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1930년대 호남의 대표 잡지 『호남평론』 게시기간 : 2024-01-17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4-01-15 14:0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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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 목포의 뿌리 1897년 개항으로 일찍부터 ‘깨인 곳’이었던 근대도시 목포! 목포에서 예향의 뿌리는 근대극의 선구 김우진(1897∼1926)과 엘레지의 여왕 이난영(1916∼1965)에서 찾는다. 물론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도적 감성의 추상화를 정착시켜 한국예술사에 기념비를 세운 김환기, 특유의 독필(禿筆)과 빠른 붓질로 운림산방의 가풍을 회복, 남종화풍을 세운 허건의 미술, 동반자작가로서 식민지시대 억눌린 조선인의 삶을 조명하며 계급의식을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형상화하였던 여류소설가 박화성의 등단과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순응과 저항의 이율배반성을 담아낸 김진섭의 수필문학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오거리문화 등도 빼놓을 수 없다.1) 이와 더불어 특기할 만한 것이 바로 『호남평론(湖南評論)』이다. 당시 ‘호남 유일’이라 불리던 잡지 『호남평론』은 1935년 4월 20일, 4·5월호 합권으로 목포에서 창간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으로는 1937년 11월호가 마지막이었다. 『호남평론』은 창간부터 폐간까지의 과정에서 1930년대 목포-호남 지역 문화상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일제의 탄압, 청년들의 고민, 타협, 이런 것들이 버물려진 잡지였다. 『호남평론』에서는 지역 소식뿐 아니라 국제 정세까지도 다루고 있어 당시 목포의 문화적 소통의 범위를 잘 보여준다. 창작시와 소설 등 문학작품도 풍부히 게재하였고, 심도 있는 시사평론들을 다양하게 싣고 있어 목포는 물론 전국의 사정도 엿볼 수 있다. 1936년 2월 목포고보 설립을 위한 유지좌담회를 주최하는 등 지역 현안에 대해서도 적극 대처하였다. 또한 독립운동가 배치문이 '배고파'란 필명으로 기자, 편집장으로 활동하는 등 많은 항일지사, 지식인들이 지역 여론을 주도하고 공론화하는 장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호남평론』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제강점기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종합잡지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호남평론』을 발간할 수 있었던 문화적 역량이야말로 예향 목포의 굳건한 뿌리가 되었다. 해방 이후 목포가 예술계를 선도할 수 있었던 저력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하 『호남평론』의 이모저모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목포평론』, 『전남평론』에 이은 『호남평론』의 출간 불허가(不許可) 출판물 목록을 게재하고 있는 『조선출판경찰월보(朝鮮出版警察月報)』제51호(1932년 11월분)에는 전남에서 발행 예정인 『전남공론』 창간호에 대하여 1932년 11월 14일자로 치안을 이유로 출판법에 따라 출판 불허 처분이 내려졌음 전하고 있다. 『전남공론』은 이렇게 창간 준비 중에 맞은 불허 처분으로 인하여 발간하지 못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듬해인 1933년 1월, ‘목포평론(木浦評論)’으로 이름을 바꿔 출간하였다. 이렇게 『목포평론』은 목포 나아가 호남 최초의 시사잡지가 되었다. 편집장 겸 발행인은 지도 출신의 사회 운동가이자 기자로 활동한 나만성(羅萬成, 1896~1936)이었다. 이 잡지에는 김성호(金聲浩)의 창간사를 비롯하여, 목포 상점 순례기, 목포 음식점 평판기, 목포 권번 기생 총출동 등 다양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목포평론』은 「동아일보」신간소개난에 따르면 1월의 신년 창간호와 3월, 5월호에 대한 소개가 실려 있다. 하지만 『목포평론』도 여기까지에서 그쳤다.
