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남도를 빛낸 위대한 사상가·독립운동가 김영식(金泳植 1899-1930) 게시기간 : 2023-11-08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11-06 16:4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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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지난 8월 15일 광복절은 필자에게 여러모로 뜻깊었다. 개인적으로 광주광역시장으로부터 독립유공자 발굴 및 선양 사업에 공적이 있다고 ‘나라사랑유공자’ 표창장을 수상하기도 하였지만, 필자를 더 기쁘게 한 것은 목포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김영식 선생이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만난 그의 누이 김귀남(목포 정명여학교 독립운동 유공자)의 외손녀는 외조모 오라버니의 빛나는 공적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지난 3월 그의 공적을 확인하는 목포 제유공 판결문을 어렵게 발견했다. 여기에는 20여 명이 넘는 목포 제유노조원의 항일운동 사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들 가운데 박제민, 배치문을 제외하고는 김영식을 포함한 대부분이 미서훈 상태였다. 이제 목포 전위동맹을 이끌며 제유노조의 파업을 주도한 김영식의 얘기를 찾아보려 한다. 그의 삶은 극적인 요소가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장모 오라버니의 삶을 찾으려는 사위와 외조모의 한을 풀어주고자 하는 외손녀의 갸륵한 효심이 필자의 마음을 한없이 아프게 한 것도 김영식을 다루려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삶을 추적하면서 그가 단순히 노동운동가·독립운동가를 넘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위대한 사상가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은 그에 관한 연구의 시론이나 다름없다.1) 2. 목포 노동운동과 제유공 파업 이름 없는 포구에서 1897년 개항 이후 급속히 발전하여 일제강점기 3대 항구로 성장한 목포는, 부두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목포의 노동운동 전통은 개항 이후부터 계속되었으며 1924년 7월 목포 해륙노동조합 창립으로 이어졌다. 해륙노조는 지역 노조였지만, 실제로는 화물 운송노동자들이 중심이었고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객주 조합과 충돌하였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사회주의 청년 활동가들이 늘어나면서 노동운동도 활발해졌다. 목포 사회주의 전파는 광주에서 내려온 강석봉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3년 사회주의 사상 단체인 신우회가 강석봉, 김재명 등에 의해 결성되면서 학생, 청년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 3.1운동에 필요한 인쇄용지를 납품한 강석봉은 1920년대 중반 목포에 자주 와 노동자 단체에서 강연하였다. 목포에 공산주의 세포조직 야체이카가 최초로 결성된 것도 강석봉의 지도 결과였다.2) 목포의 노동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한 전위동맹이 주도했다. 전위동맹은 일본에서 귀국한 김영식이 직업별 노조를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첫 단계로 1925년 9월 초 노동자 실태를 조사했다. 9월 24일 전위동맹 구성원들은 목포청년회관에서 노동자 간담회를 개최했다. 참가자들은 목포에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조합 창립 준비회를 결성했다. 직업별로 나누어 자유노동부, 정미부, 면업부, 제유부(製油部), 기타로 조직을 구성하고 위원을 선정했으며 각 부 별로 조합을 창립하도록 했다. 제유공 노동조합이 9월 27일 목포청년회관에서 창립된 이후 9월 28일 면업노동조합, 29일 자유노동조합, 30일 정미 노동조합 등이 속속 창립되었다. 자유노동조합이 집행위원 선임을 전위동맹에 일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위동맹 관계자들이 노동조합에 이사로 참여했다. 1925년 10월 13일 8개 부문 조합과 1,770여 명이 조합원을 거느린 목포 노동총동맹이 목포청년회관에서 창립대회를 열었다. 제유공 노동조합이 9월 27일 목포청년회관에서 창립된 이후 9월 28일 면업노동조합, 29일 자유노동조합, 30일 정미 노동조합 등이 속속 창립되었다. 