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무장 투쟁론·외교론의 토대를 구축한 광주학생운동의 영웅 이경채(李景采 1910-1978) 게시기간 : 2024-02-0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2-05 15:0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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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3일, 12일 양일에 걸쳐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준 광주학생운동은, 광주고보 학생 이경채가 1928년 4월 식민 지배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살포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때 폭발된 항쟁의 에너지는 해방 그날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항일운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의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삐라 사건으로 1년 4개월 가까이 투옥되었다가 1929년 9월 출옥하자마자 그는, 1929년 11월 12일 일어난 2차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망명지 일본에서도 독립운동을 꾀하다 구속되었던 그는,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남경 의열단에 가입하여 무장 독립전쟁의 토대를 구축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국민당의 연대를 추진하였다. 그는 중국군 장교가 되어 중·일 전쟁의 한복판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경채는 무장투쟁론·외교론을 함께 실천하여 독립운동의 활로를 개척한 독립운동가였다. 1. 우애하기로 소문난 민족자본가 이성륜의 아들 이경채는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조선 대표적 유학자 필문 이선제의 후예로, 1910년 광주군 송정면 6통 2호 612번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동부마을은 일본인이 아예 발을 내딛지 못하였을 정도로 항일 의식이 가득한 곳이었다. 현재 광산구 관내의 한말 의병유적은 전투지 11곳, 순국지 3곳, 무기 제조처 1곳 등 41곳이나 확인되고 있다. 광산 지역 전체가 의병과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쟁을 치른 전장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1908년 4월 25일 일본 군경과 6시간에 걸친 대혈전 끝에 김태원, 송석래 의병장 등 14명의 의병이 장렬하게 전사를 한 어등산이 바로 지척에 있다. 어등산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된 독립전쟁은 유년 시절 경채에게는 깊은 충격과 감동이었다. 이경채의 부친인 성륜은 천석꾼 지주였다. 그는 토지 자본을 상공업에 투자하여 민족 자본 축적에 앞장섰다. ‘송정막걸리’ 회사를 창업하였는데, ‘송정막걸리’는 ‘금봉(金鳳) 정종’과 함께 송정의 2대 ‘명주(名酒)’의 하나였다. 그가 양조장을 세운 데는 단순히 영리를 추구하려는 것보다 지역민의 경제생활을 돕기 위해서였다. 조선의 대표적인 농산지인 동시에 농민들의 부지런한 활동으로 인하여 흉품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으 호남선 송정일대는 경제공황과 미가 폭락으로 인하여 농민들은 작년 수확물의 대부분을 채무와 고리대금으로 다 바치고 요즈음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품을 참지 못하고 두서너 줌의 겨와 마랭이(酒粕)를 얻어 먹으려고 1∼20리나 되는 먼 곳을 이웃집 가리지 않고 시내 각 정미소와 주조장으로 매일 수백 명이 몰려다닌다는 데 창백한 그 얼굴들은 목불인견이었다.1)
1929년 세계공황은 일본 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자국 농민을 보호하려고 일제는 조선으로부터 곡물 수입을 중단하였다. 1920년부터 추진된 산미 증산계획으로 쌀 생산이 늘어난 조선은, 일본으로 수출 길이 막히니 쌀값이 폭락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이 술 찌꺼기를 얻어다 연명하였던 당시 송정리의 사정을 여러 신문이 보도하였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것은 농민의 딱한 처지를 잘 아는 성륜의 선행이 주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양조장을 세워 상업자본을 축적한 이성륜은, 공장을 세워 산업자본을 축적하였다. 1926년 송정동에 ‘쌍합성주물공장(雙合成鑄物工場)’을 설립하였다. 이 공장은 보습류, 쟁기, 탈곡기 등 농업 생산에 도움을 주는 농기계를 제작하는 회사였다. 이성륜은 영농기술 혁신을 통한 농업생산력 증대야말로 농민들 삶을 안정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토대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농기계회사를 설립하려 한 까닭이다. 성륜은 이 회사를 아우인 성방이 경영하게 하였는데 형제의 깊은 우애를 알 수 있다. 2. 광주 수재 이경채의 삐라 살포 사건 이경채는 식민교육을 거부한 부친의 영향으로 서당교육을 받았다. 그러다 1920년 송정리에 보통학교가 세워지자 입학하였다. 1924년 3월 4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는데, 월반 시험을 보고 졸업하였다. 송정보통학교 출신으로 단 2명이 들어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채에게 ‘송정의 수재’라는 말이 붙어 다녔다. 1924년 4월 광주고보에 입학한 경채는, 식민지 현실에 본격적으로 눈을 떴다. 1920년 8월에 성립된 송정 청년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노동, 농민운동, 그리고 강습소나 야학을 통한 대중 투쟁에 진력한 송정 청년회를 통해 현실에 눈을 떴다. 1928년 4월 이경채와 함께 식민지 일본을 정면으로 비판한 삐라를 준비한 경채의 절친 박병하, 윤해병은 사립 송정중학원 출신이었다. 