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비운의 사회주의자 윤가현(1912 – 1950) 게시기간 : 2023-06-28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3-06-27 10:0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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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초 강진군 대구면 수동마을을 찾았다. 해남 윤씨 집성촌으로 유명하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요, 사회주의자인 윤가현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윤가현은 강진 대구면 소재 대구보통학교(현 강진대구초등학교) 동맹휴학을 이끈 강진이 낳은 독립운동가, 농민운동가, 위대한 사회주의자였다. 주민들에게 조심스럽게 윤가현을 물었다. 인터넷상에 “살아 있었으면 대통령감”이라는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박헌영과 함께 남로당을 결성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그의 관심은 민주 정부 및 통일 정부 수립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때 충남도당 인민위원장으로 국군이 북상하자 그곳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비운의 혁명가였다. 그동안 좌우 이념 갈등과 분단 현실은 그에 대한 평가를 머뭇거리게 하였다. 하지만 그의 독립운동과 노동 운동, 해방 후 좌우를 아우른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 한 노력 등은 그에 대한 평가를 넘어 후대를 위한 기록의 관점에서 정리할 때가 되었다. ‘항일 운동 – 투옥 – 해방과 분단 – 조선 공산당 창당 – 미군정에 의한 투옥 – 빨치산 활동 –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남 지역 사회주의 운동가의 전형을 걸은 윤가현은, 1912년 5월 17일(음) 강진 대구면 수동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시기를 1914년이라고 언급한 기록도 있으나 그의 장조카인 윤순달과 혼선이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4남 1녀 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그의 큰형 윤정현, 작은 형 남현, 큰 누이 내순, 셋째 형 삼현, 막내 가현이었다. 막내이다 보니 큰형과 나이 차이가 있었다. 그와 더불어 사회주의자로 명성을 날렸던 장조카 윤순달은 큰형 정현의 아들이었다. 막내 숙부 가현보다 나이가 두 살 아래인 순달은 한 마을에서 숙부·조카를 넘어 형제처럼 지냈다. 그는 수동리에 있는 대구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강진대구보통학교는 1923년 개교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윤가현의 큰형 정현이 1922년 강진 대구에 ‘만오의숙’을 세웠다고 동아일보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대구면에는 이렇다 할 교육기관이 없어 정현이 학교를 세워 무료로 교육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윤가현은 형이 세운 ‘만오의숙’에서 공부를 하다 1923년 대구 공립 보통학교가 세워지자 그곳에서 제2회로 졸업하였다. 그와 더불어 보통학교 동맹휴학을 이끈 강원태의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윤가현이 강진대구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고등보통학교를 다닌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므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1936년 전남 노동 운동자 협의회 관련 재판기록에, 윤가현이 1928년 강진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강진중앙초등학교) 고등과 1년을 수료하였다고 나와 있다. 그가 쓴 자필 이력서에 “당시 일본인 학교에만 있는 고등과를 마치고 (광주)사범학교에 들어갈까 하고 고향 읍내에 있는 일본인 소학교에 들어갔다”고 나와 있어 판결문의 내용이 사실임을 말해준다. 그의 외손 정희운은 윤가현이 사범학교를 진학하기 위한 자격을 얻으려고 소학교 고등과에 진학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처음에는 광주에 있는 사범학교를 진학하고자 소학교 고등과에 진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구보통학교 졸업대장 번호가 두 번째에 있는 것으로 보아 졸업성적이 2위 성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보통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다고 하는 말이 사실임을 알려준다. 당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사범학교 진학을 하는 경향이 많았다. 