자유노동조합이 집행위원 선임을 전위동맹에 일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위동맹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서병인, 조극환, 배치문, 오도근 등 전위동맹 관계자들이 노동조합에 이사로 참여했다. 목포노총은 ‘대중 본위의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노동계급의 현실적 경제적 이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강령으로 삼으며, ‘무산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노동자의 전투력을 강대히’하고 ‘대중을 노동조합에 결속’하여 ‘전투적으로 교육 훈련’할 것을 목표로 했다. 목포노총은 10월 목포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위해 임금 실태를 조사하는 등 노동자 생활 개선 투쟁을 먼저 시작했다. 목포노총은 인쇄공, 목공, 토공(土工) 등 새로운 직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총동맹에 참여했다. 10월 중순 목포노총은 목포의 임금 상황을 조사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낮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에 목포자유노조는 12월 파업 투쟁에 돌입했다. 노조원들은 시내를 행진하며 단결을 과시하는 한편, 임시 총회를 열고 표준 임금을 철저히 지킬 것, 또 이를 어기는 고용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을 것을 결의했다. 자유노조의 파업에 선박 화물 노동자들도 동정 파업에 나섰다. 그 결과 목포 지역 임금이 상승하여, 목포 지역 자유노동자들의 임금은 약 50%까지 올랐다 한다. 목포 제유공 파업은 최근 필자가 발굴한 형사사건부를 통해 확인된 기소, 불기소 숫자만 42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로, 1920년대 광주 전남 지역에서 가장 대규모의 파업이었다. 조선제유주식회사의 목포 공장은 면실유를 등 식물성 기름을 만드는 공장 중에서는 최대 규모의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1926년 1월 15일 제유노동조합이 임시 총회를 열고 동맹 파업을 결의했다. 200여 명의 노조원들은 임금 인상과 12시간의 노동 시간을 10시간으로 줄일 것 등을 요구했다. 파업노동자들은 매일 제유공 노동조합 사무실에 모여 승리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투쟁 의지를 다졌다. 회사에서는 새로 노동자를 채용해 작업을 계속하려 했지만, 파업노동자들은 규찰 활동을 강화하여 대응했다. 노동자들의 단결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던 회사는 등 주변 지역에서 새로 직공을 데리고 왔다. 그러나 광주와 나주에서 새로 데려온 30명의 노동자들은 파업 투쟁을 알게 되자 공장을 빠져나와 돌아가 버렸고, 파업 노동자들이 목포역에서 이들을 환송하기도 했다. 회사는 일단 파업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한편, 이들이 목포 시내 공장에 취업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또 파업노동자들을 지원하는 목포노총이 공금을 유용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목포경찰서는 이를 빌미로 목포노총 간부들을 호출하고 장부와 서류들을 압수하여 활동을 방해했다. 2월 2일 파업노동자들은 임시 총회를 열고 회원들의 생계를 위해 행상단을 목포와 주변 지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또 2월 4일에는 파업 20일 간의 전말을 보고서로 만들어 목포 시내에 배부했다. 이들이 오래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적인 지지와 후원 덕분이었다. 목포에서는 도저히 노동자를 구할 수 없었던 회사가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데려오자, 목포 시내의 거지패가 이들을 ‘남의 밥을 뺏어 먹는 놈들’이라고 구타했다. 파업 노동자들의 행상단도 큰 환영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목포 시내와 나주, 광주, 영암, 강진, 진도, 완도 방면으로 행상단을 보냈는데, 해당 지역 노동 단체와 청년회 등의 환영을 받았다. 광주에서는 노동조합들과 광주청년회, 여자청년회 등이 연합하여 후원했다. 1926년 2월 서울청년회, 조선노동당, 경성무산청년회, 경성노동조합, 서울청년회, 경성여자청년회, 경성노동회가 위문단을 조직해 방문하고 동정금을 전달했다. 2개월 이상 파업이 계속되자 회사는 새로운 노동자를 비밀리에 모집했고, 파업 노동자와 새 노동자들 사이에 충돌이 생기기도 했다. 