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의 재발견] 진도의 상장례 다시 읽기 03 게시기간 : 2023-06-2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6-13 18:2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민속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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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씻김’이라는 의례극의 서사 이론은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들의 유기적 그물(網)”이라고 정의된다. 그간 남도를 주목하면서 이론적인 틀을 강구 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종의 목마름이었을 것이다. 김지하 이전에 폴 엘뤼아르가 먼저 노래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자유에 대한 의지, 자유로 나아가기 위한 노래였다. 나는 뒤늦게 김지하를 좇아 폴 엘뤼아르를 만났다. ‘타는 목마름으로’ 남도를 노래해보고자 했다. 목마름의 드러남은 달랐지만, 비유컨대 자유에 대한 공명(共鳴)의 출처는 다르지 않았다. 남도의 씻김굿에 대해 주목해온 나의 시선은 시나브로 힌두의 시바나 비슈누로 확장되었다. 싸목싸목 넓힌 시야는 기독교의 예수에 닿고 이슬람교의 무함마드와 불교의 고타마 싯타르타에 닿았다. 지난 30여 년 인도에서 동아시아를 돌며 눈에 밟히는 풍경들을 뇌 주름 굽이굽이 채워 두었다.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씻김’이 필요한 시대라 표방하는 것은 이를 뭉뚱그린 발설이다. 근자의 속셈은, 2016년 11월 18일 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의 궁리 속에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2018년에 펴낸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민속원)에서는 이를 좀 더 확장하여 논의했고, 이후 몇 번 더 내가 고안한 이론을 바꾸고 고쳐 썼다. 부지런히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 발견들을 발명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 지금의 내가 서 있다. 오늘 얘기는 전사의 것들을 통째로 끌어와 재편하는 내용이다. 내 글이니 굳이 인용의 형식을 갖출 필요 없이 겹쳐 쓰고 고쳐 쓰고 재구성해 나간다. 내 학문(學問)의 정초(定礎)에 부어 넣은 골재들, 나의 질문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 내가 궁금한 점을 물어 이치를 알아차리고자 했던 아마도 유년이었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큰 이모는 굿을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국민가수가 된 송가인의 가계를 살피면 내 이모의 내력이 보인다. 가인의 외할머니 여금순과 함께 서부 진도와 조도의 여러 섬들을 누비며 씻김굿이니 망자혼사굿이니 따위의 굿들을 연행하던 속칭 ‘점쟁이’ 혹은 ‘당골래’였다. 이 또한 적절한 기회를 보아 풀어나간다. ‘씻김’이 무엇일까? 씻김굿’의 기능은 무엇일까? ‘죽은 이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주어 이승에서 맺힌 원한을 풀고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굿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정의된다. 죽은 자는 모두 이승에서 원한이 맺혔다는 뜻으로 읽힌다. 표면적으로는 현실부정의 논리 같다. 생시의 죄를 씻는 것, 곧 부정을 없애는 것으로 풀이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이승의 삶이 고달팠으니 저승의 좋은 곳으로 가라는 사설들이 선율마다 빼곡하다. 여기에는 이승의 삶이 더럽혀졌다는 혹은 더럽다는 전제가 작용한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씻김굿을 받은 망자들은 어떤 저승으로 갔으며 또 그곳에서는 어떤 복락을 누리고 있을까? 