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품격 있는 정치를 위하여 게시기간 : 2024-03-06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4-03-04 14:2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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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지난 번 회니(懷尼) 사이의 일을 대략 들었습니다. 우매한 제가 도외시하기도 마땅치 않고, 생각해보니 이 일은 사림들만이 아니라 조정의 큰 시비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 사이에 끼어들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걱정이 됩니다. 선생님께서 논의를 정해 주셔서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헤매지 않게 해주십시오. 선생님께서 난처해하시면서 시종일관 침묵하고 계시니 마음이 편치 않기에 말씀드립니다. 이장(尼丈)과 회옹(懷翁)은 스승과 제자 사이입니다. 노장(魯丈)과 관련하여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많은 곡절이 있었을 터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의리에 있어서 그 깊고 얕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 깊은 것으로 말하자면 또한 천리로 맺어진 아비와 자식 사이보다 더 하겠습니까? …(중략)…지금 이것으로써 이장을 배척하여 스승을 배신했다고 하니 까닭없이 말하니 잘 살피지 못하는 것이 심합니다. 예부터 이로움과 해로움 사이에 놓였을 때 추종하려는 마음을 뒤집은 이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이장에게 과연 어떤 이로움이 있을지요. 다만 통박하고 원통한 마음을 없애고자 스승과 제자의 의리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미워하며 틈이 벌어졌으니 어찌합니까? …(중략)… 명장(明丈)이 우옹(尤翁)에 대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의리를 지키지 못했어도 그 처신한 것이 어떻게 보면 적절하기도 하니 스승을 배신했다고 배척하는 것은 이유없이 그런 듯도 합니다. 우옹의 기질이나 하시는 행동이 세간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 없으니 어찌 병통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계략이었다.(都是機關)’라고 한 것이 과연 타당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는 창계 임영(滄溪 林泳)이 스승인 현석 박세채(玄石 朴世采)에게 부친 편지이다. 편지에 날짜가 표기되어 있지 않아 시기를 알 수 없지만 대략 1683년 즈음일 것으로 보인다. 회니(懷尼)의 일에 대해 박세채의 생각이 궁금하여 다시 묻고 있다. 회니는 회덕과 이산(尼山)이다. 회덕은 대전에 있는 지명이고 이산은 현재 논산의 옛 지명이다. 회덕에는 우암 송시열이 있었고, 이산에는 명재 윤증이 살았다. 회니(懷尼)의 일이란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일어났던 일, 논란 등을 말한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몇 십 년 거슬러 올라가 윤증의 아버지 미촌 윤선거(美村 尹宣擧, 1610-1669)와 송시열 사이에 있었던 일부터 시작된다. 윤선거, 송시열, 윤휴, 이유태, 송준길 등은 학문으로 맺어졌다. 1653년 윤휴가 경전을 해석하면서 주자의 견해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다른 사람들의 논설을 참조했다. 송시열은 주자의 해석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일로 인해 송시열과 윤휴 사이가 벌어졌다.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윤휴와 절교하라고 은근히 압박했다. 윤선거가 죽었을 때 송시열과 윤휴가 제문을 지어 보냈다. 윤증은 둘 다 받았다. 송시열은 윤증을 질책했다. 윤선거가 윤휴와 진심으로 절교했다면 아들인 윤증이 윤휴의 제문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불쾌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후 윤증은 송시열에게 윤선거 묘갈명을 부탁했다. 이때 윤선거가 1669년 써 놨던 편지를 보냈다. 이른바 기유의서(己酉擬書)이다. 편지에서 윤선거는 송시열의 단점을 논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송시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윤선거 묘갈명을 쓰면서 박세채가 행장에 쓴 내용을 그대로 옮겨 썼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지 윤선거의 덕을 나타내려고 해도 아득해서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윤선거의 덕행을 칭찬하려는 마음이 애초에 없음을 은근히 표현했다. 또 ‘박세채가 쓴 행장 내용은 윤선거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니 아부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송시열이 보기에 행장은 거의 아부에 가까워 보였다. 윤증은 송시열의 글을 통해 윤선거의 덕행을 드러내려 했지만 송시열은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윤증은 여러 차례 다시 써 달라고 요청했고 거부당했다. 윤증은 배신감이 들었다. 묘갈을 쓰지 않으려 했다. 박세채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러다가 1674년 목천서원 배향 논의가 있었다. 이때 윤선거를 배향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 ‘강화도에서 순절하지 않은 사람을 배향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 병자호란 때 윤선거는 강화도로 피난갔는데 권순장, 김익겸 등과 함께 강화도가 함락되면 순절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윤선거는 종으로 위장하고 강화도를 빠져 나왔다. 그의 아내 이씨는 자결했다. 