회사는 3월 중순 150여 명의 새로운 직공들을 한밤중에 공장으로 데리고 들어와 작업을 재개하자, 파업 노동자들은 실력행사에 나섰다. 3월 17일 파업 노동자 20여 명이 공장을 습격하여 기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노동자들도 폭행했다. 경찰이 즉각 개입하여 파업 단원 20여 명과 전위동맹의 핵심 활동가 거의 전부를 연행했다. 목포노총과 전위동맹의 배치문, 조극환, 김영식, 서병인, 임흥수 등 핵심인물들은 석 달 동안 목포형무소에 갇혀 있었고, 전위동맹원 오도근, 박제민과 공장 습격에 가담했던 노동자 10명은 기소되어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목포노총은 파업 기간 동안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지원을 계속했으며 실업자 대회, 지지 연설회를 계속 조직했다. 또 다른 단체들과 연대하여 전국적인 지원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조직원이 검거되어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다 1927년 말 시작한 목포 사회 운동의 분열로 목포노총도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목포의 노동 운동은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 건설을 시도하는 사회주의 활동가들에 의해 다시 활성화된다. 3. 위대한 사상가 김영식의 삶과 전위동맹 결성 목포 제유 노동운동의 배후 핵심 인물의 한 사람인 박제민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이 김영식이었다. 김영식은 본관 김해이고 김윤언과 이윤옥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1899년 8월 1일 목포부 남교동 13번지에서 태어났다. 박제민은 목포부 죽동 출신으로 김영식과 동갑내기였다. 박제민은 그의 여동생이 유명한 소설가 박화성이었다. 박제민은 경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김영식은 목포북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민족교육을 하는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김영식의 유일한 여동생은 김영애(본명, 김귀남)은 북교보통학교 졸업 이후 목포 정명 여학교 재학 중 1919년 4월 8일 일어난 목포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투옥된 독립운동가이다. 판결문이나 공훈록에는 김귀남으로 나와 있다. 그녀는 출옥 후 서울 배화여학교를 졸업했다. 휘문학교를 졸업한 김영식은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한 후 1925년 졸업했다. 박제민도 같이 유학하였다. 김영식은 박제민과 방학 때면 귀국하여 순회 강연회를 다녔다. 어느 해인가는 호남순회 강연할 때 윤심덕, 김우진, 채동선 등 당대를 대표하는 목포 출신 음악가들이 자선 음악회를 열어 순회강연에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이것만 보아도 당시 김영식이 유학생 사이에 차지하는 위상을 알 수 있다. 김영식은 유학 생활중 조선 유학생 학우회가 동경에서 운영한 출판사인 ‘학지광(学之光)’에서 활동하였다. 학지광은 “배움의 빛”이라는 뜻으로, 학우회보, 사상잡지의 성격을 띤 일종의 독립운동 잡지였다. 졸업 직전 ‘학지광’ 26집에 웅변부 박제민, 강사부 김영식, (박)화성 등이 임원진의 이름으로 있다. 김영식은 “사회주의 국가관의 새 경향”이라는 논문을, 박제민은 “곡3장(哭3帳)-이역에서 사라진 혼백들을 불너”라는 수필을, 박화성은 ‘화성(花城)’이라는 필명으로 “소곡(小曲) 유랑의 소녀”라는 시를 학지광 26집에 각각 기고했다. 박화성의 시는 그녀가 1914년 정명여학교 재학 중 발표한 소설을 각색한 시라고 한다. 그런데 김영식의 글이 말썽이 되어 이 잡지는 압수되었고, 결국 1930년 제30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김영식은 일본 유학 중, 방학 때마다 빠지지 않고 귀국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 활동을 하여 민중에게 민족의식을 제고하는 데 앞장섰다. 1922년 9월 5일 목포 양동교회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1923년 7월 한 달 동안 그는 조선청년회 연합회와 동아일보의 후원 아래 순회 강연단의 일원으로 강연을 하며 전국을 누볐다. 그가 강연하거나 신문에 연재한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그가 1923년 총 8회에 걸쳐 동경에서 기고를 통해 동아일보에 “민족주의의 장래”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한 사실이 주목된다. 