경채가 항일운동의 선봉에 나서게 된 것은 1928년 2월 7일 신간회 송정지회 창립과 관련이 있다. 총무간사를 맡은 숙부 이성방은 송정 청년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이 무렵 광주청년동맹 송정지부가 설립되었는데 광주청년동맹을 이끌고 있던 강해석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경채는 이곳 청년회 사무실을 자주 다녀 강해석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경채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강해석 등을 일본 경찰이 검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경채는 광주 사회주의 사상의 태두인 강석봉의 아우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그가 송정 학우들을 중심으로 이념 서적을 읽는 모임을 만든 때가 1926년 5월이었다. 비슷한 시기인 1926년 11월 3일 장재성, 왕재일 등 16명이 강석봉 등의 지도를 받아 학생비밀결사 성진회를 조직하였다. 성진회를 위장 해체한 학생운동 지도부는 각급 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의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 당시 사정을 이경채의 육필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1926년 5월 전남 광주고등보통학교 3학년 시절부터 독서회를 비밀 조직하여 사회 과학방면 학문을 연구 토론하였다. 이 모임 멤버는 박병하, 윤해병, 양태성, 유병후, 김무삼 등이었다.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내부에는 각 학년마다 독서회가 성행하고 있었다.”
이경채는 송정리 친구인 박병하, 윤해병과 일제에 타격을 가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경채의 판결문에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있다. (전략) 한편 피고인 경채는 동년 3월 28일 밤에 몰래 송정리 보통학교 사무실에 침입하여 학교 비품인 등사판 및 그 부속품인 원지, 줄판, 인주를 훔쳐 왔다. 4월 4일 무렵 두 사람은 피고인 병하의 집에서 위 등사판 및 그 부속품을 사용하여 전기(前記) 3종의 문서 각 수십 통을 적색으로 인쇄한 후, (1) ‘선언서’라는 제목의 인쇄물을 동월 11일 밤 어둠을 틈타 광주역 앞 경찰관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등보통학교 앞 전주(電柱) 외 광주 읍내 눈에 띄는 장소 6개소의 전주, 판자벽 및 송정리 역 앞 전주, 송정리 신사 내 게시판 외 송정리 읍내 눈에 띄는 장소 10개소의 전주와 판자벽에 붙였다. 그리고 동월 13일 밤 경채 집에서의 인쇄물을 각 1매씩을 1조로 하여 봉투에 넣어 동월 14일부터 동월(同月) 17일까지의 기간에 1부는 피고 병하가 송정리 우편소 앞 Post(우체통)에, 나머지는 피고 경채(景采)가 광주역 앞 우체통에 넣어 전라남도 내, 각 중등학교 및 경찰서, 기타 합계 19개소 앞으로 우송, 반포함으로써 공산주의를 선전, 선동하여 안녕, 질서를 방해하였고, 제2. 피고인 윤해병은 전기 피고인 등의 범죄 사정을 알면서도 소화 3년 4월 18일 무렵(頃) 피고인 병하의 의뢰에 의해 피고인 경채 집에서부터 전기 인쇄에 사용한 등사판 및 불온문서의 인쇄된 것 20여 통을 받아 동일(同日) 무렵 자택에서 인쇄물을 불태우고 등사판을 파기하였다. (하략) 이경채가 3월 28일 송정보통학교에서 훔친 등사판을 이용하여 식민 지배체제를 비판한 유인물을 제작하여 4월 11일 밤에 광주 시내 곳곳에 부착한 데 이어 4월 13일 밤에는 유인물을 주요 인물들에게 발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경채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일본 천황제를 비롯하여 식민지배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는 점에서 식민 통치기구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광주 경찰은 4월 18일 송정 청년회장 이성태, 위원인 양영일, 이상근, 조칠성, 박승남을 구속하고, 4월 21일에 경찰은 다시 광주소년연맹위원인 김판엄, 김만년, 광주고보 5년생인 김재천을 이 사건의 관련자로 구속하였다. 송정 청년회와 광주소년연맹을 제일 먼저 수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들이 평소에 서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경채는 사건 발생 2개월이 다 된 6월 8일 광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경채, 박병하, 윤해병 등 모두 8명이 7월 예심 재판에서 공판에 회부되었다. 광주를 비롯하여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이경채 사건은 그가 체포됨으로써 일단락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사건이 광주를 흔드는 맹휴의 도화선이 되고, 이듬해의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3. 맹휴 중앙본부 결성과 광주학생운동 이경채가 6월 8일 체포되어 기소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6월 19일 광주고보 일본인 시라이 교장은 경채 부친을 학교로 불러 퇴학을 통보하였다. 학교 당국의 조치에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반발하자 6월 24일 학부형 회의를 열어 학생들의 동요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자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조처에 격렬하게 항의하며 이경채의 복학을 포함한 여러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학교 당국이 오히려 학생들을 징계하자 4, 5학년 학생 대표 11명은 24일 학부형회 석상에 진정서를 배포하였다. 