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긴 사건, 짧은 글. 압축된 역사 게시기간 : 2024-02-05 07:00부터 2030-12-24 10:21까지 등록일 : 2024-02-02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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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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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경신년에 정치 판세를 뒤집다 1680년 여름을 지내고 가을 무렵, 숙종은 속으로 분노를 삭이려고 애썼다. 10대 어린 나이에 왕이 된 데다 즉위한 지 5,6년이 되도록 아들도 없고, 잦은 병치레 때문에 주위에서 말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숙종의 후계자에 관해 은밀히 말들을 주고 받았다. 작년인 1679년 3월에 강화도에서 누군가 투서한 사건도 있었다. 강화도 축성장(築城將) 이우(李𦸲)가 익명의 투서를 김석기 등에게 전했고 숙종이 보았다. 이건창이 쓴 『당의통략』에 투서 내용이 나오는데 ‘당쟁이 생긴 건 종통의 순서를 잃었기 때문이니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인조 때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는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세웠다.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종법이 지켜지지 않았다. 종통을 바르게 잡아햐 하고 그렇게 하려면 소현세자의 적통인 임창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숙종에게 큰 충격이었다. 할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것인데 이제 와서 종통을 문제 삼은 일이 생긴 것이다. 신하들이 자신의 후계자 문제, 종통으로서의 정통성 문제 등을 은밀히 떠들어대는 상황이 못마땅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말까지 돌고 있다고 생각하니 불쾌감과 분노감이 몰려왔다. 참았다. 사건은 이우가 죽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숙종의 왕위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일은 계속 되었고, 허견이 복선군 이남(李枏)을 왕위에 추대하려고 역모를 꾸민 일까지 생겼다. 반역은 진압되었지만 여전히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숙종 시대를 설명할 때 ‘환국(換局)’이란 말을 많이 나온다. 남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져 정쟁의 판세를 유리하게 이끌어간 쪽이 권세를 쥐었다. 어떤 때는 서인이, 어떤 때는 남인이 세력을 잡아 정세가 바뀌었으므로 환국이라고 했다. 1680년 숙종은 즉위 후 처음으로 판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왕권을 넘겨다 본 ‘반역 모의’ 사건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역당’들을 처벌한 후 역모 진압의 시말을 종묘에 알리는 고묘의식을 행했다. 선조 왕들에게 알려 사건을 마무리할 작정이었다. 고묘 때에 쓸 제문이 필요했다. 긴 사건을 짧게 압축하다. 수찬 임영(林泳)은 왕명을 받고 고민했다. 대제학 남구만, 서하 이민서 같은 명성 자자한 사람들이나 써야지, 겨우 30 넘은 어린 사람이 쓸 글은 아니라고 여겼다. 게다가 편이 갈라져 정쟁이 치열해 앞을 점치기가 쉽지 않은 정세 속에서 역모를 다루는 글을 쓰는 일이어서 부담은 더 컸다. 글도 잘 짓고 학문 수준도 제법 된다는 말도 들어보고 숙종으로부터 문학 역량이 소문대로 대단하다는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사건의 속내도 복잡한 데다 선왕들의 사당에 올리는 글 아닌가. 얽히고 꼬인 속내를 사실대로 보여주면서 주요한 것은 적확하게 짚어내야 했다. 끝없이 사건을 나열할 글도 아니다. 복잡하고 긴 일들을 짧게 압축했다. 올해 여름 난리를 토벌하고 아뢰는 예를 이미 거행했으나, 남은 적당들이 빠져 있기에 아직도 숨은 정황이 있었습니다. 급하게 장계로 잇달아 보고하니 다시 조사하였습니다. 국문한 지 한 달 넘어서야 반역의 모습이 더욱 잘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역적 이남(李枏)과 그 외삼촌 오정창(吳挺昌)은 남김없이 실토했고 나머지 역적들 또한 그 비밀을 서로 증언하였습니다. 처음 아뢸 때에 다 하지 못했다가 이제야 남김없이 밝히게 되었으니 무릇 감춰졌던 정황들이 모두 진술한 글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서리를 밟으면 점점 단단한 얼음이 나타나니 이 일은 진실로 하룻밤 사이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조정의 여론이라고 하면서 곤전을 흔들어대려 했고 친경례와 종묘에 고하기를 주장해 계획을 서로 주고 받았습니다. 모의를 더욱 급박히 하면서 도체찰부도 회복시켰습니다. 병사들을 모으고 둔졸(屯卒)을 결속시켰으며 호복을 입고 도성을 습격하려 했습니다. 흉측한 말과 사특하 마음은 듣기만 해도 놀랍고 두려울 뿐입니다. 이미 죽인 역적에게서도 죽은 뒤에 그 남은 죄를 밝혀냈습니다. 역적들이 차례로 처벌받아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다 했습니다. 악의 무리를 모두 제거하였으니 묵묵히 도와주심이 있어서입니다. 이 일 마땅히 아뢰야 하니 예가 어찌 번거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난 해 요망한 역적을 토벌한 일을 아뢰었으니, 글을 지어 일을 가리키면서 간신이 제멋대로 생각해 무고한 신하를 선동하여 난리를 피운다고 지목했습니다. 그 글을 바친 사람은 이우(李𦸲)였는데 역적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부질없을 정도입니다. 이미 연약한 임금을 속이고 또 열성조를 속였는데 이제야 후회하고 깨달으니 점점 부끄러움과 분노가 깊어집니다. 정대한 말씀으로 다시 아뢰는 것이 예에 마땅하므로 삼가 길한 날을 가려 이에 경건하게 아룁니다.
