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노촌 임상덕은 왜 기자수봉설(箕子受封說)을 부정했을까? 게시기간 : 2023-09-2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9-26 09:5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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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은 있고, 기자(箕子)는 없다. 기자에 대한 역사 속 기록들은 그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역사’란 것이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자의 부침은 좀 심하다. 은(殷)나라 사람 기자가 주(周)나라 초에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내용의 전승은, 고려 중기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를 비롯한 우리 옛 문헌에서 오랫동안 예외없이 계승되어 왔다. 그래서 “기자조선의 실재(實在)를 부인하거나 의심한 기록은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단 한 건도 없다”고 단언하기도 한다.1) “조선의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라는 인식은 정설이었다.2) 그래서 “우리 동방의 예악 문물이 중국과 짝하는 것은 기자의 유풍(遺風)이 있기 때문”3)이었고, “본국에서 기자가 있는 것이 중국에서 요임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4)라고 하여 조선왕조 500년간 너무나 당연한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근대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 실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지금 교과서에서 ‘기자조선’은 사라졌다. ‘단군조선’은 교과서에서 여전히 또 당당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기자조선은 ‘기’자조차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사라졌다. 근대의 시련을 겪으면서 민족주의의 등장과 함께 단칼에 날아갔다. 그래도 되나 싶을 정도이다. 단군은 실재했나? 남한에서는 개천절이 국경일이고, 북한에서는 믿거나 말거나 단군릉이 있다. 단군의 실존 여부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5) 이는 역사적 사실과 상관없이 현재 공식적으로 정립된 단군에 대한 남북한의 인식이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는 이미 따질 문제의 차원을 넘어섰다. 학계에서도 단군은, 그 해석에 많은 편차가 있지만,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유용성 때문에 사실 자체는 따지지 않는다.
【그림 1】 평양 기자정전지 그런데 기자는 전혀 다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단군을 철통같이 우리 시조로 믿고 있는데, 같은 기록에 나오는 기자는 왜 부정하나? 왜 그렇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기자조선을 중국의 식민지인 것처럼 왜곡시킨 일본 식민주의사학에 대한 반발이란 이유가 컸다. 즉 “기자조선=식민지”라는 탈을 씌운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현실의 식민지도 싫은데 고대부터 식민지였다는 말은 더욱 듣기 싫었을 테니 쉽게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명이 멸망하고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기자를 신줏단지 붙들듯이 붙들고 있었던 그 시대의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기자조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기자가 사라진 데는 민족주의가 결정적인 몫을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옳고 그름을 떠나 ‘역사’라는 전제 위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기자조선의 역사적 실재에 대해서는 지금도 부정하는 견해들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 전통역사서에서는 기자조선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고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지금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바람직할까? 각 시대는 그 시대의 과제 해결에 적합한 해석이 필요하다. 시대가 바뀌면 이 또한 바뀌어야 한다. 물론 이랬다저랬다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는 하라는 얘기다. 변화는 꼭 있어야 하니까. 기자에 대한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여기서는 문제를 좁혀서 호남의 천재 사가(史家) 노촌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의 『동사회강』에 나타난 기자 인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6) 중국 사서들이 야기한 기자에 대한 논쟁점 기자에 대한 견해는 “원체 논란(論難)이 많은 주제”7)라 하듯이 그야말로 백가쟁명이었다. 그중에서도 논란이 되었던 쟁점은 수봉(受封)과 조주(朝周) 등의 문제였다. 즉 기자가 주(周) 무왕(武王)의 봉함을 받았는가 아닌가? 또 기자가 주 무왕과 빈주(賓主) 또는 군신관계를 맺었는가 아닌가? 이는 역사서마다 조금씩 달랐고 또 이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따라서도 달랐다. 논란거리는 중국 사서들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먼저 살펴보자. 중국 사서에서 기자는 어떻게 전승되어 왔는가? 사실상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경~기원전 86년경)의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8) ① 기자는 은나라 말기 폭군 주왕(紂王)의 제부(諸父; 숙부)로서 주왕이 사치를 즐기고, 행실이 음일(淫泆)한 것을 보고 실망하여 충고했으나 듣지 않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남의 종이 되어 숨어 살면서 거문고를 타고 괴로움을 달래고 살았다. 이때 부른 노래를 「기자조(箕子操)」라고 부른다. 또 기자는 주(紂)의 신하가 되지 않을 것을 스스로 맹세했지만 그렇다고 그 나라를 의리상 떠날 수는 없다고 말했다.
