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처럼 광복은 오고 있나니 게시기간 : 2024-02-2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2-26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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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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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마다 전공 영역이 있다. 그런데 가끔은 영역 밖의 일을 할 상황이 있다. 도전 의식이 발동한 때도 있지만 거절 못해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일이 공부의 지평을 넓히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옅은 안목에서 헤매기 일쑤다. 한 번은 전공 시기와 먼 인물을 조명하는 발표회의 토론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토론자를 구할 수 없다는 하소연에 거절 못해 응했는데, 이듬해에 그 인물 발표의 토론을 다시 맡게 되었다. 그날 돌아오면서 계속 낯이 두꺼워지느니 차라리 논문 한 편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 만났던 인물이 돈헌(遯軒) 임병찬(林炳瓚, 1851~1916)이다. 그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과 함께 거병(擧兵)한 1905년의 병오창의는 을사조약 이후 최초의 의병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의병사의 주요 인물인 만큼 이미 수십 편의 연구 성과가 있었다. 다행히 내 전공인 한시 작품은 아직 다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분석의 시각으로 작품을 읽어갔지만 시인의 애절한 마음은 문득문득 나를 그 시대의 한복판에 세워 놓기도 했다.
임병찬 선생 생가 추정지,
병오창의 기적비, <冬窓懷人>
북풍이 불어와 눈보라 몰아치니 땅 가득한 흰 눈이 북방의 백룡퇴 사막같네 누가 차가운 매화나무 가련히 여기는가 홀로 늙은 소나무 향해 피어있는데 문을 나서도 이야기 나눌 이 없는데 한 조각 돌 만이 텅 빈 산에 서있네 바라보면 멀리 무슨 소리 들리는 듯 계곡물이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구나 北風吹大雪 滿地白龍堆 誰憐寒梅樹 獨向老松開 出門無與語 片石立山空 相望如有聞 知是水流東 ‘겨울날 창가에서 어떤 이를 그리워하다’는 제목의 시이다. ‘어떤 이’가 누구인지 제시되지 않았지만, 내용상 최익현으로 추정된다. 임병찬의 삶에서 최익현은 정신적인 일체(一體)였기 때문이다. 시를 읽어보기로 한다. 시인은 창밖 겨울세상을 보고 있다. 한동안 북풍이 불어 눈보라가 치더니 세상은 온통 눈세상이다. 모래로 뒤덮인 북방의 백룡퇴 사막이 저러할까. 하루 만에 뒤바뀐 풍경의 한쪽에서 시인은 홀로 서있는 매화를 발견한다. 황량한 환경의 매화를 가련히 여길 법도 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희망의 메시지를 읽는다. 매화는 봄이 오고 있음을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어딘가의 얼음장 밑에서는 계곡물이 졸졸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야기 나눌 이도 없는 고독의 위치이지만, 가지 않을 것 같은 겨울은 곧 봄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변화와 개선에 대한 믿음, 그것은 사철 푸른 소나무를 닮으려는 그 마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임병찬은 매화를 자신에, 소나무를 세상을 떠난 스승 최익현에 견주고 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리라는 것은, 조국의 광복은 너무도 자연스런 이치(理致)라는 것이다. 스승과 함께했던 결의를 떠올리며 어두운 현실을 이겨내겠다는 마음이 드러난 시이다. 임병찬의 삶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최익현과의 만남의 순간이다. 설명에 앞서 임병찬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임병찬의 본관은 평택이며, 철종 2년(1851) 지금의 전북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300년 이상 이 지역에서 살아왔다. 그가 태어난 곳은 남산(南山)이라 부르는 작은 산 아랫자락의 집이었다. 북으로 조금 걸어가면 옥구읍성의 남문이 있고, 남으로는 큰 절이 있었다는 한절마을을 지나 넓은 들판이 만경강까지 이어지는 곳이었다. 임병찬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여 십대 초반에 사서삼경을 독파했다. 10대 후반에 경제적 이유로 옥구형방이 되었고, 이후 전라감영의 예방 등을 지냈다.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퇴은(退隱)의 뜻을 가지고 태인군 산내면으로 이거한다. 그는 관리로서의 능력만이 아니라 현실 감각도 뛰어났다. 1888년 호남에 흉년이 들자 전라감사에게 전세와 대동세 징수를 현물이 아닌 돈으로 받자고 제안하여 도민들을 안심시켰다. 이후 전라감영의 창고에 화재가 발생하여 도내 53군(郡)의 수세(收稅) 문서가 모두 불타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놀라운 기억력으로 완벽하게 복원하기도 하였다. 임병찬은 1893년 태인에서 순창 회문산(回文山) 북쪽 마을로 이사한다.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데 얼마 뒤 논란거리를 낳은 일에 직면하게 된다. 농민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김개남(金開南)이 2차 농민전쟁 이후 태인의 매부 집에 숨어있었다. 이때 관군에게 김개남의 소재를 알린다. 김개남 체포 이후 1895년에 국가에서 임실군수를 제수하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1903년 겨울, 일본군이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종 황제를 근위할 의병을 일으키려했으나 민영소(閔泳韶) 등 정부 대신의 비협조로 인해 그만두게 된다. 1906년은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해가 바뀐 정월의 어느 날, 뜻밖의 편지를 받는다. 최익현이 사람을 통해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전 해에 고종은 최익현에게 밀지를 내려 7도 의병군의 통솔을 명했었다. 최익현은 거병 계획을 세우고 판서 이용원(李容元) 등에게 함께 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모두 응하지 않자 낙담하고 있던 차였다. 편지가 전달된 지 한 달 뒤 최익현은 직접 임병찬을 찾아온다. 뜻이 통한 두 삶은 그 자리에서 사제(師弟)의 예를 맺는다. 최익현은 거의(擧義) 추진에 관한 모든 일을 임병찬에게 맡긴다.
