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노비 ‘찾기’ 기록들 게시기간 : 2023-09-13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9-11 10:0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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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심(推尋)은 간단히 말하면 ‘찾기’이다. 사전에 ‘찾아내어 갖거나 받아냄’이라고 풀이하였다. 추심이란 단어는 특히 경제와 관련된 영역에서 많이 쓰인다.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찾는’ 일이다. 숨은 예금 찾기, 숨은 보험금 찾기, 잘못 냈거나 더 많이 낸 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 찾기 등의 ‘찾기’도 추심의 성격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재물을 마다할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인지 추심 행위는 조선시대에도 많았다. 노비 찾기는 가장 많이 행해진 일 중 하나였다. 부(富)를 가늠하는 잣대는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다르다. 지금은 화폐 즉 돈이 부를 재는 잣대로 쓰이지만 화폐가 잘 쓰이지 않던 시대에는 돈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있었다. 대개 땅을 많이 가진 이들은 부자였다. 조선시대도 땅이 부를 가늠하는 잣대였지만, 집안의 노비가 몇이냐에 따라 부를 가늠하기도 했다. 집안의 재력을 과시할 때 노비의 수로 증명했다. 노비는 ‘값’을 치르고 매매할 수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노비를 잘 ‘길러내고’ 잘 ‘간수’하고 잘 ‘운용’하는 등 관리를 잘하는 일은 집안 경제력을 키우는 중요한 일이었다. 노비 찾기인 노비 추심이 수없이 이루어진 것은 경제력의 확보 작업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노비 관리’를 빈틈없이 했다. 자식들에게 남기는 가훈이나 여성들을 가르치는 여훈 등의 글에서 노비 또는 종 부리는 내용을 빠뜨리지 않았다. 요지는 ‘그들이 마음으로 복종할 수 있도록 잘 대해’주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노비들이 주인의 지배 영향권에서 벗어나 도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노비 주인들인 양반들도 이에 대응해 적극적으로 ‘찾기’ 작업을 했다. 이 일에 남녀 노소를 구분하지 않았고 집안 차원에서 정보를 공유했다. 여성도 나선 ‘노비 찾기’ 유지렴(柳之濂)의 딸은 자기 이름을 달고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그녀의 남편은 신정수(申鼎受)인데 1700년에 겨우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후 유씨는 자신의 본가가 있는 광주에 와 살았지만 신씨 집안 일을 도맡아 관리했다. 남편이 진행했던 노비 찾기 일도 그녀 몫이었다. 1714년에 노비를 찾기 위해 관청에 공증을 요청하는 소지를 제출하여 서류의 정당성을 인정 받아 노비 찾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715년에는 곧바로 임금에게 올리는 상서를 썼다.
1714년에 신정수의 아내 유씨가 노비를 되찾기 위해 관청의 인증을 요청하는 소지. 남편의 증조부인 신응망이 어머니로부터 노비들을 물려받았다는 별급 문서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 쓰고 이에 대한 인증을 요청했다. 저는 옛날 조정의 신하였던 장령 신응망(申應望)의 증손 며느리입니다. …(중략)…제 남편 집안 쪽의 여종으로 도망(逃亡)친 눈썹이(婁ㄱ西非)가 경상도에 살면서 딸 내은이(안이, 內隱伊) 내은월(안월, 內隱月) 점이(占伊) 등 3구를 낳았고 그들이 낳은 이들이 300여 구에 이릅니다. 그들은 김해, 진주, 하동, 안음, 창원, 밀양, 칠원 등지에 흩어져 사는데 그렇게 된 지 100년이 되었습니다. 김해에 사는 여종 점이의 소생은 김해현의 교노비(校奴婢)로 의탁했고, 진주에 사는 여종 내은월의 소생은 그 고을의 정가(鄭哥)의 노비로 투탁했다가 충주의 이가(李哥) 노비로 투탁했습니다. 남편이 살아있었던 갑자년에 이가에게 투탁한 노비를 소송하여 찾았습니다. 정가에게 투탁한 노비에 대해서는 관에 호소하여 처결을 받아냈습니다만, 정가가 끝내 내놓지 않아서 받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남편이 죽었고, 집안에 10촌 내의 남자가 없어 다시 추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을미년에 김해부에 호소하여 추심하려고 했는데, 김해의 수령이 그 곳 사류(士流)들에게 견제 당해 추심할 수 있는 연한이 지났다고 하면서 제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조상으로부터 전해오는 노비는 연한이 없다는 것이 전교(傳敎)에 확실히 있는데 어찌 연한이 지났다고 하면서 제 말을 들어주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찾으려는 노비들은 여종 눈썹이(婁ㄱ西非/臥叱西非)가 낳은 여종과 그 후손들이었다. 이때 눈썹이의 나이는 이미 100세를 훌쩍 넘겼다. 눈썹이가 태어난 때는 1600년대이니 그녀의 딸들인 내은이 내은월 점이도 이미 100세를 넘겼을 때이다. 유씨는 노비들을 찾는 명목으로 ‘조상으로부터 전해오는 노비’임을 내세웠다. 내은이(內隱伊, 안이), 내은월(內隱月, 안월), 점이 등은 여종 눈썹이의 소생이다. 모두 신정수의 증조부인 신응망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받았다. 