②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기자를 찾아가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묻자, 기자는 하늘이 하우(夏禹)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내려주었으니 그것에 따라 다스리라고 말했다. ③ 무왕은 기자를 조선에 봉(封)했으나 기자는 신하 되기를 거부했다[또는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9) ④ 뒤에 기자는 주나라에 조현(朝見)하러 가는 도중에 은허(殷墟)를 지나다가 궁실이 무너진 자리에 벼와 기장이 자라고 있는 것에 느끼는 바가 있어 「맥수가(麥秀歌)」를 지어 부르니 은의 유민들(殷人)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사기』의 기록은 사실상 기자조선에 관한 최초의 것이다. 후대의 기자조선 관련 기록들은 『사기』에 토대를 두고 여기에 내용을 보태거나 빼거나 바꾸거나 하였다. 여기서 특히 논란거리가 된 것은 ③의 부분이다. 『사기』 이후 등장한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랜 것은 후한 때 반고(班固, 32~92)가 편찬한 『한서』(漢書)이다. 『한서』 「지리지」의 기자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은 나라의 도(道)가 무너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箕子去之朝鮮] … 그 백성들에게 예의(禮義), 전잠(田蠶), 직작(織作)을 가르치고, 낙랑조선 백성들에게 범금(犯禁) 8조를 만들었는데 살인한 자는 죽이고,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써 갚게 하고 … 인현(仁賢)의 교화란 참으로 귀한 것이다. 그러나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柔順)하여 3방(三方)의 바깥 지역과는 다르다. 그래서 공자(孔子)가 자신의 도(道)가 시행되지 않는 것을 한탄하여 뗏목을 타고 항해하여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여기에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내용은 없고, “조선으로 갔다”고만 되어 있다. 한편, 범엽(范曄, 398~445)은 『후한서』에서 기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옛적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가 예의(禮義)와 전잠(田蠶)을 가르치고, 또 「팔조교」를 설치했다. …”
이렇게 쓴 다음에 찬자(撰者)의 「논」(論)을 다음과 같이 첨가했다. “옛날에 기자는 은나라가 망하는 운세를 만나자 조선으로 피해 갔다[箕子避地朝鮮]. 처음에는 그 나라의 풍속이 볼만한 것이 없었으나, 팔조교를 시행하면서부터 … 읍(邑) 안에 음탕한 일이나 도적이 없어지고, 문을 닫고 살지 않았다. … 그리하여 동이(東夷)가 모두 부드럽고 삼가는 풍속을 갖게 되었으며, 다른 삼방(三方)의 지역과는 달라졌다. … 공자(孔子)가 도(道)가 시행되지 않는 것을 한탄하고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어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곳이 누추함을 의심하자 공자는 ‘그곳에 군자가 살고 있으니, 누추할 까닭이 없다’고 말했다.”
