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의 재발견] 진도의 상장례 다시 읽기 04 게시기간 : 2023-07-21 07:00부터 2030-12-17 10:00까지 등록일 : 2023-07-19 10:5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민속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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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상집(喪家)의 풍경 하나, 총체극으로서의 진도 상장례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내가 자라면서 늘 접하던 풍경이다. 누군가 돌아가신 상황, 상가(喪家)판이 왁자지껄하다. 마당에는 차일(遮日)을 둘렀다. 굵고 진한 글씨로 장식된 병풍이 다섯 칸 겹집을 가리기라도 할 듯 둘러쳐진다. 그 아래 갖가지 제사 음식들이 즐비하다. 일군의 당골들이 씻김굿을 한다. 수려한 무가와 갖은 악기의 반주들이 마당을 가득 채운다. 일군의 사람들이 중간중간에 마당으로 나와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는 재담을 한다. 등이나 배꼽에 박바가지를 넣고 곱사춤이나 배둥이춤을 춘다. 박바가지와 곱사춤, 배둥이춤에 대해서는 따로 할 말이 많으므로 별도의 장을 구성해 설명해나간다.
마당의 사람들은 굿판의 주역이 아니지만, 초대와 상관없이 마땅히 참여하는 공생체의 구성원들이다. 이들을 오히려 주역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학에 견주어 말하면 작가론과 독자론의 차이 정도랄까. 굿의 의뢰자와 굿을 연행하는 당골 즉 배우와 이에 동참하는 참여자들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 당골이라는 배우만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역할이 정해지지 않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실제 상장례의 이야기 만들기 곧 총체극으로서의 연극 만들기가 달성된다. 지금은 일종의 완성된 형태의 이야기 즉 다시래기라는 연극만 무형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잔존하기 때문에 보다 근원적인 메커니즘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 만들기가 서사적 구성을 취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추적해볼 수 있다. 그것을 규명해보고자 한 게 지금 내가 거론하는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이다. 마치 판소리의 연행 요소로 창자, 고수, 관중을 들 수 있지만, 관중들이 추임새를 하면서 판소리에 개입하는 것을 통해, ‘‘공동창작’의 본래 기능을 짐작할 수 있는 것과도 같다. 씻김굿을 하는 동안에도 특정되지 않는 마을 사람들, 공동 창작자의 등장은 자유롭다. 예정에 없는 상황들이 특별하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예사 사람들에 의해 전개된다. 굿청의 한쪽에서는 쪽윷놀이가 시작된다. 종지기라는 작은 그릇을 사용하니 ‘종지기윷’이다. 윷에 대해서도 이미 졸저나 졸고를 통해 수차례 설명해두었는데, 종합하여 갈무리한다는 차원에서 차차 다시 거론한다. 일반적으로는 굿청 복판으로 술이 거나하게 취한 사람이 등장하는 풍경을 통해 이 단서들이 포착된다. 이 캐릭터는 개인일 수도 있고 다중일 수도 있다. 괜히 상주의 멱살을 잡고 트집을 잡는다. 윷판에 들러 ‘찔림’을 하거나 터무니없는 ‘개평’을 요구하기도 한다. 상주네 가족 간의 갈등이 다툼으로 번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여긴다. 차차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실제 몸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손가락질하며 나무라는 사람, 말리는 사람 등이 얽혀 난장판이 된다. 이 다툼은 굿이 진행되는 과정 혹은 굿이 끝날 때쯤 정리된다. 마치 의도치 않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하다. 물론 굿이 끝날 때까지 정리되지 않고 갈등으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여기서 말하는 연극 만들기의 기본구조를 이탈한 사례에 지나지 않으니 논외로 한다. 급작스럽고 불가피한 사회적 손실, 곧 죽음이라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공생체가 일종의 연극을 통해 심리적 보상을 도모했던 까닭을 상고해보라. 나는 이 상장례 전반을 총체극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졸저에서 설명한 부분을 다시 가져온다.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민속원, 12~13쪽). 미처 다루지 못했던 말들은 괄호 안에 넣어 설명한다. 진도지역 대표적인 상장례는 진도씻김굿, 다시래기, 진도 만가로 알려져 있다. 이들 민속의례는 상장례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음악성이 풍부하고 풍자적이며 희화적인 놀이요소들이 있다. 그 중 다시래기는 (일반적으로) 상주들을 웃음판으로 끌어내기 위한 놀이라고 해석되었다. 다시래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상여놀이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인다거나, 여러 문명권에서 산견된다는 학자들의 보고가 있다. 이 중 다시래기는 정병호, 이경엽, 임재해, 전경수 등 여러 학자들이 언급했다. 학자들이 반의례적 성향의 장례놀이로 거론한 것은 그만큼 다시래기가 가진 (돌발적이고도 엉뚱한) 특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다시래기의 연희성에 비교되는 음악성과 놀이성이 강조되는 씻김굿이나 만가 종목도 반의례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매 일반이다.