학교에서는 11명의 학생 대표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다. 6월 26일 2, 3, 4, 5학년 학생 전원이 맹휴에 돌입하였다. 그러자 광주고보 당국은, 주모자 12명 퇴학, 102명 무기정학, 나머지 참가 학생들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다. 학교 당국의 강경한 탄압은 오히려 맹휴 가담 학생들을 자극하였다. 맹휴 직후인 7월 10일에는 맹휴 활동을 효율적으로 이끌기 위해 최규창의 하숙집에 임주홍 등이 모여 ‘맹휴중앙본부’를 결성하였다. 중앙본부는 참모부, 통신부, 외교부, 회계부를 설치하여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심지어 지방 학생들의 결속을 위해 지방대표기관을 조직하였다. 맹휴 중앙본부는 학부형에게 통고문을 보내 맹휴의 정당성을 알리고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하였다. 맹휴생에게는 끝까지 투쟁할 것을 알리며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사라이(白井) 교장에게 보내는 항의문도 작성 배부하였다. 이경채 사건으로 촉발된 맹휴는 외견상 일제의 탄압으로 성공하지 못한 것 같았으나 중앙본부는 본격적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경채의 「투쟁경력」에 자세히 나와 있다. “1928년 7월 동맹휴교 때 다수 희생자(구속, 퇴학 학생을 말함)와 재학생 독서회원들과 장기 계획을 모의하였다. 시위할 때 제1선 학생진용이 체포되면, 제2선 학생진용이 앞으로 나가고, 제2선 학생진용이 체포되면 제3선, 그리고 제4선이 항쟁을 계승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이듬해 11월 3일 일어난 시위가 오랜 기간 지속되어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경채 사건으로 촉발된 맹휴가 단순 수업 거부가 아니라 ‘맹휴중앙본부’라는 식민 지배체제를 무너뜨리려는 만세 시위를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조직체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이 조직체가 1년 넘게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 이듬해 11월의 광주학생운동이었다. 곧 11월 3일 광주에서 폭발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이경채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경채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의가 여기에 있다. 7월 21일 공판에 넘겨진 이경채 등의 재판을 무려 3개월이나 끌었다. 일제가 이 사건에 받은 충격이 컸음을 말해준다. 단순히 학내 사건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 아니라 일본의 국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천황제까지 공격했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1928년 10월 12일 광주지방법원은 이경채 등이 만 18세가 되지 않아 소년형무소에 보낼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이경채 징역 1년 6월, 박병하 징역 1년, 윤해병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등 중형을 선고하였다. 이경채는 거의 1년 가까이 복역하다 1929년 9월 4일 가출옥(假出獄)하였다. 그의 출옥 일을 1929년 10월 20일로 밝힌 글이 많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4. 제2차 학생 시위와 이경채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역사적인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그날 저녁과 4일 연달아 청년동맹 지도부 회의가 열렸다. 광주신간회 집행위원 겸 광주청년동맹 위원장 장석천, 광주청년동맹 집행위원 및 광주유학생회 간부 장재성, 전남청년동맹 국채진, 광주직공 노동자회 박오붕, 신간회 집행위원 나승규, 광주소년동맹 위원장 강석원, 조선일보 광주지국 최인식, 청년동맹 집행위원 임종근 등 10여 명이 참석하여 ‘학생투쟁 지도본부’를 결성하였다. 11월 3일 우발적인 충돌을 대사건으로 발전시킨 학생 지도부는 사전에 계획한 대로 2차 시위를 준비하였다. 2차 시위는 새로 결성된 ‘학생투쟁 지도본부’가 맡았다. 1차 시위 때는 미처 항일격문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2차 시위 때는 투쟁의 목적을 명시한 격문을 만드는 등 철저히 준비하였다. 격문을 통해 “11월 3일 학생충돌사건이 우발적 충돌이 아니라 부당한 압박과 민족차별을 자행해 온 총독 정치에 맞선 광주학생의 정당한 항쟁”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2차 시위의 계획 수립에 광주학생운동의 영웅 이경채가 참여하였음이 확인된다. 그는 전남도립병원 부근에서 열린 비밀 ‘대책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날 이경채의 참여는 항쟁 지도부의 사기를 높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11월 10일 밤 박석기의 집에서 광주고보의 오쾌일, 이영범(李榮範), 광주농업학교 김남철, 정욱, 조길룡, 전남사범학교 이신형과 황상남 등이 모여 11월 11일 1교시 종소리를 신호로 각 학교가 동시에 궐기하여 격문을 뿌리고 시위하기로 정했다. 박석기의 집이 광주 금계리 현재의 전남대학교병원인 도립병원 근처이다. 이경채가 도립병원 근처의 낡은 주택에서 지도부들을 만났다고 증언하고 있다. 2차 시위 계획이 수립될 때 이경채의 참석하였음이 분명하다. 특히 이경채가 인도하여 이날 시위 추진계획에 참여하여 백지동맹을 이끌었다는 광주여고보 최순덕의 증언은 이러한 추론의 결정적 근거가 된다. 출옥한 지 두 달도 채 안 되어 이경채가 광주 시위 준비에 앞장을 선 것은 ‘광주 영웅’다운 행동이었다. 10일 밤 모임에서 11월 11일보다는 장날인 12일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거사일을 변경하였다. 