요컨대, 『한서』에는 아예 수봉 자체에 대한 기술이 없고, 『후한서』에는 기자가 무왕의 봉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것보다 “조선으로 피해 갔다”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다. 기자에 대한 노촌의 인식 『동사회강』을 읽다 보니 독특한 점이 눈에 띄었다. 즉 중국 사서의 내용들을 비교하면서 이런 논쟁점에 대해 나름대로 논증한 부분들이다. 특히 ‘수봉’과 ‘조주’를 부정하는 이유들을 사료 검증을 통해 논증해 갔다. 이게 뭐지? 하며 눈여겨 보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런 중국 사서들의 기록에 대해서 노촌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기자를 삼조선의 하나인 ‘후조선’으로 보았다. 단군조선을 ‘초조선’으로, 주 무왕 때 기자가 조선으로 피해와서 평양에 거하니 이를 ‘후조선’이라 하고, 한초에 위만이 기자를 축출하니 이를 ‘위만조선’이라 하여 세 개의 조선을 거론하고 있다.10) 그리고 『동사회강』의 「범례」 상에서 “동방은 단군이 처음 등장하여 나라를 세웠고 기자가 문물을 일으켰다. 그러나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편년체로[편년기사, 연대를 따라 사건을 서술-고] 서술할 수가 없다. 따라서 동국통감에서 삼조선, 사군, 이부, 삼한을 별도로 외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본서도 동국통감의 방식을 따라 동사의 처음을 신라시조의 원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동국통감에서) 외기로 실은 (상고시대 관련) 기록을 (그 이후 삼국시대) 나라들의 흥기하고 쇠망하는 부분에 요약된 형식으로 삽입하여 시작의 근원을 찾고 끝을 살필 수 있게 하고자 한다.”
라 하여 “단군이 나라를 세웠고, 기자가 문물을 일으켰다”는 것은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인다. 다만 기록이 드물어 편년에 넣지 못하고 삼국의 기록에 삽입하여 알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삼조선과 삼한의 역사는 신라 건국을 서술하는 가운데 주로 처리해 넣었다. 특히 단군, 기자와 삼한의 강역 등에 관한 문제는 범례의 뒤에 「부론」으로 따로 취급해서 실었다. 이처럼 단군과 기자를 정사로서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논란이 되고 있는 수봉이나 조주에 대한 해석은 『한서』의 기록을 옳다고 보아 이를 따랐다. 그 내용과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기』「송미자세가」에서 말하기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한서』「지리지」에서는 ‘은의 도가 쇠퇴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箕子去之朝鮮]’고 했다. (『후한서』를 편찬한) 범엽은 기자가 쇠퇴하는 은의 운을 떠나 조선으로 피했다 하고, 함허자(涵虛子, 명나라 사람)는 주사(周史)에서 말하기를 옛날에 기자가 중국인 5천 인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가 … 고로 말하기를 반만(半萬)의 운인(殷人)이 요수를 건넜다고 했으니 바로 이것이다. 이 또한 일찍이 봉했다는 말이 없다. 은의 3인을 살피건대 … 비간은 죽었고 미자는 제기를 챙겨 갔고 마침내 주의 봉함을 받아 은의 제사를 이었다. 기자는 말하기를 상이 윤리를 잃었으니 나는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의에 처하고자 하는 뜻을 볼 수 있다. 또 『한서』의 기록이 상세하여 믿을 수 있는 까닭에 지금 이 책에서 기자에 대한 일은 『한서』의 것을 바름으로 삼는다.”
