결했다. 도둑을 잡아 벌주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게 해달라고 요청한 소지였다. 저의 9세조는 임분(林蕡)입니다. 문정공 정암 조공(趙公)의 문학생이 되었는데 학술이 크게 이루어져 당시 사람들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기묘년 이후 여러 번 천거되어 벼슬이 내려졌지만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학문을 연구하여 사문(斯文)을 흥성시키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습니다. 좋은 말씀과 아름다운 덕행은 지금까지도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 선비들이 기양사(岐陽祠)에 모셨는데 세상에서는 서곡선생(書谷先生)이라고 부릅니다. 그 서곡선생의 진사 백패(白牌)와 그 조카의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이 전해져서 지금까지 종손인 임종재(林宗材) 집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용계에 사는 종재의 고모부 이영원(李永元)이 그것을 몰래 훔쳐서 회녕에 사는 임득명(林得鳴)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제가 그것을 찾으려고 회녕에 갔더니 임득명은 이미 죽었고 그 아들은 섬으로 들어가버려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손된 사람으로서 원통하니 어찌할지요.
1821년 8월에 임백우가 올린 소지. 임분은 연산군 때 태어나 명종 때 세상을 떴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인 임안우(林安祐)가 장흥으로 이사 온 이후 대대로 장흥에서 살았다. 정암 조광조의 학문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그 문하생이 되었고, 1521년 신잠(申潛, 1491~1554)이 장흥으로 귀양왔을 때 그에게 가서 제자가 되었다. 문학적 역량도 뛰어나 10세가 채 안 된 나이에 글도 제법 잘 지었다고 한다. 1540년에 소과(小科)인 진사시에 붙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했다. 얼마 안 되어 스스로 성균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이 자꾸 응시하라고 보채서 진사시험에 응시했다고 한 것을 보면 과거시험 공부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던 듯하다. 성균관에서 자퇴할 때 <부귀재천부(富貴在天賦)>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성균관을 자퇴하는 이유를 밝혔다. 부귀는 하늘이 주는 데에 따를 뿐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과거 합격이나 높은 벼슬 따위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40대에 여러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사양했다. 훗날 장흥의 대문장가인 존재 위백규가 묘표를 썼는데 그 글에서 ‘천한 사람이라도 세워서 세상을 요순으로 만들었어야’했다고 썼다. 임분에게 뜻을 충분히 펼쳐 정사에 참여할 수 있는 높은 자리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임분 자신도 관직에 뜻이 없었던 사실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임분은 장흥과 주변 지역에서 문장과 학덕으로 명성이 있었고 이로 인해 장흥의 기양사에 배향되었다. 임분의 후손들은 이를 자랑스러워했고 집안의 영광으로 여겼다. 임분이 진사시험에 붙어 받았던 백패를 소중히 여겼다. 그 백패(白牌)를 도난당했다. 범인은 임씨 집안 사위 이영원이었다. 백패는 임씨 종손인 임종재 집에서 보관했다. 이영원은 임종재의 고모부였다. 이영원은 처가의 조카 집안에 백패나 공신록권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것을 몰래 훔쳐 임씨 집안 사람인 임득명에게 팔았다. 팔았으니 금전적 이득도 챙겼을 터이다. 임백우는 임씨 집안 사위가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게다가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공신녹권까지 훔쳐 팔아버렸다고 했다. 훔친 것도 용서하기 어렵지만 백패나 공신녹권을 감히 돈이나 쳐서 받는 물건으로 취급한 행태가 더 괘씸했다. 돌아온 녹권(功臣錄券), 다시 찾아야 하는 백패(白牌) 백패와 공신록권은 임득명 손에 들어갔다. 임백우는 그것을 찾으러 임득명이 산다는 회녕(會寧)까지 갔다. 임득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은 섬으로 들어가 행방조차 찾기 어려웠다.