【그림 1】 1936년 1월 15일 발간한 『호남평론』제2권 제1호(신년호) 표지. [출처] 국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어서 1933년 6월 18일자 「동아일보」에는 ‘목포부 죽동 44번지’의 ‘전남평론사’에서 발행한 『전남평론』 6월호의 신간 안내가 실려 있다. 언제까지 발행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전남평론』 역시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2) 이처럼 지역 잡지의 출판 환경은 열악했다. 창간-폐간이 잇달았다. 그런 사정인데도 불구하고 1935년 4월 20일, 이를 이어서 『호남평론』이 창간되었다. 1935년 4·5월호 합본으로 창간한 『호남평론』은 이후 한 차례의 결본(1935년 7월호)과 또 한 차례의 합본(1936년 3·4월호)을 제외하고 1937년 11월호를 마지막으로 발간할 때까지 매월 빠짐없이 출간하였다. 총 29차례 발간한 것으로 파악된다. 『호남평론』을 『목포평론』, 『전남평론』을 이은 속간(續刊)으로 여겼음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호남평론』 창간호의 권두언에서 “이제 호남평론은 다시 갱생(更生)의 길을 밟게 된다”라 하였고, 김성호가 쓴 시론의 제목이 「『호남평론』을 다시 내놓으면서」였다.3)그리고 특히 「편집여언(編輯餘言)」에 “속간호(續刊號)라고 이름을 붙이기는 매우 거북상스럽다. 1년 3개월 동안 휴간시켜온 『전남평론(全南評論)』을 지금에 다시 계속한다고 속간이라 하기는 정말 면목이 없는 소리이다. 그러나 1년 3개월 동안을 휴간시켰던 『전남평론』을 영구히 폐간(廢刊)이란 열쇠를 채워버리지 않고 다시금 붙잡아 일으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전남평론』의 필요를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지난 실패를 체험으로 하여 앞날의 발전을 예기(豫期)할 수 있음에서 새로운 진용(陳容)을 정비하고 『호남평론』을 내놓는 것이다.”
라 하는 데서 그간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김철진(金哲鎭, 1905~1971)의 연재물인 「사물(事物)의 일면관(一面觀)」은 “이미 『목포평론』, 『전남평론』으로부터 현 『호남평론』에 이르도록 호를 거듭하여 이 「사물의 일면관」이 계속하였으니”4)라 하는 데서 그 연속성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호남평론사원 일동의 이름으로 게재한 나만성 선생의 추도문을 보아도, “아사(我社)의 창립자로서 『목포평론』·『전남평론』 시대부터 자기 일신으로 분투 노력하여 온 그 은덕으로 하여서 금일의 아사는 기초가 반석 위에 서게 된 것이다”5)라 하고 있어, 나만성이 『목포평론』, 『전남평론』을 이어 『호남평론』까지 주도적으로 역할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인적 연속성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고투(苦鬪)시대를 이겨내며 ‘호남평론’이란 이름으로 속간을 하였다. 하지만, “실은 모두가 새준비와 새살림으로 첫 번호를 내놓느니만큼 힘든 바람도 없이 재료의 수집과 배편(配編)의 불비(不備)의 관(觀)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고 하듯이 쉽지 않았다. 그 결과 첫 번호부터 4월호만으로 펴내지 못하고, 4·5월호 합본으로 발간하였다. 그 점에서 그간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림 2】 『호남평론』과 함께 삶을 같이했던 나만성(羅萬成, 1896.3.19~1936.6.6).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출처] 나무위키 창간 당시 발행인은 서광우, 사장은 김성호, 주간은 김철진, 편집책임은 나만성이었고, 이사로는 정찬민, 천길호, 박찬일, 권녕지, 오태준, 그리고 기자로는 최양선, 장인순 등이었다. 