1680년에 임영이 쓴 <토역고묘제문>
1681년 임영이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 우선, 이남과 오정창을 역적으로 지목했다. 이남은 복선군으로 인조의 손자, 효종의 조카, 현종과는 사촌, 숙종의 5촌이다. 현종과 궁궐에서 함께 자랐고, 숙종도 종척으로 대우를 잘해주었다. 이남의 두 형 복창군 이정, 복평군 이연(李㮒) 등과 함께 삼복(三福)으로 불렸다. 왕들이 후대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궁을 드나들 수 있었다. 오정창은 이남의 외삼촌이다. 이들은 서로 친밀하게 지냈다. 그런데 1680년 4월 5일 정원로(鄭元老)와 강만철(姜萬鐵)이 긴급하게 글을 올려 허적의 아들 허견이 복선군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고 알렸다. 반역이었다. 주모자와 관련자들을 심문하고 처벌했다. 임영은 이런 일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나온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전부터 반역의 기미가 여러 가지가 있었다고 하면서 각각의 일들을 짤막하게 썼다. 1675년 현종이 승하했을 때 복창군과 복평군이 궁으로 들어와 상을 지켰는데 그들이 궁녀들과 간통했다는 고발이 있었다. 이른바 홍수(紅袖)의 변이다. 홍수란 궁녀를 말한다. 궁녀는 임금에 딸린 여성으로 간주되어 종친이나 사대부라도 감히 어찌할 수 없었다. 또 국상 기간이 아닌가. 사대부 집안에서도 상을 치르는 동안 남녀가 가까이 접하는 일을 비난하는 눈초리도 보던 때였다. 이 사건으로 조정이 떠들썩했고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두 사람을 처벌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직접 조정에 나와 발을 치고서 대신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이 일을 두고 또 논의가 시끄러웠다. 윤휴는 숙종에게 ‘자성(慈聖)의 행동을 관속(管束)하여 이와 같은 거조가 없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관론(照管論)이라고 한다. 명성왕후의 행동을 아들이 잘 살펴 단속해야 한다는 뜻이다. 홍우원도 가세하여 ‘두 번 다시 저지르면 안 된다.’고 했다. 명성왕후가 홍수의 변을 처결한 일을 두고 경계했다. 이것이 제문에 있는 ‘곤전을 흔들어댄다.’라는 말이다. 임금에게 어머니를 잘 단속하라고 했으니 임금을 얕본 기미가 이때부터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1676년 1월 18일에 오정창은 숙종에게 친경례(親耕禮)를 실시하자고 했다. 친경례는 왕이 땅을 가는 일을 몸소 실행하여 백성들에게 농업을 권장하는 행사이다. 왕비는 친잠례 곧 뽕 따고 누에치기 등과 같은 일을 행한다. 왕 부부가 나란히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는 행사를 치른다. 이때 궁 안의 내명부 여성, 사대부 집안 여성들이 합류한다. 오정창은 이때를 틈타 자기 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낼 계획이었다. 후궁이 되어 숙종의 아들을 낳게 되면 숙종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임영은 백성을 위하기보다는 오정창이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는 속셈이었다고 했다. 왕의 후계자를 신하가 은밀히 계산하는 일도 역모의 싹이었다. 1677년에는 고묘를 시행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송시열과 그의 사람들을 역적으로 규정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과거 1674년 3월에 효종의 왕비이며 숙종의 할머니였던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했을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다. 송시열은 대공복(大功服)을 주장했다. 대공복은 맏며느리가 아닌 며느리를 위한 복제다. 효종이 왕통을 이어 받았지만 맏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배우자도 맏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아들이다. 비록 왕이 되었지만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종통 법칙에 맞지 않는다. 왕통과 종통이 어긋나 일치하지 않게 된다. 효종과 인선왕후를 ‘맏이’로 보느냐 아니냐에 따라 복제 등급이 달라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복 입는 기간을 정하는 일이지만 그 뒤에는 왕통이나 종통의 정통성 문제가 숨어 있다. 