씻김굿과 다시래기는 중요무형문화재로, 만가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윷놀이를 상장례의 하나로 취급한 사례는 전무하다. 하지만 나는 윷놀이를 상장례의 필수 의례로 해석해왔다) 전경수의 견해에 의하면, 부분으로 찢어져 의식과 연극과 놀이 장르로 분산되어 있다. 무형문화재가 전체가 아닌 낱개의 요소로 인식된다는 점은 나도 주장한 바다. 유무형을 구분하는 모순 등을 언급하여 선학들의 논의에 참여하였다. 만들어진 다시래기가 전승된 다시래기의 출로를 막아버렸다든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강강술래가 자생적 강강술래의 확산을 방해한 사례 등을 거론했다. 본질에서 탈맥락화한 부분과 더불어 예능 일변도의 전승 측면을 지적했다. 전승체계 전반의 문제는 도외시하고 예능중심의 일부만을 전승하는 행태를 지적했다. 제도적으로는 일종의 문화적 독과점을 보장해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이른바 요소주의적 사고방식, 혹은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총체적으로 통합해서 각 종목들을 볼 필요가 있다.
졸저에서 상장례를 총체극으로 보고, 죽음 확인하기, 죽음 알리기, 갈등 만들기, 죽음 달래기 등의 서사 구성으로 풀어 설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내가 접근했던 삼단 구성 연극 만들기는, 이야기 만들기뿐 아니라 무대의 설치, 미장센의 구성들까지 확대된다. 협의의 다시래기와 광의의 다시래기로 나누어 설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극의 형태로 이 맥락을 재구성해 연희한 것이 다시래기다. 사실상 상장례 자체가 다시래기라는 사회극이자 놀이이며 퍼포먼스라고 봤던 것이다. 졸저에서 나는 또 이렇게 설명해두었다.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민속원, 6~7쪽) 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윷놀이 등은 자연스럽게 삭힘의 기술로 연결된다. 여기에는 두 개의 판형이 존재한다. 하나는 ‘꿔다가도 하는 지랄’이고 다른 하나는 발효 기술이다. 상장례를 일종의 사회극으로 봤을 때 극의 서사화, (즉) 등장인물들이 이행하는 구조다. 죽음이라는 상실의 문제를 풀어내는 서사구조 속에서 ‘갈등 만들기’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갈등을 만들고 풀어내는 구조가 사회극의 요체다. 사람들은 이 절차를 통해 죽음의 상실을 (심리적으로 회복시키고자 한다). 마음을 삭이는 기술이다. 이 두 개의 기술로 사람들은 위안을 얻고, 망자는 비로소 조상의 단계에 진입해 또 다른 세계에서 재생하는 자격을 얻게 된다. 이 책을 통해 진도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윷놀이 등 진도 상장례가 총체적 축제이며 재생관념을 내포한 의례라는 점을 밝혔다.
여기에 훗날 사당패 등의 레퍼토리를 넣어 짜놓은 것이 국가지정무형문화재 ‘다시래기’다. 본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변화되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그 중심에 ‘꿔다가도 하는 지랄’ 역할을 하는 캐릭터가 있다. 극적 이야기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등장이 필연적이다. 협의의 다시래기는 문화재로 지정된 장르를 말하는 것이요, 광의의 다시래기는 씻김굿, 만가, 윷놀이 더 나아가 죽음 확인하기, 죽음 알리기, 서사로서의 이야기 갈등 만들기, 죽음 달래기 등을 포괄하는 상례 전반을 말한다. 왜 그러한가에 대해서 여러 차례 발표도 하고 책도 쓰고 했지만 내 설명방식이 친절하지 못한 탓인지 늘 새잡이로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내 재주가 거기까지이니 어쩌겠는가. 오늘 또 풀어 변명한다. 2. 사회극, 꿔다가도 하는 지랄의 캐릭터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 내가 세운 사회극 이론 중 하나다. 창조한 조어가 아니다. 내 고향 어르신들이 늘 하던 말씀을 빌린 것이다. 욕설이 아니다. 상가에서 항상 훼방을 놓거나 일명 ‘지랄’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까닭을 빗대 말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의도한 것도 아니다. 상가에서의 이 캐릭터는 거의 필연적이다. 이런 사람이 등장하지 않으면 꿔서라도 반드시 등장한다고 해서 ‘꿔다가도 하는 지랄’이라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것이 상장례의 연극 만들기 구조이며 이 캐릭터가 일종의 악역(안타고니스트, 대립 인물)이라고 주장해왔다. 갑자기 일어나는 죽음이라는 사회적 손실의 심리적 보상이나 보완 기제로 극 만들기가 이루어졌고, 이 극의 서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에 대적하는 대립자가 반드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이 구조가 아니라면 서사를 가진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악역이 상장례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것은 수천 년 이어온 전통이다.