고종황제 밀칙, 1912년. 고손 임동권 소장
『돈헌유고(遯軒遺稿)』권4, 「관견(管見)」의 초고, 1913년 추정, 고손 임동권 소장. 1906년 윤4월 13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을사조약 이후 최초의 의병이 봉기하게 된다. 최익현은 무기를 수집하고 일제의 죄 16가지를 열거한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글을 통감부에 보낸다. 얼마 후 광주관찰사가 의병 해산을 요구하는 고종의 칙령을 전달하고, 광주와 남원의 진위대도 급파된다. 일제 군경으로 알고 전투를 벌이려다 진위대 군인이라는 것을 알자 최익현은 해산을 지시한다. 최익현과 임병찬 등은 서울로 압송되는데, 일제는 최익현에게 대마도 감금 3년, 임병찬에게 감금 2년을 선고한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 이즈하라에 있는 일본군 위수영에 감금된다. 최익현은 옥고를 겪다가 1906년 11월 대마도 감옥에서 순국하고, 임병찬은 이듬해 1월 형기가 감면되어 석방된다. 고국으로 돌아온 임병찬은 순창에서 생활한다. <漫吟>
병든 학 꿈속에서 땅 벌레 마주하고 있지만 한 번 날아 하늘에 다다르기를 생각하네 대지는 삼천 리, 하늘은 구만 리 때가 오면 시작할 수 있고 마칠 수도 있으리라 病鶴夢中對蟄蟲 一圖驚振一飛冲 大地三千天九萬 時來能始亦能終 병오년의 거사는 애초에 성공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누구도 나서지 않는 현실에서 대의(大義)를 알리고 주저하는 지성(知性)들에게 각성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는 지사(志士)들이 힘을 모아 일제의 야욕에 맞서야 한다고 말하던 때였다. 1907년 겨울, 서울의 이평해(李平海) 등이 그를 찾아온다. 거사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임병찬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위의 시는 그러한 생각의 일단을 보여준다. 병든 학(鶴)이 꿈속에서 땅 벌레를 마주하고 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땅 벌레가 학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학이 병들었기에 땅 벌레가 학을 우습게 보고 있다. 병든 학은 땅 벌레의 도발에도 개의하지 않는다. 학이 시야에 두는 것은 땅 벌레가 생각도 할 수 없는 넓은 땅과 아득한 하늘이기 때문이다. 다만 학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병든 학은 일제의 침탈 앞에 무기력한 시인 자신, 땅 벌레는 일제를 뜻한다. 시인은 굴욕의 상황 에서도 오히려 큰 뜻을 펼칠 것을 생각한다. 그렇지만 상황의 개선은 더디고 지금은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중요한 것은 ‘적절한 때가 오기[時來]’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임병찬은 이평해 등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일에 거의의 뜻이 있다면, 먼저 군졸을 단련시키고, 저와 나의 강약(强弱)을 헤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목숨만 잃고 누추한 이름을 취하기 쉽네.” 무리한 거병은 오히려 인명의 손상만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전통적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할 수 있음)의 지혜를 알고, 또 비폭력 운동의 효용까지도 내다보고 있었다. 강제병합 이후 임병찬에게 고종의 밀지(密旨)가 전해진다. 그는 사양 끝에 전라남북도 독립의군부 순무대장이 된다. 이듬해에는 독립의군부 거의(擧義) 방략(方略)을 담은 「관견(管見)」을 제작한다. 「관견」에는 무력투쟁이 아닌 국제세력 이해관계의 이용이나 비폭력 평화운동으로서의 장서(長書) 투서 방식 등이 담겨 있다. 1914년에는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 순무총장, 함경남도 관찰사 겸 순무총장에도 임명된다. 그런데 얼마 후 일경(日警)에 체포된 동지가 고문을 못 이기고 독립의군부 조직을 자백하는 일이 발생한다. 임병찬은 국권회복을 요구하는 편지를 총독과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보낸다. 재차 편지를 보내자 일경은 그를 체포하고 모욕을 주었다. 그러자 옥중에서 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1년의 형기(刑期)로 여수 남쪽 거문도에 유배 된다.