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영원이 훔쳐서 판 백패와 공신록권만 생각하면 분한 마음에 정신도 흐릿해질 지경이었다. 관아에 호소하기로 마음을 먹고 탄원서를 냈다. 관에서는 이영원을 잡으라고 했다. 성과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임득명의 5촌 조카인 임일득(林一得)이 임백우에게 와 상황을 설명했다. 공신록권은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었고 백패는 성량의 집에 있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자기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공신록권은 되찾았지만 백패를 찾아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임백우는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 사이 공신록권을 찾았으니 백패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가을이 다 지나고 겨울에 들어설 무렵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임백우는 타는 마음으로 다시 탄원서를 냈다. 지난번 백패와 녹권을 잃어버린 일로 소지를 제출한 지 석 달 되었습니다. 녹권에 대해서는 임득명의 5촌 조카 임일득이 제게 와서 주인에게 녹권을 돌려주었다고 말하면서 백패는 성량의 집에 있다고는 하는데 자기는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잃어버린 녹권을 다시 찾은 것은 성주님께서 인의로 교화하신 덕분입니다. 그런데 백패는 아직도 찾지 못했으니 원통하기만 합니다. 처음부터 일을 꾸민 이는 이영원이고 그 중간에 농간을 부린 자는 정내진(丁乃進)입니다. 두 사람을 잡아 가두는 일이 차일피일 늦춰지다 보니 더욱 도리에 어그러지고 사나워졌습니다. 그리하여 감히 말씀 올립니다. 두 사람을 잡아다 법정에 세워 백패를 돌려주라고 해주시고, 금당도(金塘島) 풍헌에게도 알리시어 성량을 잡아오게 해주십시오.
1821년 10월에 임백우가 올린 소지. 첫 번째 탄원서를 내고 임백우는 회녕도 다녀오고 백패와 공신록권에 대해 이리저리 탐지했었다. 백패와 녹권이 없어진 것은 이영원이 한 짓이기도 했지만 그 사이에 정내진이 농간을 쳤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백패가 성량의 집에 있고 그가 현재 금당도에 산다는 정보도 알아냈다. 임백우는 이영원과 정내진 두 사람을 잡아다 백패를 도로 가져오도록 하고 금당도에 사는 성량도 잡아와 백패를 다시 찾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수령은 또 잘 살피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백패는 임금이 내린 증서이다. 이를 훔쳐 내다 파는 일을 그냥 내버려 두거나 소홀하게 다루면 백성들의 윤리적 양심도 희미해지고 지역의 기강이 어지러워질 수도 있었다. 임분 집안은 장흥에서도 존경받는 가문이었다. 무엇보다 임백우는 9대조가 받은 시험합격증서를 찾으려는 열심을 내고 있었다. 3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임백우는 선조가 물려준 유물을 소중히 여겼다. 그 절실한 정성을 무심히 보아 넘기기도 어려웠다. 한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으로서 여러모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공신록권은 돌려주었으면서도 백패는 왜 내놓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만 수령이 할 수 있는 일은 백패를 찾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패를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임백우가 할 일이었다. 무가지보(無價之寶)-백패와 공신녹권 백패는 진사시나 생원시와 같은 소과(小科) 시험을 통과했을 때 받는 입격 증서였다. 흰 종이로 되어 있어서 백패라고 한다. 소과에 입격하면 다음 단계인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다. 비록 소과라도 해도 워낙 경쟁률이 높아서 백패를 받는 일은 개인뿐 아니라 집안을 빛내는 일이었다. 조선 후기 이주신(李周臣)이란 사람은 소과에 속하는 향시와 대과에 나란히 붙자 백패와 홍패 둘다 앞세워서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임분의 스승이었던 신잠은 귀양에서 풀려난 후 시를 지었는데 ‘붉은 종이는 거둬갔고 흰 종이는 잃어버렸으니 한림이나 진사는 모두 헛된 이름이 되었다.’고 했다. 1513년에 진사시에서 1등을 한 백패를 받았고, 현량과에 합격하여 합격증인 홍패를 받아 한림이라는 벼슬도 지냈다. 