누가 의도해서 만든 것이 아니기에 사회극의 원형(아키타입)이랄 수 있다. 상례의 필연적 등장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꿔서라도 하는 지랄’의 캐릭터다. 다른 하나는 윷놀이다. 윷놀이를 상례 중 하나로 주장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사전에서는 사회극을 이렇게 말한다. “사회의 문제를 주제로 다룬 연극이나 희곡, 개인과 집단,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생기는 모순이나 갈등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좁은 의미의 연극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으되 넓은 의미의 사회극이라 함은, 공생체가 자신들의 문제를 일종의 극적인 방법을 통해 풀어내는 장치라는 점에서 가장 원시적인 사회의 이야기 만들기로 소급하여 해석해야 한다. 스턴버그와 가르시아가 함께 쓴 『사회극-원리와 적용』(학지사, 2012)에 보면, 사회극은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동의한 상황을 행위화 하는 집단행위 방법이라고 정의한다. 이 극을 통해 사람들은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이슈를 해결하며, 가치관을 명료화한다는 것이다. 다만 사회극은 사회문제를 토론하기보다는 현재의 역할에서 나와서 행위로 탐색한다고 주장한다. 스턴버그, 가르시아, 『사회극-원리와 적용』(학지사, 2012, 11쪽) 사회극은 인간관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천 방식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둔 집단학습 과정이다. 집단원들이 사회적 가치와 감정을 명료화하도록 돕고, 새로운 행동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회극은 집단이 주인공이다. 주 초점은 주제와 상황에 둔다. 사회극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경험’이라고 하는 공통적인 맥락을 풀어낸다. 사회극은 참가자들이 자신과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상호 간의 만남을 새로운 방식으로 시도해 볼 수 있으며, 집단의 지지적인 힘을 경험한다. 타인의 입장에서 존재감을 즐기며(역할놀이), 삶에 있어서 자신의 주된 역할을 확장시키는 자유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경험 많은 진행자와 함께 사회극에 참가한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에 압도되며, 매우 열광한다. 사회극은 문제해결을 탐구하고 경험하는, 비위협적이며 비판단적인 방법이다.
위 저자들의 주장에 견주어 보면, 우리네 전통적인 상장례에 모인 마을 구성원들이 주인공이자 굿판의 주체이다. 다시래기로 좁혀 말하면, ‘가상제’는 사회자나 진행자의 역할을, ‘사당’과 ‘거사’ 나아가서는 ‘땡중’까지 주요 등장인물이 되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 출연 배우가 된다. 하지만 지금은 익명의 출연자였던 ‘지랄’ 담당이 이미 극 속에 녹아들어 각각의 캐릭터 속에서 분연(扮演)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경우라도 즉, 원시 형태 즉 광의의 다시래기이건 문화재로 지정된 협의의 다시래기이건 상장례 전체가 총체극이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출연자라는 맥락은 훼손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불가피하고도 돌발적인 사회적 손실에 대해 마을 구성원들이 필연적으로 대처하는 방식이 의례극이다. 이들은 역할을 상호 분담하고 상장례라는 총체극 만들기에 적극 동참한다. 누군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마치 꿔서라도 안타고니스트를 반드시 등장시킨다. 서사의 완성 곧 이야기 만들기를 위해서 수천년 고안해온 메커니즘이다. 이 캐릭터들은 아마도 무의식중에 침윤해있을 조상들로부터의 기술을 끄집어내고 또 무의식의 발현일 수 있는 훼방꾼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한다. 조동일이 말하는 창조주권자들이다. 스턴버그와 가르시아는 이를 자발성과 창조성으로 해석하고 있다. 스턴버그, 가르시아, 『사회극-원리와 적용』(학지사, 2012, 200~201쪽) 모레노는 그의 저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에서 자발성을 “새로운 상황에서 적절하게 반응하고 익숙한 상황에 새롭게(그리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모레노는 자발성을 세가지 유형-순수한 자발성, 병적 자발성, 상투적 자발성-으로 구분하였다.