12일 제2차 시위는 조직적으로 광주 시내 전역에서 전개되었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동력이 되었다. 시위를 지도한 이경채는,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다 11월 말 체포되어 1개월간 유치장에 갇혀 물고문을 포함한 온갖 고문을 받았다. 그는 이때의 물고문을 “조타주수(弔打注水)”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이러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비밀을 지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에게는 ‘요주의’ 인물이라는 낙인이 붙여졌다. 광주에서의 학생 시위는 단기간에 전국 학생들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이는 시위 준비가 사전에 조직화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후 학생시위를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구속, 퇴학 등의 처벌을 받은 학생들이 농촌이나 노동 현장에서, 그리고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단체에서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선배들의 영웅적인 항쟁은 전설이 되어 1938년 광주고보 학생들의 무등회 조직, 1942년 광주사범학교의 무등독서회 조직으로 이어져 광복 그날까지 독립운동의 열기가 활활 타오르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게 위대한 항쟁이었던 광주학생운동의 기폭제는 1928년 4월에 있었던 이경채의 삐라 살포 사건이었다. 이경채 사건의 역사적 의의는 여기에 있다. 5. 일본 망명과 재일유학생 독립운동 주도 국내에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1931년 2월 일본 망명길을 떠난 이경채는, 와세다대학교 전문학교 야간부 법률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신문 배달과 지하철 공사장 인부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고학생(苦學生) 신분이었다. 이 무렵 광주고보 재학 중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투옥된 문두재, 양태성, 유병후, 윤창하, 김보섭 등 그와 가까운 친구들이 일본에 와 있었다. 이경채는 이들과 광주에 있을 때부터 같이 독서회 활동도 하였고, 그의 구명을 위해 맹휴를 전개하다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구속되었기 때문에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국제 질서가 요동을 치자 전남 출신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구축하려 하였다. 양태성처럼 공장에서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이도 있었다. 이경채도 처음에는 양태성처럼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하려고 생각한 것 같다. 그의 3남 용립이 보관한 이경채의 앨범에 시기는 나와 있지만 일본 동경시 내무국 페인트 강습소에서 강습을 마치고 찍은 사진이 하나 있다. 당시 동경시 내무국에서는 1929년 세계공황으로 인해 실업자들이 늘어나자 그들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일본은 그들의 일자리가 부족해지자 조선에서 건너온 노동자를 강제로 송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 이경채가 일본 동경시 사회국이 주관한 일자리 강습소에서 교육받고 있는 일은 이례적이다. 곧 이경채가 일본에서 장기 체류하며 그곳에 위장 취업하려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경채 사건으로 퇴학당한 고인석이 일본에 건너가 이경채를 만났다고 한 시기가 이 무렵이었다." 한편 일본 경시청에서는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인 그가 사회국 주관 강습소에서 교육을 받고, 다른 광주학생운동의 핵심 인물과 회합하는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마침 1932년 1월 동경에서 일본 국왕을 폭사시키려 한 이봉창 의사 의거가 일어났다. 일본 수사 당국은 감시하고 있던 조선인들을 체포하였다. 이경채도 일본 경시청 내선과(內鮮課)에 체포되어 악랄한 고문을 받았다. 상해 임시정부와 재일본 유학생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혈안이 된 일본 경찰은 이경채에게 온갖 고문을 가하였다. 소위 ‘다라이마와시(たらいまわし)’를 6개월 동안 4차례나 시켰다. 이경채는 일본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을 단념하고 중국으로 망명을 결정하였다. 그가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한 또 다른 까닭은 이념을 둘러싼 유학생 내부의 치열한 갈등도 한몫하였다. 광주고보 시절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던 그의 이념 지형이 일본 망명을 거치며 민족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6. 한·중 연대 구축에 혼신을 기울인 독립운동 이경채는 일본 우편선 선원의 도움으로 상해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1933년 4월 28일이었다. <용의조선인 명부>에 그가 상해에 도착한 사실이 나와 있다. 그가 상해에 도착하였을 때 임시정부는 윤봉길의사 의거 사건으로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해 항주로 이동해 있었다. 이경채는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으로 있던 함평 출신 김철의 소개로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임시정부가 운영한 인성소학교 선우혁 교장을 만났다. 