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언제부터 ‘한국사’를 말할 수 있나? 그리고 ‘호남’은? 게시기간 : 2023-11-15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3-11-10 14:0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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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누가 읽겠는가? 이수광(李睟光, 1563~1629)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사관(史官)이란 관직을 설명하는 글에 “이기(李芑)가 재상이 되어 사림(士林)을 많이 죽였는데, 어떤 사람이 넌지시 그를 나무라며 ‘사필(史筆)이 두렵지 아니한가?’라고 하니, 답하기를 ‘『동국통감』을 누가 읽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만일 이 말과 같이 한다면, 악행을 행하는 자들을 징계할 바 없게 되고,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 또한 그 직권(職權)을 사용할 바가 없게 될 것이다.”1)
라고 하여 사관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한지를 말하였다. 이기(1476~1552)는 조선 명종 대에 을사사화, 양재역벽서사건 등을 통해 수많은 사류(士類)들을 죽이거나 유배 보낸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 이기에게 누군가가 “역사가 두렵지 않느냐?”라고 나무라자, 이기가 “『동국통감』을 누가 읽겠는가?”라며 우습게 여겼다는 것이다. 이수광은 사관이 제 역할을 못하면 이처럼 악행이 거리낌없이 자행된다고 하여 사관들에게 경계의 뜻을 보였다. 이런 이기의 사례는 여러 곳에서 자주 인용되곤 하였다. 예를 들면,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이 찬한 글에서 ‘무오년의 화’나 ‘기묘년 옥사’의 진상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음을 한탄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은 비록 널리 알고 통달하고 관통한 사가(史家)라고 하는 자들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읽지 않는다. 그러므로 겨우 수십 년이 지나 귀로 들을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게 되면 어질고 어리석고 간사하고 바른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 상말에, 우리나라 사람이 나쁜 일 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상심할 것이 무엇 있는가. 아무리 나쁜 일을 한들 『동국통감』을 누가 읽겠는가?’ 라고 한다. 아, 이것은 비록 희롱하는 말이긴 하나 참으로 격언이다.”2)
라 하였다. 이익이 안정복에게 답하는 글에서도 “우리들이 동국(東國)의 일을 익히지 않으므로 기탄없는 소인배들이 ‘『동국통감』을 그 누가 읽으리오?’라고 말하는데, 나쁜 짓을 하여도 후세의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3)
라고 하여 그 사례를 들고 있다. 이처럼 “『동국통감』을 누가 읽겠는가?”라는 이기의 사례는 역사를 잘 알게 하여 교훈으로 삼게 하자는 뜻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를 다시 들여다보면, “『동국통감』을 누가 읽겠는가?”라는 말에는 다른 역사책은 차치하고 『동국통감』조차도 읽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곧 『동국통감』이 그만큼 가장 기본적인 우리나라 역사책이란 뜻이다. “우리나라의 역사”하면 곧 『동국통감』을 꼽았다는 뜻이다.
2. 『동국통감』은 어떤 책인가? 1) 편찬 과정 “『동국통감』을 누가 읽겠는가?”라고 하여 거론되던 『동국통감』은 이른바 한국사 체계의 ‘원형(原型, archetype)’을 세운 대표적 사서로 꼽힌다.4) 어떤 점에서 그럴까?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였다. 고대사는 『동국사략』, 『삼국사절요』 등으로, 고려시대사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으로 마무리하였으며, 이를 합쳐 통사체계를 구성한 것이 『동국통감』이었다. 『동국통감』은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外紀),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까지를 신라기, 935년부터 고려 말까지를 고려기로 각각 수록하였다. 당초 『동국통감』의 편찬은 1458년(세조 4)에 세조가 “우리나라[본국]의 서기(書記)가 탈락되어 완전하지 못하므로, 삼국사와 고려사를 합하여 편년체(編年體)로 쓰고자 하여, 여러 서적을 널리 취하여 해를 따라[逐年] 그 아래에 모아 써 넣게” 지시하면서 시작하였다.5) 그리고 다시 5년 후인 1463년(동 9)에 “우리나라의 역사[본국사]가 착란(錯亂)하여 통일이 없으니, 내가 『동국사략』·『삼국사』·『고려사』 등의 책을 참작하여 거기에서 빼거나 보태어서 억지로라도 한 책을 만들어 이름하여 『동국통감』이라 하고, 장래에 밝게 보여주어 고열(考閱)에 편리하게 하고자 하니, 경들이 그것에 힘쓰도록 하라.”