그런데 현량과 합격이 취소되어 국가에서 홍패를 도로 가져갔다. 또 그가 장흥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 집안 사람들이 백패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진사라는 명예도 헛된 일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박지원의 <양반전>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문과의 홍패는 크기가 두 자〔二尺〕가 채 안 되어도 온갖 물건이 그 속에 다 갖춰져 있으니 돈 자루와 다름없고, 30세에 진사가 되어 첫 벼슬에 나서도 이름난 음관이 될 수 있다.’ 남구만의 친척인 남오성(南五星)은 자기 형제들이 받은 백패 3장과 홍패 3장을 갖고 7폭 병풍을 만들었다. 병풍을 세워 놓고 집안의 자식들이 늘 보게 하여 공부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현실을 보면 백패가 가진 힘은 꽤 강했다. 음관으로 나아갈 길을 터주는 문서이고,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증이며 입격자의 우수함도 증명했다. 집안을 빛내고 자손들을 가르치는 훌륭한 본보기였으며 자기 집안이 명문가임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돈이나 물질로 계산하려면 그 상한가가 얼마일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것을 훔쳐서 같은 성씨에게 팔아버렸고, 그것도 집안의 사위놈(?)이 그랬으니 더 기가 막혔다. 공신록권은 또 어떤가.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이었다. 선무공신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 데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부여한 공신 호칭이다. 일등공신은 단연 이순신(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었다. 그리고 1605년에 9천 60명이 선무원종공신으로 정해졌다. 공신도감에서는 이들의 이름을 기재한 선무원종공신록권을 인출하여 공신들에게 1부씩 나누어주었다. 비록 일등공신은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일에 대해 임금과 조선 백성들로부터 공인받았다고 증명하는 문서이다. 충효를 최고의 윤리적 가치로 높였던 조선시대였으니 집안에 공신이 나왔다면 그 또한 집안을 빛내는 일이었고 자랑거리였다. 다만 입으로만 자랑해서는 안 된다. 증거가 있어야 한다. 공신록권이 그것이다. 그런데 녹권도 도둑맞았다. 백패든 공신록권이든 모두 임금이 하사했다. 돈값으로 매길 수 없는 집안 보물을 사위가 훔쳤다. 집안 일이고 밖으로 드러내기에 껄끄러웠지만 찾아서 제자리에 돌려 놓야야 했다. 임백우는 그 일을 기꺼이 하고자 탄원서를 제출했다. 백패는 돌아왔을까 임분과 그의 조카가 살았던 때는 임진왜란 전후였다. 300여 년이 지났지만 임백우에게 9세조 어르신의 진사시험 합격증과 8세조 어르신의 공신록권은 세상에 다시 없을 집안 보물이었다. 남도 아닌 집안 사위가 훔쳐 팔았다. 그것을 산 이는 임득명이었다. 같은 임씨 집안에서 선조의 보물을 종가에서 빼낸 일이었다. 조선 후기에 대과 합격증인 홍패를 파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속대전을 편찬할 때 ‘홍패를 사고 판 사람 모두 절도(絶島)로 보내 종으로 만든다.’는 조항을 써 넣었다. 시험합격증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매매 대상이 된 현실을 잘 보여주는 법조항이다. 임분의 백패도 이런 가치가 있었을 터이고 사위 이영원은 백패를 이용했을 터이다. 백패를 산 이도 마음 속에 숨겨둔 어두운 목적이 있지 않았을까. 이 모든 상황이 임백우에게는 충격이었다. 분통함을 내뿜기에 충분했다. 끝까지 찾아내야 했고 임백우는 그 일을 맡았다. 공신록권은 찾았다. 백패는 어찌되었을까. 임씨 집안 보물의 행방은 여전히 궁금할 뿐이다. <도움 받은 글들> 한국고전종합 DB, https://db.itkc.or.kr
『경국대전』, 규장각소장. 김동석(2014), 「과거 관련 장전장후 고문서 연구」, 『대동한문학』 40, 대동한문학회. 박성호(2012), 「여말선초 홍패, 백패 양식의 변화와 의의」, 『고문서연구』 40, 한국고문서학회. 임기영(2012),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에 관한 서지적(書誌的) 연구」, 『영남학』 21, 영남문화연구원. 장학근(2011), 「임란공신이 이순신 위상에 미친 영향」, 『이순신연구논총』 15,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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