이승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한다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민중들의 언설과는 어떤 심리적 괴리가 있는 것인가? 행간에 서린 맥락을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그것이 갱번의 신기루나 산골짜기의 해무 같아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에서 이렇게 풀이했다. 진도지역 상장례 전반을 총체극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씻김굿은 격자놀이나 격자 상장례에 해당한다. 일종의 프랙털(fractal)이다. 씻김굿에서 죽음 확인하기나 죽음 알리기 절차와 갈등 만들기, 죽음 달래기의 절차, 망자 보내기의 절차가 일련의 조합을 거쳐 연희 되기 때문이다. 이 사회극을 가능하게 해주는 각양의 오브제와 내가 마련해둔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 등의 이론에 대해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하였고 또 본 칼럼에서 거듭 소개해나간다. 이 절차들은 대개 청신->오신->송신의 단계로 해석된다. 이를 확대하면 남도 상장례가 가진 3단 구성과 대응하게 된다. 내가 고안한 3단 구성에 대해서는 졸저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씻김굿의 ‘씻김’은 대개 죽은 자에 대한 절리 의식으로 해석되어왔다. 이를 분석심리학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집단의식과 집단 무의식의 관계를 대비한 보상 관계로 바라본다. 어느 사회를 지배하는 합리적 행동규범은 반드시 이를 대상하고자 하는 비합리적 원천의 힘에 의해 보완된다는 것이 해석의 골자다. 이러한 비합리적 원천의 힘은 씻김굿뿐만 아니라, 상장례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는 반의례(anti-ritual)적인 연희, 노래, 놀이 등에서 발휘된다. 특히 이런 힘들은 망자의 천도를 유도하고 생자에게 안위를 주는 것으로, 심리치료의 과정에 비유되기도 한다. 씻김굿의 여러 현상 속에 인류 공통의 집단 무의식 원형(원천의 힘)뿐만 아니라 인간의 무의식을 순화시켜 나가는 원형의 상징적 해결 양상이 있다. 그래서 죽음의 과정에서 씻김은 정화력을 가지고 거듭남이라는 인격전환의 기제로 나타난다. 즉, 망자와 생자들은 생전의 기억을 다시 드러내 정화의 계기로 삼고, 서로 거듭나는 총체극으로서의 상장례를 완성 시키는 것이다. 이 서사를 면밀하게 살피고자 했던 것이 내 의도였고 기왕의 해석들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 지난 칼럼의 ‘제망매가’에 대한 재해석이기도 했다. 2. 영돈마리 ‘이슬털이’와 누룩의 비밀 남도 씻김굿은 대개 열두거리가 있다고들 한다. 그중 전형(典型)을 가지고 있는 거리는 아무래도 ‘이슬털이’다. 이 씻기는 대목을 중심으로 삼기 때문에 전체 굿의 이름을 씻김굿으로 호명하는 것이니 말이다. 거기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마치 지난 칼럼 제망매가와 길닦음에서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고 한 것과 한가지다. ‘이슬털이’의 내면과 외면이 그것이다. 씻김굿의 여러 절차가 끝나고 ‘이슬털이’ 순서가 되면 고인을 상징하는 ‘영돈마리’를 한다. ‘영돈’은 ‘영(영혼)+돗(돗자리)’의 와음이 정착된 예로, ‘영혼(靈魂)을 말아 넣은 돗자리’라는 뜻이다. 망자의 옷을 돗자리에 말아 세운다. 말아 세우면 마치 기둥이나 사람이 서 있는 모양새가 된다. 돗자리 위에 누룩을 놓는다. 누룩 위에는 또아리(똬리)를 놓는다. 그 위에는 복개 혹은 주발(뚜껑이 있는 밥그릇)에 넋(한지로 오린 신체)을 오려 넣어 올린다. 맨 꼭대기에는 솥뚜껑을 놓는다. 솥뚜껑 아래는 이어서 연행할 ‘길닦음’에 쓸 ‘질베(길을 상징하는 베)’의 끝을 연결해둔다. 망자가 미혼이었을 경우 솥뚜껑은 바가지로 대체된다는 증언도 있다. 물론 나는 이를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이 망자를 상징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뒤쪽에서 다시 설명한다.