그의 연재 글이나 강연 주제들을 보면 주제들이 하나같이 사회현상을 구조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대학 재학 중, 그리고 불과 20대 중반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이러한 주제를 선정하고 철학적이지만 이해하기 쉽게 글을 쓴다는 것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그의 두뇌가 명석하였다는 소문이 사실임이 분명하다. 그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민족주의의 장래”에서 “단순히 혈연적인 측면의 민족주의가 아닌 독립 수단으로 민족”을 내세웠다는 점이 주목된다. “인도 3억의 종족이 이유 없이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절치부심하며 경영하는 것은 자기실현을 이상하는 민족주의 즉 국민주의라고 할 수 있는 동시에, 그를 억압하여 자기 우월의 지위를 보전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영국의 그것은 제국주의적 모범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인도의 저항을 민족주의 곧 국민주의라 하였고, 영국의 억압은 제국주의 전형이라고 보았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끈질긴 저항을 단순한 민족주의 차원이 아닌 국민주의 관점으로 확대하였다는 점이다. 그가 이처럼 ‘국민주의’ 관점을 내세운 것은 이 무렵 확산되고 있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와의 갈등을 국민주의 관점에서 조화시켜 하나로 엮어내려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3) 졸업을 앞둔 1925년 1월 김영식은 동경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 일월회(一月会)에 가입하고 기관지인 사상운동 편집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졸업 후 곧 부산에서 열린 전선(全鮮)민중운동자대회에 참석하려고 조선노동총동맹 동경 대표자 신분의 가명 김웅성(金熊星)으로 입국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사회주의 관련 서적이 모두 압수되었다. 조사를 받고 풀려난 김영식은 1925년 6월 10일 목포 청년을 상대로, “역사의 대전환기에 임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고, 1925년 8월 목포에서 사상단체인 전위동맹을 결성하였다. 전위동맹은 9월 목포 무산청년회로 개편하고, 무안 노농단체와 연합한 ‘무목노동연맹’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10월 13일 목포 노동총동맹 결성을 주도하면서 집행위원이 되었다. 김영식이 목포 지역 노동운동을 이끄는 단체를 결성할 때 일본에 남아 여동생 화성의 뒷바라지하려 했던 박제민이 귀국하였다. 그가 귀국한 것은 김영식과 함께 노동운동 등 독립운동을 하고자 함이었다. 박제민은 1925년 10월 목포노동총동맹 창립총회에서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목포 노동운동의 핵심 조직인 전위동맹과 연합 노조 성격인 목포노동총동맹을 김영식과 박제민이 주도하게 되었다. 1925년 9월 결성된 목포전위동맹의 핵심은 10여 명이었다. 김영식을 비롯하여 서병인, 배치문, 박춘풍, 이고산이 핵심 동맹원이었다. 주요 회원은 오도근, 조극환, 임흥수, 박제민이었다. 4. 목포 제유공 파업과 김영식 김영식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전위동맹에는 산하에 11개 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목포제유공노동쟁의 사건은 당시 신문 표현대로, 1920년대 일제강점기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큰 직장파업 사건이었다. 현재의 목포시 해안동(당시 해안동 3정목) 소재 조선 제유 주식회사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식물성 목화 기름(면실유)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목포 제유 공장 직원 60여 명은 김영식, 박제민이 주도한 사상단체인 전위동맹과 목포노동총동맹의 도움을 받아 1925년 9월 27일 노조를 창립하였다. 이들은 1925년 10월 중순 목포 지역의 임금을 타 도시와 비교하여 파악한 결과 크게 열악하다는 사실을 알고, 1925년 11월 18일 노조 임시총회를 거쳐 1926년 1월 5일 사측에 3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첫째 노동시간 단축(12시간을 10시간으로), 둘째 평등한 대우(조선인을 차별하는 불량한 감독으로 교체), 셋째 임금 인상이었다. 