즉 봉함을 받았다고 하면, “상(商)이 윤리를 잃었으니 나는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한 의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수봉을 인정하기 어렵고, 또 『한서』의 기록이 더 상세하여 믿을 수 있는데, 『한서』에는 조선으로 갔다고만 되어 있을뿐 수봉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하여 기자 수봉을 부정하였다. 이런 논증은 「범례(凡例)」 하의 「부론변제조(附論辨諸條)」 「기자봉조선지변(箕子封朝鮮之辯)」에 더 상세하다. “기자의 일은 살피기가 조금 어려운데, 『사기』 「미자세가」에서 말하기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武王封箕子於朝鮮]’라 했고, 반고가 쓴 『한서』「지리지」에서는 조선에 대한 서술에서 사기의 설을 사용하지 않고,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箕子去之朝鮮]고 하였다. 반고의 『한서』를 살피건대, 대개 사마천의 『사기』를 술하되 간혹 (사마)천의 설을 이용하지 않는 데가 있다. 반드시 설명이 있다. 그 후 범엽 또한 『한서』를 따라 곧바로 조선으로 피해 갔다[以避地朝鮮]고 썼다. 선유들이 기자를 논하면서 다만 홍범 한 가지만 진술하고 특히 도를 전해준 일과 주에 신하 되지 않은 대의를 밝혔으나 조선에 봉했다는 일에 대해서는 깊이 살피지 않았다. 또 사마천, 반고, 범엽의 설을 비교하여 그 같고 다름과 시비를 분변하지 않았다. 지금 동사(東史)를 씀에 장차 사실을 기재할 때 … 주자 말하기를 3인의 행동이 다른데 각자 그 마음에 편한 바를 구하였다. 미자는 주의 봉함을 받아 종사를 지킬 수 있었다. 기자는 이런 것이 없었다. 그런데 또한 주의 봉함을 받았다니 그 마음의 편안한 바가 아닐 것이다. 마천의 사기는 박잡(駁雜, 어긋나고 뒤섞이다)함이 많아 독신할 수 없고 그래서 반고도 이미 그 설을 따르지 않았다. 또 반고가 조선의 인성과 토속, 인현교조 등을 서술할 때 믿을만한 근거가 있었으니 약간의 기록만 있는 『사기』와는 다르다. … 또 삼대 이전 중국의 서궤(書櫃)가 미치는 바는 강회지간(江淮之間)만큼 넓지 않았다. 만이(蠻夷)의 지방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하물며 풍호(豐毫)와 만여 리나 떨어져있는 조선에게야 미쳤겠는가? 이때 오히려 홍황(洪荒, 매우 거친)한 지역일 것이다. 주례(周禮) 직방(職方, 천하 구주(九州)의 지도(地圖)를 맡고 사방의 조공(朝貢)을 주관했음)에도 들어있지 않은 바인데 중국과 통할 이치가 없다. 만일 구이팔만(九夷八蠻)에 통하는 날이라면 조선 또한 통할 것이다. 무왕이 기자를 섬기고 조토(胙土, 일종의 봉토)를 주었다면 이는 무병(無屛)의 만황(蠻荒, 오랑캐)일 리가 없지 않을까? 이로 미루어 보건대 피해 갔다[避之]고 보는 것이 이치에 맞다. 세대가 멀고 문헌이 징험할 바 없다. 지금 비록 감히 묻지 못하지만, 또한 반고의 상세한 기사를 버리고 『사기』의 짧막한 것을 취할 수는 없으니 어떠한가?”
좀 길게 인용했는데, 중국의 세 사서를 비교하여 『한서』가 상세하고 조선의 사정을 잘 설명하고 있어 이를 『사기』보다 더 믿는다고 했다. 또 기자 당시 문물 교류 사정을 볼 때 주와 조선은 거리가 멀어 봉함은 불가하고 그래서 피해 왔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논증하였다. 수봉의 부정 = 기자불신설의 맥락 노촌은 수봉설을 부정했고, 군신관계 또한 부정했다. 이는 노촌만의 견해는 아니었다. 이런 인식은 맥락을 갖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 맥락은 어떻게 이어졌을까? 이승휴(李承休)가 편찬한 『제왕운기』(帝王韻紀; 1287)에서는 「단군조선」을 자세하게 서술한 뒤에 기자조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후조선 시조 기자는 주(周) 호왕(虎王) 원년 기묘년 봄에 조선으로 도망하여 와서 스스로 나라를 세웠는데, 주 호왕이 멀리 봉하는 명을 내렸다. 사례하지 않기 어려워 들어갔더니 『홍범구주』의 이륜(彝倫)을 물었다. 41대손 준왕이 침탈을 받아 백성을 버렸는데, 928년을 다스리면서 끼친 풍속과 공렬(功烈)이 화락(和樂)하고 순후(淳厚)했다.”
