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이끈 완도 약산학교 교사 문승수(1905∼1950) 게시기간 : 2023-12-13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12-11 15: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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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역사를 공부하는 필자는 ‘역사의 진실’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지난봄, 한국학호남진흥원의 도움으로, 필자는 광주학생운동을 촉발하고 중국군 장교로 전사에 빛나는 크리크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한·중연대를 실천한 독립운동가 이경채 선생의 삶을 정리한 바 있다.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생가는 현재 광주송정역 맞은편에 쓰러져 가는 폐가로 남아 있다.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평전 자료를 모으던 중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하던 이경채 선생을 ‘일제의 밀정’이라고 의심한 동료 박OO가 일본 경찰에 진술한 자료를 발견하여 잠시 혼란에 빠졌다. 곧 그의 진술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의 심문조서인데도 그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었고, 많은 임정요원의 번지까지 포함된 주소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만약 정말 조직을 사랑하는 독립운동가라면 사실과 거짓을 교묘히 섞어 일본 경찰을 혼란스럽게 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박OO의 진술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정확하여 혹시 그가 관리하던 임시정부 자료들을 요즘으로 말하면 usb를 통째로 일본 경찰에 넘겨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의 투옥 경력이나 이후 행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확인하였더니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그에게 1996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이라는 매우 높은 등급의 훈장을 수여하였다. 남도를 빛낸 의병사령관 심남일 장군이 받은 서훈 등급이 독립장이다. 후일의 과제로 남겨 놓고 있다가 며칠 전 2019년 모 방송에 나왔던 일본 밀정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살폈더니 정말 있었다. 답답한 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상당 부분이 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받을 때의 내용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진술한 내용의 진실은 과연 믿어도 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2. 완도의 천재, 민족의식에 눈을 뜨다. 광주 동구 학동에 있는 전남대 병원 응급실 옆에 꽤 오래된 이OO내과가 있다. 이 병원 벽면에 “애국지사 문승수 선생”을 소개한 동판이 있어 오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동판의 주인공은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이 있게 한 비밀결사 성진회를 조직하고, 졸업 후 고향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항일운동을 이끌다 투옥되었고, 출옥 후에 농민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 문승수 선생이다. 동판 설명 끝에 “(선생은 이상명 내과의 친외조부이심)”이라고 적혀 있다. 곧 동판을 제작한 병원 원장은 문승수의 외손임을 알 수 있다. 이 동판을 볼 때마다, 친손자도 아닌 외손자의 갸륵한 효심에 울컥한다. 이번에 문승수 선생을 다루려 한 까닭은 이러한 외손의 효심에다, 광주학생운동의 주역, 독립운동을 이끈 교사, 항일농민운동의 선구자 등 독립운동에 끼친 그의 공적, 그러나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으로 몰려 억울하게 수장(水葬)된 비참한 최후 등 그의 삶 자체가 우리 현대사의 축소판이었기 때문이다. 문승수 선생은 완도 출신이다. 완도 소안도와 고금도는 3·1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소안도는 일제강점기 함경도 북청, 부산 동래와 더불어 우리나라 독립운동 3대 성지였다. 한 겨울임에도 소안도 사람들은 한 사람이 감옥에 갇히면 “감옥에 들어간 사람을 생각하여 이불을 덮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항쟁을 전개하였다. 현재도 태극기가 1년 365일 걸려 있는 곳으로 유명한 이 섬은 독립운동하다 투옥된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였다. 