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생(生)의 강을 건넌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게시기간 : 2024-05-24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4-05-20 15:0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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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머니가 계시는 시골집에 갔다. 친한 농대(農大) 선생님에게 얻은 아스파라거스 모종을 심기 위해서였다.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구덩이를 팠다. 구순의 어머니는 힘든 걸음으로 오시더니 의자를 놓고 앉으셨다. 아스파라거스라는 식물도 생소한데 난데없이 삽질을 하는 아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셨다. 흙을 북돋으며 모종을 심었다. 어머니는 이왕 하는 것 꼼꼼히 좀 하라 다그치신다. 내년 봄이면 고사리같은 순이 올라올 것이라 말씀드리니, 어머니는 허허 웃으며 내년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한 해라는 시간은 다른 느낌의 것이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하지만 모르는 것이 태반이다. 대부분은 부모가 되어서야 아는 것 같다. 옛글을 읽다보면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애달픈 삶의 마디에서 쓴 육필의 흔적은 시간을 초월한 울림을 준다. 이번에 소개할 시는 17세기 호남 장성, 영광 지역에서 살았던 송암(松巖) 기정익(奇挻翼, 1627~1690)의 작품이다. <輓劉君湍>
옛날에 나의 아들 따르던 너 나이는 아들보다 조금 적었지 우리 아이 잘한다는 소문 있자 너는 도리어 선생 삼아 배웠지 불행히도 아이 일찍 세상 떠날 때 너와 영결(永訣)하는 말 몹시도 슬펐지 나에게 가서 배우라고 권하니 아이의 그 마음을 너는 알았으리 내가 우리 아이를 잃고부터는 너를 보며 아들처럼 여겼으니 네가 와서 나의 곁에 있을 때 진실한 모습 자못 대견했었지 내가 마침 홀아비로 생활하니 밤낮으로 부지런히 보살피며 아버지 모시듯 정성을 다하니 어찌 글만 공부한 것이라 하랴 어쩌다가 병이 네 몸을 휘감았나 나는 오묘한–원문 빠짐-을 다했지만 생사의 기미를 대략 아는지라 너의 병 실로 치료하기 어려웠지 나는 너를 집으로 가게 하여 차마 더 이상 고생 않게 했지 이제 자식 같은 너를 보내고 지금 이렇게 통곡을 하나니 삶과 죽음 사이의 무한한 뜻이 종이 한 장의 이 시에 있는 듯하구나 爾昔從吾兒 行年小參差 吾兒早有譽 爾却師事之 不幸兒短命 訣爾辭極悲 勗爾來學我 兒情爾當知 自我失吾兒 見爾如見兒 爾來在吾傍 淳實頗有奇 我時鰥且獨 夙夜勤扶持 誠深視猶父 豈獨文字爲 爾何病纏骨 我卽窮妙(缺) 粗知生死氣 爾病實難醫 吾令爾歸家 不忍增險巇 遂負視猶子 慟矣今至斯 幽明無限意 有如一紙辭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한 애도시(哀悼詩)이다. 그의 이름은 유단(劉湍). 기정익의 아들 왕(汪)을 선생 삼아 공부했었다. 이전에 아들 왕이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과 인연이 있는 단마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시를 쓴 기정익의 삶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기정익은 1627년(인조5) 부친 기진탁(奇震鐸)과 나무춘(羅茂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식년시와 증광별시에 아홉 번 합격했는데 두 번이나 장원을 차지했다. 양친이 세상을 떠나자 대과의 뜻을 접고 성리학에 몰두했다. 특히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좋아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이른 시기에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제자가 되었지만 연이은 상사(喪事)로 직접 가지 못하고 편지 왕래를 통해 의문점을 해결했다.
그는 인근 동학들과 성리학을 탐구하는 학문공동체의 중심에 있었다. 함께 성리학의 요지를 궁구하여, 만나면 대화로써 토론하고 헤어져 있을 때에는 편지로 주고받았다. 두 살 연상인 윤증(尹拯, 1629~1714)과도 교유하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이후 관계를 정리한다. 『율곡집(栗谷集)』 속집(續集)의 간행 작업이 한창일 때는 신익상의 부탁에 의해 교정을 맡기도 한다.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1610~1669) 등 여러 선배들은 그를 ‘호남제일인(湖南第一人物)’이라 하기도 했다. 장성 소곡(小谷)에서 영광 박산(朴山), 장성 동귀점(東龜店) 등으로 옮겨 살다가 열리곡(悅理谷)으로 돌아와 생을 마친다. 열리곡 집 뒤에 소나무와 바위가 있었는데, 그의 호 ‘송암(松巖)’은 여기에서 온 것이다.