여기서 기자는 조선으로 도망해 와서 스스로 나라를 세워 후조선의 시조가 되었음을 찬양하고, 뒤에 주 무왕이 봉하여 예의상 주나라로 들어갔더니 『홍범구주』를 물어서 가르쳐 주고 왔다고 했다. 또 기자 41대 후손 준왕(準王)이 나라를 빼앗겼으나 기자조선 928년의 풍속이 아름다웠다고 칭송했다. ‘조선’이란 이름으로 왕조를 개창한 조선의 초기, 기자에 대한 시각은 고려 말 이승휴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관찬 사서(史書)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단군조선을 첫머리에 서술하고, 이어 기자조선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은 태사 기자는 주(紂)의 제부(諸父; 숙부)였다. 주가 무도(無道)하자 … 기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면서 남의 노(奴)가 되었다. 기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상(商)이 윤리를 잃었으므로 신하로 복종하지 않겠다’고 했다. 주 무왕이 주(紂)를 정벌한 뒤에 기자를 찾아가서 도(道)를 물으니, 기자가 『홍범구주』를 가르쳐주었다.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평양에 도읍을 두고 백성에게 예의, 전잠, 직작(織作)을 가르쳐주고, 백성을 위하여 팔조금법을 실시했다. … 이 때문에 백성들이 도적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살지 않았으며, 부인들이 정신(貞信)하고 음탕하지 않았다. 전야(田野)와 도읍이 커지고 음식을 대나무그릇에 담아 먹었으며, 인현(仁賢)의 교화가 이루어졌다. …”
그리고 본문 뒤에 편찬자의 「안설」(按說)을 실었는데, 여기서는 『후한서』를 인용하여 기자는 조선으로 피해 와서 팔조교 등 여러 가지 시책을 폈다고 했다. 또 함허자(涵虛子) 주권(朱權)의 『천운소통(天運紹統, 1406)』을 인용하여 기자가 중국인 5천 명을 데리고 조선으로 들어갔다고 소개하여 주 나라의 제후가 아닌 것으로 해석했다.11) 조선 중기로 오면서 “기자의 조선화”를 추구하였다. 즉 기자가 무왕에게 수봉 받은 것이 아니라 조선으로 피해 왔고[避朝鮮, 走之朝鮮], 무왕은 기자가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을 보고 난 후에 그곳의 지배자로 인정하게 되었다[因以封之]고 하여 “기자의 자발적 선택설”이 힘을 얻어갔다. 즉 기자가 주나라에게서 수봉받고 유교 문명을 이식한 수동적인 인물이 아닌 자발적 선택에 의해서 스스로 조선에 건너와 새롭게 유교 문명을 중국 밖에서 꽃 피운 인물로 만들었다. 즉, 기자를 보다 조선적 인물로 변모시켰던 것이다.12)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도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을 주장하였다. 장유는 「만필(漫筆)」에서 「기자비수무왕지봉이자래조선(箕子非受武王之封而自來朝鮮)」이라는 글을 썼다. 즉 “기자가 주나라 무왕의 봉함을 받지 않고 스스로 조선에 왔다”는 내용의 글이다. 장유는 이 글에서 사마천의 『사기』 「송미자세가」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구절을 소개하면서, “뒷사람들이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 제대로 분변해 놓은 것이 없어서 내가 늘 의아하게 여겨 왔다”고 의문을 제기하며, 기자가 신복(臣服)하지 않은, 즉 불신(不臣)의 이유를 몇 가지 들었다. 우선 “상(商) 나라가 망하게 되면 나는 다시는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기자가 무왕의 봉작을 받아 신하가 되었다면 이는 의리상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당시 [고]조선은 중국에 종속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무왕이 그 땅을 마음대로 취해서 제후를 봉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사기』의 기록은 잘못이다. 반고(班固)의 『한서』 「지리지」를 보면, “은나라의 도(道)가 쇠해지자 기자가 그곳을 떠나 ‘조선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예의와 양잠과 베짜기 등을 가르쳤다”고 했는데, 이 말이 맞다고 하여 『한서』 「지리지」를 정설로 보았다. 장유는 임상덕의 증조인 임연(林堜)의 부탁으로 무안의 「식영당기(息營堂記)」를 써주기도 했다. 장유와 임연은 “어렸을 때 같은 서당에서 글을 배우면서부터 교분을 맺기 시작하였는데, 머리카락이 희어지도록 감괴(甘壞)하는 일이 없었으니, 대개 세한(歲寒)으로 서로 기약하는 그런 벗”이라 하듯이 매우 막역한 사이였다. 따라서 노촌이 『한서』의 내용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 데는 계곡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17세기 중엽 『동사』(東事, 1667)를 지어 사학사에 한 획을 그은 허목(許穆)도 기자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기자는 주 무왕이 감옥에서 풀어주자 『홍범구주』를 설명해준 뒤에 조선으로 도망왔는데, 뒤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했으나 「불신」(不臣)했다.”
