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백년을 기약하는 이 밤에 어찌 죽음을 말하랴 게시기간 : 2023-09-11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3-09-06 14:3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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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고전 번역을 주관하는 한국고전번역원의 이전 이름은 민족문화추진회였다. 건물도 지금의 은평구 진관동이 아닌 종로구 구기동 구기터널 입구에 있었다. 이 기관은 고전 국역만이 아니라 한문국역인재 양성을 위한 부설 국역연수원도 운영한다. 20대 때에 이곳을 다니며 훌륭한 선생님들께 가르침을 받았던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행운이다. 처음 연수원에 들어갔을 때 배웠던 과목의 하나가 『소학(小學)』이다. 지금 전북 순창의 훈몽재(訓蒙齋)에 산장으로 계신 고당(古堂) 김충호(金忠浩) 선생님께서 강의를 하셨는데, 강의 중간에 소개하는 내용들이 무척 재미있었다. 혹 놓칠까봐 깨알같은 글씨로 책 여백에 적던 기억이 새롭다. 이 글에서 소개할 내용은 당시 들었던 이야기에 이후의 공부 내용을 더한 것이다. 이야기는 16세기 전반, 조선 중종대가 그 배경이다. 열심히 글을 읽으며 과거를 준비하던 스물네 살 호남 선비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열여섯 살 홍주 송씨(宋氏) 집안의 딸 덕봉(德峰)과 혼인을 한다. 북적이던 예식도 끝나고 밤이 되어 두 사람은 신혼 방에 마주 앉았다. 백년의 가약을 맺은 사이지만 어색한 분위기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신랑 유희춘은 멋쩍게 한 마디 말을 꺼낸다. “부인,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아시오?” 상식이라 할 삼종지도를 모를 리 없지만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뜻이었다. 덕봉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지요.” “그럼 한 번 말씀해 보시오.” 덕봉의 대답은 예상과 달랐다. “在家從父 適人從夫 夫老從子(집에 있을 때는 친정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늙으면 아들을 따른다)입니다” “거, 夫老從子가 아니라 夫死從子(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가 아니오?” 그러자 덕봉은 이렇게 답한다. “제가 모르는 바 아니나, 평생을 기약하는 이 밤에 어찌 죽음[死]을 말하겠습니까. 그래서 ‘늙을 老(로)’로 대신한 것입니다.” 신랑 유희춘은 부인의 기지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유희춘의 본관은 선산으로 해남 출신이다. 부친은 유계린(柳桂鄰)이고 외조부는 『표해록(漂海錄)』으로 유명한 최보(崔溥, 1454~1504)이다. 부친 유계린은 순천 출신이었으나 최보의 문인이었다가 사위가 되면서 해남에서 살았다. 최보는 김종직으로 문인으로 무오·갑자사화기에 죽음을 당했다. 유계린은 최보 아래에서 학업을 닦았고 한때 순천에 유배되었던 김굉필에게 배우기도 했다. 유희춘은 이러한 도학적 전통을 가진 집안에서 자라면서 신재 최산두(崔山斗, 1483~1536), 모재 김안국(金安國, 1478~1543) 등에게 수학했고, 장성의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도 교유하였다. 부인 송덕봉의 ‘덕봉’은 그녀의 호이다. 이름은 종개(鍾介), 자는 성중(成仲)이다. 덕봉은 담양 지역에 살던 송준(宋駿)과 어머니 함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 이인형(李仁亨)은 진주에서 살았는데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문하에 출입하였고 이 일로 인해 무오사화 때에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덕봉 역시 외가의 학술 전통이 자연스레 몸에 배어있었고 학식과 식견이 풍부했다. 유희춘은 결혼 이듬해 생원시, 별시문과에 연달아 합격한다. 이후 춘추관 기사관, 세자시강원 설서, 무장현감, 정언 등을 지낸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2년 뒤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났다. 벽서는 문정왕후와 이기(李芑) 등에 대한 비방의 내용이었다. 소윤(小尹) 세력은 이를 빌미로 잠재적 정적(政敵)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유희춘도 이 일에 연루되어 제주로 유배되었다가 고향에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鍾城)에 이배(移配)되었는데, 종성에서 거의 19년을 보냈다. 명종 말인 1565년 신원되었고 선조 즉위 후에는 사면되어 직첩을 환수받았다. 이후 대사성, 동부승지, 전라도관찰사, 홍문관부제학 등을 지냈다. 유배 중에도 학문에 열중하여 『속몽구(續蒙求)』를 집필했고, 주자학에 대한 투철한 관심은 이후의 『시서석의(詩書釋義)』, 『주자어류훈석(朱子語類訓釋)』, 『강목훈석(綱目訓釋)』 등의 저술로 이어졌다. 선조는 유희춘의 해박한 학문을 극찬하면서 경연에서 도움을 받고자 하기도 했다.