고 하였다.6) 양성지(梁誠之)에게 편찬을 맡고, 신숙주(申叔舟)·권남(權擥)이 감수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세조는 수찬(修撰)의 착오를 살피게 하거나 편찬 절차에 관한 범례를 직접 내려주는 등 지극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성과가 없었다. 거기에는 세조의 왕권 강화 입장과 수사관(修史官)들의 유교적 명분을 내세운 신권 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잠시 멈췄다가 1466년(세조 12) 윤3월에 다시 시작했지만, 세조 년간에는 끝내 편찬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예종 대에도 다 마치지 못했고, 성종으로 넘어갔다. 1483년(성종 14) 10월에 서거정(徐居正)이 “우리나라 사람이 비록 유사(儒士)라고 일컬을지라도 본국의 사적(事蹟)에는 아득하게 알지 못하니, 만약 『동국통감』을 편찬해서 완성하면 사람들이 모두 알 것입니다”라 하면서 『동국통감』의 편찬을 청하였고, 성종은 이를 허락하였다.7) 그리고 마침내 1484년(동 15) 11월 『동국통감』을 편찬하여 올렸다. 이것이 구편 『동국통감』이다. 이에 성종은 “이 책은 진실로 만세(萬世)에 남길 만한 것”이라고 평하면서도 사론에 대해 지적하였다. 이에 서거정 등이 “사마천(司馬遷)이 논한 것을 반고(班固)가 비난하였고, 사마광(司馬光)이 논한 것을 뒷사람이 또한 비난한 자가 있었으며, 삼국 때 김부식이 논한 것을 권근이 또 비난하였는데, 신 등이 권근의 논한 것을 보니, 혹 잘못된 곳이 있었습니다. 김부식·권근 두어 사람 외에 나머지는 논평을 쓴 자가 없고, 단지 이첨(李詹)이 찬(贊) 두 편을 지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논(論)을 쓰면서 범연히 ‘사신왈(史臣曰)’이라고 일컬은 것이 하나만이 아닌데, 누구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고려 때에 논평을 쓴 이는 오직 이제현(李齊賢)뿐이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8) 이렇게 사론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는데, 어쨌든 기존 사론들만을 수록했을 뿐 새로 지은 사론은 없었다. 성종은 이에 불만을 표하고 다시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듬해인 1485년(동 16)에 새로 편찬한 『동국통감』을 올렸다. 이것이 지금 전하는 것은 신편 『동국통감』이다. 여기에는 모두 382편의 사론이 있는데, 178편은 기존 사서에서 뽑은 것이고, 나머지 204편은 찬자 자신들이 새로 써넣은 것들이었다. 나머지 204편 중 반이 넘는 118편의 사론을 최부(崔溥)가 썼다고 전해진다.9) 신편은 편찬자의 구성도 달랐다. 구편이 대부분 세조 이래의 훈신들이었다면, 신편에는 훈신계의 서거정, 이극돈(李克墩), 정효항(鄭孝恒), 이숙감(李淑瑊), 김화(金澕), 이승녕(李承寧)과 사림계의 표연말(表沿沫), 최부, 유인홍(柳仁洪) 그리고 손비장(孫比長) 등 10인이 골고루 참여하였다.10) 훈신계와 사림계의 합작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신편 『동국통감』은 훈구와 사림의 입장차를 넘어서고, 왕권의 입장까지도 담아낸 성과였다. 그런 점에서 『동국통감』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관찬(官撰) 역사서인 셈이다. 이는 또한 훈구세력의 마지막 사서이자 사림세력이 쓴 최초의 사서로 평가 받고 있다.11) 『동국통감』을 마지막으로 하여 조선초기의 관찬사서 시대는 막을 내리고 16세기 이후로는 사림학자들에 의한 사찬사서의 시대로 넘어갔다. 2) 편찬의 의미 이와 같은 『동국통감』 편찬의 첫 번째 의의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사의 기본 체계를 세웠다는 점이다. 즉 “3조선(단군·기자·위만조선)-삼한-4군(2부)-삼국-신라(문무왕 9-고려 태조 18)-고려”로 이어지는 왕조의 체계화를 세워 조선 이전의 역사를 하나의 역사, ‘한국사’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이른바 최초의 통사화 작업이라 일컬을 수 있다. 특히 ‘동국’이란 용어를 사용한 데 한국사의 체계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앞서 본 “누가 『동국통감』을 읽겠는가?”라는 사례에서 보듯이 『동국통감』은 인구에 회자되는 대표적인 사서로 자리 잡아 갔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기사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경연의 단골 소재로도 등장하고 있다.12) 『동사회강』을 쓴 임상덕도 “동방은 단군이 처음 등장하여 나라를 세웠고 기자가 문물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편년체로 서술할 수가 없다. 따라서 『동국통감』에서 삼조선, 사군, 이부, 삼한을 별도로 외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본서도 『동국통감』의 방식을 따라 동사의 처음을 신라 시조의 원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동국통감』에서) 외기로 실은 (상고시대 관련) 기록을 (그 이후 삼국시대) 나라들의 흥기하고 쇠망하는 부분에 요약된 형식으로 삽입하여 시작의 근원을 찾고 끝을 살필 수 있게 하고자 한다.”13)
