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공모전 수상작] 피어라, 피어라, 이팝나무꽃들아! 게시기간 : 2023-09-08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9-05 14:0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원고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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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꽃이 하늘거리고 있다. 화사하게 피었던 진달래와 철쭉이 사라진 봄날의 공원. 이제 하얀 이팝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이팝나무의 하얗고 길쭉한 꽃술은 월남미(越南米)를 닮았다. 밥알 닮은 꽃, 예부터 이팝나무에 꽃이 무성하면 풍년이 들 징조라고 했다.
이팝나무 ‘흰쌀밥과 고깃국’은 민중들의 영원한 소망이다. 조선의 개국은 이러한 소망을 위한 혁명이었다. 여말, 권문 세력가들의 거센 저항을 뚫고, 조선은 토지개혁과 함께 나라를 열었다. 드디어 따끈한 김이 오르는 밥을 먹게 된 백성들은 쌀을 닮은 이팝나무꽃을 가리켜 ‘이 씨가 내려준 밥’이라며 감격했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이 꿈꿔온 민본(民本) 실현이 이팝나무꽃처럼 주렁주렁 피어난 것이었다. 조선은 과거 명멸했던 왕조와는 달리 성리학적 민본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제시했다. 이전 왕조들의 개국이 지배 계급 간의 수평 이동에 불과했다면, 조선은 고려의 권문 세도가를 몰락시키고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었던 셈이다. 가히, 조선의 개국은 혁명이었고, 위민(爲民)의 정치가 삼봉 정도전의 승리였다. 민본을 향한 정도전의 첫걸음은 전라도 땅에서 시작되었다. 우왕 1년, 삼봉은 천민 거주지였던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그는 삼 년에 걸친 유배 생활을 하면서 민중이 근본인 새 시대의 밑그림을 그렸다. 훗날 정도전은 혁명의 초안을 품에 안고 동북면의 맹주 이성계를 찾아간다. 태조 이성계 또한 전주가 본관이니, 조선과 호남의 인연은 깊다고 하겠다. 마침내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순간이 도래하고 있었다. 늦은 봄날의 햇살을 받으며, 흐늘거리는 이팝나무 아래로 길을 나섰다. 삼봉 정도전의 유배터 답사를 위해서였다.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유배지로 가는 길이 쉬울 것이라는 헤아림은 섣불렀으니, 영암 부근에서 우회하는 등 예상보다 복잡한 경로였다. 한 시간을 훌쩍 넘는 운전으로 나른해질 무렵, ‘삼봉 정도전 선생 유배지 1.2Km’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유배의 땅 호남은 버려진 모퉁이 돌이 주춧돌로 거듭날 수 있도록 유배객들을 품었다. 능주에서 사사(賜死) 당한 정암 조광조는 선비 정신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했고, 정약용, 정약전 형제의 실학 정신은 강진과 흑산도에서 꽃을 피웠다. 종두법의 선구자 지석영이 임상실험을 했던 곳도 유배지 신지도였다. 마찬가지로 정도전 또한 호남의 품에서 자신의 민본사상을 구상할 수 있었다. 정도전의 나주 유배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지식인들에게 불었던 하방(下放)운동과 흡사하다.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도 젊은 날 하방이란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의 농촌 경험이 시진핑에게는 정치적 자산이자, 지도자로서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삼봉 정도전도 누추한 거평부곡의 민중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을 배웠노라고 <삼봉집>에 고백하고 있다.