그는 김판수(金判守)로 이름을 바꾸어 신분을 위장하며 학생 교육에 정성을 기울였다. 김철이 작명하여 주었다. 당시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고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이경채의 중국 망명이 임시정부와 연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인성학교에서 이경채는 김두봉, 조완구 등 당대의 명망가들과 함께 근무하였다. 다음은 인성학교 시절을 회고한 이경채의 글이다. “당시 제일 곤란한 것은 혁명가의 자제인 고로 혁명 의지가 왕성하고 미래의 혁명투사가 될 수 있는 신교육을 시켜야 하겠는데 교재가 없어 선우 교장과 함께 매일 밤늦게까지 다음날의 교재를 토론하며 혁명의 기백을 주입시킴과 동시에 한글 신철자법 등을 가르쳤기에 학부모들의 찬사를 받아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2)(이경채의 소감)
한편, 이경채는 항주로 와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고, 기관지인 한국독립보 발간에 참여하였다. 김철은 이경채의 이름을 다시 ‘이중환(李中煥)’으로 개명해주었다. 한국독립보는 월간 소형보 1, 2면은 중국 문자, 2, 3면은 한글판으로 편집하였다. 이경채는 문선과 조판을 담당하였다. 그가 문선, 조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928년 개성 소년 형무소에 수감 되어 있을 때 이 일을 배웠기 때문이다. 한국독립보는 송병조 목사가 주관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김형순의 경제적 후원, 조소앙의 프랑스 지인 등의 경제적 후원으로 간행되고 있었다. 조선독립동맹을 세운 김두봉도 한국독립보 간행에 참여하였다. 김두봉은 이경채에게 공산주의 사상의 위험함을 강조하였다. 그런 김두봉이 연안으로 건너가 조선독립동맹을 건설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국독립보 편찬은 총책임자인 조소앙을 비롯하여 양기탁·김두봉·김상일 부부·김사집·박경순 부부·김철·이세창·해공 신익희, 그리고 이경채 자신이었다. 1934년 6월 19일 작성된 일본 상해 영사관 자료에는 항주에 이중환이 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경채가 이름을 여러 차례 바꾸는 등 신분을 숨겼지만, 일제는 그의 행적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내부에 일본 밀정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 부분은 말미에 상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이경채는 한국독립당의 또 다른 기관지인 ‘진광’ 발간 작업에 참여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활동을 선전하고 한·중연대를 유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문건들을 간행하여 한국독립 운동의 당위성과 한·중연대의 필요성을 알리려 하였다. 1934년 1월에 진광(震光)이 간행된 배경이다. 김철도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그해 11월 중국과 공동 항일전선을 구축하려고 중국항일대동맹을 조직한 바 있었다. 1930년대 재중 한인 독립운동세력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정부와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독립을 찾으려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 이경채가 있었다. 7. 남경 의열단과 무장투쟁 다음은 이경채가 남경 의열단원임을 입증하는 일본 자료이다. 이경채 명치 43년 4월 6일 (본적) 전라남도 광주군 송정리(주소) 상해
광주학생 불온삐라 부착 사건으로 징역 2년 6개월3)을 복역하고 출옥 후 내지로 건너와 이곳 저곳을 유랑하다가 상해로 건너온 후 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임4) 의열단은 김원봉이 1919년 길림에서 조직한 폭력혁명 조직이다. 1920년대 중반 폭력혁명의 한계를 절감한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가면서 의열단은 해체상태에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김원봉은 북경에서 남경으로 다시 활동무대를 옮겼다. 중국 정부가 동북실지회복(東北失地回復)에 힘쓰자, 중국과의 합작에 의한 항일독립운동을 달성하려고 의열단을 재건하였다. 바로 ‘남경 의열단’이다. ‘남경 의열단’을 조직한 김원봉은 공산주의자와의 관계를 끊고 중국 국민정부와의 항일 공동투쟁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많은 애국지사들이 남경 의열단에 가입하였는데 이경채도 지원한 것이다. 이는 이경채가 중국과의 외교적인 연대뿐만 아니라 무장 투쟁도 서슴치 않음을 알 수 있다. 8. 중일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장교 이경채- 戰史에 빛나는 상해 크리크 전투와 이경채 일본과의 전쟁을 염두에 둔 중국 국민당정부는, 1935년 10월에 상해에 일본연구소를 조직하였다. 외견상으로는 민간연구소였으나 국민당 군사위원회 직할이었고, 장백리가 주관하였다. 일본연구소에는 일본, 영어, 프랑스 유학생이 12명(일본 육사 출신 2명) 등 모두 22명으로 조직되었다. 이곳에서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을 광범위하게 연구하였다. 후에 일본연구소 모든 연구원은 진성(陳誠) 장군 휘하로 흡수되었다. 이경채는 중국 노혁명가인 장고산(張孤山)의 소개로 일본연구소에 들어갔다. 이때 이일휘(李一輝)로 개명하였다. 국민당 정부의 도움이 우리 독립에 필요하다고 이경채는 생각한 것이다. 일본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내던 이경채는, 장백리의 추천으로 1936년 9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13기생으로 입교하였다.5) 중앙육군군관학교는 1924년 1월 설립된 황포군관학교 후신이다. 