사무실은 목포시 죽동 49번지였으며, 인쇄·발행 장소는 경성 숭동 206번지로서 당시 『호남평론』 경성총지사 사무실이었다. 주요 필진은 주간인 김철진과 편집장 격인 나만성을 비롯하여, 조극환, 김상수, 천독근, 박찬일 등 1920년대의 지역활동가들이 중심이었다. 박화성, 이무영, 방인근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도 실었다. 1930년대 중반의 시점에 지방에서 이 정도 규모의 종합잡지를 발간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주식회사 호남평론사의 창립 어렵게 재출발하였다. 그래도 의욕 하나만은 충만하였다. 이후 하나씩 보완해 가면서 완성도를 높여갔다. 이는 주식회사 호남평론사의 창립으로 나타났다. 1935년 11월호에 이르면, 권두언에서 “『호남평론』의 외적 발전과 내적 충실은 실로 일취월장의 상태에 있다함을 부인치 못한다”라고 전제하고, “그러나 자금의 결핍, 조직의 미립(未立)은 그 내적 외적의 비약을 허용치 아니한다. … 고로 우리는 이 엄연한 목전의 사실에 감(鑑)하여 근본적 개혁의 일보로서 주식회사 호남평론사 조직에 착수하였다”라 하였고, 사고(社告)에서 “보일보(步一步) 일취월장하는 본지는 그의 조직체의 견고를 위한 주식회사 조직에 착수하였고 또한 지방잡지로서 감히 단행할 수 없는 희생적 지가(紙價)의 제공을 비롯하여 벌써 신년호 편집에 착수하고 있다”라 하여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었다. “우리 호남평론사가 1월 1일부터는 자본금 일만원(一萬圓)으로 주식회사가 될 터이므로 이와 동시에 지대(誌代)도 낮아지고 기사(記事)도 나아질 것을 믿는다”라 하여 주식회사 창립에 대한 기대가 컸다. 1936년 1월 1일, ‘주식회사 호남평론사’가 창립하였다. 김철진이 사장 겸 주간을 맡았다. 특히 조선인 손으로 경영하는 기관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조선인 사회가 이를 끔찍이 여기고 원조와 지지를 하는 것은 당연 이상의 당연한 일이다”6) 라고 하였다. 이에 지역사회가 부응하였고, 그 지지와 후원, 찬조로 버텨낼 수 있었다. 호남평론사는 목포 본사 외 경성총지사를 비롯하여 진도, 장성, 완도, 영암, 광주, 전남동부, 영광, 여수, 무안삼향, 나주의 순으로 지사를 설립하여 확산해 나갔다. 무엇을 하려 했나? 무엇을 담으려 했나? 무엇을 기대했나? 「권두언」이나 「사고(社告)」, 「편집여언」 등에서 그런 사정들을 읽을 수 있다. 먼저 잡지 발간의 목적, 즉 “잡지 존립의 의의와 사명”에 대해 알아보자. 김철진은 1935년 10월호 「권두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본지는 정당한 사회의 공기(公器), 독자(讀者)의 투고지이요, 부와 권력에 굴치 않고 씩씩하게 나아가려고 한다. 그리하여 사회에 다소의 공헌이 있어 자타의 향상 전진이 있으면 만족한다.”
고 하였다. 그리고 “목포의, 호남의 자랑이 되고 힘이 되고 보배가 되어 향상케 함”에 목표를 둔다고 두었다. 이는 곧 “목포 내지 호남의 문화향상, 언론공정”으로 요약된다.7) 무엇보다 ①정당한 사회의 공기, ②독자의 투고지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③연중행사로서 삼대사업을 추진한다고 하였다. 각각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자. ①정당한 사회의 공기(公器) 정당한 사회의 공기가 되기 위하여 일제의 검열이나 압박, 어떠한 부나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이 목적을 철두철미하기까지 온갖 혈성(血誠)과 열애(熱愛)를 바쳐서 싸우기를 다시금 굳게 맹서”하였다.8) 「투고환영」의 글 중 1937년 6월호의 것이 인상적이다. 즉 지방논설(地方論說) 관련 투고를 바라면서 그 내용으로 “호남의 공기(公器)요, 진실한 민중의 목탁(木鐸)으로서 본지는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함이오니 우리 호남지방의 여론과 비판을 엄연한 시대적 과학적 체계 아래 정리하기 위하여 독자 여러분은 내 지방의 당면문제 논설(論說)을 투고하시라.”