라 하여 『동국통감』의 방식을 따라 동사(東史)의 처음을 신라 시조의 원년에서 시작하되, 『동국통감』에서 외기로 실은 상고시대 기록을 나라들의 흥기하고 쇠망하는 부분에 요약된 형식으로 삽입하여 시작의 근원을 찾고 끝을 살필 수 있게 하고자 한다고 하여 상고시대의 기록을 반영했음을 밝혔다. 홍여하(洪汝河, 1620~1674)는 『동국통감』을 대본으로 하여 『동국통감제강』을 편찬하였다. 비록 후세의 사가들이 『동국통감』의 부족한 점이나 입장이 다른 점들을 비판하며 따르지 않은 부분들이 있지만, 이를 바탕으로 점차 보다 나은 사서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니 그 모태는 여전히 『동국통감』이었다. 이렇게 『동국통감』은 한국사의 원형이 되었다. 3. 한국사의 원형이 만들어지기까지 – 역사동일체 인식의 형성 『동국통감』을 한국사의 원형이라 할 때 또 어떤 점이 있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한국사의 원형이란 오늘날로 이어지는 역사공동체 인식의 원형이 만들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공동체 인식은 한국사의 체계화와 연관되며, 단계적으로 진화하였다. 첫 단계는 통일신라기 “삼한=삼국” 인식에서 시작했고, 두 번째는 단군 즉 고조선까지 역사의 시원을 소급해 공유했던 고려 후기의 『삼국유사』, 『제왕운기』 단계였으며, 세 번째는 역사는 물론, 강역, 문화 등의 일체감까지 갖게 되는 단계로 조선 전기의 『동국통감』에서 완성되었다고 본다. 1) 삼한=삼국, 삼한은 아방(我邦, 우리나라)의 별칭 대한민국의 ‘한’의 연원은 삼한에 있다.14) 삼한은 우리나라의 별칭 중 하나였다. 지금 삼한은 한강 이남의 마한·진한·변한을 지칭하나, 예전에는 달랐다. 삼한은 삼국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래서 때로는 아방(我邦), 즉 우리나라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였다.15) 특히 7세기의 대당전쟁기에 들어서 삼한은 본래의 역사적 실체와는 무관하게 ‘요하(遼河) 이동 지역’ 내지는 ‘삼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치렀던 수 양제, 당 태종을 거치면서 중국측에서 먼저 그렇게 사용되었다. 중국 입장에서 전쟁의 강력한 상대였던 고구려를 삼한의 하나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삼국은 삼한이며 삼국인은 삼한인으로 구성되었다고 인식하였던 것 같다. 수·당대인이 삼국을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인종적으로 동질적인 성격을 지닌 국가군으로 이해하였음을 말해준다. 그에 따라 고구려는 삼한의 한 부분이 되었다. 나아가 668년 이후의 대당전쟁, 그리고 이어지는 당과의 대치상태 속에서 일련의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이제는 삼국민 간에도 동질성에 대한 자각이 형성되었다. 이를 ‘일통삼한(一統三韓)’으로 표현하였다. 이렇게 역사동일체의 표현으로서 ‘삼한=삼국’ 인식이 성립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백제와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도 삼한의 하나로 포함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최치원(崔致遠)은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 시중에게 올린 편지)에서 삼국을 삼한으로 인식했으며, 각각 마한=고려(고구려), 변한=백제, 진한=신라로 상정하였다. 따라서 최치원 이래 ‘삼한’은 우리나라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받아들였다. 그런 뜻에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통일을 두고 ‘삼한일통’, ‘삼한일가’ 등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신라통일기에 형성된 ‘삼한일통의식’은 후삼국기에 잠시 ‘삼한유민의식’에 가려지기도 하였으나, 고려에 의해 ‘삼한’의 재통합이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되면서 삼한일통의식은 이어졌다. 삼한을 삼국에 비정하는 오래된 인식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16) 그런 흐름은 결국 대한제국, 나아가 대한민국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졌다. 2) 단군을 한국사의 시원으로 공유 고려 전기까지 삼한=삼국의 인식이 역사공동체 형성의 토대가 되었는데 바로 그런 인식으로 인하여 역사 기록의 상한은 삼국까지에 그쳤다. 