소안도가 이러한 빛나는 전통이 세워지게 된 데는 섬 주민들의 항일의지를 하나로 모았던 ‘수의위친계’라는 독립운동 조직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 결사의 영향으로 소안도, 고금도 등에서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2023년 10월 말 현재 국가보훈부 공훈록에 등재된 완도 출신 독립운동가가 89명에 달한다. 분야별로 3.1운동 7명, 학생운동 20명, 농민 노동운동 55명, 국외 7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병계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 필자는 전라남도가 광역 자치단체로서는 처음 추진한 독립운동 미서훈자 발굴작업을 총괄하면서 완도 출신 미서훈자를 56명 추가로 발굴하였다.(2023.11.15. 현재) 의병계열 5명, 3.1운동 10명, 학생운동 5명, 농민 노동운동 19명, 국외 7명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번 미서훈자 발굴과정에서 필자가 기뻤던 것은, 완도 출신으로 의병에 참여한 인물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1908년, 1909년 무렵 남도 의병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완도에서는 해상 의병들이 그들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동년(1909년) 5월 20일 약 50명의 의병부대가 전남 완도군 내면 죽청리 연안에 정박중이던 일본어선 1척을 습격하여 일본인 4명 중 1명을 총살하고 퇴거”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1) 완도에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성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치열한 항쟁이 이어졌던 데는 이러한 의병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애국계몽운동기에 김(해태) 양식을 통해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신교육에 관심이 높았던 주민들의 높은 민족의식도 한몫하였다. 1905년 세워진 사립육영학교(1911년 완도공립보통학교로 변경)를 시작으로 소안도에 개교한 사립 중화학원(사립 소안학교 전신), 노화도의 사립 영흥학교, 고금도의 사립 약산학교 등이 대표적이었다. 실제 판결문을 통해 확인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한 학교 가운데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사립학교는 사립 약산보통학교였다. 이 학교 출신 정후균, 김경태, 정병래, 정병생, 이영식, 박천세, 곽사길, 김옥도 등이 학생운동에 앞장서다 투옥된 이들이다. 약산보통학교 출신 독립운동가가 많다는 것은 이 학교에서 민족교육을 하였다는 징표이다. 1920년대 중반 이 학교에는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다 구속된 박성래·정남균·문승수 등 3명의 독립운동가 교사가 있었다. 문승수 선생은 이들 가운데 1명인 셈이다. 이제 문승수 선생의 이력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문승수 선생은 본명은 승호(升鎬)이다. 승수(升洙)는 자(字)이다, 그는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지면서 일제의 침략 야욕이 노골화된 1905년 1월 21일 완도군 군외면 대야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평생을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것도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이러한 운명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조부 통정대부 문백수는 학문이 뛰어나고 성품이 강직하였다. 부친 양준(본명 洪竜)이 그가 세 살 되던 해에 작고하여 조부 밑에서 자랐다. 그는 조부의 엄한 가르침을 받으며 꿋꿋이 자랐다. 그의 족보에 “재모과인(才謀過人)”이라고 나와 있듯이 6세부터 사서삼경을 외우고 쓸줄 알아 천재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1906년 사립육영학교로 출범한 후 1911년 공립으로 전환한 완도공립보통학교에 1918년 입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이었다. 그는 5년제 광주농업학교를 1923년 4월에 입학하여 1928년 3월에 졸업하였다. 그는 1923년 2월에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는데 1922년 한국인 보통학교 학제가 4년제에서 6년제로 전환되어 1924년 3월에 졸업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6년을 마치지 않고 졸업시험에 합격하여 5년 만인 1923년 3월 졸업하였다. 그에게 ‘신동(神童)’이라는 말이 나온 까닭이었다. 공부만을 알았던 문승수가 평생을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올바름을 가르친 조부의 교육에, 완도 출신이라는 점이 작용하였다. 완도 소안도는 독립운동의 3대 성지라고 한다. 완도는 일제강점기 치열한 독립운동 무대였다. 완도는 김(해태)를 양식해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주민이 많았다. 일찍부터 광주, 일본 등지로 유학을 떠난 이가 많았다. 하지만 이들이 신학문을 배우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눈을 떴다. 