왜 이런 형식을 갖게 되었을까? 쑥물, 향물, 맑은물 세 가지의 물을 각각 작은 그릇에 담고 솔가지 혹은 빗자루로 찍어서 씻는다. 빗자루보다는 솔가지에 찍어내는 것이 원형적이다. 이 세 가지의 물에 대해서는 다음 차에 풀어 쓴다. 찍어낸 물로 망자를 상징하는 ‘영돈’을 쓸어 내린다. ‘질베’로는 세 가지의 물 즉, 삼합의 물기들을 닦아낸다. 신칼로 연신 솥뚜껑을 두드리며 무가를 연창한다. 솔가지나 빗자루가 ‘영돈’을 씻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씻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무가가 진행되는 동안 ‘영돈’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곧, 망자의 몸과 넋이 깨끗하게 씻겨진다고 관념한다. ‘영돈마리’ 의례를 하는 문화권에서는 모두 누룩을 사용한다. 남도의 씻김굿만이 아니다. 지역에 따라 ‘온누룩’을 사용하는가 ‘누룩 가루’를 사용하는가가 다를 뿐이다. 화순이나 능주 등 남도의 내륙지역에서는 누룩 가루를 주로 사용한다. 질문이 생긴다. 하고많은 오브제들 중 왜 누룩을 사용했을까? 망자의 신체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누룩 외에도 예컨대 메주 등 더 근사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누룩의 효능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토를 달 필요가 없다. 누룩 효모는 발효의 대명사다. 전 세계의 발효문화 중에서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의 것들이 주목된다. 심지어는 간장, 된장을 담을 때도 전통적으로 누룩을 사용했던 적이 있다. 일부 농가는 지금도 그렇게 한다. 기본적으로 누룩은 술을 만든다. 술은 마시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신을 경배하는 데 사용된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이 의례는 ‘술 만들기’이다. 전경수는 그의 글 「보존과 접신의 발효문화론-통합과학의 시행모델을 지향하며」(비교민속학, 2010)에서 접신에 이르는 발효의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내가 베트남의 느억맘 등에 관심 갖고 줄기차게 동남아를 돌던 시기여서 이 논문에서 받은 영감이 크다. 집안에서 특히 종가의 며느리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일 중의 하나가 술을 만드는 일이었다. 연간 줄줄이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제사에 가장 필요한 것이 술과 떡이다. 여기서의 제사는 굿과 동의어다. 하지만 체언격인 ‘굿’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용언격인 ‘씻김’ 혹은 ‘씻기는 과정’이라는 용언격의 호명을 에두루고 있음을 주목한다. 항간의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라는 언설이 여기서 나왔다. 굿이나 제사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떡’이고 ‘술’이다. 그래서다. 이슬털이에서 누룩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망자의 신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굿과 제사에 필수적이었을 술을 만드는 모의 의례일 수 있다. 이항대립의 경계를 넘는 기술이 그 안에 숨어있다. 홍주를 예증 삼아 설명한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소주나 고량주는 복발효 증류주에 해당한다.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설명한다. 쌀과 누룩을 빚어서 익힌 술이나 술지게미를 솥에 넣고 그 위에 시루를 놓은 다음 솥뚜껑을 뒤집어 덮는다. 뒤집은 솥뚜껑의 손잡이 밑에는 주발을 놓아둔다. 솥에 불을 때면 증발한 알콜의 증기가 솥뚜껑에 미리 부어 둔 냉각수에 의해 응축된다. 이것이 솥뚜껑의 경사를 따라 손잡이를 타고 뚝뚝 떨어져 주발에 고이게 된다. 이보다 조금 발전한 것이 소줏고리(古里)라는 증류장치를 만들어 쓰는 경우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방식은 후자의 것이다. 마치 아침 이슬처럼 보이기에 이 술내리는 과정을 ‘이슬털기’라고 했다. 무언가 상상되지 않는가? 씻김굿의 ‘영돈마리’를 이슬털이라고 하는 이유에 비추어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증류주를 내리는 방식은 이처럼 이슬처럼 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한 방울씩 받아내는 방식이다. 곧 이슬을 털어내는 방식이기에 ‘이슬털기’이고 ‘이슬털이’이다. 