국민당 정부가 경제건설과 군비확충에 주력하여 독일식 군사훈련으로 히틀러와 협력관계를 설정하자 초조해진 일본은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을 일으키며 8월 13일 상해를 포위 공격하였다.(중·일전쟁) 이경채 등 군관학교 학생들은 졸업도 하지 못한 채 호북성 무창에서 특명으로 상해 방면군 전적총사령부(前敵總司令部)가 주둔한 곤산의 진성 휘하에 도착하였다. 이경채 등 일본연구소에 있었던 연구원들 대부분이 진성의 휘하에 배속되었다. 이 무렵이 1937년 10월 초였다. 한편 화북을 공격하였을 때 3개월 안에 전쟁을 종식한다는 속전속결 전략을 수립한 일본은 그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자 남쪽에서 화북을 압박함으로써 남북 양쪽에서 협공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상해의 전략적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었다. 일본은 일본육군 5개 사단을 상해로 파견하여 상해를 확보한 후 남경을 공략하려고 하였다. 8월 13일 일본 해군 육전대의 공격과 동시에 황포강에 정박하여 있던 일본 군함의 함포사격이 시작되었다. 3개월에 걸친 상해 공방전의 서막이 올랐다. 중국군의 완강한 방어와 역습에 당황한 일본은 상해 파견군 제3, 제11 2개 사단과 여러 부대의 증파를 결정하였다. 이경채가 배속된 상해 제3전구에 할당된 병력은 총 20만 명이었다. 국민정부군의 증원이 이루어지면서 본토에서 증파된 일본군 상륙부대는 중국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아 전진할 수가 없었다. 부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유제명 중장이 지휘하는 중국군 11사단에 배속된 이경채는, 상해 부근의 가정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가정현은 오송 전투의 치열한 전장터 가운데 한 곳이었다. 이경채는 세계 전쟁사에 회자되는 ‘상해 크리크 전투’의 한복판에 있었다. 劉(行)羅(店)도로·蘊藻濱·大場 및 蘇州河 연안에서 중·일 간에 격렬한 전투가 진행되었다. 26일 일본군은 대장을 점령하였고 곧이어 소주하 도하를 강행하였다. 중국군도 강력하게 저항하여 이 지역에서 10여 일간 쟁탈전이 반복되었다.6) 이때 각 사단의 방어 정면이 불과 1.3㎞ 정도로 과도하게 밀집된 중국군은 일본군의 집중포화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일본군 또한 중국군의 방어선을 쉽게 돌파하지는 못했다. 중국군은 일본의 공격을 예상한 장개석의 지시로 1935년 견고한 콘크리트 방어진지와 토치카가 구축되어 있었고, 독일에서 수입한 중화기와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신속히 松江·楓逕지역을 점령한 후 황포강을 도하하여, 오송·상해지역에서 소주하를 도하한 일본군과 협조하여 상해를 양측에서 협공하였다. 바로 이때 오송지역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았던 부대가 이경채가 속해 있던 11사단이었다. 가정현의 오송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어서 상해를 공격하는 일본군이 반드시 점령해야 할 곳이었다. 오송지역이 운하 지역이라 이곳을 크리크라고도 부른다. 바로 이 오송지역에서 전개된 전투가 중일전쟁의 최고의 전투였던 ‘크리크 전투’였다. 이곳에서 중국군과 일본 육전대가 2중, 3중으로 상호 간에 전개된 치열한 포위 작전이 6일간 전개되었다. 중국군과 일본군 양측이 거의 전멸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7) 이경채가 속한 11사단의 경우 사단 병력 약 1만 명 가운데 사단장 이하 겨우 200명 그것도 대부분 부상병을 입은 채 탈출하였다. 이경채도 운 좋게 생존한 200명에 포함되었다. 일본군의 포위망을 겨우 탈출한 이경채는 15집단군 사령부로 복귀하였다. 국민당 정부군이 화동 전역에서 취한 작전은 일종의 방어작전이었으나 화북 전역과는 차이가 있었다. 즉 화북에서 국민정부군은 단계별 전방 방어책을 계획하였지만, 화동에서는 일본군이 상해에서 공격하자 곧바로 반격으로 전환하는 공세적 방어책을 수립하였다. 이 결과 국민정부군이 상해에서 전장의 주도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상해에 총 70만여 명을 투입한 중국군은 27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총 28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4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중국 공격의 동력을 상실했다. 아울러 중국군이 3개월간 상해를 방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사실 장개석 자신도 상해에서 일본군을 격멸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지구전과 소모전으로써 적의 속전속결의 기도를 좌절시키는 것”이 상해 수성(守城)의 주목적이라고 하였다. 크리크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이경채는, 진성이 지휘하는 제15집단군 사령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계속 치렀다. 한구·한양·무창 이 3곳을 무한이라고 한다. 지리적으로 한구는 수로와 육로의 교통요충지에 있어 상업이 번성하였고, 한양은 군수산업 중심지로 제철소, 병공창, 화약창이 있었고, 무창은 정치 중심지로 남북을 연결 및 통제하고 있었다. 남경 함락 후 국민정부는 중경으로 천도하였으나, 지리·교통·산업면에서 보았을 때 무한은 사실상 국민정부의 군사·정치·문화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서주를 차지한 일본은 무한 공략에 나섰다. 이 무렵 이경채는 진성이 지휘하는 제9전구에 배속되어 있었다. 상해 크리크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능력을 인정받은 이경채는 1938년 1월 소교(소령)로 임명되어 무한위수사령부(제15집단사령부)에서 근무하며 진성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였다. 그는 1938년 9월에 중국군관학교 명예 졸업장을 사천성 동양에서 받았다. 