그런 인식에 변화를 초래한 계기는 몽골의 침입과 그에 대한 항쟁이었다. 30여 년에 걸친 이민족과의 전쟁, 그리고 원간섭기라는 불편한 시기를 거치면서 ‘삼한’의 수준을 넘어서는 고려인들 간의 결속을 다지려는 인식이 생겼고, 이를 묶어주는 끈으로 삼국이 한뿌리임을 내세우게 되었다. 그렇게 찾은 것이 단군·기자 등 고조선이었다. 아방 역사의 시원 즉 동일한 옛 나라[故國]로서 고조선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삼국은 고조선에서 기원하는 동일 족속의 나라로 인식하였다. 이와 같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넓게 퍼져나갔다. 이 시기의 고난과 현실적 위기의식 속에서 형성된 새로운 역사인식은 몽골 지배기 초에 저술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속에 반영되어 나타났다.17) 모두 우리 역사의 시원을 단군조선에 설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고대사 체계는 단군조선을 천손인 단군이 세운 최초의 국가로 파악하고 이를 위만조선과 마한이 병렬적으로 계승하는 것으로 보았다. 최치원의 말과 『삼국사기』를 따라 마한을 고구려로 보았고, 변한에서 백제로, 그리고 진한에서 신라로 계승되는 체계를 제시하였다. 기자에 관한 기록을 덧붙이면서도 기자조선을 따로 설정하지는 않았다. 이렇듯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확실해졌지만 전체적인 상고사체계는 아직 정연치 못하였다. 사서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오면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를 1,460언(言)으로 밝히고 있다. “요동에 따로 하나의 천하[乾坤]가 있었으니”로 시작하여 중국과는 다른, 소중화로 불린, 동국의 역사가 있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처음에 누가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열었는가”라고 물으며 그 답으로 “석제(釋帝)의 자손으로 이름은 단군”을 꼽았다. 이어서 기자를 후조선의 시조로 세웠고, 기자의 유풍(遺風)이 아름답고 도탑게 전하였다고 하여 기자조선을 높였다. 이렇듯 단군조선–후(기자)조선-위만조선-사군-삼한–삼국-고려로 이어지는 체계를 세웠다. 그 연원이 모두 단군으로부터 이어진 것으로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삼한인은 모두 한 뿌리를 갖는 동일체로 인식한다. 이는 조선에 그대로 이어져 “조선의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라는 인식으로 자리잡았다.18) 이런 이원적 역사인식체계는 단군은 조선개국의 시조[肇國之主]로서, 기자는 그 유풍(遺風)을 전해준 시조[東國風敎之所自]로 이어졌다.19) 3) 우리 역사 전체를 담는 그릇, 동국 : 왕조, 강역, 문화의 일체화 한국사의 원형을 담는 나라의 별칭이 새롭게 나타났다. 바로 ‘동국’이다. ‘동국’이란 개념을 담은 역사서는 『제왕운기』에서 단초가 마련되었고, 『동국사략』을 거쳐 『동국통감』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으로는 ‘삼한’ 이외에도 ‘동국’·‘해동(海東)’·‘대동(大東)’·‘진국(震國)’·‘진역(震域)’·‘진단(震檀)20)’·‘청구(靑丘)’21) 등이 있었다. 이들 명칭은 대개 중국의 동쪽나라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동’은 물론이고, ‘진’, ‘청’ 등도 모두 동쪽을 뜻한다. 조선(朝鮮)의 ‘조’도 ‘동’의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22) 따라서 ‘동국’이란 칭호가 우리나라의 별칭으로는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국’이란 명칭은 언제부터 쓰였을까? 고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으며, 고려 때 사용된 경우는 ‘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23) 등 동전의 이름에서 보인다. 『고려사』의 기록에도 ‘동국’이란 명칭이 나오긴 하나 대부분 중국과의 외교관계에서 나온 사례들로 중국의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정도의 의미였다. 고려 때 기록으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년)이다. 『제왕운기』를 바치는 표문[帝王韻紀進呈引表]에서 “중국[中朝]은 반고(盤古)로부터 금국(金國)에 이르기까지, 동국(東國)은 단군으로부터 우리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처음 일어나게 된 근원을 책[簡牘]에서 다 찾아보아 같고 다른 것을 비교하여 요점을 취하고 읊조림에 따라 장(章)을 이루었습니다.”