라 하여 『호남평론』이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즉 “호남의 공기요, 진실한 민중의 목탁”임을 내세우고 “시대적 과학적 체계”라는 방향성을 제시함으로써 비판적이며, 진보적, 사회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시인 제씨(詩人諸氏)에게 일언(一言)」이라는 글에서도 확인된다. 즉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예술가는 자기가 속한 나라-자기가 속한 계급의 귀요, 눈이요, 심장이다. 그들은 시대의 소리다”라는 말을 빌어, “사회적 가치가 있는 문학만이 진정한 예술적 가치 있는 문학일 것이다. … 우리가 맞이할 새로운 세계와 우리들의 현실의 고생들의 투쟁과 자신을 노래하여 생의 진로를 여는 작품”이어야 하며 이는 곧 대중이 요구하는 작품, 계급을 위한 작품이라고 하였다.9) 이런 경향은 나만성에게서도 뚜렷이 보인다. 나만성을 추모하는 글에서 “계몽사업으로 야학강습소, 사립(私立)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주력하였으며 계급의식으로 청년운동과 노농운동(勞農運動)을 일으키며 사상운동에 종사하였으며 언론계에 있어서는 조선일보기자로서 필봉(筆鋒)을 날려 주의(主義)를 선양하였음은 우리의 기억에 다시금 새롭거니와 …”10)
라 회고하고 있다. 전형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지향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그가 했던 역할을 보면 『호남평론』이 어떤 정치적 지형을 지향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이 점은 김철진도 마찬가지였다.11) 1937년에 들어오면 지방시사평론에 대한 투고를 유도하는 광고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다. 시사는 국제적인 정세와 지역 현안, 지역 소개 항목으로 대별하였고, 특히 목포-호남지역이라는 지역정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를 보다 세분하여 “일. 지방당면문제에 관한 논문/ 일. 지방시평논문(地方時評論文)/ 일. 학리연구논문(學理硏究論文)/ 일. 사회이면폭로기사(社會裏面暴露記事)/ 일. 문예에 관한 원고” 등으로 구분하여 투고 모집에 적극 나섰다. 이런 광고는 1937년 10월, 11월호에 연속 게재되었다. 하지만 원치 않던 폐간으로 인하여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②독자의 투고지 한편, 독자의 투고지임을 강조하는 데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겼다. 『호남평론』이 지역종합시사평론지 또는 지역문화담론체라고 평가받듯이 무엇보다 지역담론에 충실하려 하였다. 말하자면, “중앙문인의 원고를 얻으려면 언제든지 마음대로 독자의 마음에 흡족한 잡지를 만들어 내놓겠지만 호남지방의 유일한 잡지인 만큼 호남문인의 시 한 편이라도, 습작기(習作期)에 있는 창작 한 편이라도 실으려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자랑인 까닭에 언제나 마음대로 잘 되지를 않는다.”12)
라 하는데서 호남의 지역성을 담으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호남평론』이 “지방의 문화적 개발과 향상”을 잡지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13) 「투고환영」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게시하기도 하였다. “숨은 문인들의 옥고를 널리 환영합니다. 아직까지 이만한 발표기관(發表機關)이 적음으로 애태우던 문인들이여! 『호남평론』은 당신네의 기관이니! 맘껏 힘껏 이용한다는 것을 약속하며, 다음 원고를 보내주십시오.” (『호남평론』 1935년 6월호)
또 이어서 “『호남평론』은 여러분의 잡지입니다. 독자가 되는 동시에 필자가 되시는 것도 여러분의 의무요 권리입니다. 깨끗한 원고를 많이 보내주십시오.”(『호남평론』 1935년 10월호)
투고를 원하는 분야로는 “평론, 소설, 시, 촌극, 공개장, 취재” 또는 “시사평, 작품평, 인물평, 소설, 기행문, 수필실화, 애화(哀話), 감상문, 전설, 신시(新詩), 기타”, 그리고 희곡 등이었다. 이를 위해 편집 방향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즉 “본지(本誌)는 하등의 고정(固定)한 주의(主義)나 주장(主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호남에 계신 제위(諸位)에게 개방한 본지는 곧 제위의 투고지이다. 고로 일정한 편집방침도 세우지 않고 혹은 그 수준이 높을 때도 있을 터이며 혹은 그 수준이 낮을 때도 있을 것이다. 혹은 난해한 학설(學說)도 있을 것이며 혹은 잡문 혹은 좀 저급에 흐르는 기사도 있을 것이다.”14)
