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조선시대 장학(獎學) 프로그램, 과계(科稧) 게시기간 : 2023-12-08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12-05 16:5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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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험한 용(龍)의 길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 있다. 환경이 열악하지만 극복하고 크게 성공한 사람을 가리킬 때 쓴다. 용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용은 바다나 크고 넓은 강, 검푸른 색을 띤 깊은 연못에서 나온다. 마을 앞을 지나는 좁고 얕은 ‘개천’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뒤집어 보면 물이 많거나 깊은 곳에서 용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바야흐로 대학 입시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맘때면 개천의 용이라는 말이 한번씩 꼭 나온다. 명문대 입학을 ‘용 나옴’에 비유한다. 수험생이나 부모들은 명문대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명문대라는 곳에 들어가 졸업하면 고소득의 기회가 많아지고 그 결과 행복감도 높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나 사회적 분위기가 강하기 때문이다. 성인 9948명을 대상으로 현실 생활 만족도를 조사한 한 결과에 따르면 만족도의 평균값이 31.1%였는데 이른바 상위권 대학 출신들의 만족도는 54.5%였다고 한다. 명문대 입학이 대학 졸업 후의 삶의 수준이나 만족감의 정도를 결정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명문이라고 인정받는 대학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수험생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그 역량을 더 증대시킬 수 있는 뒷받침도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 뒷받침 중 하나가 경제력이다. 곧 ‘재력’의 힘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시대이다. 오죽하면 미국 노동통계국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그 제목을 ‘교육은 돈값을 한다(Education pays)’라고 표기했으랴. 명문대 입학이 삶의 만족도, 수준 등을 향상시킨다는 보장에 대한 믿음이 강한 만큼 그에 대한 투자도 과감하다. 사교육을 위한 비용을 아낌없이 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2022년의 사교육비는 25조9538억이었다고 한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1.2%, 삼성전자 연구개발비(24조9292억원)보다 많은 금액이라고 한다. 시험 치를 학생들이 오직 공부에만 전념하고, 그 역량을 더 증대하기 위한 투자의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만 이런 고민이 있었을까? 조선시대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조선시대에 과거 합격은 출세하는 길이었다. 진사시에만 합격해도 잔치를 했고 최종 시험인 대과에 합격하면 가문은 물론 급제자가 살았던 지역의 영광으로 여겼다. 물론 벼슬길도 열렸다. 집안에서 배출한 과거 합격자를 읊어대는 것은 집안 자랑의 대표적 항목이었다. 과거 합격은 가문과 개인의 영달을 세상으로부터 공인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그러니 과거에 대한 생각을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과거 합격의 길목에는 장애물들이 수 없이 잠복해 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선 많은 것들이 투입되어야 했다. 수험생의 재능과 의지, 변함없는 꾸준한 공부와 노력 등. 그 중 경제적 지원은 빼놓을 수도 빼놓아서도 안 되는 요건이었다. 붓, 종이와 같은 학용품 값이 있어야 하고 선생님께 배우려면 교습비를 내야 한다. 서원이나 향교에서 공부하려면 먹고 자기 위해 드는 돈을 각자 낸다. 혹 친구들과 함께 복습하거나 과거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절에라도 가게 되면 또 비용이 필요하다. 과거 시험을 보려면 시험장이 있는 지역으로 가서 머물러야 하니 숙박비나 식비도 들어간다. 게다가 답안지인 시지(試紙)도 각자 준비해야 한다. 조선시대 종이는 선물 항목으로 꼽힐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임진왜란 때 광주향교의 책들이 엉망이 되자 법융이란 스님이 책지(冊紙) 90권을 바쳐 책을 만들게 했는데 이에 대한 대가로 광주목사가 스님들의 부역과 승군(僧軍)의 의무를 면제해 줄 정도였다. 종이가 귀하고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시지는 일반 종이와 달랐다. 장지를 여러 장 붙여서 특별히 제작해야 하므로 돈이 들었다. 한양에서 시험을 치른다면 상경하여 아는 이들을 두루 찾아 뵈면서 과거에 대한 소식도 듣고 청탁을 넣기도 하는데, 이때 또 선물값이 든다. 권상일은 회시를 보러 서울에 갔을 때 그 동안 여러 차례 과거 시험을 치르다 보니 많은 돈을 써서 집에 돈이 없다고 한탄했다. 장성에서 올라간 기양연은 사람들에게 인사하기 위한 비용으로 200냥을 마련해달라고 집에 부탁했다. 과거 공부 시작부터 합격까지 가는 길에 ‘돈’이 없으면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를 포기하기도 어려웠다. 진주의 재령이씨 가문에서는 ‘선비로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과거인데, 과거에 없어서 안 될 것은 재물이다.’라는 말도 했다. 과거를 포기하지 않는 일도 중요하지만 과거 합격에 ‘재력’의 뒷받침도 빼놓으면 안 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과거 준비생을 위한 프로그램, 과계(科稧) 조선의 땅끝이라 하는 곳 해남, 김해김씨 집안의 김재일(金載一)은 과거 합격을 위해 돈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집안이 대대로 부자이거나 당대에 돈을 많이 벌어 재력이 탄탄하다면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개인이 모두 부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가 생각해낸 방책은 계(稧)였다. 계는 ‘서로 돕기’를 합의하여 결성된다. 서로 조금씩 재물을 내어 모으고 불린다. 그것은 과거 합격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짊어질 경제적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그래서 김씨 집안에 ‘과계(科稧)’를 결성했다.