그리고 일본의 무한 공격이 집중되던 시기인 1938년 9월 진성이 지휘하는 제9전구 위수사령부로 배속되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때 이경채는 전투 최일선에서 부대원을 지휘하며 싸우는 보병 지휘관이 아니라 사령부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취득하여 분석하는 정보분석관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가 일본연구소에서 근무한 데다 일본어에 능통한 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비록 일본군과 직접적 전투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계림에 있을 때는 일본군의 공습으로 동굴에 피하지 않았으면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비적(匪賊)들의 습격도 여러 차례 받는 등 목숨을 건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때 갓 결혼한 그의 아내도 군무원으로 그와 함께 근무하였다. 그의 유일한 낙은 사랑하는 아내와 전선에 같이 있다는 것이었다. 1939년 10월부터 1940년 3월까지 제6전구 위수사령부 소교로, 1940년 4월에는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정치계림파공처 소령, 1940년 10월부터 제6전구 위수사령부 소교의 직위에 있으며 정보분석관 일을 계속 맡았다. 이 무렵 9전구 사령관이었던 진성이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장을 맡고 있었다. 전구 사령부 등에서 정보분석관으로 활약하면서 일본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여 국민정부군의 대응 작전을 수립한 이경채는, 진성 등 지휘부의 높은 신뢰를 얻었다. 1940년 9월 중국 국적을 취득한 것도 진성, 장백리 등 중국 최고 지도층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한편 1943년 4월 중교(中校)로 승진한 이경채는 제6전구 사령부에서 참모의 직위에 있었다. 이제 전쟁의 주도권은 점차 국민정부군에게 넘어오고 있었다. 특히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 전선에서 발을 빼려 하였으나, 미국은 중국 정부가 일본의 발목을 붙잡아 놓기를 바랐다. 사실상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육군이 미군과의 상륙전투에서 대부분 패한 것은, 일본 육군의 대부분이 중국 본토에서 발목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중국 본토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거의 소강상태에 있었다. 이때 경채는 1945년 4월 육군군관학교 군관고등군사반(육군대학 과정)에 11기로 입학하여 1946년 4월 졸업하였다. 이때 교육받은 469명의 장교 가운데 한국인으로는 경채가 유일하였다. 경채가 교육을 받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방송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해방 소식을 들었다. 그는 1946년 3월부터 7월까지 국민당 군사위원회 무한행영 중교를 역임하고, 1946년 8월부터 1947년 5월까지 국민정부 주석 무한행원참모처 중교 조장을 거쳐 1947년 5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제6총청사령부 제4처 중교 참모직을 맡았다. 이 시기 그는 장개석의 신임이 두터운 9전구 사령관 출신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장의 직책을 맡았던 진성의 휘하에서 정보분석관을 지내고 있었다. 이경채가 진성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징표이다. 9. 쓸쓸히 방치된 광주 영웅 생가 이경채는 1948년 12월 6일 한국에 돌아왔다. 그의 귀국 사실은 당시 한국 외교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 사이에 오고 간 공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귀국자 명단에 있는 이일휘 그리고 아내 추졸흡, 딸, 아들 이름이 이를 말하고 있다.
이일휘는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활동할 때 개명한 이름이다. 외교부 문서에 있는 이일휘가 이경채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광주 출신에다 그의 이름 밑에 아내와 자녀 이름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장녀 여홍은 1943년생이다. 그가 고향을 떠난 지 18년 만에 귀국한 것이다. 이경채가 귀국하던 1948년 12월은 대한민국 정부가 불과 4개월 전인 1948년 8월 15일 출범하였으나, 4월 3일 일어난 제주 4·3사건과 그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광주 전남지역이 매우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그와 가깝게 지낸 항일운동의 영웅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주의 사상을 지녔다 하여 이념적으로 공격받고 있었다. 18년 만에 대한민국에 발을 내디딘 경채의 마음은 착잡한 마음이 더하였다. 그가 귀국한 직후인 1949년 1월 9일 중국 국민당정부의 초대 대사로 부임한 유어만(劉馭萬) 대사가 이경채를 찾아 송정리에 왔다. 그와 중국군으로 함께 근무한 친구 사이였다. 경채는 한·중 연대의 상징인 셈이라 하겠다. 한편 독립운동의 전설이 된 경채를 여러 정치세력이 영입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이미 좌, 우익의 치열한 싸움을 경험한 데다. 더구나 한국전쟁은 그의 마음을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하였다. 그가 일체의 정치 활동에 간여하지 않은 까닭이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그를 이용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1961년 12월 당시 광산군수의 강권에 ‘재건국민운동 광산군 촉진회장’에 추대되었으나 4개월 만에 물러났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그에게 정계 진출 및 각종 직책 수임 요구 등이 이어지자 1974년 3월 인연이 전혀 없는 경남 양산군 기장면 석산리로 주거를 옮겨 양어장을 운영하였다. 