정도전 백동마을 초입에 들어섰다. 마을 회관을 지나가는데 오래된 비석이 보였다. 삼봉의 유배 내력과는 무관한 열녀비였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보니 도올 김용옥 선생이 쓴 <신소재동기(新消災洞記)>가 서 있었다. 오래전 도올 선생이 정도전의 <삼봉집>의 주해서를 출간했던 기억이 났다. 읽어보니 도올 선생 특유의 격정이 묻어있다. “고부 만석보를 터트리며 동학혁명의 기치를 올리게 만든 민중의 한, 수세(水稅)! 그 수세를 혁파하는 농민 운동으로 양명하여 젊은 나이에 나주 시장이 된 뜻있는 사나이 신정훈이 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 암, 도와주고 말고, 나는 <신소재동기>라는 글을 적어서 내려 보냈다...” 도올 선생의 <신소재동기>는 필사를 하고 싶을 만큼 명문이었다. 정도전의 흔적이 가까이 느껴졌다. 설레임으로 삼봉의 유배터로 찾아갔다. 좁은 마을 길이 논을 끼고서 뱀처럼 이어져 있었다. 걷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대나무 우거진 구릉 위에 자리한 소박한 초가집 한 채가 보였다. 정도전의 유배터였다. 유배터로 걸어가면서 그 시대를 떠올려보았다. 정도전의 유배는 우왕 1년에 벌어졌다. 친원파 권문세도가와 친명 신흥사대부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고려의 공민왕은 자신이 임명했던 개혁의 중심 신돈을 제거하지만, 이는 오히려 고려 멸망을 재촉하는 스모킹 건이 되었다. 이후 개혁의 동력을 잃은 고려는 이색 문하의 젊은 사대부들이 겨우 붙들고 있었다. 권문세가들의 전횡을 보다 못한 조준은 토지개혁 상소문에서 “불쌍한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개천과 구덩이에서 죽어가도다”라며 고발하고 있다. 당시 70~80여 가량의 권문 세력가들은 소작인들에게는 8~9할의 소작료를 뜯어가면서 자신들의 모든 부역 면제는 물론이요, 세금 한 푼 내지 않았다. 극도의 불공정, 불의에 절망한 사회는 새로운 세상을 애타게 고대하고 있었다. 1375년 정도전은 북원 사신을 마중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게 된다. 반발한 그는 실세 이인임과 경복흥에게 북원 사신의 목을 베거나 오라를 지워서 명나라로 보내겠노라며 소리쳤다. 결국 이 사건으로 삼봉은 유배를 떠나게 된다. 유배를 떠나기 직전, 경복흥의 마지막 회유마저 삼봉은 끝내 거부하고 만다. 정도전에 대한 권문세도가들의 앙심은 깊었고 결국 삼봉은 오랜 세월을 떠돌아야만 했다. 개경을 떠난 정도전은 나주에 몸을 의탁하게 된다. 유배지에 도착한 삼봉은 그곳 토박이 민중들로부터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정도전이 남긴 <소재동기>에는 지역 민중들의 따스한 인정을 실감나게 적고 있다. <답전부>에는 어느 무명씨 농부와 나눈 대화를 통한 자기 성찰의 내력과 그의 탄복할만한 유식함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거평부곡 민중들에게 받은 정도전의 감동은 컸다.
정도전 유배터 – 광주일보(자료출처) 정도전이 감동했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보다도 호남의 넓은 수용성 또는 포용력을 꼽고 싶다. 구례에 터를 잡고 사는 부산 출신 평화운동가 한 분을 알고 있다. 그는 주역 학자이자 보따리 학교를 운영했던 대안 교육자이며 평화 일꾼이다. 한때 그는 전기도 없는 깊은 산골에서 살기도 했었다. 언젠가 그는 전라도의 힘은 포용력에 있다고 평했다. 고향 부산은 자신의 대안적 삶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저 정신 나간 사람 정도로 취급했다고 했다. 반면에 전라도는 자신과 가족이 타자임에도 마을공동체로 받아주는 너른 품이 있다고 했다. 호남의 너른 포용성이란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생각해보니 전라도는 비교적 낮은 산과 너른 평야라는 개방적인 지리의 형국을 갖추고 있었다. 삼봉 정도전은 이러한 호남의 수용력에 매료되었던지, <소재동기>에서 거평부곡에서 알게 된 ‘황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동리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는데, 그중에서도 황연은 더욱 그러했다. 그의 집에는 술을 잘 빚고 황연이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술이 익으면 반드시 나를 청하여 함께 마셨다. 손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여 대접하는데 날이 오랠수록 더욱 공손했다....” “내가 찬찬하지 못하고 고지식하여, 세상의 버림을 받아 귀양살이로 멀리 와 있는데도 동리 사람들이 나를 이토록 대접하니 … 내가 한 편으로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감동이 되므로 그 시말(始末)을 적어서 나의 뜻을 표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삼봉은 김성길 형제, 떠벌이 승려 서안길, 김천부와 조송 등의 정겨운 인간미를 기록하여 남겨 두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 채, 유배터에 도착해보니, ‘삼봉 정도전 선생 유허비’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유허비 뒤로는 정도전이 머물던 초사(草舍)를 복원한 초가(草家) 한 채가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유허비에는 1988년에 삼봉의 유배터 임을 확인한 후, 2010년에 한 칸 규모로 초가와 안내판을 조성했다고 적혀 있었다. 복원된 정도전 초가집을 둘러보았다. 허술한 집은 판자를 얽어서 사립문을 내었고, 대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형태였다. 방 한 칸, 마루 한 칸이었다. 잠시 토방에 앉아 들판을 바라보니, 이곳에서 느꼈을 유배객 삼봉의 좌절과 희망을 알 것만 같았다.