완도 출신들 유학생 대부분이 항일운동의 전면에 나선 까닭이다. 완도보통학교 2학년 진급을 목전에 둔 1919년 3월 15일 완도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있었다. 그도 당연히 시위대에 앞장섰을 것이다. 그가 2학년 진급 직후인 4월 7일 완도보통학교 학생 김우진, 차종화 등 20여 명이 모여 4월 8일 시위 계획을 세우다 발각되어 전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문승수가 직접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민족의식을 자극하는데 충분하였다. 2. 비밀 항일 결사 약진회·성진회·독서회 결성 주도 그는 실력을 기르는 것이 민족 독립의 지름길이라 여기고 이를 악물고 공부하였다. 1923년당시 전라도 수재들이 모였다는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농업학교 내내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고 한다. 5년 동안 4년 수석을 하여 광주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무렵 광주에 강석봉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신우회라는 사회주의 운동 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를 통해 학생들의 사회변혁 의식이 강화되었다. 그가 친구 강해석의 도움으로 좌익문헌을 읽는 모임인 약진회(躍進会)라는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강해석은 광주, 전남 지역의 혁신운동의 태두인 강석봉의 아우로 청년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강해석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문승수는 비밀 모임 ‘약진회’를 만들었다고 본다. ‘약진회’를 그가 결성하였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성진회 이전부터 이미 항일 학생운동조직을 결성되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진회’는 이러한 학생결사의 완성판이었다. 광주의 소문난 수재가 앞장서자 그 주위에 의식있는 학생들이 모였다. 광주학생운동을 이끈 성진회 결성에 그가 앞장섰던 것은 당연하다. 성진회와 관련 사실을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 개략적인 윤곽을 추론할 수 있다. “광주학생사건을 책동하며 지방 청년들을 망라하여 성진회의 지나온 경로를 듣건대, 대정 15년(1926년) 11월 3일에 왕재일·박인생(사망)·장재성 등 3명의 지도하에 최규창 외 13명의 중등학생이 최규창의 집에 모여 성진회를 조직하였다가 1927년 3월에 정남균의 집에서 해체를 단행한 후 11월 중순에 김태호 집에서 김복만·김재룡·류상걸·주당석·유치오·정동수·문승수 등이 모여 재조직하였다 한다.”(조선일보 1930. 10. 20) 조선일보에 개략적으로 보도된 내용을 통해 ① 왕재일·박인생·장재성 등이 처음 성진회 결성을 계획하였고, ② 여기에 문승수 등 13, 4명이 참여하였고, 조직이 노출되자 이듬해 3월 완도 출신 정남균의 집에 모여 해체를 선언했다가 그해 11월 김태호 집에서 조직을 재결성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승수가 조직 결성과 재결성에 참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때 같은 완도 출신으로 농업학교 선배인 정남균과 함께 행동하였음이 확인된다. 이때의 사정이 다음 판결문에 좀 더 상세히 나와 있다. “피고인 장재성 및 왕재일은 모두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부터 사유재산제도를 부인는 공산제 사회의 실현을 열망하고 있었는 바, 대정 15년(1926) 9월 무렵 위 2명은 사상상 공명(共鳴)하여 친교를 맺기에 이르렀고, 당시 같은 사상을 품고 있는 광주공립농업학교 5년생 박인성과 공모하여 위 고등보통학교 및 농업학교의 생도 중 같은 사상을 품고 있는 자를 규합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계획하였고, 위 피고인 왕재일의 분주(奔走)에 의해 동 피고인 장재성, 최규창, 김광용, 정우채, 임주홍, 정남균, 정동수, 문승수, 정종석, 김한필은 위의 박인성, 기타 여러 명의 사람과 함께 동년 11월 3일 무렵 광주 읍내 부동정의 최규창의 하숙집에 모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제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성진회(醒進会)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피고인 왕재일을 그 총무, 피고인 장재성을 회계, 위 박인성을 서기로 하고, 회원은 매월 제1, 제3의 토요일에 회합하여 공산주의의 연구를 하기로 협정 하였는 바, 회원 중에 이반자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소화 2년(1927년) 2, 3월 무렵 동회(同会)는 해산되었다.” 성진회의 결성과 자진 해체를 언급한 판결문 내용이다. 위에 잠깐 언급되었지만, 성진회 자진 해체 결정이 완도 출신 정남균 하숙집에서 이루어졌다. 정남균 등이 성진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곧 이 조직은 다른 형태의 비밀조직 곧 독서회로 재탄생한다. 1927년 11월 김태호의 집에서 독서회 결성을 결의하였다. 