이러한 요구사항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임금 통일과 표준 임금의 현실을 요구하는 목포 자유노조의 과업이 성공적이었는데, 그 배후에는 목포 노동 총동맹의 조직적인 측면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상황이 당시 판결문에 잘 나와 있다.4) “제1, 피고 윤수성, 서봉규, 박점옥, 박흥식, 손덕흥, 전봉석, 김성병, 김영준, 임이조는 목포부 해안통 3정목 조선제유주식회사에 고용되어 대정 14년 음력 8월 중 동 회사에 통근하는 조선인 노동자 백 수십 명과 함께 ‘제유노동조합’이라는 것을 조직하고 피고 윤수성은 이사장이 되었는데, 동 회사가 임금은 낮으면서 근무 시간은 지나치게 긴 것을 구실로 동 15년 1월 중 피고 윤수성 등의 주최 하에 조합회를 개최하고 동 회사에 대한 노동 임금 인상, 노동 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고 만약 수용하지 않을 시에는 동맹 태업을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동 회사에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동 조합원은 결국 동맹 태업에 들어갔는데, 회사는 태업자를 해고하고 새로이 직공을 모집하여 영업을 개시하였기 때문에 태업원은 복업할 가망이 없어지고 생활이 곤란해져 동 회사 및 새로 모집한 직공을 원망하는 마음이 싹트던 중, 동년 3월 15일 동 회사 사장 희다우장(喜多又蔵)이 목포를 방문했을 때 피고 윤수성, 박흥식 그 외 수 명은 태업단을 대표하여 동 사장에게 앞서 조합에서 합의한 결의 사항을 제언하고 복업을 요구하였으나 즉석에서 거절당하자 피고 윤수성, 서봉규 등은 보복하기로 계획하고 다음 날인 16일 밤, 동 부 남교동 동 조합 사무소 계단 위에서 피고 박점옥, 박흥식, 손덕흥, 전봉석, 김성병, 김영준, 임이조, 최준철 외 10명을 집합하게 하여 피고 윤수성은 일동에게 제유노동조합의 사전 결의 사항을 회사에 요구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이를 보복해야 하며 그 방법으로 다음 날이 17일 오전 5시 반 동 회사 직공의 교대시기를 틈타 회사에 난입하여 건조물을 파괴하고 새로 모집한 구타 방축해야 한다고 제의하고, 피고 서봉규는 앞서 이에 찬성하고 다른 피고 및 집회자도 이에 찬동하여 그날 밤 각자 동 소에서 시간이 되기를 기다려 다음 날인 17일 오전 5시경 각자 미리 준비한 빨래방망이를 휴대하고 출발하여 나아가던 중 탁주를 마시고 기세를 올려 동 5시 반 경 동 회사 정면 직공 통용문으로부터 건물 내부로 난입하여 함성을 지르며 각자 휴대한 몽둥이 또는 돌멩이를 들고 수위실, 압착공장 등의 문 유리 수십 장을 깨부수고 작업 중인 여공 김준오, 황소사를 쓰러뜨리고, 남공 한윤식, 박기선을 빨래방망이로 구타하여 4명을 3일 내지 1주간의 치료를 요하는 상해를 입힘으로써 동 회사의 사무를 일시 중지시켰고…… 제4, 피고 오도근은 대정15년 3월 중 동 부 남교동 노동총동맹 사무소에서 ‘아, 동포들이여’ 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제유회사를 태업한지 이미 2개월이 되어 그간 천여 명의 가족이 끊임없이 아사하고 있어도, 배고픔을 돌보지 않고 싸워왔는데 어떤 놈이 새로 모집한 직공 등은 태공자의 밥을 빼앗고 통근하고 있고, 회사는 우리들을 업신여기고 있지만 우리들의 밥을 빼앗은 놈, 우리를 죽인 놈들의 원한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이들이 우리들의 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말고 깊이 골수에 새기자‘ 라며. 앞서 동맹태업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제유회사 신모(新募) 직공과 태업단원 사이에 반감을 선동 유발하는 과격한 문구를 나열하고, 만일 성공하지 못하면 다시 하고 다시 하고 다시 하고 다시 하자. 우리들이 한 일이 이번 기회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합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은 실로 미친놈이라고 끝을 맺고 동월 17일 제유회사 습격과 동일한 행위를 다시 야기하고자 하는 안녕 질서를 방해하는 선전문을 저작하여 허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이를 등사판을 사용해 수 백매를 인쇄하여 동월 18일 오후 6시경 동부 죽동에서부터 온금동 욱정에 이르기까지 통행 중인 일반 노동자에게 배포하였다. ……피고 조극환, 김영식, 배치문, 박제민, 서병인, 오도근, 박흥수(박흥식의 誤記임-필자 주)가 전게 제1의 범죄에 가담했다는 혐의가 없으므로 형사소송법 제313조에 의거 처분해야 한다. 따라서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예심 종결 결정서, 대정 15년 6월 26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예심괘) 목포노동총동맹의 적극적인 지원에 고무된 목포 제유공 노조는 1926년 1월 17일 파업에 돌입했다. 170여 명 전체 직공 가운데 136명이 동조한 동맹 파업이 시작되었다. 