이 일이 윤선거를 목천 서원에 배향하려고 할 때 논란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강화도 얘기가 송시열 쪽에서 나왔다는 말이 돌았다. 결국 송시열과 윤증 사이의 갈등은 더 커졌다. 1681년 윤증은 송시열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보내지는 않았다. 편지에서 윤증은 과거 송준길과 이유태가 송시열에게 했다는 말을 썼다. 도시기관(都是機關), 전용권수(專用權數). 기관이란 권모술수란 말과 같다. ‘모두 다 권모술수이다.’ ‘오로지 권모술수만 쓴다.’는 말이다. 송시열을 비난한 것이다. 또 송시열이 왕패병용(王霸竝用), 의리쌍행(義利雙行)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즉 춘추대의를 내세우지만 다른 사람 충고는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여 명성이 있어도 실제 덕은 병들었다고 했다. 청에 대한 복수 실현에도 실질적인 공은 없고 명성만 높이는 이익을 보았다고 지적했다. 1682년 윤증은 개성 감로사에서 박세채를 만났을 때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야할지 말지 의견을 물었다. 박세채는 보내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편지 내용이 샜다. 논의가 분분했다. 윤증이 스승을 공격했다거나 배신했다는 말이 돌았다. 한편에서는 송시열도 잘한 게 없고, 그의 성행(性行)이 편협하다고 말했다. 논란이 분분할 때 임영은 서울에 없었다. 소식만 들었다. 너무 궁금하여 박세채에게 채근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선생님은 이 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임영은 스승을 걱정했다. 10대 후반부터 스승과 제자 인연으로 만나 20여 년간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윤증은 송시열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박세채에게 자주 자문을 구했다. 그래서 임영은 회니의 일에 박세채도 조금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박세채도 임영에게 쓴 편지에서 ‘이 일들은 행장이 너무 지나쳤고, 묘갈문은 너무 성의가 없었던’ 데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남들이 보기에 행장 내용이 칭송만 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송시열이 성의없이 묘갈명을 지었다는 사실도 말했다. 임영은 송시열의 비평이 달갑지 않았다. 비아냥으로 들렸다. 사람들은 박세채가 한쪽을 지지하지 않고 가운데 버텨서서 둘다 옳고 둘다 그르다고 한다고 비판해댔다. 박세채는 공식적으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했다. 제자 임영에게만 속내를 털어 놓았다. 임영은 스승이 처한 어려운 상황과 그 고민을 충분히 배려하고 이해했다. 다만 침묵으로 인해 세간 비난을 받는 일이 안타까웠다. 무엇보다 송시열과 윤증이 갈라져 화합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는 일이 염려되었다. 개인적 갈등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송시열을 비호하는 무리와 윤증을 지지하는 무리가 생겼다. 노론과 소론. 둘 모두 이전에는 서인(西人)이었다. 그런데 서인들이 갈라졌다. 내편과 네편이 생겼다. 임영은 조선 사림 전체의 문제, 나아가 조정 분열까지 확대될까 걱정했다. 현종 때 예송문제로 서인, 남인이 대립했고, 1680년 경신년 때 정국이 바뀌어 남인이 정치판에서 쫓겨나는 일을 보았다. 그런데 편이 또 갈라졌다. 편이 생겼으니 편을 들어야 하고 그러면 또 갈라치기에 몰두하게 된다. 임영은 이를 걱정했다. 나라가 갈라져야 좋을 게 없었다. 그 사이에서 그는 한쪽만 지지하지 않았다. 윤증이 스승을 ‘도시기관’한 사람으로 몰아댄 일, 송시열이 남의 말을 안 듣고 제 고집만 내세우는 단점이 있음을 둘 다 지적했다. 네편과 내편 사이에서 스승은 어떻게 할지, 또 자신은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83년 이희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근래의 일들은 나라의 흥망과 사림의 휴척과 관계되어 죽기 전에는 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어르신, 마음을 넓히시어 남의 말도 들어주십시오 임영은 서인과 남인이 갈라져 서로 정쟁하고 해를 입는 일들을 직접 보았다. 이제는 송시열과 윤증이 갈라섰다. 임영은 어느 지점에 있어야할지 고민하기도 했다. 1680년 이희조가 자신을 멀리한다고 생각되자 정치적 의견을 조금 달리했기 때문이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 편에 서서 편들기를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송시열과 박세채가 나란히 조정에 나와 나라를 위해 일해주기를 원했다. 한때 그는 송시열만이 중국 명과 오랑캐 사이에 끼여 있는 조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1680년 경신환국 때 송시열이 조정에 나와 정국 운영에 참여해야 나라가 제대로 갈 수 있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송시열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기는 쉽지 않았던 듯하다. 송시열과 윤증 사이가 회복 불가능할 만큼 악화되자 박세채와 같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했다. 박세채의 의견과 입장이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자기 생각을 넌지시 드러냈다. 윤증이 권모술수, 왕패병용, 의리쌍행 등의 말로 스승을 공박한 일이 정말 타당하고 마땅한 건지 따졌다. 송시열의 마음씀과 행적이 평범하지 않고 모나며 병통이 있다고 말했다. 그가 선 곳이 그 중간인 것은 양쪽 눈치를 보기 위함은 아니었다. 인재라면 누구나 조정에 들어가 나라를 위해 일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시열에게 편지를 부쳤다. 