고 하여 『한서』에서 “조선으로 갔다”, 『후한서』에서 “조선으로 피해갔다”는 설을 따랐다. 또 기자가 뒤에 주나라에 간 것은 사실이나 제후로서 간 것이 아니라 그저 객(客; 나그네)으로 갔다고 보았다. 이 점은 장유의 해석과 같다. 19세기 중엽 소론파인 홍경모(洪敬謨)도 『동사변의』에서 “기자는 무왕의 봉함을 받지 않고 조선으로 왔다. 뒤에 다시 주나라에 간 일도 없다. 당시 조선은 중국에 복속한 일이 없었으므로 조선땅을 차지하여 제후로 봉할 수는 없다.”
고 하였다. 이 점 역시 장유의 이론과 같다.
소중화 : 작은 나라 큰 생각 기자수봉을 부정하는 설에 따른다면, 기자조선은 처음부터 결코 중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당당히 기자조선을 내세울 수 있었다. 일찍이 『제왕운기』에서 고려를 ‘소중화’라 했다. 조선 특히 후기에 기자가 존숭된 데에는 조선중화주의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소중화란 무엇이고 노촌은 이를 어떻게 보았을까? 노촌의 소중화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자. “대저 천지생물에는 대소(大小)에 각각의 올바름이 있다. 소(小)에는 소의 리(理)가 있고 대(大)에는 대의 리가 있다. … 그래서 우리 동방을 돌아보니 나라가 비록 한 모퉁이에 처해 있고 지금의 시세가 비록 상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천지로부터 받은 명을 일분이라도 부족하게 할 이치가 없다. 그리고 하물며 기자가 구주로 가르침을 열어 이륜이 크게 밝아져 예악문물이 소화(小華)라고 일컬어졌으니 하늘이 우리 동토를 이끌고 돕는 것이 조금의 서운함도 없다고 하겠다.”13)
라 하여 “소(小)에는 소의 리(理)가 있고 대(大)에는 대의 리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가 비록 한 모퉁이에 처해 있어도 기자의 가르침 덕분에 소화(小華)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런 평판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된 연유가 바로 기자가 끼친 은혜였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14) “우리 동방 예속의 아름다움은 천하에 소문이 나 있다. 부자(夫子, 공자의 높임말)는 살고 싶은 뜻이 있었고, 한서에서는 인현[즉 기자]의 교화를 귀하게 여겼고, 당서에서는 군자의 나라를 아름다워 했고, 송나라에서는 예악문물의 방국(邦國)으로 여겼다. 함허자 또한 말하기를 시서인의의 나라라 하였다.”