시의 이해를 위해 기정익의 고달픈 삶의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기정익은 참판을 지낸 김여옥(金汝鈺)의 딸과 결혼하여 4남 6녀를 두었다. 그런데 막내 왕을 제외한 첫째, 둘째, 셋째 아들과 셋째 딸, 다섯째 딸, 그리고 부인이 1660년 후반~1680년 초반에 걸쳐 세상을 떠난다. 문집에는 그가 역병(疫病)을 피해 둘째 홍(泓)과 함께 산사(山寺)에 머무르던 일, 막내 왕이 아홉 살 때에 역병을 피해 표숙(表叔)에 집에 있다가 열한 살 때에 돌아온 일, 형님이 전염병에 걸려 위태로운 지경이 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나누어 준 일, 조카 형(泂)이 전염병으로 죽자 직접 시신을 수습한 일 등 집안의 앙화(殃禍)가 자주 언급된다. 경신대기근(庚辛大饑饉)을 전후한 무렵의 전염병 유행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잦은 참화를 겪으면서 그는 장성 소곡에서 영광 박산으로 이사한다. 그런데 이사 후 10년 쯤 될 무렵, 또 딸 하나를 잃고 이어 막내 왕마저 잃게 된다. 왕의 죽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 너는 나의 마음을 알아 목숨이 다했을 때 새 어머니를 맞이하라 권하면서 다시 아들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아아, 이는 비록 일반적인 이치는 아니지만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그렇게 될 수 있다. 공자께서 “낳고 낳는 것[生生]을 역(易)이라고 한다.”라고 하셨으니, 이역(移易)하고 변역(變易)하는 것이 바로 음양의 이치이다. 지금 충만하게 하늘에 있는 너의 기(氣)는 실로 음양 조화의 근본으로 돌아간 것이니, 그렇다면 지극한 정성이 감응하여 다시 아비에게 태어날 이치가 어찌 없겠느냐. …<중략>… 다만 내가 새 부인을 맞는 것은 또한 시운(時運)이 있다. 원컨대 사무친 너의 영령이 더욱 한결같은 정성을 모아, 때를 기다려 다시 태어나 예전처럼 부자(父子) 사이가 된다면 내가 또 무엇을 슬퍼하랴. 이보다 큰 경사가 없을 것이다. 이에 제철 음식으로 곡을 마치니, 가눌 수 없는 그리움은 말로 다 할 수 없구나. 혼령이 앎이 있다면 어느 훗날에 꼭 그렇게 될 것이다. 흠향하기를 바란다.(“…汝知吾意 臨絶屬余 勸我後娶 切願再降 嗚呼 此雖非理之常而誠之至者 亦能感通 孔子曰 生生之謂易 然則移易變易 乃陰陽之理也 今汝洋洋在上之氣 實還陰陽造化之本 則以其至誠之感 而再化生於其父 豈無其理 …<중략>… 但吾後娶 亦有時命 願汝感結之靈 益凝不貳之誠 待時以降 父子如初 則吾又何悲 慶莫大矣 玆以時羞 用卒其哭 轉輾之懷 都在不言 靈其不昧 後必有驗 惟冀饗之” 『松巖集』 권3, 「祭汪文」.)