조정을 잘 융화시킬 수 있는 방법과 변화시킬 기틀은 하집사(下執事)께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둘로 갈라진 모습은 조정의 의론뿐 아니라 사림의 의론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하집사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넓은 마음으로 멀리 내다보시어, 혹 오랫동안 의심으로 인해 생겨난 일이나 한때 격한 생각에서 나온 것들이 혹 다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깊이 살피셔서 분명하게 말씀하십시오.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정의상 용서해 줄 수 있는데 견식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어도 어여삐 여기시어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측은하게 여기셔서 포용하시고 불러서 말씀시어 정성을 다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사람의 근본이 되는 것이 하루 아침에 얼음 풀리듯이 된다면 그 나머지 자잘한 일들은 오히려 다시 잘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처럼 해결한다면 세상 교화에 도움이 될뿐 아니라 하집사의 성대한 덕도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 편지는 1686년에 보냈다. 송시열과 윤증이 완전히 갈라져 노론과 소론이 팽팽하게 맞선 때다. 임영은 둘로 갈라진 조정을 걱정했다. 융합을 위해 송시열에게 요청했다. 조정 분열을 잘 융화할 사람은 송시열뿐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렇게 하기 위해 송시열이 해주어야 할 일을 제시했다. 송시열이 하고자 한 일 중 다하지 못한 게 있으면 스스로 되돌아 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넓은 마음을 갖고 잘 받아달라고 했다. ‘부디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뒤집어보면 송시열의 단점이 보인다. 편지를 읽는 이의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다. 자신있게 계획했지만 실제 이룬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을 배척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친구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충고나 비난을 받았다. 자신의 일만 옳다고 고집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며, 자부심이 남달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임영은 송시열의 단점을 분명히 알고, 숨기지도 않았다. 다만 직설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할지 충분히 고민했다. ‘이리저리 해주시기를 바란다.’고 엎드려 공손하게 요청했다. 정치 선배들이 송시열의 단점을 공공연하게 떠들었지만, 임영은 송시열이야말로 분열된 사림과 조정을 융합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기대감을 보여주었다. 송시열과 임영은 거의 40살 차이가 있다. 스승뻘이면서 정치계의 대선배이다. 정치 경륜이 임영보다 훨씬 많았다. 임영은 그 점을 높이 샀다. 꼬인 정치 현황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했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후배, 선배에게 품격 있는 정치 주문서를 내다 호모카테고리쿠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범주화해서 외부 세계를 이해하거나 인식한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범주화는 이루어진다. 구분하고 한데 묶고, 경계선을 긋는다. 그 선은 단호하다. 범주 안에 있는 이들은 소속감을 갖고 범주의 정체성을 세우고 강하게 만드는 데 열심이다. 이를 위해 가끔은 경계선 밖의 것도 활용한다. 경계선 밖의 것을 활용한다. 저편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 격렬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윤증은 송시열을 향해 권모술수만 쓴다고 말하고, 대의를 행하려고 하는 듯하나 실제 이익만 챙겼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때 윤증은 송시열보다 20년이나 어렸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정치나 학문의 연륜이나 역량이 어린 사람보다 더 뛰어난 것은 아니다. 다만 함께 같은 장(場)에 몸담고 활동한다면, 서로 존중하며 원색적인 비난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임영은 충간과 존중을 적절히 조절했다.
인정과 부드러운 충언은 정치 품격을 높이는 필수 조건이다. 아주 높지 않더라도 품격이 일정 수준을 유지되는 정치가 이루어지면 백성들의 삶은 편안해진다. 품격이 살아 있는 장(場). 학문과 정치의 대선배에게 임영은 이것을 정중히 주문했다. <도움 받은 글들>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한국고문서자료관, https://archive.aks.ac.kr 박석무(2007), 우국의 지도자 창계 임영의 삶과 사상 下, 『경향신문』 2007년 10월 19일, https://www.khan.co.kr/, 검색일 2024년 2월 28일. 이영호(2020), 「창계 임영의 因文入道論 고찰」, 『민족문화』 56, 한국고전번역원. 박래호(2001), 「창계 임영 선생의 생애와 사상」, 『향토문화』 21, 향토문화개발협의회. 최재남(2008), 「창계 임영의 삶과 시세계」, 『한국한시작가연구』 12, 한국한시학회. 이종범(2008), 「창계 임영의 학문과 정론」, 『한국인물사연구』 9, 한국인물사연구회. 심경호(2023), 「창계의 시문과 학술에 대한 일고찰」, 『대동문화연구』 124,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노관범(2009), 「이희조의 학술 교류와 숙종대 주자학의 동향」, 『역사문화논총』 5, 역사문화연구소. 한지희(2017), 「명재 윤증의 책선지도와 붕당인식」, 『국학연구』 34, 한국국학진흥원. 한기범(2008), 「우암 송시열에 대한 후대인의 추숭과 평가」, 『한국사상과 문화』 42, 한국사상문화학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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