윤가현도 이러한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고등과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의 자필 이력서 내용이다. “세상의 물정을 모른 나는, 일본인 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우리 조선 민족이 어떠한 민족이며 어떠한 처지를 놓여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조선 민족에 대한 열등시, 온갖 모멸, 천대 그 당시 나의 어린 심정에는 말할 수 없는 큰 충격과 자극을 주었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2년간 처음에는 공부의 성적으로나 열성으로 남에게 지지 않게 나아갔던 것이 나중에는 학교도 쉬는 날이 많고 성적은 말할 수 없이 되었다.” 심상소학교 고등과 학생들 대부분이 일본인 학생이었다. 윤가현은 그의 이력에 적힌 것처럼 일본인 학생들과 지내며 민족의식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일인 학생과 자주 충돌하였는데 이를 처리하는 일본인 교장으로부터 참지 못할 모욕을 느끼고 바로 중퇴를 하였다. 이때가 1928년 그의 나이 16살이었다. 그는 고등과를 중퇴한 후 곧장 야학(夜學)을 통해 학생들의 민족의식 제고에 앞장섰다. 이때가 1928년쯤이었다. 야학교사들이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윤가현도 대표적 인물에 속한다. 윤가현은 1929년 11월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동조하는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추진하였다. 그의 활동내용이 당시 판결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 번거롭지만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기에 그대로 옮긴다. “①피고인 윤가현은 최근 광주고등보통학교 생도 다수가 형무소에 수용되어 형사소추를 받게 된 관헌 당국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또 그 일단의 동맹휴교하던 같은 학교 생도들이 본래의 의지를 번복 복교하여 수업을 받기에 이른 것을 일반 학생의 치욕이라고 하고 자기 출신 학교인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 소재 대구공립보통학교의 재학생 다수에게 동맹휴교를 할 것을 선동 실행하게 하며, 그 실행에 관하여 몇 사람과 공동으로 생도를 협박 혹은 불온 격문을 만들어 이를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생도, 강진군 대구면 공립보통학교장 및 같은 군내에 있는 군동, 강진, 엄천 및 성전 각 공립보통학교 생도들에게 보내 사단을 크게 하려고 지방조선인의 민족관념을 고취하여 배일사상을 농후하게 하며 우리 제국 정치를 비방하여 치안을 방해할 것을 기도하여 이러한 의중을 피고인 강원태에게 분명히 한 바 있고, 피고인 강원태는 이에 공명하여,
② 제1, 피고인 윤가현은 소화 5년(1930년) 1월 11일 밤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 자택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생도 제군에게」라는 제목으로 「백여 명의 학생이 싫다. 반도의 동포를 빙설같은 감옥에 보낸 제군은 다시 학교로 가다니 왜 그렇게 약한가. 이번 복교는 광고(光高,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수치, 조선 학생계의 수치, 우리 삼천리 강산의 수치이다. 그렇다면 이 수치를 면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는 제군의 관대한 판단에 맡기라. 물론 알겠지만, 혁명을 일으키자. 결과를 내려면 이런 의견을 말하자. 우리는 승리다」 운운 하는 의미를 기술한 문서(증 제9호)를 만들어 이를 다음날인 13일 거주리(里) 우편함에 넣어 수일 후 광주공립보통학교에 배달되어 직원이 개봉 열람함으로써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동을 하고 치안을 방해한 자이다. ③제2, 피고인 윤가현은 동년 동월 17일 오전 8시경 동군 동면 구수리 이상면 집에서 「대구공립보통학교장, 우리는 오늘부터 동맹휴학을 하고자 한다」고 앞에서 서술한 이유로 「우리 조선민족은 군국주의 자본주의 침략주의인 일본국에 모든 자유를 빼앗긴 20년 기간 우리 신성한 조선민족을 식민시하고, 모든 억압은 음으로 양으로 우리 머리 위에 내린 일은 이제 다시 말하지 않지만, 알다시피 이번 광주사건도 그 일례이다」 운운 이라고 우리 일본의 조선 통치는 조선 민족의 자유를 빼앗고 모든 압박을 가하고 있어서 광주학생 사건도 그 일례라고 하는 의미를 기술한 문서(증 제1호)를 작성하여 이를 봉투에 넣어 대구보통학교 교장에 보냈다.(중략) ④제2, 피고인 윤가현, 강원태는 대구공립보통학교 학생을 선동하고 또는 협박 등을 하여 동맹휴교를 하도록 기도하여 소화5년 1월 15일 오후 4시 지난 무렵 동교 재학생 중 상급생인 이상면, 이진희, 김상환, 김승호, 윤충현, 박채언, 김명호, 이소자 등을 동교 뒷산에 모이게 하여 그들에게 오는 동월 18일에 동교 재학생 일동의 동맹휴교를 결행할 취지를 선동하고, 그 실행 수단으로써 각자 생도에 대하여 18일은 등교하지 않고, 혹은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구타하는 등 신체에 위해를 가할 뜻으로 그 통고를 할 것, 또 18일 당일 아침 박병언은 마량리, 이상면, 김상환은 구수리, 김승호, 이소자는 원포리, 윤충현 및 피고인 윤가현은 수동리 각 요로에 감시하여 생도를 위협하여 등교를 극력 저지하도록 협정하고, 다음날 16일에도 오후 4시 지나 동교 뒷산에서 같은 일을 숙의한 바 있고, 그리하여 동월 17일 동 학교 내 또는 그 집에 돌아오는 도중에 윤충현, 