이에 제유공장 일본인 사장은 1차로 직공 126명에게 해고통지를 하고, 2차로 사무원 20명을 해고하였다. 목포시내 업주들에게 조선제유 해고 노동자는 절대로 채용하지 말도록 요청하는 일종의 회람을 돌리는 등 강경책을 쓰면서 신규 모집 광고를 ‘사방팔방’에 붙였다. 그리고 파업 직공에게 사죄하라는 말을 하며 회유, 협박을 하자, 파업 지도부는 긴급 의총을 열고 “직공 중 조합이사의 승인 없이 회사 측에 방문하는 직공은 곧 처벌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그리고 노조 조사부원들을 공장 주위에 배치하여 엄중 감시하였다. 노조원들이 회사의 압력에 굴하지 않으면서 1개월 이상 강경한 투쟁을 하자 경성노동회에서는 목포파업 노동자들에게 후원회를 조직하여 송금을 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동정금이 쇄도했다. 당시 동아일보에 성금을 낸 단체와 개인이 나와 있다. 다음과 같다. “목포여자청년회, 자유노조, 목포목공조합, 무산청년, 김상숙, 남교동인, 완도인, 목포여자수양회, 죽동 정희, 오정옥, 유달산인, 해동” 단체와 더불어 개인들이 많이 실명으로 참여하고 있다. 일제의 무서운 감시를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목포 시민들이 공개적으로 노조의 활동을 지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 대한 후원은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는 노조가 식민지 동포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국, 회사는 파업 노동자와 싸움에 패배하고 해산되었다. 한편 제유공 노조의 파업을 배후에서 지도한 김영식, 박제민 등은 2월 25일 이를 지지, 격려하는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박제민은 “제유쟁의에 대한 경찰의 태도를 논란함”이라는 주제로 전위동맹을 대표하여 공개적으로 노조의 파업을 지지하자 3월 17일 일본 경찰은 박제민 등 노조 간부를 체포하였다. 그리고 전위동맹 간부인 김영식, 박제민, 오도근, 조극환, 서병인, 배치문, 임흥수, 그리고 파업을 주도한 윤수성, 박점옥, 서봉규, 박흥식, 전봉석 , 임이조, 김성채, 손덕흥, 최준철, 김영준 등 직공 10명이 이첩되었다. 그런데 최근 필자가 찾은 형사사건부에는 이들 외에 26명이 추가로 불기소 처분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곧 36명 직원이 기소, 불기소 처분되고 전위동맹 간부 6명이 기소된 엄청난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7월 2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열린 재판에서 검사의 구형이 있었고, 7월 19일 선고공판이 있었다. 박제민 징역 8월, 오도근 6월 금고 등 전위동맹 간부들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반면 그리고 노조원들은 박점옥 등 4명은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무죄 4명이 선고되었다. 풀려난 이들이 밤 11시 무렵 목포역에 도착했을 때 환영인파가 3천 명이었다고 당시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제유공노조의 파업 사건이 목포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박제민은 투옥 중 치아와 턱이 썩어가는 질병으로 만기일을 불과 1주일 앞두고 1927년 3월 10일 병보석으로 출소하여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때 박화성이 오빠의 병간호를 하였다. 박제민은 투옥 중 치근막염을 제때 치료받지 못해 치아 없는 장애인으로 살 다가 1942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빛나는 삶은 박화성의 작품으로 부활하였다. 5. 신간회 결성과 국외 망명 김영식은 제유 노조 파업 배후 주동 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 투옥되었다가 면소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그는 목포 노동총동맹를 중심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1927년 신간회 목포 지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27년 6월 “신여성에게”라는 시평(詩評)을 동아일보에 기고하였다. 그가 여성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목포 근우회 결성에도 관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의 사후, 친척이 부친 윤언에 보낸 편지에 ‘근우회’라는 글자가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한편 그는 강연 및 신문 연재를 통해 대중들의 의식을 제고하려 하였다. 그런데 이때 주제들은 유난히 전환기의 조선 사회를 분석하려 하고 있음이 보인다.