이는 효종의 자식으로서 왕위를 계승한 왕들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대공복 주장은 송시열이 지금의 왕인 숙종을 종법에 맞지 않는 왕통으로 여긴다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했다. 남인들은 이를 ‘역(逆)’으로 몰아부치면서 종묘에 고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제문에서 말한 ‘친경례와 고묘를 주장’했다는 내용이다. 개인 욕심과 당파적 목적을 위해 왕을 이용하고 국가의 예를 들먹였으니 역모의 미묘한 자취가 이미 숨겨져 있다는 의미를 실었다. 1673년 명나라 오삼계가 난을 일으키자 숙종 즉위 후 1674년 청에 대한 복수 준비를 위해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세웠다 폐지하기를 반복하다 1679년(숙종5)에 완전한 조직을 갖추었다. 도체찰부는 병권을 일원화하는 것으로 무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허적이 부서의 장을 지냈다. 실록에 의하면, 허적의 아들인 허견이 대흥산성에 있는 군사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둔졸을 결속시켰다’는 말이 이것인 듯하다. 또 당시 오랑캐옷인 호복을 입고 도성을 습격하려고 했다는데 호복 계획도 허견이 제안했다고 한다. 경신환국에는 이러한 속사정이 얽혀 있다. 모든 일들이 숙종에겐 위협적이었다. 병을 자주 앓는 데다 아들도 없고 다만 명안공주만 있었다. 후계자는 왕이 결정하는 일인데 신하들이 나서서 수근대니 숙종도 속을 많이 태웠던 듯하다. 8년 후인 1688년에 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자마자 한 달 만에 원자로 책봉하여 후계 구도를 굳혀놓았다. 조선시대 왕에 대항하여 거스르는 일을 반역이라 했다. 토역(討逆)이란 역적을 물리쳐 없애는 일이다. 토역 결과는 참혹하다. 주모자는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처벌되었다. 신분 추락은 기본이었다. 아들은 죽이거나 귀양보냈고, 여성들은 신분이 바뀌어 관청의 여종이 되거나 역적 토벌의 공을 세운 공신 집안의 여종이 되었다. 역적이 살던 집은 헐리고 연못으로 변했다. 역모했다는 혐의만 있어도 처벌은 가혹했다. 역모는 왕실과 국가 존망이 달린 만큼 최고로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이다. 역모나 반란을 제압한 후에는 사건의 전말을 종묘에 고했다. 반란의 기미나 시작부터 전개 과정, 진압과 그 결과 등을 왕실 조상들에게 알린다. 토역고묘제문이 필요하다. 역모의 전말을 빠뜨리지 않으면서도 간략한 글이어야 한다. 숙종은 토역 후 교서를 반포하고 한편으로 종묘에 고했다. 그 글을 임영에게 쓰게 했다. 왕의 기대에 부응하다 임영은 환국 계기가 된 역모의 긴 과정을 짧고, 적확하게 서술했다. 짧게 쓰기는 쉽지 않았다. 선배인 대제학 남구만과 이민서 등이 역모와 관련한 교서를 짓는 상황 속에서 몇십 년 아래인 젊은 후배가 역모를 다루는 글을 쓰는 일 자체가 부담이었다. 또 숙종은 추록(追錄)에 관한 내용까지 자세하게 새로 넣어야 한다고 하교했다. 임영은 난처했다. 추록할 내용을 대신들이 논의하는 중이었다. 확정되지도 않은 내용을 종묘에 고하는 글에 넣는 것은 일의 형편상 해롭다고 생각했다. 숙종에게 이 뜻을 분명하게 전했다. 박세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종묘에 고하고 죄를 논하자는 일은 시비와 관련되므로 어쩔 수 없이 하기는 했지만 오직 신과 사람을 속였다는 뜻만 보였다.’면서 부담감을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그는 은미하고 복잡하게 꼬여 있는 일들을 반듯하게 풀어 조리있게 접어 넣었다. 167자로 5년 간 일을 차곡차곡 쌓았다. 이 글은 아마도 지금 세대에겐 마치 수수께끼 같을 것이다. 한 글자, 한 단어 속에 서리서리 채운 그 끝을 잡아내어 톺아보아야 안다. 숙종은 임영에게 ‘너의 문학에 대해 내가 잘 안다.’거나 ‘역시 문학과 재행이 탁월하다.’면서 은근히 압박했다. 자신의 마음을 조상들에게 잘 전달해 줄 사람으로 점찍었다. 임영을 지목한 숙종의 선택도 탁월하지 않은가. <도움 받은 글들> 한국고전종합 DB https://db.itkc.or.kr/
한국학자료포털 고문서자료관 https://archive.aks.ac.kr/ 손흥철(2012), 「우암 송시열의 예송의 특징과 의미」, 『유학연구』 26, 충남대유학연구소. 이상식(2005), 「숙종 초기의 왕권안정책과 경신환국」, 『조선시대사학보』 11, 조선시대사학회. 김문택(2009), 「숙종대 이원정의 정치활동과 피화」, 『역사와실학』 38, 역사실학회. 한지희(2008), 「숙종 초 ‘紅袖의 變’과 明聖王后 金氏의 정치적 역할」, 『한국사학보』 31, 고려사학회. 김종수(2016), 「조선의 왕권과 숙종초기 도체찰사부」, 『군사』 98,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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