즉 신정수의 고조할머니가 증조부에게 준 것들이다. 1624년에 신응망이 문과에 급제했을 때 이씨는 눈썹이의 1소생인 내은이와 2소생인 내은월을 축하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1646년에 이씨는 자신이 친정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자신이 낳은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점이는 신응망의 몫으로 배당되었다. 당시 문기에 ‘여종 눈썹이(臥叱西非)의 3소생 여종 점이’라고 명기했고 점이가 병오생(丙午生)이라고 했다. 점이는 병오년인 1606년에 태어났고 신응망의 몫으로 정해졌을 당시에는 40세 정도였다. 눈썹이가 낳은 여종 셋은 모두 신응망의 소유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1669년 신응망의 후처인 정씨가 재산을 분배했는데 신응망의 전처 아들인 신익진과 자신이 낳은 딸에게 나누어주었다. 당시 신익진은 이미 죽었지만 그의 몫으로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최종적으로 신익진의 아들인 신경륜에게 돌아간 재산이리라. 그 문서에 재산을 분배하게 된 연유를 쓰고 그 말미에 ‘도망간 노비는 간 곳을 모르기 때문에 우선 몫을 분할하지 않는다. 훗날 추심한 이후에 각각 똑같이 나누어 가질 일.(平均分執)’이라고 명기했다. 이어서 죽은 신익진과 딸에게 분급하는 내역을 명기한 후 그 아래에 ‘도망친 노비 명단’인 ‘도노비질(逃奴婢秩)’ 항목을 두어 여기에다 ‘여종 눌서비(訥西非/눈썹이)가 낳은 내은이(內隱伊), 내은월(內隱月)’을 기재했다. 신응망이 눈썹이의 소생 여종을 받을 때에는 ‘도망’이라는 말이 따로 기재되지 않았다. 그런데 1669년에 작성한 재산 분급 문서에 ‘도망간 곳을 모른다.’고 했고 1669년에 신응망의 손자인 신경륜의 준호구에도 세 명의 이름에 ‘도망’이라고 표기했다. 하지만 눈썹이의 소생들은 신응망의 소유임에 틀림 없었고 그의 자손들은 이를 찾아 챙겨야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1681년 신경륜의 부인인 박씨의 호구 기록이 있는데 박씨는 신정수의 어머니이다. 이 호구에 내은이, 내은월, 점이의 이름이 나온다. 거기에는 ‘도망하여 진주에 살고 있음’이라고 분명히 썼다. 손자인 신경륜 대에 할머니 정씨의 뜻을 받들어 도망간 노비들의 거처를 지속적으로 탐지했던 노력이 보이는 대목이다. 신응망의 증손자인 신정수는 좀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내은이, 내은월, 점이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 후손들의 거주 지역이나 투탁한 상황도 파악했다. 1684년에 ‘진주노비갑자춘화명기(晉州奴婢花名記)’라는 노비 명단도 작성했다. 맨 첫줄에 눈썹이의 소생들을 쓰고 이어서 그녀들의 후손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쓰고 거주 지역이 밝혀졌으면 그 지역명까지 기록했다. 그래서 충주의 이가(李哥) 집에 있던 노비를 찾아 오기도 했다. 그런데 신정수가 젊은 나이에 죽었으므로 더 이상 노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신정수의 부인인 유씨는 남편이 죽은 후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친정 쪽인 광주로 와 살고 있었지만 신씨 집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다. 노비 찾기는 조상들이 물려준 재산 찾기였고 남편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적어도 남편이 생전에 노력했던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 일을 자기가 계속하여 결실을 맺고자 했다. 남편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신씨 집안을 유지하여 자신의 자손들에게 삶의 안정을 안겨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이 공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호소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왕에게 직접 글을 올리는 상언에는 규제가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형과 관련한 일, 적첩(嫡妾) 구분이나 양천(良賤) 등 신분의 위계 구분과 관련한 일로 한정했고 조선 후기에 와서는 ‘조부모, 남편, 형을 위한 일’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재물과 관련한 일은 엄격히 규제했다. 유씨가 노비 찾는 일은 재물을 위한 일이었다. 상언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닐 수 있었다. 대신 유씨는 ‘조상으로부터 전래한’이라는 명목을 들었다. 조상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훼손하지 않고 지키는 일은 효도로 해석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조상으로부터 전해 온 노비는 연한이 없다.’고 한 전교로써 법적 근거를 제시했다. 조상과 남편, 자식을 위해 재산을 되찾으려는 열망이 임금에게 글을 올리는 적극적 행동을 하게 만들었고, 유씨는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대대로 전해지는 도망친 노비에 대한 정보 임금에게까지 상언한 유씨의 노비 찾기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1720년에 아들 신시갑(申始甲)이 집안을 계승하여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게 되자 이 아들에게 재산을 주었다. 이 문서에서 역시 도망한 노비들을 잊지 않고 언급했다. 오래전에 도망한 노비는 몫을 나누는 데에서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 그러나 각처에 있는 노비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니, 너는 힘을 다해서 찾아서 앞으로 선조들을 위하는 큰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여라.