그가 양어장을 운영한 것은 지나온 삶을 반추해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때의 심경을 들어보기로 하자. “본적 지방 정치단체 및 각 기관에서 때때로 정계 출현 및 모모 직책을 맡을 것을 강권하여 소생은 만사 포기하고 ‘조용한 황혼’을 뜻하면서 여생에 먹칠하지 않으며 정의에 입각하여 집불(草灰) 같이 사라지면(棄世) 다행이라는 생각하고 있다.”8)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채 내외는 1977년 3월 26일 오전 11시 그가 거주하던 양산의 삼양 양어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이때 사랑하는 중국인 아내 추수이 여사도 함께 사망하였다. 3남 용립은 군 복무 중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가 떠난 지 3년이 지난 1980년 대한민국 정부는 훈장도 아닌 기껏 대통령 표창으로 그의 공적을 평가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서훈의 격을 올렸다. 광주학생운동,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등 그가 펼친 항일운동의 역정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해도 남음이 있다. 그의 빛나는 항일운동의 여정은 시간이 갈수록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국가보훈처와 광복회는 이경채를 2014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그의 공을 기렸고, 모교인 광주송정동초등학교에 송정 유지들이 2017년에 건립된 기념비가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전시실에 그의 유품이 진열되어 있다. 그가 사망한 후 유해는 광산구 평동 용곡동 939-2번지 선산에 안장하였다가 대전 국립현충원에 이장하였다. 그가 귀국 후 살았던 생가는 거의 폐가(廢家)로 있다.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부기, 역사의 무서움> 한국독립당 및 진광 발간과 관련하여서는 한국독립보의 발간과 진광 발간에 참여한 박OO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받을 때 작성한 심문조사서에 자세히 드러나 있다. 이제껏 ‘한국독립당’, ‘진광’ 관련 연구 대부분은 그의 진술을 참고한 것이다. 박OO은 1920년 대련을 거쳐 상해에 왔다. 그리고 임시정부에 들어가 외무부 참찬을 맡은 후 항주에 와서 이경채와 함께 한국독립당에서 한국독립보 및 진광 발간을 맡았는데 그의 업무는 영문 번역 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이러한 공으로 1995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가 영어를 할 줄 안 것은 경성에 있을 때 경성기독청년회관 야학 영어과에서 14세부터 17세까지 약 4년간 공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경채는 그가 미국 유학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박OO이 임시정부에서 미국에서 공부하였다고 자신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박OO은 1938년 9월 6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받았다. 그의 심문조서가 현재 남아 있는데, 심문조서를 통해 당시 독립운동의 실상을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정확히 임시정부 및 한국독립당의 사정을 진술하고 있다. 마치 Usb에 담아 임시정부와 독립당 자료를 일본 경찰에 넘겨주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만약 그가 밀정이었다면 어떠한 처벌도, 이후 행적도 없어야 할 것이다. 정말 그러하였다. 일본 당국으로부터 어떠한 처벌을 받은 흔적도, 이후 행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 그가 이경채를 일본의 밀정으로 의심하는 진술을 하고 있다. 필자는 그가 일본의 밀정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어느 것이 역사의 진실일까? 만약 필자가 이를 밝히지 않았다면 이경채가 밀정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었을 것이다. 최근 필자는 2019년 KBS가 보도한 밀정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확인하였더니 불행히도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1) 동아일보 1931. 6. 5.
2) 이경채, 「투쟁경력」. 3) 이경채는 1928년 삐라살포 사건으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년 만에 가출옥하였다. 그가 2년 6월이라 함은 1년 6월을 착오한 것이라 여겨진다. 4) 朝鮮總督府 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發行, 「資料 義烈團經營の南京軍官學校の全貌」(思想彙報第四號) 5) 이경채는 장백리를 무척 존경하였다. 그가 귀국 후 그의 장남 용정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백리’로 할 것을 당부하였다. 실제 그의 사후에 장녀가 태어나자 용정은 부친의 당부대로 ‘百莉’로 이름을 지었다. 6) 이경채에 의하면 중, 일 양군이 서로 2중, 3중으로 포위해 공(攻), 수(守)가 셀 수 없이 바뀌었다고 한다. 7) 이때 일본군은 3사단이 전사자 1,080명, 부상자 3,589명, 11사단은 전사자 1,560명, 부상자 3,980명으로 전체 병력의 1/3을 상실했다. 일본군의 피해가 이 정도였으니 중국군이 입은 피해는 이보다 훨씬 더 컸다고 짐작된다. 8) 이경채, 투쟁경력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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