김영식은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신간회의 창립에 관여하였던 그로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사상 모두를 살필 필요가 있었다. 이미 사회주의 유입 초기에 이를 염두에 두고 민족주의 방향성을 살폈던 그는, 맑스 사상의 유입이 우리 사회에 대전환기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도 무조건적 수용이 아니라 우리 역사를 정확히 인식한 바탕 위에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동아일보 1927년 2월 15일자에 게재된 “전환기에 직면한 조선 신흥운동(1회)”의 다음 내용은 이를 잘 말하고 있다. “(전략) 방향 전환의 과정은 신흥계급으로서의 계급 형성 과정 중, 한 과정에서 타 과정에로의 한 과도 과정이니 고찰은 먼저 그 한 과정 즉, 우리의 종래 과정 종래 형태의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당면 과정의 구체적 특수성은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분석 비판될 것이요(하략)” 한편 그는 1927년 조선공산당 후보위원, 준비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노동운동가에서 사회주의 혁명가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1928년 2월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M.L당 사건)에 연루되고, 3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만주총국 위원이 되었다. 그가 만주총국 위원이 된 것은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활동의 무대를 만주로 옮기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 사업을 하는 도중 급성 폐결핵에 걸려 1930년 7월 6일 길림성 연길현 소재 노두 숭례향에서 요양하였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순국하였다.5) 불과 31세의 안타까운 나이였다. 목포 제유공장 파업 주동 혐의로 감옥에 갇혀 고문을 받은 후유증과 독립운동을 하며 건강을 관리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의 순국 사실은 국내 언론에 보도되면서 알려졌다. 중외일보가 7월 19일 자 “사회운동의 거성 김영식 군 서거”를 알리는 짧은 소식을 전한 데 이어, 조선일보가 그의 일대기를 담은 순국 소식을 자세히 다루었다. “조선일보 1930년 7월 25일 조선 사회운동계에서 활약하던 김영식은 일본 즉 와세다 대학 재학 당시부터 사회운동에 투신하여 당시 유학생 사상단체 일월회 주요간부로서 잡지 사상운동의 집필 동인으로 활약하였고, 졸업 귀국 후 1926년에는 사상단체 정우회의 중요 간부가 되어 조선 사회의 통일을 위하여 맹렬한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조선 노동운동의 역사상에 한획을 긋는 목포제유공파업 당시에는 그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오랫동안 철창에서 고생하였던 바 그 뒤에 와서 세칭 제3차 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1928년 중에 해외로 망명하여 일시 러시아에 체류하다가 내외로 출몰하면서 비상한 활동을 하던 중 몇 달 전부터 신변이 위험하여 다시 망명하던 도중 간도 숭례향 지방에 도착하여 병세가 더욱 악화하여 지우의 출입조차 임의롭지 못하다가 지난 7월 6일 오전 11시에 31세의 청춘을 일기로 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장의(葬儀)는 당지 유지의 손에서 사회단체 연합장으로 거행하였으며 이 부고를 접한 각지의 친지들은 도처에 추도회를 거행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출판물의 간행을 준비하는 중이라 한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김영식의 유가족이 시신을 운구할 목적으로 간도로 출발하였다고 후속 보도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 1930년 8월 2일 조선 사회 운동에 크게 활약한 김영식은 제3차 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1928년 국외로 망명하여 러시아에 체류하며 사회 운동에 맹렬히 활동하다 급성 폐결핵으로 간도 숭례향에서 사망하였다. 