이진희, 김승호, 이상면, 이소자, 김명호 등은 동교 생도 공진태, 윤재웅, 안길환, 김평진, 나호균, 이달순, 이순희, 이상숙, 이명수, 윤웅하, 김광호, 장병일, 박순곤 등 다수 생도에게 명일 18일은 등교하지 말라, 명령을 듣지 않으면 구타 또는 박살을 내겠다고 각각 위협하고, 또 그날 동교 뒷산에서 피고인들은 협의한 바 있어 다음으로 18일 아침 피고인 윤가현, 강원태 및 이상면, 이진희, 김상환, 윤충현, 박채언 등은 생도의 등교를 공동으로 저지할 협정의 부서에 대하여 피고인 강원태는 막대기, 박채언은 대나무 막대기를 휴대하고 대구면 구수리, 원수인리 후방 도로 위에서 동교생 김광호에게 장을 때려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태도를 보이고, 위협하여 등교를 저지하고, 피고인 윤가현은 윤충진과 함께 동면 수동리 노상에서 동교생 공진태, 윤재웅, 안길순, 강명수 등에게 왜 학교에 가느냐 박살을 내겠다고 협박하고, 강명수가 강하게 등교하려고 하자 피고인 윤가현은 손으로 그의 우측 복부를 2, 3회 구타하므로 몇 명이 공동으로 협박 및 폭행을 한 것이다. (소화 5년 형공 제162호,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 1930. 3. 14)” 판결문을 통해 1930년 1월 18일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한 대구보통학교 학생들의 맹휴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이 맹휴는 보통학교 졸업생이자 야학교사인 윤가현이 조직적으로 계획한 것이다. 윤가현이 주도한 이 맹휴는 몇 가지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우선 맹휴의 배경이다. 곧 광주고보 학생들이 학교 당국의 회유 협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교실로 돌아간 것에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의 강한 기개를 엿볼 수 있다. 다음으로 그는 대구보통학교 학생들 전원을 맹휴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맹휴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윤가현을 포함하여 주동자급은 졸업생이거나 5·6학년 재학생이었다. 이들은 윤가현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맹휴 참여 독려 및 서로 다른 격문을 준비하는 등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불과 20세도 되지 않은 젊은 청년이 이러한 운동을 이끌었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더욱 그는 맹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학교 당국의 눈치를 보는 일부 소극적 학생들을 강하게 압박하는 대담함도 보였다. 10대 후반의 윤가현의 “혁명을 일으키자”고 한 절규가 마냥 구호에 그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주학생운동 동조 동맹휴학을 주동한 혐의로 징역10월을 복역하고 출옥하였다. 그의 첫 번째 감옥살이였다. 이 무렵까지 그는 아직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가 사회주의 사상에 접한 것은 1931년 무렵 공산주의자 최가산으로부터 학습하였다고 1936년 판결문에 나와 있다. 그는 판결문에 나와 있지만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면서 깊이 빠져들었다. 적지 않은 그의 지인들이 그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하였다. 그는 민족 독립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완도, 강진, 장흥 등 전남 여러 지역의 사회운동가들과 함께 항일 비밀조직 ‘전남사회운동자 협의회’를 만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여 투옥 경험이 있는 이론이 확고히 정립된 항일운동가 그룹이었다. 항일 의식이 몸에 밴 윤가현은, 일본 순사만 보면 대들었고 일본인들이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고 한다. 강진군의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 책임자 역을 맡았던 그는, 마을마다 야학을 열고 저축계와 독서회를 운용하였고, 어업조합 해태(김)조합, 그리고 총독부가 주도한 농촌진흥회 등 합법적인 단체에도 참여함으로써 운동의 합법성과 대중성을 갖추려 하였다. 일제는 1930년대 들어 농촌사회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농민 노동운동 비밀조직이 늘어나자 이를 막고자 관제 ‘농촌진흥운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윤가현은 이를 오히려 농민들이 주체가 된 활동 공간의 확대 수단으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윤가현 등이 조직한 ‘전남사회운동자협의회’는 곧 일제에 의해 발각되었다. 전남 9개 군에서 558명이 검거된 대규모 사건이었다. 모두 49명이 구속되었다. 가장 주동자 격인 황동윤 징역 3년을 비롯하여 이기홍 징역 2년 등 대부분이 형을 받았다. 윤가현도 1년 6월을 받아 목포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 이들의 재판 사실이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크게 보도될 될 정도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 사건은 강진·완도·해남·장흥·진도 등 전남 5개 군의 주요 항일운동 세력들이 관련되었는데, 1930년대 최대의 항일 비밀결사의 하나였다. 