집이 빈한할 경우 학문에 뜻을 두지 못하고 대개 농사 짓는 일로 돌아간다.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어서 힘쓰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혹 글을 배워 가문의 명성을 이어간 사람이 있기도 하고 글을 배우지 않아 담벼락을 마주 대하게 되는 것과 같은 사람도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개 가난함과 부유함에 따라 다르거나 타고난 재주가 영민한지 아둔한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일을 일찍이 우려했지만 계획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영남의 찰방직을 얻어 약간의 재물을 마련해 계를 만들어 이름을 문학계라고 했다. 그리고 가마와 병풍을 만들어 그 임대료를 받아 계의 자원으로 삼았다. 이는 자손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이다. 돈과 곡식을 이자로 불리고, 계원의 자손 중 입학의 초기에 쓸 종이, 붓, 먹이나 글방에 들어가는 물건들이라면 모두 지급해주어라.
공부나 성공에 물질적 지원이 필수 요건임을 강조했다. 빈한하여 농사 짓는 데에 전념하느라 공부할 틈을 낼 수 없는 현실을 직시했다. 가문의 명성이 가난과 부유함에 따르는 현실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부에 몰두할 수 있게 경제적으로 지원할 재원을 마련했다. 그것을 자본으로 삼아 이자로 불리고, 가마와 병풍을 만들어 임대 수입으로 계금을 늘렸다. 오로지 과거 시험 준비하는 이들을 후원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후원하는 규정도 만들었다. 계원의 자손이 입학하게 되면 종이, 붓, 먹 등을 도와 줄 것
글방에 들어가는 물건이라면 모두 제공해 줄 것 과거에 응시하게 되면 노잣돈을 갖춰서 제공해 줄 것 강경(講經)을 업으로 삼은 사람은 양식과 찬을 주어 도울 것 시부(詩賦)에 재주가 있는 사람이 여름에 집을 떠나 절간에 머물러 살게 되면 양식과 찬을 주어 도울 것 배움의 길을 향해 발을 내딛을 때 필요한 학용품, 글방 생활에 드는 비용을 계에서 내주라고 했다. 과거를 보러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면 여비를 챙겨주는 약조도 두었다. 강경은 생원시를 겨냥하고 시부는 진사시에 응시하는 수험생이 학습했다. 둘다 과거 시험이어서 어느 것을 하든 시험 준비하는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했다. 특히 집을 떠나 절간에 머물러 공부하는 경우를 거접(居接)이라 했는데 여기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아낌없이 지원하도록 당부했다. 이른바 장학 프로그램인 셈이다.
김재일은 처음에 계 이름을 ‘문학계(文學稧)’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계의 목적이 과거 준비생 일을 지원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에 후대로 가면서 ‘과계(科契)’라고 고정한 된 듯하다. 김재일의 증손인 김용혁(金龍赫)은 서문 내용을 추가하여 계의 목적을 다시 부각했다. 우리 증조부께서 자손을 위하는 마음이 깊어 경전과 역사서를 넓게 소장하지 않으면 자손들이 현명해질 길이 없다 했고, 재화를 미리 불리지 않으면 자손들이 의지할 데가 없다고 생각하셨다. 이에 책을 많이 소장하여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이 이치를 연구하고 과거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은 공부할 만하다. 그리하여 과계를 세운 조약이 상세하고 이자가 불어나 자손 가운데 소장한 책을 읽거나 재산에 의지한 이들은 모두 여유가 있었다.
김용혁은 증조부가 과계를 세운 뜻을 더 강조하면서 영원히 이어가고자 했다.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노자에 대해 늘 부족할까 걱정한다.’고 했다. 수험생에 대한 지원이 충분하지 못할까 걱정했다. 과거에 합격하여 명성을 얻고 그 이후에 누리는 영달은 모두가 열망한다. 김용혁은 ‘여유가 있었다.’고 하면서 재물이 발휘하는 힘을 무시하지 않았다. 과계, 어려움은 가볍게 기쁨은 무겁게 조선시대 과거에 합격은 쉽지 않았고 경제적 뒷받침이 없으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과계가 김해김씨 집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구례나 보성 등지에서도 과거 준비생을 위한 과계들이 있었다. 과거 합격의 기쁨 뒤에 버티고 있는 냉혹한 현실을 잘 알았기에 아마도 과계가 생겼을 것이다. 계는 서로 돕는 상호부조의 정신을 바탕으로 삼는다. 기쁨은 함께 하면 더 커지고 고난은 나누면 가벼워진다고 한다. 과계는 이런 마음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1889년 구례 토지면에 사는 임노승(林魯升)이 자기 소유의 논을 과계(科契)에 판 명문.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움 받은 글들> 고전번역원 DB
디지털장서각 고문서자료관 https://jsg.aks.ac.kr/ 호남국학종합 DB http://db.hiks.or.kr/ 한국경제신문 www.hankyung.com/ 권수용(2013), 「간찰을 통해 본 장성 유생 기양연의 합격 과정」, 『남도문화연구』 25, 남도문화연구소. 전경목(2007), 「조선후기 지방유생들의 수학과 과거응시-권상일의 『청대일기』를 중심으로」, 『사학연구』 88, 한국사학회. 차미의(2013), 「17세기 예안 사족 김령과 과거시험」, 『국학연구』 23, 한국국학진흥원.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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