막내 왕에 대한 제문(祭文)이다. 왕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왕을 임신했을 때 어머니는 용(龍)꿈을 꾸었고 기정익은 꿈에 노자(老子)를 보았다. 왕은 글재주가 있어 요절한 형들 대신 가문을 빛낼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렇지만 10대 초반부터 잔병치레를 했고, 모친상을 치루면서 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하나 남은 아들의 죽음은 너무도 비통한 것이었다. 제문에는 죽음 무렵 부자간에 나눈 대화의 일부가 언급된다. 왕은 세상을 떠나지만 다시 아들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새 어머니를 맞이하면 제가 꼭 다시 태어나 못다 한 아들 노릇을 할게요.” 내내 가슴에 묻었던 이 말을 왕이 떠났던 그 날에 떠올리며 하늘이 정성에 감동한다면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낳고 낳는 것[生生]이 역(易)이고 이역(移易), 변역(變易)이 음양의 이치임을 들어, 지극한 정성만 있다면 아들의 기(氣)가 다시 자신에게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학문 논리를 빌어 자신의 소망을 피력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불가능하지만 믿고 싶은 것, 그렇게 되기 힘들 것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비원(悲願)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아들은 이미 세상에 없지만, 기정익에게는 아들이 남긴 과업(課業)이 있었다. <만유군단(輓劉君湍)>이라는 이 시는 그 일을 배경에 두고 있다. 왕이 살아있을 때였다. 어느 날 집에 유단이라는 아이가 찾아왔다. 막내 왕이 재주가 있고 학업에 열심이라는 소문이 나자 왕에게 공부를 배우러 온 것이다. 왕은 반갑게 맞이하고 가까이 지내며 초학(初學) 공부를 이끌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약하던 왕의 병이 깊어졌다. 병이 위중해지고 살 가망이 없자 왕은 단을 불러서는 공부를 그만두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가 없더라도 아버지 아래에서 공부를 하라고 당부한다. 아버지에게도 단이 학문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한다. 왕이 세상을 떠나자 기정익은 단에게 집으로 와서 배우라고 한다. 단은 짐을 싸 와 함께 생활하며 학업에 몰두한다. 여가에는 집안일도 돕고 홀아비인 기정익의 시중도 들었다. 기정익은 아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단이 고마웠고 성실히 공부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지낼 때였다. 어린 단이 시름시름 앓아 눕더니 좀처럼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약도 쓰고 방법도 찾아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정익은 얼마 못살 것을 직감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한다. 집으로 가서 부모님 아래에서 지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단이 떠난 지 얼마 후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병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생(生)의 강을 건넌 그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붓을 들어 한 편의 애도시를 써 내려 갔다. 순간 지난 시간의 일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아들 왕과 단의 인연(因緣), 왕이 떠난 후 자신과 단의 인연. 그 시간 속에 등장하는 아들과 아들 같던 단의 얼굴. 아비의 사랑으로 품고자 했으나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존재들. 일상화된 슬픔이 이런 것일까. 슬픔으로 치달을 것 같은 시인은 오히려 담담히 하나하나 지난 일을 적어간다. 감정의 격앙도 하늘을 향한 울부짖음도 없고, 오직 체화(體化)된 슬픔만이 이 시의 행간에서 묻어난다.
기정익의 삶은 17세기 소빙하기라는 전세계적 이상 기후 시기 안에 있다. 이 시기 서양에서는 농작물 수확이 늦어지거나 아예 어려운 일이 빈번하면서 사회가 혼란에 빠졌고, 이에 마녀라는 억압집단을 설정해 마녀 사냥을 일삼기도 했다. 조선에서도 두 차례 우역이 발생했고, 이상 저온으로 인한 흉년으로 두 차례 대기근이 발생했다. 기근에서 오는 면역력의 약화, 이에 따른 전염병 유행과 엄청난 수의 사망자 발생이라는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는 기정익의 중장년 시기와 겹친다. 이 때 그는 자식들의 잇따른 죽음을 보며 부모 자식의 인연을 끊임없이 되돌아 본 사람이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더 큰 품을 여는 것이 부모이다. 기정익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넘어 아들이 못다 한 책임까지 다하려 했다. 어린 유단마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운명의 가혹함이지만 그는 이마저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 곧 학문에의 몰입을 통해 휘청일 수도 있는 자신을 부지하고 견뎠다. 근심과 상심이 심할 때 경(敬)을 생각하거나 슬픔을 잊기 위해 치지(致知) 공부를 했다는 기록들은 이러한 예이다. 가정의 달, 오월이 하순을 향하고 있다. 감사와 격려의 언어가 오가는 오월에 너무 슬픈 이야기를 적지 않았나 싶다. 세상에서 가장 큰 인연, 천륜(天倫)이라 할 부모 자식의 관계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 글쓴이 김창호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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