씻김굿의 이슬털이에서 반드시 누룩을 사용하는 이유나 굳이 이슬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술 만들기(삭히기, 익히기)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굳이 표현하자면 솥뚜껑은 소줏고리의 뚜껑이며 그 안에 든 망자의 넋이 발효되는 과정, 다시 말하면 산자에서 죽은자로 넘어가는 경계넘기의 비밀을 여기서 읽어낼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솔가지로 영돈마리를 닦아내는 절차가 ‘씻는 기능’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슬털이 의례의 행간과 여백을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주 회사 브랜드 중 ‘참이슬’이 있다. 누가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표에 두꺼비를 그려두었다. 한자로 고쳐 쓰면 ‘진로(眞露)’이다. 왜 도깨비의 출처를 두꺼비로 해석하였는지, 도깨비와 두꺼비의 양면성에 대해서는 졸저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할미디어)에서 거듭 밝혀 두었다. 이슬과 참이슬의 행간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우리 조상들은 처녀의 첫 월경 때 피가 비치면 ‘이슬 비친다’고 했다. 출산 때에 양수가 터지기 전 피가 얼핏 비칠 때도 이슬 비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슬의 의미를 상고 해보라. 생명의 잉태와 관련된 이슬 곧, 참이슬의 의미가 영돈마리 의례 속에 마치 시루떡처럼 포개져 있다. 내가 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의 부제를 ‘진도 상장례와 재생의례’라 붙인 이유 말이다. 진도사람들이 이 의례를 이슬털이라 호명해왔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것은 불교 전래 이후 노반(露盤)의 이슬털이로 이어진다. 유교의 제사 술 만들기를 불교 노반의 이슬에 앞서 분석한 것은 불교보다 유교가 앞선 전통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3. 유교와 불교의 교접 의례, 증류주 털기와 불탑 노반(露盤)의 이슬털이 2022년 6월인가 7월쯤에 조선일보 조용헌살롱에서 ‘씻김굿의 이슬털이는 술 만들기’라는 내 이론을 다루어 주었다. 씻김굿의 핵심거리인 ‘이슬털이’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이 시대가 장차 씻김의 시대로 나가야 한다는 점을 내 이론을 인용해 상재(上梓)한 글이다. 내 오랜 주장이기도 하지만, 비로소 내 생각들이 인용되는 듯하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 언급을 받아 2022년 7월 29일 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307회 칼럼에서 보충하였다. 진도뿐 아니라 남도 전역의 씻김굿 중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기도 하고 또 이 시대가 더불어 어깨 겯고 나가야 할 덕목이라는 점을 환기하기 위해서였다. 앞선 내용과 다소 중복되지만, 거듭 상고하기 위해 그 내용을 통째로 가져와 붙인다. 진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도의 씻김굿은 우리나라 남도 무속의례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 사안마다 다른 이름을 붙여 굿판을 벌인다. 한 틀의 씻김굿은 대략 12개의 ‘거리’로 구성된다. 판소리로 치면 열두 개의 마당이다. 연극으로 치면 열두 개의 ‘과장’이다. 중간쯤에 배치한 ‘씻김거리’가 전체 굿의 핵심이다. 그래서 다른 거리의 이름들을 놔두고 통칭하여 ‘씻김굿’이라 한다. 이상한 것은 예로부터 진도사람들이 이 거리를 ‘이슬털이’라 했다는 점이다. ‘이슬털기’ 혹은 ‘이슬털이’라는 이름의 출처와 이항대립의 경계 넘기 맥락에 대해서는 졸저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에서 자세하게 다루었음을 여러 차례 밝혔고, 다시 불교적 맥락을 가져와 보충하고 보완했다. 사용하는 소품들이 여러 개다. 죽은 자를 위해 마련한 옷가지를 저고리에서 버선까지 돗자리에 놓고 말아 세운다. 넋(魂)을 만 돗자리이기에 ‘영(靈)+돗말이’다. 소리 나는 대로 ‘영돈마리’라 하여 와음이 본딧말을 대체하였다. 말아 세운 돗자리 위로 누룩을 놓는다. 누룩은 원형틀에 넣고 밟아서 만든다. 원모양의 가운데가 옴팍하게 패어있다. 엽전을 크게 확대해놓은 모양새다. 종이로 오린 넋을 넣은 주발(周鉢)을 위에 놓으면 흔들리지 않을 만큼 안정적인 모양이 된다. 위에 짚으로 만든 또아리(똬리)를 놓고 솥뚜껑을 덮어 ‘영돈마리’를 완성한다. 주발(周鉢)은 뚜껑이 있는 밥그릇으로, 승려의 밥그릇인 바리때(鉢)와의 친연성이 높아 불교적 뉘앙스가 짙다.