다시 유희춘과 송덕봉 두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유희춘은 평소 소탈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박람강기(博覽强記)하여 서사(書史)를 다 외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집안일에는 서툴렀고 관심도 없었다. 송덕봉은 명민(明敏)한 성격에 경전과 사서에 능했고 여사(女士)의 기풍이 있었다. 남편에게 살림살이를 알리거나 재촉하기보다는 알아서 잘 꾸려가는 성격이었다. 두 사람은 정이 두터웠다. 때로는 격의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어느 날 둘이 함께 있을 때였다. 남편 유희춘은 송덕봉을 보고 빙그레 웃더니 몇 글자를 적어갔다. “出門鼻先出”(문을 나서니 코가 먼저 나오고)
부인 송덕봉이 코가 다소 컸는데, 그것을 비유하며 놀린 것이었다. 이것을 본 송덕봉은 입을 꾹 다물고는 자신도 몇 글자를 적었다. “坐席纓掃地”(자리에 앉으니 갓끈이 땅바닥을 쓰네)
남편 유희춘은 키가 작았다. 이것을 돌려서, 자리에 앉을 때면 갓끈이 땅바닥을 쓴다고 한 것이다. 부인을 골려 주려다가 골림을 당한 꼴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깔깔 웃었다. 평소에도 둘은 시를 주고받았는데, 때로는 가족들이 시작(詩作)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전하지 않지만 유희춘은 아내의 시를 모아 『덕봉집』이라는 시집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는 벗이기도 했다. 넓은 이해의 폭을 가졌지만 따끔한 충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희춘의 허세 섞인 자랑에 송덕봉이 자중하라는 일침을 놓는가 하면, 유희춘의 담담한 고백에 송덕봉이 염려의 마음으로 감싸기도 했다. 말년에 주고받은 작품을 하나 소개한다.
<至樂吟, 示成仲>
정원의 꽃 화려해도 볼 것이 없고 악기 연주 듣기 좋아도 관심이 없네 좋은 술 고운 자태에 흥미일랑 없고 참된 맛이란 오직 서책에만 있구려 園花爛熳不須觀 絲竹鏗鏘也等閑 好酒妍姿無興味 眞腴惟在簡編間 유희춘은 공부를 최고의 재밋거리로 삼았다. 어느 날 그런 마음을 노래한 시를 덕봉에게 보였다. 울긋불긋한 정원의 꽃, 귓가에 일렁이는 음악 소리, 그리고 향기로운 술이며 아름다운 여인. 세상에서 즐거움으로 삼는 것들이지만 자신은 손때 묻은 책 속에서 참된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이다. 학문에 열심인 남편을 추켜세울 만도 하지만, 덕봉은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次韻>
봄바람에 아름다운 경치 예로부터 감상했고 달 아래 거문고 연주 또한 하나의 한가로움 술 역시 근심 잊고 정 넘치게 하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서책에만 빠져있으신지 春風佳景古來觀 月下彈琴亦一閑 酒又忘憂情浩浩 君何偏癖簡編間 송덕봉의 마음은 이랬던 것 같다. “선비가 책을 읽는 것은 중하고 중하지요. 그렇지만 책에만 매몰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으니 고개 들어 주위를 둘러보시지요. 좋은 풍광 속에 술 한 잔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공부 밖으로 제쳐 둔 것들을 다시 공부의 테두리에 담아 상대를 다독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삶에서 가장 큰 시련은 함경도 종성 유배였다. 유희춘이 26세(1547년) 때에 종성에 가자 송덕봉은 고향에서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림을 꾸려갔다. 1558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송덕봉은 삼년상(三年喪)을 치른 후 먼 북단의 종성을 찾아간다. 걷고 걸어 드디어 마천령에 이르니
동해는 끝이 없이 거울처럼 잔잔하네 만 리 길의 부인이 무슨 일로 이르렀는가 삼종의 의리 중요하고 이 한 몸 가벼워서라네 行行遂至磨天嶺 東海無涯鏡面平 萬里婦人何事到 三從義重一身輕 종성에 가려면 마천령(摩天嶺)을 넘어야 한다. 마천령은 함경남도 단천과 함경북도 김책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고개 마루에서 손을 뻗으면 하늘에 닿을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천령을 넘던 덕봉은 잠시 쉬며 가쁜 숨을 내쉰다. 순간 툭 트인 동해가 눈에 들어왔다. 만 리나 되는 머나먼 길, 나를 여기에 이끈 것은 무엇인가. 순간 혼례를 치뤘던 그 날의 밤이 생각났다. 어색함 속에 주고받던 ‘삼종지도’라는 말. 그 안의 끈끈한 믿음이 오늘의 이 길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닌가. 덕봉은 첫날밤에 ‘죽음[死]’ 대신 ‘늙음[老]’을 말했던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유희춘은 ‘적인종부(適人從夫)’의 ‘從(종)’을 상호적 가치로 여기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전통시대의 가정이 엄숙주의적인 분위기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장면은 이러한 선입견의 적용을 어렵게 한다. 쾌활한 생활 모습과 온기있는 정(情)의 나눔. 관념의 유학을 넘어 그러한 현장성의 포착과 발굴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글쓴이 김창호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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