여기서 특히 “하등의 고정한 주의나 주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글귀가 눈에 띈다. 이는 김철진, 나만성 등의 편집진이 지니고 있던 사회주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동시에 잡지사 운영을 위하여 대중을 품으려는 현실적인 목적도 담겨 있었다고 보인다. 이렇듯 중립적이며 개방적 그리고 대중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투고된 글 중에는 문예물이 상당량을 차지했는데 거기서도 대중적인 통속성을 보이고 있다. 『호남평론』은 일차적으로 대중, 그리고 남성 소비자의 욕망을 충족하는 통속소설을 다수 싣고 있다. 이는 당시 목포의 경제적 환경이 일정 규모 이상이었으며 잡지의 주소비계층을 고려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15) 소시민성을 잘 드러내며 타협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다른 한편, 특기할 만한 것은 라디오 드라마(원문: 라듸오·드람마) 또는 희곡으로 분류된 라디오 드라마 텍스트들이었다. 총 5편 중 4편이 경성중앙방송국(JODK)에 의해 실제로 방송되었다. 이처럼 경성방송국이 개국한 뒤 약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라디오 드라마의 장르 미학이 어느 정도 정립되는데 『호남평론』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16) 이렇듯 『호남평론』은 호남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그리고 편집 원칙으로 사장, 주간, 이사의 합의제 운영을 내세우고 있다. 다만 최종 책임은 편집책임자에게 맡겼다. ③연중행사로서의 삼대사업 『호남평론』이 연중 자체행사로 내세웠던 것은 대강연회, 웅변대회, 지방정형소개(地方情形紹介) 등 삼대사업이었다. 대강연회는 1935년 11월, 함상훈과 김진섭을 각각 초청하여 「조선경제의 발전과정」, 「조선문학의 현재와 장래」라는 주제로 문예경제강연회(文藝經濟講演會)를 개최하였다. 웅변대회는 호남소년소녀웅변대회를 1935년 8월 10∼11일 양일간 목포극장에서 개최하여 “아무런 모임과 부르짖음이 없던 목포사회에 커다란 충동을 준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라 할 만큼 의미있는 성과를 냈다. 지방정형소개는 진도소개판을 비롯하여 장성, 완도(1,2), 영암, 영광, 여수(1,2), 나주, 광주 등 모두 8편을 수록하였다. 이는 사회의 합리적 진화를 위해 농산어촌(農山漁村)의 제반시설의 개선이 필연적 조건이 된다고 파악하여 문화, 교육, 산업, 위생, 교통의 각 부문에 대한 정세를 수집, 공개하여 장단점을 취사선택하여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이끌고자 기획하였다. “모든 경비와 불편을 무릅쓰고 전호남(全湖南)의 지방판을 속속 발행”하고자 한다고 하여 그 각오가 대단했다. “백 쪽[百頁]의 본지를 무휴간으로 발행하여 제위의 앞에 바쳤으며 삼대사업 – 웅변대회, 대강연회, 지방정형소개-의 축행(逐行)에 노력 실현하였다”17) 라고 하는 데서 삼대사업에 대한 호남평론사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부득이한’ 폐간에 이른 사정은? 자금의 결핍, 원고의 수집난, 종업인원의 부족 등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를 “진실한 의지와 활동으로써 극복”해 갔다. 책을 내는 일이 버거웠다.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컸다. 그럼에도 꾸준히 발간했다. 그들 스스로 말하듯이 “조선의 문화기관에 있어서 조선의 중앙도시인 경성(京城)에서는 월간잡지로서 호를 거르지 않고 매월 백 쪽[百頁] 이상의 잡지를 발행하는 것이 신문기관에서 발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드물거늘 우리 목포에서 이와 같은 잡지가 매호 거르지 않고 나오며 지방의 언론기관으로서 그의 문화발전에 선봉에 선다 하면 이 어찌 우리의 자랑이 아니랴.”18)
라 하여 『호남평론』 및 목포의 문화역량에 대한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동아일보」1937년 11월 17일자 「대목포약진전모(大木浦躍進全貌)」라는 제목의 목포소개판을 보면, ‘목포민중의 사표(師表)’라고 하여 호남평론사장 김철진을 소개하고 있다. “호남 유일의 평론지인 호남평론사의 사장으로서 민지(民智)개발과 문화향상을 위하여 꾸준한 노력으로 금석 같은 기초를 세웠으며 각 기관에도 물심양면으로 원조하되 성의와 열이 있어 일반의 감격을 자아내고 있다. 목포에 있어서 씨의 존재는 이 모든 점을 보아 실로 커다란 의의가 있다. 그 풍부한 지식과 그 겸양한 품성과 그 진실한 성심은 민중의 사표이며 목포의 보배이다.”