아들에게 재물을 분급해 주는 문서이지만 당부하는 말도 넣었다. 유씨는 이때 48세였다. 그 사이 유씨가 낳은 친아들은 모두 죽었다. 유씨는 1717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후사를 위한 입양을 추진하였다. 남편 신정수의 8촌형 신만정(申萬挺)의 둘째 아들 신용백(申龍伯)을 입양하여 후사로 삼았다. 신용백은 21세로 이미 성인이었고 신시갑으로 개명했다. 유씨는 입양한 아들에게 신정수 집안 사정을 자세하게 알릴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신정수의 아들로서 집안 차원에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부여하였다. 당부의 말 아래에 도망한 지 오래된 노비들의 이름과 정체를 나열해 놓았다. 눈썹이의 소생과 그 후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1684년에 작성한 ‘진주노비갑자화명기(晉州奴婢花名記)’의 내용과 거의 차이가 없다. 노비 찾기를 위해 노비에 대한 정보를 문서에 따로 기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그들 집안의 호구 기록에도 보인다. 이미 1669년 신정수의 아버지인 신경륜의 호구 기록에 도망했다는 말을 분명히 기록했다. 1681년과 1684년에 작성한 신경륜의 부인인 박씨 호구에도 썼고, 1687년부터 1696년까지는 신정화(申鼎和)의 준호구에 기재했다. 1702년에는 신정수의 아내인 유씨의 준호구에도 기재했는데 이때 내은이, 내은월, 점이 등은 100세를 넘긴 나이였다. 이 기록은 1759년에 작성한 신태성(申兌成)의 호구 단자에까지 지속되었다. 희망 재산, 그러나 슬픈 기록 이들의 이름은 이때부터 1759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130여 년 동안 신씨 집안의 문서와 공식 문서인 호구 기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이 도망한 노비에 속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긴 시간동안 문서에 기재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실제 내은이, 내은월, 점이의 나이는 100세가 넘어 생존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신응망의 후손들은 그 여종들이 낳은 노비들을 ‘찾아’오려고 했다. 이런 기록은 도망한 노비들이 증산한 재물을 찾아 가져오려는 후손들의 노력의 흔적일 수도 있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재물 추적과 획득의 희망을 준다. 하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대대로 노비라는 그물에 갇혀 있는 이들의 서럽고도 슬픈 처지도 배어 있다.
<도움 받은 글들> 고전번역원 DB https://db.itkc.or.kr/
김경숙(2021), 「17-18세기초 사대부가 여성의 친소(親訴)·친송(親訟) 활동 - 영광 영월신씨가 고문서를 중심으로」, 『여성과 역사』 35, 한국여성사학회. 안승준(1996), 「조선시대 사노비 추쇄와 그 실제-영주 인동장씨 소장 고문서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8(1), 한국고문서학회. 전경목(2012), 「도망노비에 대한 새로운 시선」, 『전북사학』 10, 전북사학회. 전형택(1992), 「조선후기 사노비의 추쇄」, 『역사학연구』 6, 전남사학회. 정진영(2008), 「조선후기 호적자료를 통해 본 사노비의 존재양태」,『지방사와 지방문화』 11(1), 역사문화학회. 한국고문서자료관 https://archive.aks.ac.kr/ 한국학호남진흥원(2020), 김현영·박경·박한남 편역, 『영광 영월신씨 고문서』(호남한국학자료총서5).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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