거문도 임병찬 선생 유폐지 터,
임병찬 선생 묘소, <夢陪先師歸家>
꿈에 선생님 모시고 고향 땅 옥구에 이르러 십 년 사이 일들을 다정하게 묻고 답했네 즐비한 선비들은 선생님께 경복하고 어자 느릿느릿 말 몰 때, 그 옛날의 얼굴이셨지 뒤척이다 깨어보니 창문에는 날이 밝아오는데 이불 어루만지며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흐르네 어느 날에 함께 한 동맹의 뜻 이루고서 저승에 가서 선생님을 뵐 수 있을까 夢陪先師到玉山 慇懃問答十年間 從儒濟濟先生服 御者依依舊日顔 移枕忽驚窓透白 撫衾自惜淚霑斑 何時能遂同盟志 歸去泉臺立侍班 *玉山은 조선시대 옥구현의 다른 이름 거문도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 64세였다. 쇠약한 몸을 염려하여 동생과 손자가 와 식사를 돕고 적료함을 덜어드렸다. 지역민들의 얼굴도 익혀갔다. 노사 기정진의 학통을 이은 박석규(朴奎錫), 제주수문장을 지낸 원세학(元世學) 등과 교유하고, 어린이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홀로 있는 시간에는 일상이나 절기(節氣)를 제재로 시를 짓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이미 삶이 다하고 있음을 느낀 것 같다. 얼마 후 유배의 형기가 일 년 더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살아 돌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고, 혼(魂)이 돌아가는 것이 영광이라 말하기도(生還非幸事, 魂返是榮光.) 하고, 자신의 죽음에 대한 시를 짓기도 한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도 문득문득 떠올리는 것은 병오년 스승과의 만남이었다. 시인은 어느 날 꿈을 꾼다. 나날의 힘듦과 다르게 꿈속의 장면은 화락(和樂)하기 그지없다. 어릴 적 놀던 고향 옥구의 어느 아늑한 곳에서 선생님과 마주하고 있다. 선생님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며 다정스레 물으신다. 그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10년 사이의 일을 말한다. 나라를 위해 온힘을 다했지만 홀로 헤쳐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이야기 끝에 주위를 둘러보니 제자와 시종들이 가득하다. 모두 온화한 표정과 존경스런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본다. 선생님도 평온하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근심은 오간 데 없고 스승과 제자가 함께 어울리는 한 장면. 그 행복감에 젖어드는 순간, 몸을 뒤척이다 그만 꿈에서 깬다. 선생님을 만난 행복감과 현실의 쓰라림이 교차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선생님과 한 약속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삶을 마쳐야한단 말인가. 이 시를 쓴 지 얼마지 지나지 않은 1916년 5월 23일, 임병찬은 66세의 나이로 절해(絶海)의 고도(孤島)에서 삶을 마친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은 대내외적인 격랑의 시기였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이들도 있고, 왕정(王政)의 틀 안에서 희망을 찾으려 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한 역사의 공간은 하나의 숲이었고, 저 마다 길을 찾던 이들은 다른 이에게 아픔을 주기도 했다. 그 숲에서 멀리 떨어진 21세기의 오늘은 우리에게 윤곽을 조감할 거리를 준다. 임병찬은 그 시기 역사의 숲에서 조국과 백성을 위해 충심(衷心)을 다한 한 거목이다. 삶을 일관하는 불굴의 의기(義氣), 그리고 얼음장 밑 물소리에서 봄을 보았던 그 낙관(樂觀)의 정신을 오늘 새삼 되새겨 본다. 그러고 보니 며칠 있으면 삼일절(三一節)이다. 글쓴이 김창호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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