판결문에, “(김재룡이) 문승수의 권유로 사회과학연구원이 되었다”는 진술이 있다. 곧 문승수가 비밀결사 재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강해석과 함께 ‘약진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경험이 있는 문승수가 조직 재건의 책임을 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듬해인 1928년 2월 11일 광주 서방면 지용수 집에 문승수, 최규창, 임종근 등이 모였다. 문승수 등이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강해석도 참석한 이날 모임에서 졸업 후에도 사회나 교직에 나가서도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하여 철저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였다. 문승수, 임종근 등이 완도약산보통학교, 비금보통학교 교사로 나가자마자 곧장 민족 교육에 앞장선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이렇게 광주농업학교 시절 5년 동안 수석을 놓치지 않는 뛰어난 성적을 보였던 문승수는 ‘약진회’, ‘성진회’, ‘독서회’ 등의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학생독립운동의 토대를 구축한 독립운동의 영웅이었다. 그는 1928년 3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다음 달인 4월 완도 조약도에 있는 사립 약산학교의 교사로 발령났다. 완도 약산 보통학교에는 이미 그와 함께 성진회를 결성하였던 정남균이 1년 먼저 발령받아 근무하고 있었다. 사립 약산학교는 고금면 조약도 주민 800여 호가 매호에 곡물을 할당하여 거두고 해태양식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토대로 최병준이 1917년 세운 학교였다. (학교 연혁에는 1920년 개량서당이 세워졌다고 하나 1924년 당시 신문에는 세워진 지 7년 되었다고 함) 그러나 1924년 당시 교장이 회계 업무가 불투명하다 하여 주민들이 문제를 제기하여 물러나고 새로이 교장으로 신합희, 교감 박어채, 학감 김두현이 들어왔다. 교원 박성래도 이때 선발되어 들어왔다. 사립약산학교는 사실상 주민들이 세운 학교나 다름없다. 박성래 선생처럼 민족의식이 충만한 교사가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었다. 박성래는 1925년 12월, ‘지나친 감정에 의지’라는 글에서 조선을 멸망시킨 일본의 처사에 분개하고 장차 이를 회복하기 위해 아동의 각성을 촉구하는 뜻의 문서를 작성하고, 이어 1926년 1월 20일에는 ‘신년을 맞이하는 어린 친구에게’라는 제목의 문서를, 같은 해 2월 24일에는 ‘고민의 서곡’이라는 제목의 산문시 같은 문서를, 그리고 3월 무렵에는 무제(無題)로 이전과 같은 문자를 나열해 조선의 현상으로써 불합리한 사회라고 논술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분기(奮起)를 촉구하는 취지의 문서 및 ‘아들들이여 우리나라는 이러하다.’라는 제목으로 조선의 현상으로써 조선인의 생활 복리를 개의치 않는 잔인, 폭력적인 정치와 같다고 논평한 문서를 각각 저술하여 학생 교육에 활용하였다. 한편 정남균은 1927년 3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익월인 4월 약산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교사로 부임하기 이전부터 방학 때면 고향에 내려와 “농촌의 비애와 희락”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며 농촌을 순회하였고, 부임후에는 1926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현하(現下) 조선과 총독부 경제책’이라는 제목의 소위(所為) ‘산업 제1주의 또는 산미증식계획’ 이라는 의논, 기타를 논평한 글을 인쇄하여 나누어 주는 등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이처럼 약산보통학교 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을 하다가 1928년 10월 20일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져 벌금 20원의 처벌이 가해졌다. 박성래와 정남균이 약산학교에서 민족 교육에 매진하고 있을 때인 1928년 4월 문승수 역시 약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가 이 학교로 부임하게 된 데는 선배이자 동지였던 정남균의 추천에 의하였다고 추측된다. 광주학생운동 조직의 핵심 인물인 문승수는 약산학교에 부임 후에도 선, 후배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박성래, 정남균 두 선배 교사는 문승수의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1928년 10월 20일 박성래, 정남균 두 교사가 체포되었을 때 문승수의 독립운동 관계를 감추고 보호하였다. 문승수가 광주학생운동 주동 세력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시위 배후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30년 10월 27일 징역 3년 6월에 처해졌다. 미결구류일수 80일 본형에 산입되었다. 이미 1928년 벌금 20원의 처벌이 가해졌던 정남균도 성진회 관련 사실이 드러나면서 함께 구속되었다. 정남균은 징역 3년형이 가해졌다. 문승수는 정남균보다 6월이 더 많다. 