세 번째 투옥은 1939년 2월부터 12월까지인데 이때는 과거의 그의 전력을 트집 잡았다. 1937년 중일전쟁 후 일제는 윤가현처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을 검속하고 있었다. 그는 강진에서 더 활동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일제의 감시를 피해 경성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1941년 3월 시행된 사상범예방구금령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941년 6월부터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경성형무소와 청주예방구금소에서 4년 2개월 갇혀 있었다. 네 번째 투옥이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투옥은 미군정청에 의해 미군 포고령 위반혐의로 징역 2년을 언도 받았으나, 2심에 가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무죄로 나올 때까지 1946년 4월부터 1947년 9월까지 17개월 갇혀 있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한 윤가현은, 해방 후 박헌영을 도와 조선공산당 창당에 앞장섰다.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간부로 활동한 그를 박헌영과 같은 화요계로서 분류하고 있지만, 미군정청에서 그가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 상고 이유서 및 판결내용을 보면, 그가 미군정과 대립관계를 형성하려 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북한의 김일성정권에 막연히 추종하는 세력이 아니라 독립된 통일국가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청이 공산당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한 이후 남한에서 그의 활동 공간은 크게 위축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지배하던 충남의 인민위원회 도당위원장을 맡았던 그는 그곳에서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이 북상하자 충남 대둔산을 근거지로 빨치산 활동을 하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부분은 좀 더 차분한 정리가 필요하다. 한편 강진 수동리는 일제강점기 윤가현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이끈 독립운동의 성지였다. 일본 경찰은 이 마을을 강진의 ‘모스크바’라고 하여 ‘빨갱이’로 낙인하였다. 그동안 이념의 벽에 갇혀 있었던 우리는 ‘빨갱이’라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완도 소안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제강점기 형성된 이러한 표현은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다. 한말 의병전쟁이 치열한 곳을 일제가 ‘3성, 3평’이라 하여 부정적 이미지를 형성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수동마을은 국도변에 있는 큰 마을이었다. 해방 이후 친일 경찰의 잔재를 지닌 경찰들은 수동마을을 집중적으로 표적으로 삼아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 사건으로 마을 주민 26명이 목숨을 잃었다. 6·25전쟁 때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 27명이 총살당했다. 곧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에 마을 사람이 54명이나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민간인 피해가 일어난 가장 대표적인 곳이 강진 대구면 수동마을이다. 수동마을이 지닌 아픔은 우리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다. 윤가현의 아내 정일남은 보성 회천의 명문가 정해룡 집안이다. 그녀는 감옥 드나드는 것을 밥 먹듯 하는 남편과 오붓한 가정생활을 제대로 이루지는 못했으나 남편의 기개를 존경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1남 1녀의 자녀들에게 이어졌다. 어린 자녀들에게 “느그 아버지는 혼자만 아니라 모두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좋은 일을 하셨다. 원망하지 마라”고 하였다 한다. 그의 빛나는 항일 독립운동은 좌우 이념의 대립이 치열한 현실에서 망각 속으로 잊혀져 있으나, 최근 강진이 낳은 위대한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활동가로 그의 활동을 자리매김하려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그를 당대의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살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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