라 하였다. “동국은 단군으로부터 우리 본조에 이르기까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말할 때 ‘동국’이라 하였다. 그리고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를 밝히는 것이 저술의 목적이었듯이 ‘동국’은 우리 역사 전체를 담는 그릇이었다. 1454년(단종 2) 10월 인쇄 발간된 『고려사』의 편수자인 정인지가 쓴 「지리지」 서문에는 고려 성종 대에 경내(境內)를 10도(道로) 정비했다는 기사에 이어서, 이렇게 함으로써 “동국 지리의 융성함이 여기서 극치를 이루었다”라고 썼고,24) 또 「여복지(輿服志)」 서문에는 “동국은 삼한 때부터 의장(儀章)과 복식에서 토풍(土風)을 따랐다”라고 썼다.25) 『제왕운기』가 나올 즈음 ‘동국’이란 용어에 역사동일체 인식을 담기 시작하였고, 조선왕조에 들어오면 정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국사략』을 거쳐 『동국통감』이 나오면서 ‘동국’은 우리나라의 역사 전체를 담는 그릇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때를 즈음해서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통사 체제가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상고시대부터 뿌리를 함께 했고, 이를 ‘동국’이란 이름 안에 담는 인식은 그 후 정식화한다. 성호 이익은 삼한의 정통에 대해 논한 글26)에서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과 서로 역사의 전개를 같이한다”로 시작했는데 이는 곧 우리 역사가 단군부터 시작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그의 제자인 안정복이 “만일 우리나라 역사책[동사]을 다시 편찬할 사람이 있다면 상고시대부터 고려말까지를 묶어서 한 책을 이루고 『강목(綱目)』의 예에 의하여 이름을 『동사강목(東史綱目)』이라 하여 한 나라의 문헌이 전해지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27)
라 하여 그 뜻을 잇고 있다. 즉 동사는 상고시대, 즉 단군·기자조선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으며, 그런 역사를 동사 즉 동국의 역사라고 이름하였다. 조선 후기 사서들의 기본 명칭에 대부분 동국의 역사라는 뜻을 담아서 『동사찬요』, 『동사회강』, 『동사강목』, 『동사』 또는 『해동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음도 이런 현상을 반영한다. 4. 『동국통감』이 나올 즈음, 전통 한국의 원형도 정립 “성정(性情)28)이 서로 비슷하고 연원(淵源)이 이어지니 사람들[氣類]의 느낌이 산이나 강에 의해 나누어지지 않는다[性情所近 淵源所自 氣類之感 不以山河間之].”29)
어떤 권역 내에서 성정이 서로 비슷하고 연원이 이어지면 그 안의 사람들이 갖는 정서는 산이나 강 등의 자연지형 때문에 서로 갈라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연원 즉 역사의 뿌리가 이어지고, 강역을 같이 하며, 나아가 성정까지 같이 한다면, 바로 일체감이 형성된다는 뜻이다. 그런 일체감의 핵심 요소인 역사의 원형은 조선 전기의 『동국통감』에서 마련된 것으로 본다. 우리는 대체로 조선 전기의 세종·세조·성종 년간에 조선다움의 원형이 성립된 것으로 본다. 이때의 조선다움이란 단지 조선왕조만에 한정하지 않는다. 결국 한국 전통의 원형 같은 것을 뜻한다. 어떤 점들이 있어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훈민정음의 창제를 첫손에 꼽을 수 있다. 말과 글이 일치하는 생활을 하게 함으로써 민중문화의 폭을 넓고 다양하게 해주었고, 고유한 문자를 가짐으로써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바탕을 이루었다. 지금도 한글은 한류의 상징으로 한국다움의 토대를 이룬다. 또 독자적 본국력인 『칠정산내편』의 편찬, 『제가역상법(諸家曆象集)』의 발간, 앙부일구, 보루각 자격루 등 의표 창제를 통해 조선에 맞는 시간의 통일을 가져다 주었다. 또 『농사직설(農事直說)』,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세종실록지리지』 등도 발간되었다. 이른바 풍토부동론(風土不同論)에 따라 “각각 그 처해 있는 바를 따라 편안하게 할 것이요 억지로 똑같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30)는 정서를 만들었다. 이런 성과들을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성정’을 같이 할 다방면의 토대들이 마련되었다. 