이처럼 “기자의 과화존신(過化存神)15)의 묘함이 우리 동방에 은혜를 미친 때문이다”라 한 다음, “오랜 세월 동안 제사 지냄이 한날 같았는데, 마한이 멸망함에 김부식, 권근이 모두 기자의 시종을 믿지 않았으니 어찌 된 일인가? 기자의 성덕이 자손이 미약하고 파천함에 따라 하루아침에 제사가 끊기니 홀연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라 하였다. 이렇게 노촌은 조선이 소중화라 불리게 된 오랜 연원이 기자에게 있음을 길게 서술하였고 김부식, 권근에 의해 불신된 역사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였다. 이처럼 여느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노촌은 동방이 오랜 기간 소중화로 칭송받는 문명의 땅이 된 이유가 바로 기자의 유교문명을 물려받은 때문임을 확신했다. 한편, “내가 또 선유(先儒)에게 들으니 『춘추(春秋)』는 (周가) 동쪽으로 천도한 뒤에 나왔고, 『강목(綱目)』은 (宋이) 남하한 시점에 저술됐다고 한다”16)고 하여 『동사회강』을 지은 목적이 『춘추』와 『강목』의 취지를 따라 존화반청의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데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즉 명·청 교체 이후 동아시아 유교문명의 존폐 위기 속에서 동주(東周) 시대에 공자가 『춘추』를, 남송(南宋) 시대에 주자가 『통감』을 저술한 전통을 이제 조선이 계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림 3】 송암미술관 소장본 기자묘. 출처 동북아역사넷 그리고 이어서 “우리 동방은 비록 궁벽한 데 위치한 나라이지만 기자 이후 대대로 소중화로 일컬어졌다”라 하여 노나라나 송나라와 같은 의미를 부여하면서 소중화라 여겼다. 이른바 “작은 나라 큰 생각”을 반영하는 부분이다.17) 대국의 영혼과 소국의 육체가 결합한 나라가 중국에서는 공자의 노나라였다. 소중화라는 인식은 여기에서 연원했다고 볼 수 있다.18) 특히 병자호란 이후 무너진 조선의 자부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랑캐인 청나라와는 다른, 보다 고고한 지위에 있음을 내세워, 적어도 정신적으로나마 극복하려 했고, 그래서 찾은 것이 화이론에 기반한 문화적 우월이었다.19) 오랑캐가 중국의 지배자가 된 이상, 중국은 이제 더 이상 옛날의 중화가 될 수 없으니 이제 세상에 남은 중화는 곧 조선뿐이라는 생각으로 모아졌다. 이때 중화란 중국의 문명이라기보다는 ‘보편문명’으로서의 중화였다. 다만 조선이 소중화인 것은 그 땅이 작다[其地則小也]는 이유에서이지 유교문명이 중국보다 못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20) 소중화론에서 보이는 조선 유교 문명에 대한 사대부들의 자부심은 정파나 학파를 넘어선 공통된 것이었다.21) 그야말로 시대정신이었다. 이런 문화적 우월을 내세워 무너진 자존감을 세웠다. 이를 가능케 해 준 근거가 바로 기자였다. 기자가 문명을 열었기에 그 덕분에 소중화를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자에 대한 해석은 더욱 적극적이 되었고 ‘기자의 조선화’ 역시 분명해졌다. 이때 수봉을 부정함으로써 기자와 주나라의 관계를 단절시켜 그 독자성을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수봉과 조주를 부정하는 것은 대세였다.
【그림 4】 북한 평양직할시에 있는 기자묘로 초기국가시대에 건립된 기자의 무덤이라고 전해온다. 하지만 믿을 수는 없다. 공자의 춘추에 대해 탕누어는 “역사를 사실의 기록으로 버려두지 않고 의로움에 맞추어 일일이 고쳐 씀으로써 공자는 이 아름답고 거대한 이념을 한 치의 타협도 없이 드러내려 했다. 현재에 배반당한 정신을 추슬러 과거를 다시 배열함으로서 미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춘추필법을 따른 역사서술은 조선 후기에 만연했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이 역사서술의 정답은 아니겠지만, 어차피 역사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면 그건 그대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당위성으로 현실을 대체한 역사. 역사의 사실이란 사실(事實)보다 사실(史實)이 맞을 듯하니까…. 노촌의 기자인식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왜곡된 시선을 ‘극복’하기보다 ‘외면’해 왔던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의 ‘역사’도 이제는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 韓永愚, 「기자조선은 사실인가 허구인가」(『진단학보』 136, 진단학회, 2021) 36쪽.