이만큼 사장 김철진은 목포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잡지로서 『호남평론』의 지위는 공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남평론』이 느닷없이 멈춰 섰다. 왜 그랬을까? 한 달 전 목포소개판 기사의 먹이 마르기도 전인 「동아일보」1937년 12월 14일(7면 사회)에 『호남평론』의 폐간을 알리는 「문예지발행계획」이란 제목의 기사가 나온다. 제목은 발행계획이지만 실 내용은 『호남평론』의 폐간 소식이었다. 폐간의 이유로 “금번 부득이한 사정으로 자진근신을 표하기 위하여 본 월 6일 오후 세 시경 본사 역원실에서 중역회의를 열고 신중 결의 끝에 동지의 폐간을 선언하였다.”
라고만 전한다. 이유가 그냥 ‘부득이한 사정’으로만 되어 있어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리고 그 기사의 말미에 “새로운 문화잡지를 발행하려고 계획중”이라 하여 속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끝내 이루지 못했다. 나름 잘 나가던 『호남평론』이 갑작스럽게 폐간하게 된 그 ‘부득이한 사정’이란 무엇이었을까? 추측컨대 『호남평론』 발간 앞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겼던 것이다. 그 벽은 바로 ‘삭제처분’과 같은 식민지 언론에 대한 탄압이었다. 그 사정을 살펴보자.19) 일찍이 『조선출판경찰월보(朝鮮出版警察月報)』 제82호(처분일 1935-06-18)에는 『호남평론』1935년 7월호의 출판물 불허가 기사 요지가 실려 있다. 필리핀[比島] 독립헌법안 투표 종료에 관한 건과 3·1운동 이후 팽창한 민족의식의 결정(結晶)이란 표현을 담고 있는 청년회관 수축(修築)에 대한 건이었다. 결국 7월호는 간행되지 못하였다. 9월호부터는 조선인 발행 계속 출판물 허가대상이 되었다. 비록 허가는 되었지만 검열의 대상이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간행은 할 수 있었어도, 표현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내세운 기조는 무색무취였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겉으로는 어떤 입장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7년에 들어서면서 불허가 사례가 부쩍 늘어나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급박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압박의 빈도와 강도가 달라졌다. 예를 들면 1937년 신년호의 「권두언」에 “우리 민족은 자포자기자굴(自暴自棄自屈)의 촌법(寸法)을 버리고 새롭게 전도를 개척하는 용기와 투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 이는 우리들의 의무이며 권리이기도 하다” 등의 표현이 들어 있는 「권두언」과 민족경제에 각성하고 산업적으로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등을 담은 「조선인 중심의 상공발전방도」 등에 대하여 ‘삭제 후 허가’하는 조치가 있었다.20) 1937년 2월호에는 「‘사장(砂場)’아」라는 시에서 부귀보다 자유를 선택하겠다는 내용과 「평화와 전쟁에 대한 정치적 철학적 비평」이라는 글에서 향락주의보다 고행적 저항으로 나서야 하고 식민지 제국주의보다 민족생존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 「조선신문계만담(朝鮮新聞界漫談)」이라는 글에서 정치 경제 문화적 지도기관으로서 조선신문의 중요성과 일본 내지 신문의 침입이 가져올 폐단을 역설한 부분들이 삭제처분되었다.21) 1937년 3월호에는 영흥·정명 양교 폐쇄문제를 다룬 기사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조선이 쇠약해졌으니, 지금이 지사들이 일어나 민족적 양심을 일깨울 때임 등을 썼다는 이유로 삭제되었다.22)
1937년 4월호에는 1. 사회제도를 저주하여 선량한 풍교를 해침, 2. 민족주의 사상이 농후하여 실제 운동방법을 교시하는 것, 3. 내선융화를 해치는 것 등을 이유로 관련 기사들이 삭제되었다.23) 1937년 7월호에는 민족의식 고취 및 총독정치 비방 등의 이유로 여러 가지 기사를 삭제하였다.24) 이처럼 거의 매호마다 삭제처분이 이어졌다. 급기야 8월호에는 아래와 같이 폐간을 암시하는 글이 있었다. 「나주지방소개판 간행에 제(際)하야」라는 글에서 “그리고 주위사정(周圍事情)으로 인하여 평소 염두에 포회(抱懷)하였던 것의 반분(半分)도 표현치 못한 것만은 실로 유감이다. 후일의 기회를 이용하야 이 유감을 추호라도 남김없이 만전을 기할가 하는 바이나 그 기회가 불원(不遠)에 오지 않을 것 같음으로 더욱 유감이다.”