광주 학생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문승수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한편 이보다 앞서 10월 20일 열렸던 검사의 구형 사실을 보도한 당시 조선일보는, 재판에 당당히 임했던 문승수 등 광주 영웅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비밀리에 일사천리로 즉일로 결심해, 성진회 공판 속보 전남 광주학생들을 지도하여 오던 장재성 외 34명에 대한 공판이 20일 오전 8시에 광주지방법원 1호 법정에서 궁원(宮元) 재판장의 주심으로 개정되어 겨우 각 피고들의 주소와 직업 등을 물은 후 입회 검사의 요구로 동 40분에 방청을 금지하고 비밀리에 사실 심리를 진행 중이라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오전 11시 20분에 5분간 휴정한 후 주식(昼食, 점심) 휴정을 하였다가 1시 30분 다시 속개하여 3시 반에 사실 심리를 마치고 구형을 시작하였다. 최고 7년 등 검사의 준열한 구형이 끝나자 35명의 피고들은 법정이 무너질만치 고성대소(高声大笑, 크게 소리를 지르며 웃음, 필자 주)하여 법원 구내에는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이때 자진 변론에 나선 김병로, 김용무, 김성호 등 제씨의 열렬한 변론은 밤 7시 40분까지 마쳤다. …” 검사의 무거운 구형이 떨어지자 오히려 ”크게 소리를 지르며 웃었다“는 사실은, 광주 학생운동 주동자들이 검사의 상식을 초월한 중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상징하고 있다. 총독부의 온갖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당당히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문승수 등은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다. 이들이 항소한 것은 단지 형량을 줄이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재판을 통해 일제의 만행과 그들의 독립 의지를 널리 알리고자 함이었다. 대구 복심법원에서 2심이 진행되었는데, 당시 문승수 등의 대구 압송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가 있다. “광주 성진회 사건의 공소(控訴, 항소의 옛칭)한 피고 중 장재성·최규창·김광용·문승수·왕재일·임종근·장석천 등 7명은 (1930년 11월) 8일 오전 5시 반 대구 착 열차로 8, 9명 경관의 호위 아래 대구로 극비밀리에 제1대로 압송되어 왔는데 정거장에 내려 경관이 자동차에 태우려 하자 보고 싶었던 대구이니 걸어가겠다고 타기를 거절하고 때마침 부슬부슬 내리는 늦은 가을 싸늘한 비에 젖어 가며 일행 7명은 대구형무소로 가고 말았다. 나머지 피고들은 뒤를 이어 날마다 7, 8명씩 압송해 오라 한다.”(동아일보 1930. 11. 11) 무려 7개월 이상 계속된 심리 끝에 대구복심법원에서 1931년 6월 13일 징역 1년형으로 형량이 줄어졌다. 3. 전남운동자협의회 결성과 농민운동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문승수는 고향 완도에 내려와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완도는 농민운동의 중심지였다. 완도와 해남 농민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일제강점기 최대의 농민운동 단체의 하나인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문승수는 전남운동협의회 산하기관인 완도군농민조합 건설위원회 재정 책임을 맡았다. 1933년 해남 북평면 성도암에서 공식 출범한 ‘전남운동협의회’는 황동윤(완도), 김홍배(해남)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1933년 8월 강진 병영 주재소 방화사건을 수사하던 일본 경찰이 전남 운동협의회의 실체를 1934년 2월 확인하면서 대규모 검거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완도, 영암, 강진, 해남, 장흥 등지에서 558명이 검거되고 335명이 불기소, 183명이 기소유예, 10명 기소중지, 9월 7일에 51명이 공판에 회부되었다. 문승수도 사건 발생 초기인 1934년 2월 체포되었다. 이들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일제는 애를 먹었다. 거의 3년 가까이 조사와 재판 끝에 1936년 12월 28일에서야 이들의 형을 확정하였다. 문승수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36년 9월 29일 결심 공판의 사실을 보도한 당시 신문 기사의 일부이다. “검거 이래 2년 반, 출정 피고 49명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공산주의 결사 전남사회운동자협의회 사건은 지난 소화 9년(1934년) 2월 중순 경에 탄로되어 장흥, 강진, 해남, 완도, 영암 등지에서 558명이 대량 검거되었고, 그 가운데 335명이 불기소, 183명이 기소유예, 10명 기소중지, 9월 7일 51명 공판회부되었다. (중략) 51명이 지난 (9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2호 법정에서 정사복경관의 삼엄한 경계하에 수백명의 방청객이 쇄도하여 방청권을 발해앟(행하)여 가족들만이 방청하게 하였다. 이날 출정 피고인 가운데 김인학, 이순주 등 2명은 병으로 출정하지 못하였고, 황동윤 외 48명이 출정하였다. 이 가운데 윤인옥은 위장병으로 매우 중태이고 그 외는 건강하였다. 