『탯줄코드』(민속원)라는 탁월한 민속학적 저서를 쓴 김영균은 이것이 자궁일 수 있다는 견해를 내게 말해주었다. 위에 놓은 또아리를 뱀의 또아리(똬리)로 해석하고, 이를 ‘탯줄코드’라는 신화적 장치로 풀면 자궁과 탯줄을 연결하는 한 가닥의 키워드가 드러난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참이슬의 ‘이슬’과 비교하여 생각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이나 재생이라는 기본적인 생각이 대개의 죽음 관련 의례를 관통한다는 것이 내 이론의 핵심이다. 수년 전 기독교 잡지인 월간 기독교사상에 1년간 연재했던 모티프와 지향들이 모두 이를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이슬털이는 당골(무당)이 솔잎에 쑥물, 향물, 맑은물 등 세 가지의 물을 묻혀 세워놓은 ‘영돈마리’를 씻는 절차다. 진도문화원장을 역임한 박병훈옹은 이를 ‘식힘굿’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박원장이 유년에 들었던 이름이 ‘식힘굿’이었다는 얘기였다. 씻김굿이라는 이름이 보편화 되기 전의 주장이다. 누군가 혹은 어떤 학자들이 용언격의 여러 이름을 뭉뚱그려 ‘씻김굿’이라는 체언격의 명사로 정의하기 이전의 풍경들이다. 사람이 죽으면 불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니 사전에 물로 식힌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불교적 내세관이 반영된 주장임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나는 이를 ‘삭힘(김치나 젓갈 등의 음식)’과 ‘삭임(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의 과정으로 풀어 여러 지면에 소개한 바 있다. 나오서사 나오서사 불쌍한 망제 싯금받어 나오실쩍
초제왕전 말미타고 십제왕전 말미타고 불쌍한 금일망제 넋이 되야 오시고 혼이 되어 오셨으니 넋방에 모시고 혼방에 모시고 씻겨서나 천도를 허옵시면 염불하신 공덕으로 망제님이 옥경연화 몰근 넋이 되야 십왕전에 가실쩍에 상탕에 향물로 목욕하고 중탕에 쑥물로 목욕하고 하탕에 청계수로 목욕하고 진옷벗고 모른옷 입고 비린내 가시고 단내 가시고 십왕전에 가옵소사 분향길로 스기를 삼으시고 용천감로(龍泉甘露) 정화수로 저의 도량에 감응내림 하옵소서 씻김마당에 강림하야 해원경에 원을 풀고 육갑해원에 길을 찾아 인도환생 화류경에 건원득심 원을 풀어 십왕세계 문을 열고 극락세계 들어가서 인도환생 하옵소사.... 잘 알려진 당골 고 이완순의 이슬털이 사설 중 일부다. 이 사설은 수제자였던 송순단이 받아 전승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못하였지만 여러 학자들과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었던 당골 고 채정례는 이 부분을 이렇게 노래한다. 쑥물로 씻기시면 악사지옥도 면하시고
생왕극락 가옵시니 쑥물로 씻깁시다~(중략) 향물로 씻기시면 하탄지옥도 면하시고 태산지옥도 면하시니 향물로 씻깁시다. 향물로 씻기시면 지옥을 면하시고 새왕극락 가시라고 향물로 씻겼으니 맑은물로 씻깁시다. 맑은물로 씻기시면 십대지옥을 면하시고 천근도 여의시고 중복도 가시옵고 왕생극락 하옵시니 맑은물로 씻기실 때 상탕에는 머리빗고 중탕에는 몸을 씻고 하탕에는 열손발 고이고이 씻기시니 진옷벗어 내던지고 마른 옷 갈아입고 생왕극락 옥경연화당 수구품으로 일실성불 되옵시고 몰물되어 가옵시네
내가 기왕에 주목했던 것은 누룩과 솥뚜껑이었다. 누룩은 술을 만드는 필수재료다. 앞서 설명한 대로 왜 하필 이 의례에서 누룩과 솥뚜껑을 사용했을까, 나아가 또아리(똬리)와 밥그릇(주발)을 사용했을까 하는 점 말이다. 간단치 않은 문제인데 그 여백과 행간을 읽으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신화의 원형이 내포하는 아우라라고나 할까. 그 이유를 진도홍주 만드는 소줏고리 형태를 빌어 졸저에서 설명해두었다. 기독교의 성찬의례 및 불교의 차(茶)와도 연결된다. 나는 이를 종교를 횡단하는 신화적 원형이라고 봤다. 제사의 완성은 ‘음복(飮福-제사를 마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이라고 늘 주장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의례의 총체적인 미장센은 유교 의례다. 여기에 덧붙이는 것이 고 이완순이나 고 채정례 등 당골들의 무가에서 현현하는 용천감로에 대한 것들이다. 불교적으로는 감로탱화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설화적으로도 이미 정리된 맥락이다. 이를 이슬털이와 연관하여 풀어냈다.