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그 기회가 불원에 오지 않을 것 같음”이라 하여 이때 이미 주위사정으로 인하여 『호남평론』이 지속되기 어려움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계속 발간하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결국은 접고 말았다. 1937년에 들어서면 이처럼 거의 매달 삭제처분을 받았다. 이런 언론 탄압 등 악화된 출판 환경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더욱 심해졌을 것으로 보이며 호남평론사 입장에서는 더 이상 이를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이 ‘부득이한 사정’이었고, 이에 따라 ‘자진근신’이 사실상 강요되었다. 끝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1939년 10월 28일 주주총회의 결의에 따라 주식회사 호남평론사가 해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김철진이 청산인으로 이름을 올렸고, 같은 해 12월 20일 청산이 종료되었다. 맺음말 : 무엇을 남겼나? 『호남평론』은 목포를 기점으로 호남을 주 대상으로 한 종합시사평론 및 문예지였다. 여기에는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을 중심으로 나만성, 김상수, 조극환, 박찬일, 박화성, 천독근 등이 주요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이들 목포 여론 주도층의 수준은 어디에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높았다.
【그림 4】 해방 후인 1966년 4월, 같은 이름의 호남평론사에서 『월간 호남평론』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이 잡지가 구 『호남평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아직 잘 안 알려져 있다. 1930년대 목포 지식인·유지의 활동에 『호남평론』이 미친 역할은 매우 컸다. 그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것은 유지좌담회(有志座談會)였다. 1936년 2월 2일에 목포에 있는 조선, 동아, 매신, 조선중앙사의 지국과 호남평론사의 연합으로 현실 목포사회에 당면한 시급문제를 촉진하기 위하여 유지좌담회준비위원회를 가졌고 이는 중등학교 즉 목포고등보통학교 창립운동으로 이어져 목포사회에 치열한 논쟁을 일으켰다.25) 이런 유지좌담회를 호남평론사가 주도적으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호남평론』에 그 사정을 일일이 문자로 기록하여 두었다는 점에서 사료적 의미도 각별하다. 『호남평론』은 지역문예지로서의 역할도 컸다. 목포와 호남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다수 생산되는데 자극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호남평론』에 참여한 문사들은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호남지역 시문단 형성에 기여한 공로는 인정받고 있다.26) 『호남평론』을 발간한 목포의 저력은 해방 직전의 암흑기에도 동인지 발간을 위한 열정들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해방이 되자마자 목포문화예술동맹을 발족하면서 예향 목포를 제창하였다. 행정가나 시민이나 지식인들도 그것을 뒷받침하였다.27) 그 열정이 해방 직후 『예술문화』를 탄생시켰다. 여기에는 차남진, 천독근, 김철진을 비롯한 유지들의 협조가 있었던 만큼 『호남평론』의 성격을 이어받은 측면이 강하다. 또 1946년 조희관의 발의로 『보국문학』을 발간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1947년에는 목포 최초의 출판기념회가 국취관 무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박화성의 첫 번째 단편집 『고향 없는 사람들』의 출판기념이었다. 파란만장했던 해방공간의 격랑도 목포 예술의 열정만은 막을 수 없었다.28) 이처럼 일제강점기 『호남평론』을 발간할 수 있었던 문화적 역량이야말로 예향 목포의 굳건한 뿌리가 되었고, 해방 이후 목포가 예술계를 선도할 수 있었던 저력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1) 고석규, 「개관 : ‘예향(藝鄕) 목포’의 문화사」(『목포시사』다섯마당 ②예향 목포, 목포시·목포시사편찬위원회, 2017.12) 참조.