또 4군 6진의 개척으로 사실상 오늘날과 같은 국가의 경계가 확정되었다는 점에서 강역의 정형이 이루어진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조종(祖宗) 성헌(成憲)으로서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도 완성되었다. 이런 법전이 편찬되었다는 것은 그 시점에 들어서 조선의 정치는 물론 경제와 사회에 관한 기본체제가 모두 확립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경국대전』이 조종의 성헌이 되었듯이 같은 시기에 완성된 『동국통감』도 동사(東史)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국조오례의』, 『동문선』 등도 이때 발간하였다. 이와 더불어 조선 개국 후 수도를 개경에서 서울로 옮겼다. 서울은 국토의 중앙에 있어서 삼국 모두가 역사의 흔적을 남겼다. 이로써 공간적으로도 삼국분립의식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남북의 영토와 주민, 그 문화를 균형있게 포용함으로써 일체성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는 곧 한국의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5. 『동국통감』이 나올 즈음에 ‘호남’ 정서의 원형도 형성되었다. 1) 호남은 언제부터 호남이었나? ‘전라도’라는 명칭은 고려 때인 1018년(현종 9)에 처음 나타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팔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는 단지 행정구역의 명칭일 뿐이다. 그보다 정체성 등의 단어에 걸맞게 정서적으로 구분되는 칭호는 ‘호남’이란 별칭이다. ‘호남’이란 말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나? 『고려사』에는 그런 말이 아예 없다. 『조선왕조실록』중 『세종실록』에 처음으로 한 번 나온다. 즉 1447년(세종 29) 집현전 교리 하위지(河緯地)의 상서(上書)에 처음으로 나온다. 그 후 『세조실록』에 2건, 『성종실록』에 4건 등 아주 드물게 나온다. 성종대 기사 중 호남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 사신의 논평에 영광군수 기찬(奇禶), 익산군수 이계통(李季通)과 김제군수 최반(崔潘) 등이 모두 문과 출신으로 대간(臺諫)을 역임하였으나, 하루아침에 외리(外吏)가 되고서는 염치없이 탐학을 자행하였다고 비난하며, “사람들이 이들을 가리켜 호남 삼걸(湖南三傑)이라 하였고, 또 기찬은 삼절 중의 으뜸이었다”라고 기술하였다.31) 여기에서 ‘호남 삼걸’이라 하여 ‘전라도’ 대신 ‘호남’이란 표현을 쓴 것은 이때 호남이 지역의 별칭으로서 자리 잡아 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16세기 『중종실록』(재위 1506∼1544)부터는 ‘호남’이란 호칭이 흔해진다. “남방의 삼도(三道)는 천부(天府)의 땅인데 호남 일대는 더욱 부유한 곳입니다”32)라거나 “호남과 영남은 국가의 부고(府庫)인데”라는 표현도 나온다.33) 또 “영남과 호남 두 지방은 생산이 풍부한 지방으로 인물이 살기 좋은 땅이라서 실로 우리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호남에는 황충이 날아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되었고, 영남에는 풍수의 재해로 가옥이 떠내려가고 인명이 손실되었습니다”34)는 기록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호남이란 호칭은 지역의 정체성을 담는 별칭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영남’이란 말도 ‘호남’과 병칭으로 사용될 만큼 익숙하게 자리 잡았다. 세조 이후 성종(재위 1469∼1494), 중종을 거치면서 등장하는 ‘호남’이란 별칭은 이제 전라도가 단지 행정구역상 구분되는 곳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구분되는 지역성을 갖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오늘날로 이어지는 ‘호남’ 운운함도 이때의 별칭에서 찾아야 한다. 2) 호남의 정서적 특징은? 왜 이때 행정구역들이 정서적 의미를 띄는 별칭을 갖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자리 잡은 호남의 정서적 특징은 무엇일까? 16세기 전후한 시기에 정치적으로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훈구와 대립하고 이를 대체해 가면서 향촌사회에서 이른바 사족지배체제를 정립해 나갔다. 