목포 거주 김씨의 가족들은 이 소식을 신문 보도를 통해 알고 심히 의아하게 생각하였으나 죽은 것이 사실임으로 김씨의 부친과 그의 아내가 8월 3, 4일경 김씨의 시체를 반장하여 올 목적으로 간도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한편 김영식의 순국 사실은 목포 시민들에게 큰 충격적인 뉴스였다. 역시 조선일보 1930년 8월 10일 자 보도 내용이다. “목포경찰서에서는 지난 7일 목포중학원에서 개최된 목포유학생 학우회 정기총회장에 방청하러 온 임흥수, 박제민, 김영은, 정학현 4명을 돌연 검거하고 다시 오후 10시 경에 한석순, 김용길, 김상만, 정적파 등 4명을 검거하여 고등계 중서주임(中西) 주임의 손에 직접 취조를 받았다는 데 내용은 일체 비밀에 붙여 자세히 알지 못하나 고 김영식군 추도회 준비 사건과 기타 무슨 관계 사건이 있는 듯 하다고 한다.” 목포 청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김영식 추도집회를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일본 경찰이 봉쇄하고자 주동 집단을 예비검속하고 있다. 이러한 통제가 있음에도 김영식을 추모하는 집회 또는 행사가 목포 또는 여러 지역에서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숭례향 주인6)이 그의 순국 사실을 편지로 가족에게 알려왔다. 이 편지를 받고 영식의 부친 윤언과 부인 한상숙이 간도로 간 것으로 보이나, 이미 장례를 치른 데다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국내 운구를 못하고 그곳에 모셔놓았다. 그것은 ‘故 金泳植’이라는 신위와 김영식의 사진을 걸어놓고 유족과 지인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또한 간도에 사는 김동승(지인으로 추정)이 1930년 11월 여동생 김영애(김귀남)에게 보낸 편지에 “(김영식의) 묘소에 가 보았는데 상태가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글에서 알 수 있다.7)가족과 지인들이 간단히 추모 모임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영식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8월 15일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필자는 김영식에 대한 평가는 이제 시작이라고 여긴다. 그는 독립운동가를 넘어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가 남긴 글과 삶의 발자취에서 그가 지향하고자 한 이상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그에 대한 후대인의 진정한 예우일 것이다.
1) 본 글의 작성에는, 김하림(2022, 일제강점기 목포제유 노동쟁의사건에 관한 연구-박제민, 김영식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목포의 항일운동 재조명, 목포문화원 시군역사문화자원발굴사업 학술회의 발표집)의 글과 김영식의 여동생인 독립유공자 김귀남의 외손 문지연의 구술 도움이 있었다.
2) 목포 출신으로 목포 3·1운동을 주도한 또 다른 동명이인 강석봉이 있다. 인터넷에 보면 목포 강석봉과 광주 강석봉과 혼동하여 소개한 자료들이 상당히 많다. 유의해야 한다. 3) 그의 8회에 걸친 “민족의 장래” 글은 별도의 기회를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4) 이 판결문은 필자가 지난봄 발굴한 것이다. 5) 그의 호적에는 소화 3년 곧 1928년에 사망하였다고 나와 있다. 소화 19년(1944년)에 그의 아내 한상숙이 사망 신고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호적 정리과정에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1930년 순국이 분명하다. 6) 사망 사실을 알린 편지를 보낸 이가 권영근으로 나와 있다. 7) 김동승이 누구인지 확인이 되고 있지 않으나 김영식 사후, 김귀남, 김윤언, 한정숙에게 모두 3통의 편지를 보냈다. 이 가운데 영식의 부친 김윤언에게 보낸 편지가 거의 삭아 조각조각 나 있다. 이 조각을 김귀남의 외손녀 문지연이 복원하려고 애를 썼으나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아 포기하고 말았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필자에게 사진을 보냈다. 다만 그 조각에 신간회 자매 여성 단체인 ‘근우회’ 등의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목포에서 있었던 독립운동 등 그와 관련된 여러 얘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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