2) 순천 출신 임학수(林學洙, 1911~1982)가 주재하는 잡지 『전남평론』이 1936년 9월에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참조. 3) 이하 『호남평론』의 인용문은 현재의 표기법으로 바꾸었으며 한자도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밝히지 않았다. 4) 『호남평론』1935년 8월호, 「부기」, 42쪽. 5) 『호남평론』1937년 7월호, 51쪽. 6) 有非子, 「호남평론사 주식회사 창립은 躍動하랴는 木浦相의 一面」(『호남평론』 1936년 2월호), 40쪽. 7) 「권두언」(『호남평론』 1935년 송년호), 1쪽 8) 金聲浩, 「호남평론을 다시 내놓으면서」(『호남평론』 1935년 4·5월호), 2쪽. 9) 朴秉先, 「詩人諸氏에게 一言/ 대중이 요구하는 작품을!」(『호남평론』1937년 신년호), 61쪽. 10) 三松子, 「故 羅萬成군을 哭함」(『호남평론』1936년 8월호), 102쪽. 11) 『김철진에 대한 보다 상세한 사정은 고석규, 「제2부 제5장 4. 목포청년운동과 김철진」(『근대도시 목포의 역사·공간·문화』, 서울대출판문화원, 2004); 안종철 외, 「김철진 『호남평론』의 발행인」(『근현대 형성과정의 재인식』(Ⅰ), 중원문화, 2010.10) 참조. 12) 「編輯餘言」(『호남평론』1935년 송년호), 78쪽. 13) 「권두언」(『호남평론』1935년 11월호), 7쪽. 14) 「社告」(『호남평론』 1935년 8월호), 87쪽. 『호남평론』 1937년 8월호의 「권두언」에도 똑같은 내용을 담았다. 15) 최창근, 「1930년대 목포의 근대성과 대중매체- 『호남평론』 수록 소설과 기사를 중심으로」(『국학연구론총』 제11집, 택민국학연구원, 2013.6.30.) 참조. 16) 『서재길, 「1930년대 라디오 드라마 텍스트 연구-『호남평론』소재 자료를 중심으로-」(『민족문학사연구』2010. 8. 31,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참조. 17) 「권두언」(『호남평론』1935년 송년호), 1쪽. 18) 「예고 장성소개판 발행」(『호남평론』 1935년 10월호), 79쪽. 20) 「出版 不許可의 理由 및 記事要旨(執務資料)- 1937년『湖南評論』 新年號」, 『朝鮮出版警察月報』第100號(1936년 12월분). 21) 『朝鮮出版警察月報』第101號(1937년 2월분). 22) 『朝鮮出版警察月報』第102號(1937년 3월분). 23) 『朝鮮出版警察月報』第103號(1937년 4월분). 24) 『朝鮮出版警察月報』第106號(1937년 7월분). 25) 이 점에 대하여는 고석규, 앞 책의 제7장 「목포의 ‘유지’와 목포고등보통학교 설립운동 -기대와 현실의 간격-」 참조. 26) 이동순, 「광주전남 지역 근현대 시문단 형성사 연구 1」(『현대문학이론연구』52, 현대문학이론학회, 2013. 3.30), 360쪽 참조. 27) 차범석, 「목포는 예향인가」(『목포예총』7, 1995), 29쪽. 28) 고석규, 앞 글(2017) 참조.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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