전국적으로 지역사회가 성장하고 지역문화가 형성되면서 사림의 영향력은 커갔다. 이에 따라 군·현 단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였고, 그 결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각종 읍지(邑誌)가 편찬되었다. 군·현이 지역인식의 기본 단위가 되었으며 단순한 행정 단위에서 벗어나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닌 생활권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은 군·현의 지역정체성을 토대로 도(道) 단위의 정체성으로 이어졌다. ‘도’를 하나의 역사문화적 단위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에 들어 와서이며 이러한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도’ 별칭들의 탄생이었다. 조선시대에 경기도는 기전(畿甸), 강원도는 관동·영동, 충청도는 호서, 전라도는 호남, 경상도는 영남, 평안도는 관서, 황해도는 해서, 함경도는 관북을 별칭으로 각각 불렀다. 이 도의 별칭들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대체로 15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하다가 16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542년(중종 37) 7월 행 부사과(行副司果) 어득강(魚得江)이 상소에서 “신의 생각으로는, 젊고 시문에 뛰어난 사람을 가려 사절(使節)처럼 금년에는 관동 지방을, 다음해에는 영남 지방, 호남 지방, 호서 지방, 서해 지방, 관서 지방, 삭방(朔方)을 차례로 드나들면서 모두 탐방하게 하되 마음대로 실컷 유람하면서 그 기(氣)를 배양하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하면 중국 사신이 나오더라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35)
라 하여 시문에 뛰어난 젊은이들을 전국을 지역별로 유람하게 하여 지역성을 품은 기(氣)를 배양하며 역량을 키우게 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이때 팔도의 행정명 대신 전국 모두에 통틀어 별칭을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때쯤이면 지역마다 다른 기를 가진 정서가 전국적으로 분명히 자리 잡았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별칭들은 처음에는 행정 단위로서의 도(道)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다가 점차 역사·문화적 공동체로서의 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사족지배체제가 정립되어 가던 이때 일부 사림들은 절의를 지키기 위해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전라도를 찾아와 호남 사림, 내지 호남 사족들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절의·비판·실천정신 등 의향(義鄕)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호남이란 정서적 지역을 형성하는 주체가 되었다고 본다.36) 그 결과 16세기 중반에 들어와 전라도 일대가 ‘호남’이란 정서적 지역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37) 이는 학파로도 구분되어 호남의 정서적 맥락을 잇는 시원이 되었다.
1) 『芝峯類說』 卷4, 官職部 史官
“然頃世李芑爲相 構殺士林 人或諷之曰史筆可畏 答曰東國通鑑 誰人看得乎 余謂若如此言 則爲惡者無所懲 而爲史者亦無所用其權矣” 2) 『大東野乘』 「涪溪記聞」 3) 『順菴先生文集』 제9권, 「書」, 「정자상에게 편지를 보내다. 신축년」 4) 이 점에 대해서는 정재훈, 「실학자들의 ‘한국사’ 탐구」(『한국사 시민강좌』48, 2011.2, 일조각) 참조. 5) 『세조실록』 14권, 세조 4년(1458) 9월 12일 4번째 기사 6)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1463) 9월 5일 2번째 기사 7) 『성종실록』 159권, 성종 14년(1483) 10월 8일 1번째 기사 8) 『성종실록』 172권, 성종 15년(1484) 11월 13일 1번째 기사 9) 민병하, 「《동국통감(東國通鑑)》 해제」(『국역 동국통감』 1, 1996.1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참조. 10) 위와 같음 11) 전덕재, 「제3부 제4장 동국세년가·동국통감」(『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상), 1994. 