중추가- 광주일보(자료출처) 토방에서 일어나 잠긴 문틈으로 방안을 엿보니 정도전의 초상이 보였다. 마루 위에는 삼봉의 <중추가>가 걸려 있었다. 서른 초반, 젊은 정도전의 아픔이 절절하게 묻어있는 글이었다. “작년 추석날 달구경 때에 화려한 자리에 가무와 해학이 있었다. 높은 마루방에 발을 걷자 밤이 낮 같고 환한 자리에는 신선들이 둘러앉았다. 취중에 달을 부르니 금동이 되어 옥호ㆍ미주에 시 백 편을 지었어라. 금년엔 멀리 회진 골짜기로 귀양 오니 초가집, 대 울타리, 거친 산 앞에 있다. 가을바람에 우수수 숲을 흔들고 쓸쓸한 물상들 얼마나 처연하던가. 이 밤에 달을 보니 더욱 서글퍼져 돌아보니 옛 친구들 연기처럼 흩어졌다. … 중 략 … 명년에는 또 어디서 달을 보게 되며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도 모르겠다. 밝은 달은 말이 없고 밤은 깊어 가는데 나 홀로 창망히 서서 원망 시를 노래한다.” - 정도전, <중추가> -
정도전이 민중에게 받은 또 다른 충격을 <답전부答田父>에서 볼 수 있다. 삼봉은 이름 모를 농부의 말에 자신의 부족함과 나갈 길을 깨우쳤다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농부가 정도전이 귀양 오게 된 이유를 물었다. 불의를 돌아보지 않고 재물에 욕심을 부리다가 얻은 죄인가? 벼슬을 위하여 권신을 가까이하고 세도에 붙다가 얻은 죄인가? 녹만 먹고 직책을 다하지 않은 죄인가? 장수가 되어 당파를 짓고 정작 외적을 만나서는 패퇴하여 국사를 그르친 죄인가? … 중략 … 그러면서 농부는 “이들 네 사람은 다 도(道)가 있는 선비였는데도 혹은 폄직(貶職: 벼슬이나 직위 따위가 낮은 자리로 떨어지거나 면직을 당함)되고 혹은 죽어서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대는 몇 가지 금기를 범하였는데도 겨우 귀양만 보내고 목숨은 보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은전이 너그러움을 알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조심하면 화를 면하게 될 것이다.”라고 깨우쳐 주었다. 삼봉은 이 농부를 은군자(隱君子)라 칭하면서 배움까지 청해보지만, 농부는 농사지어 나라에 세금을 내고 처자를 양육하는 일밖에는 알지 못한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정도전은 그를 장저(長沮)· 걸익(桀溺) 같은 사람이라며 탄복하였다. 이런 촌부의 세상을 보는 안목에 삼봉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민중은 절대 무지하지 않을뿐더러 변화의 힘이 될 수 있음을 깨닫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민중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정도전은 우왕 9년, 드디어 이성계가 있는 병영을 찾아간다. 그렇게 세상은 개벽을 맞이하게 된다. 유배지를 거닐던 중에 뭔가 아쉬움이 느껴졌다. 삼봉의 유배터 초가는 허전함과 쓸쓸함만이 가득할 뿐, 그의 민본사상을 엿보기에는 너무나 빈약했다. 나는 이곳에 정도전의 생애와 정신을 담은 소박한 기념관이라도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해거름이 내리자 백동마을을, 나는 길을 나섰다. 어두운 시대, 가장 낮은 이곳에서 빛을 밝혔던 정도전을 생각해본다. 안타깝게도 그는 재상 중심의 민본국가를 시도하다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하얀 쌀밥에 고깃국’으로 상징되는 삼봉의 정치실험은 미완으로 남게 된다. 하지만 그의 민본사상은 이후 경복궁과 세종조의 치세와 세조의 경국대전으로 이어지면서 오백 년 조선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오마이뉴스 (자료출처) 2023년 대한민국. 정도전이 나주에 유배 온 이래 칠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갈등은 여말의 혼란과 닮아있다. 광장에서 일어나는 태극기와 촛불 시민들의 대결, 날로 커져만 가는 빈부격차. 세계가 놀라워하는 기록적인 저출산율. 미. 중 패권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길을 잃은 외교와 북의 핵 위협과 일본의 재무장 등. 이런 비상한 시절이건만 국가 에너지는 갈등에 소모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호남은 혼돈의 시대마다 민족의 나갈 방향을 제시했다. 문득 충무공의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는 말이 떠오른다. 갈등에 휩싸인 이 땅에 희망을 가져다줄, 새 시대의 삼봉 정도전을 호남은 기다리고 있다. 무성하게 매달릴 이팝나무의 꽃을 다시 꿈꾸면서... 집필자 박신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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