노반(露盤)은 불교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을 말한다. ‘이슬판’이라고도 한다. 탑 위 네모난 기와집처럼 생긴 조형물이다. 연꽃처럼 장식되어 있기도 하다. 보통 위에 복발(覆鉢)이나 보륜(寶輪)을 올린다. 노반 위에 엎어놓은 듯한 복발(覆鉢)은 주발(周鉢) 곧 바리때(절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 그릇) 형태다. 한자말에서 알 수 있듯이 반(盤)은 쟁반이나 소반, 밑받침 등 자그마한 밥상이다. 이를 ‘이슬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 이슬’, 즉 감로(甘露)롤 받는 쟁반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내린 천상의 음료가 감로다. 사찰의 전각 내부를 구성하는 감로탱화가 이 맥락을 그린 그림이다. 감로 그림은 우란분절에서 비롯되었지만, 세시풍속 백중과도 연결된다. 부처님의 수제자인 목련이 거꾸로 매달린 아귀도의 어머니를 구제하고자 했다는 ‘불설우란분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한무제는 건장궁(建章宮) 안에 하늘 닿을 듯한 구리 쟁반을 만들기도 했다. 새벽에 내리는 이슬을 받아 마시고 영원히 살고자 함이었다나. 일곱 아름이나 되는 이슬받이 쟁반 아래 길이 20장(丈)이나 되는 금경(金莖)이라는 기둥을 만들었다. 믿거나 말거나, 현명한 임금이 어진 정치를 베풀면 하늘이 이 신령스런 액체를 내려준다고 한다. 인도의 생명수 암리타(Amrita)도 주목의 대상이다. 넥타르(靈酒), 암브로시아(神饌) 등도 유사하다. 꿀같이 달고 향기가 좋다. 이것을 마시면 갈증이 해소되고 번뇌가 사라질 뿐 아니라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신비스러운 이슬이라고 한다. 여기에 영돈마리 풍경을 대입해보면 불탑을 세우고 쑥물, 향물, 맑은물로 씻는 의례의 행간을 읽을 수 있다.
향물은 흠향(歆饗), 쑥물은 이승의 상흔 치유, 정화수는 감로에 대입해볼 수 있다. 거듭 상고하는 것은, 이 장치를 고안했을 우리네 조상님들의 마음이다. 불교가 융성했을 시절에는 탑상의 노반을 상상하며 죽은 자의 재생과 부활을 염원했을 것이다. 유교가 융성했을 때는 제사의 술(祭酒)을 만들어 음복(飮福)함으로써 후손들로 이어지는 유교적 영생을 도모했을 것이다. 불교라고 다르며 기독교라고 다르겠는가. 노반 위의 복발을 자궁으로 해석하고 남도씻김굿 이슬털이의 또아리를 탯줄로 해석할 수 있듯이 신화 원형은 힌두교 혹은 시바교의 남근 모티프까지 거슬러 오른다. 내 초기 논문에서 이슬털이를 남근 모티프로 해석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주목하고 수정을 거듭하여 지금까지의 풍경 읽기를 정리한다. 부활의 기능을 포섭하고 제반 종교를 횡단하는 이슬이 그 핵심이다. 4. 이슬털이의 경계 넘기와 변칙범주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니 그에 앞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는 곧 경계 넘기에서 술이 왜 필요할까? 이슬털이가 경계를 넘는 방식이라면 여기서의 술은 경계를 넘기 위해 필요한 장치이거나 기술을 의미할 것이다. 경계를 넘기 위해 발효라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뜻인가? 여기서 발효(醱酵)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뜻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미생물이 자신의 효소로 유기물을 분해 또는 변화시켜 특유한 최종산물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말로 삭힌다. 띄운다. 익힌다 등의 용어로 설명된다. 하지만 발효 자체에 의미가 있다면, 씻김굿의 영돈마리 의례에 간장을 만들어내는 메주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망자의 신체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라면 오히려 얼굴 형태의 메주가 적당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신체를 은유한 오브제보다는 ‘술’이라는 키워드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술은 신(조상)의 은유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음복의 예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제사상에 올랐던 술은 조상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고 이를 후손들이 나누어 마신다. 조상과 합일하기 위해서다. 마치 교회에서 성찬식을 할 때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셔 신성을 획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피와 살의 메타포인 것처럼. 