피고인들은 서로 인사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재판장이 거절하고 주소, 성명 등을 묻자 이 사건의 주모자격인 김홍배가 큰소리로 어서 사건이나 속히 진행하라, 3년 만에 이 법정에서 만나는 우리 동지 일동을 인사케하라는 몸부림을 치며 떠들어 법정의 공기는 자못 긴장하였다.”(조선일보 1936. 10. 1) 조선일보에 이어진 보도 내용이다. 사건의 전체 윤곽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므로 그대로 전재한다. “당초 검거된 자 그 중에는 현직 경관과 교원 등이 참가하여 이와 같이 대량적으로 검거되었던 것은 공산 운동 사상 실로 보기 드문 일이며 이 사건의 지도 인물인 이창우는 지금 피신 중이고 검거된 김홍배는 전협 계통 인물로서 오로지 농촌청년에게 선전 운동을 하여 각 군에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고 지도기관으로 전남운동자협의회를 조직하여 총독부 당국에서 극력 주력하는 농촌진흥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그 안에 잠입 활약하는 동시에 야경단과 계(契)를 조직하여 일반 대중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도록 활동한 것과 하부조직으로부터 상부조직의 결성을 도모하고 모든 회합에는 망을 보게 하고, 산속 밀림에서 준비 공작을 하여 망년회와 신년 연회 등 명목으로 결사의 기초를 완성하여 제 3차 회의에서 8개 테제를 결정하여 군, 면, 리에 ‘블럭’ 조직을 하고 하부 기관을 이용하여 중앙 기관지로 농민 투쟁을 발간하여 각 처의 적색농민조합준비회에 배부하고 기념일마다 격문을 발간하는 등 실로 심각한 특징을 보였다” 일제는 농민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공산당 조직으로 둔갑시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을 적용하였다. 그런데 문승수 등 농민운동에 뛰어든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은, 레닌 강령을 철저히 추종한 화요회 계통보다는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던 서울회 계열의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자들이었다. 서울회계열은 해방 후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을 때 대부분 참여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광주에 들어온 박헌영계가 서울회 출신들을 체포하여 ‘반동’이라고 공격하였던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일제가 덧칠한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낙인한 “빨갱이”를 해방 전후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이용하였고,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 여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편,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문승수는 일제의 감시가 심하여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운동 전면에 나서지 않고 사업에 집중하면서 독립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완도에서 가장 큰 선박 2척을 건조하여 주민들이 생산한 김을 완도 수협에 납품하는 일을 도왔다. 완도에서 생산된 화목(火木)을 배로 목포에 판매하는 일을 도맡다시피 하였다. 이 사업을 하며 문승수는 재산을 꽤 늘렸다. 그는 축적된 부를 사익에 쓰지 않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거나 마을 주민 구휼에 오로지 사용하였다. 4. 분단의 아픔과 억울한 죽음 1945년 8월 15일 꿈에도 그리던 민족해방이 왔다. 기쁨은 순간이었다. 치열한 좌, 우 이념 대립, ‘친일’과 ‘빨갱이’로 서로 공격하는 무서운 세상이었다.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그는 좌, 우 한편에 가담하지 않았다. 후손의 증언에 따르면 문승수는 해방 직후 구성된 완도 건준에 참여하였으나 가까운 지인의 변신에 회의를 느낀 후 일체 활동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빨갱이로 공격받고 있음을 곧 알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그러한 사상을 가진 이들과 힘을 합하여 독립운동하다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된 적은 있으나 공산주의 체제를 그리워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를 좌익혐의가 있다고 하여 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승수 등 완도 보도연맹에 속한 이들은 이유 없이 1950년 7월 17일 끌려가 20일 완도 앞바다에 수장(水葬)되었다. 평생을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한 영웅의 억울한 최후였다. 시신은 물론 찾지 못하였다. 대전현충원 국립묘지의 그의 묘는, 부두에서 부친이 강제로 끌려간 것을 목격한 딸이 가져온 수장된 현장의 바닷물과 선산이 있는 대야리의 흙이 유해를 대신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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