창작과비평사), 163쪽. 12) 『숙종실록』 37권, 숙종 28년(1702) 12월 11일 2번째 기사; 『영조실록』 23권, 영조 5년(1729) 윤7월 17일 1번째 기사 외 다수 13) 『동사회강』의 「범례」 상 14) 고석규, 「대한민국 국호의 소출처, ‘한’, 그리고 ‘마한’」(2023.08.07), 한국학호남진흥원 호남학산책 [풍경의 기억] 23 참조. 15) 이 부분에 대하여는 노태돈, 「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한국사연구』38, 1982.9, 한국사연구회); 문창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삼한 연구-연구 추이와 특징을 중심으로-」(『한국고대사연구』62, 2011.6, 한국고대사학회) 등을 참조하였다. 16) 李賢惠, 「崔致遠의 歷史認識」(『明知史論』 創刊號, 1983), 14쪽. 17) 노태돈, 앞 글, 151쪽. 18)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1392) 8월 11일 경신 2번째 기사 “檀君, 東方始受命之主, 箕子, 始興敎化之君” 19) 吳澐, 『東史簒要』 「凡例」 “箕子東來事蹟 本史外紀及見於他書者 參考而備載之 欲使看此書者 開卷第一 知東國風敎之所自”; 이만열, 「17·8세기의 史書와 古代史認識」(『韓國의 歷史認識』(下), 창작과비평사, 1976), 318쪽 참조. 20) 동방에 단군의 나라라는 뜻으로, ‘진단(震檀)’이라고도 표기한다. 진(震)은 『주역(周易)』 설괘(說卦)에 나오는바, 이를 동방(東方)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진방(震方)은 동방을 뜻한다. 21) 삼국시대 이래 사용된 우리나라의 별칭으로 청(靑)은 동방을 가리키는 색으로 청구(靑丘)는 ‘동방의 나라’라는 뜻이다. 김정호가 그린 우리나라 지도를 「청구도(靑丘圖)」라고 한 것 등이 그 예이다. 22) 『星湖先生全集』 卷25, 書, 「안백순에게 답하는 편지 병자년(1756, 영조32), 答安百順 丙子」 23) 『高麗史』 卷79, 志 卷第33, 食貨, 화폐, 도평의사사에서 자섬저화고 설치를 건의하다 24) 『高麗史』 卷56, 志 卷第10, 地理, 지리 서문 25) 『高麗史』 卷72, 志 卷第26, 輿服, 여복 서문 26) 『星湖先生全集』 卷47, 雜著, 三韓正統論 27) 『順菴先生文集』 卷10, 書○東史問答, 上星湖先生書[甲戌] “若有人更編東史。自上古至麗末。合成一編。依綱目之例。名之曰東史綱目。使一方之文獻有傳。似好矣” 28) 『順菴先生文集』 卷12, 雜著, 橡軒隨筆[上] 戶牖雜錄並附 성정(性情)에 대해 “성(性)은 심(心)의 고요함이요, 정(情)은 심의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성의 발한 것이 정이 되며, 심은 성과 정을 거느리며, 그 발하는 바는 의(意)가 되고 그 지향하는 바는 지(志)가 된다” 하였다. “性心之靜也。情心之動也。故先儒曰。性之所發爲情。心統性情。其所發爲意。其所之爲志” 29) 이는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의 사적(事績)과 평전(評傳)을 집대성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1928) 서문 중 일부이다. 30) 『訓民正音解例』(62쪽)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 구만옥, 「조선왕조의 집권체제와 과학기술정책 – 조선전기 천문역산학의 정비과정을 중심으로-」(『동방학지』 124, 국학연구원, 2004), 235쪽에서 재인용. 31) 『성종실록』 181권, 성종 16년(1485) 7월 6일 3번째 기사 32) 『중종실록』 59권, 중종 22년(1527) 6월 3일 3번째 기사 33) 『중종실록』 75권, 중종 28년(1533) 6월 16일 1번째 기사 34) 『중종실록』 82권, 중종 31년(1536) 10월 1일 2번째 기사 “湖嶺二南, 財殖之豐鄕, 民物之樂土, 實我國之根本也, 而蟲隕于湖南, 民失其業, 風水于嶺南, 漂家沒人” 35) 『중종실록』 98권, 중종 37년(1542) 7월 27일 1번째 기사 36) 고석규, 「호남 역사에 대한 인식의 현황과 대책」(『歷史學硏究』59집, 호남사학회, 2015. 8.) 37) 고영진, 「한국에서 지역주의의 역사적 맥락」(『사회연구』 창간호, 광주사회조사연구소, 2000)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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