우리는 음복할 때 조상의 피인 술을 마시고 조상의 살인 떡을 떼어 먹는다. 제사의 최종 목표가 이것이다. ‘이슬털이’ 의례에서 술 만드는 행위를 모사하는 것은 망자가 조상(神)의 단계에 진입할 수 있는 권위를 획득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즉 변칙범주의 경계 넘기를 이행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슬털이는 ‘비로소’ ‘길닦음’으로 갈 수 있는 핵심적인 의례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일종의 이항대립이며 ‘변칙범주’다.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상징으로 만들지 않으면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없는, 레비스트로스의 언술대로라면 삶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있는 범주에 속한다. 이슬털이에 사용되는 누룩이 이 이항대립 즉 이슬털이의 이전과 이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관건이다. 나는 이를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레비스토르스의 변칙범주 즉 이항대립 이론을 인용하였고 이를 음악적 범주로 전개하여 ‘시김새론’을 말해왔다. 그는 신화의 이항대립구조를 설명하면서 위험적이고 모순적인 이항대립적인 관계를 잠정적으로 해소시키는 존재가 신화, 나아가 영웅들이라고 말한다. 기호나 상징은 대립되는 다른 기호나 상징과 구분될 때 의미를 획득한다. 기호의 의미는 고립되어서는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관계를 맺어야만 의미를 획득한다. 그 관계는 일차적으로는 이항대립으로 맺어진다. 말/무언, 소음/침묵, 색/무색, 색채도가 다른 색들의 대립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이란 두 개의 관련된 범주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체계가 형성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졸저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경계 넘기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는 것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씻김굿의 길닦음 절차가 향가 『제망매가』에 핍진(逼眞)한 의례이자 노래이며 신화적 결과물이었듯, 이슬털이는 유교적 세계관의 술 만들기이고 불교적 세계관의 이슬 생성이다. 이 둘의 교합이자 접합이며 생성의례이다. 체언격의 정의가 아니라 용언격의 형용이자 끊임없이 변동하는 움직임이다.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오는 ‘다시 태어남’의 의례이다. 이것이 거듭남이고 재생이며 부활이다. 따라서 남도씻김굿의 영돈마리 이미저리는 유교적 시선으로 보면 제사 술 만드는 소줏고리이고 불교적 시선으로 보면 불탑이다. 이를 세워두고 무가를 연행하는 의례 이슬털이는 유교적 시선에서는 음복이고 불교적 시선에서는 감로 의례 혹은 전통적인 세시풍속의 백중 의례다. 기독교적 시선에서는 성찬의례다. 이 모두 재생과 거듭남을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조용헌이 위 칼럼에서 나를 인용해 언급했듯이 이 시대는 씻김이 절실한 시대요, 김영균이 포착했듯이 탯줄의 아우라 곧 재생과 부활의 은유가 긴요한 시대다. 지난 회 칼럼을 소환하여 그 의미를 거듭 환기한다. 길닦음에는 두 가지의 행로가 있다.
하나는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닦음이요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왕생을 비는 닦음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길닦음은 곧 미타찰에서 만날 나의 길을 닦는 일이기도 하다. 앞의 닦음은 단순한 마당 쓸기이고 뒤에 닦음이 도닦음이 아니라 모두 도(道)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이른 가을 무엇이 바빠 여기저기 흩어지는 낙엽처럼 그리도 총총 떠나셨나. 제망매가는 그대 내 사랑하는 이의 왕생(往生)을 주문하는 노래이자, 기형도의 고백처럼 ‘추악하게’ 이승에 남겨진 나를 다듬는 도(道)닦기이다. 길닦음의 길베가 두 개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줄레줄레 잡초 우거진 마당에 앉아 장차 그대가 오가고 내가 이를 제망연가(祭亡戀歌)를 노래한다. 글쓴이 이윤선 진도학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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