2)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1일 경신 2번째 기사 1392년 /예조 전서(禮曹典書) 조박(趙璞)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3)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5월 9일 정사 1번째 기사 /평양 부윤(平壤府尹) 윤목(尹穆)이 편의(便宜) 두어 조목(條目)을 올렸다. 4)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6월 6일 기미 2번째 기사 1412년 /예조 우참의(禮曹右參議) 허조(許稠)가 상서하였다. 5) 이춘호,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역사에 대한 재인식」(『(한국(조선)어교육연구』15호, 2020. 5), 61쪽. 6) 임상덕의 『동사회강』이 지니는 사학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호남학산책』에 필자가 기고한 「37세의 짧은 삶을 살다 간 호남의 천재 사가(史家) 임상덕」 참조. 7) 천관우, 「箕子攷」(『동방학지』 15, 1974. 01, 연세대 국학연구원) 8) 한영우, 앞 글, 6쪽에서 간추림. 9) 이른바 ‘기자불신설(箕子不臣說)’과 관련된 부분이다. 원문은 “武王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이다. 10) 구체적으로 『東史會綱』』卷1 甲子 (新羅始祖朴赫居世元年)에 삼조선을 거론하고 있다. 11) 『천운소통(天運紹統)』에 수록된 기자와 기자조선 기록은 『주사(周史)』와 『통전(通典)』의 명성과 권위를 빌린 가짜 역사였고,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17 황자인 주권의 권위와 명성에 기대어 15세기에 만들어 낸 가짜 역사라고 한다. 김태윤, 「『천운소통(天運紹統)』의 기자(箕⼦)와 기자조선 기록 고찰」(『인문사회』21, 10권 1호, 2019) 12) 이정일, 「조선후기 기자인식에 나타난 유교문명과 보편성」(『한국사학보』37, 고려사학회, 2009.11), 210쪽. 13) 林象德, 『老村集』卷6 策問題, 窮盡性分 14) 『東史會綱』 卷1 己巳 (新羅南解王六年 ○ 高句麗琉璃王二十八年 ○ 百濟始祖二十七年) “吾東方禮俗之美 聞於天下 夫子有欲居之志 漢史稱仁賢之化 唐書美君子之國 宋朝以爲禮樂文物之邦 涵虛子亦曰 詩書仁義之國也 則箕子過化存神之妙 惠我東方者 歷千萬祀而如一日也 今馬韓之滅 金富軾權近皆不信箕君始終何耶 以箕子之聖之德 子孫微弱播遷 一朝不祀 忽諸不亦悲乎” 15) 『맹자』 「진심상」에 나오는 말로 “(성인이) 지나는 곳에는 그 곳의 백성이 그 덕에 감화되고, (성인이) 있는 곳에는 그 덕화가 측량할 수 없이 행해진다”는 뜻이다. 16) 『동사회강』, 「범례후어」 17) 탕누어/김영문, 『역사, 눈앞의 현실』(2018, 흐름출판), 592쪽. 18) 탕누어는 이를 “대국의 영혼과 소국가의 육체”가 결합된 나라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위대한 영혼이 깃든 작은 육체는 결코 축복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조선의 유학자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같은 책, 147쪽 참조. 19) 중국은 淸의 雍正帝(1723~1723) 시기에 ‘華와 夷는 문화의 유무에 있으며 人種 자체에 둘 수 없다’는 입장이 대두하면서, 이른바 ‘所出之處’의 華夷論을 지양하고 문화적 가치에 의한 華夷論이 갖추어졌던 것으로 본다. 그 뒤 중국에서 논의되던 문화적 가치에 의한 화이론이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 전해지면서 점차 인종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화이론은 퇴색되었고, 華夷의 구분은 문명의 수준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사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한국고대사연구』 62, 2011.6, 한국고대사학회), 30쪽. 20) 이정일, 앞 글, 223쪽. 21) 이정일, 앞 글, 224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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