(그중 하나 예를 들자면) 저자중 한 사람이 신년 파티에 참석하였는데, 그 파티에 참석한 한 연예인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녀는 재치있고, 익살맞으며 즉흥적이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일어났을 때, 그 연예인의 남자 친구가 갑자기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뛰어나와 있었다. 당황한 손님들은 그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나중에 그 남자 친구는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관심이 집중된 것에 질투가 나서 스스로 주의를 끌기 위해 그렇게(새롭지만 부적절하게) 행동했다고 말했다. 상장례 의례 중 임재해를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이 반의례라는 용어로 호명했던 바로 그 기술을 발휘하는 캐릭터들이다. 나는 이를 풀어 탈놀이니 마당놀이니 하는 전통극의 원형적 구조로 읽어내고자 했고 수천 년 혹은 수만 년 우리에게 깊숙하게 내면화된 연극 만들기의 원리로 해석해왔다. 넓게는 사회극이고 좁게는 의례극, 전통극이다. ‘꿔다가도’ 등장시키는 이 출연자가 없으면 ‘풀이’의 결말로 진행하지 못한다. 이것은 의례나 제사의 기본구조이기도 하고 이른바 ‘이야기’의 형성 전제이기도 하다. 이것을 원형적인 것으로 보는 이유는 『황금가지』에서도 빈번하게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다. 수많은 용례들이 있지만 그 중 하나만 소개해두기로 한다. 내가 말하는 이야기 만들기보다 훨씬 본래적 면모를 다룬 사례라고나 할까. 이들을 두루 살피면 내가 왜 이 연재를 통해 남도의 상장례를 재생의례로 읽어내고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한겨레출판, 2003, 160쪽) 우리는 봄과 여름의 축제에 대해 앞서 검토한 내용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추리할 수 있다. 곧 우리 미개한 선조들은 식물이 지닌 힘을 남성과 여성으로 인격화하고, 동종주술 또는 모방주술의 원리에 따라 숲의 신들의 결혼은 오월절의 왕과 여왕, 또는 성령강림절의 신랑과 신부 따위로 의인화하여 표현함으로써 나무와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그런 표현들은 단순히 시골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거나 가르치기 위해 만든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드라마나 목가적 연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숲이 푸르게 자라게 하고, 싱싱한 풀이 돋게 하고, 밀이 싹트게 하고 꽃이 피어나게 하기 위한 주술이었다. 그러므로 나뭇잎으로 감싸거나 꽃으로 장식한 배우들의 결혼이 숲의 정령들의 실제 결혼과 흡사하면 할수록 주술의 효험이 당연히 더 커진다고 여겼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의식에 수반하는 방탕한 행동이 우발적인 과잉행동이 아니라 한때 그 의식에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고도의 개연성을 근거로 추정할 수 있다. 그 의식을 거행한 사람들은 나무와 식물의 결혼이 인간 남녀의 실제 결합 없이는 생산적일 수 없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오늘날 문명화된 유럽에서 식물의 성장을 촉진한다는 명시적인 목적으로 이런 풍습을 지키는 예는 아마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다른 지역에 사는 미개종족들은 대지의 생산성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성적 교섭을 의식적으로 활용했다.
프레이저의 보고를 통해 우리는 상장례의 우발적이고도 즉흥적인 캐릭터들의 참여와 행동들을 돌아볼 수 있다. 방탕하고도 우발적인 과잉 행동들이 가진 행간의 의미가 전 세계 고대사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는 사실 말이다. 한때 그 의식에 꼭 필요했던 캐릭터이기에 만약 없으면 꿔다가도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도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상장례 서사를 완성시키는 세계적 보편 원칙임을 가늠해볼 수 있기에, 감히 ‘지랄론(論)’이라 이름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3. 공동창작 의례극의 서사, 조동일의 대등창작과 창조주권론에 기대어 지난 몇 년 조동일이 말한 대등창작과 창조주권론에 대해 사숙(私淑)했다. 십수 년 전에는 그가 창발한 생극론을 여러 지면에 인용한 바 있다. 근자에는 그의 사상적 정점일 것으로 보이는 대등론을 풀어보고 있다. 대등창작, 창조주권론 모두 탁월한 이름짓기다. 그는 한국문학사, 세계문학사를 넘나들며 이야기의 본질과 구조에 대해 설파했고 특히 탈춤을 통해 ‘카타르시스’, ‘라사’, ‘신명풀이’의 세 가지 기본 원리를 주장했다. 지난달 채희완이 중심이 되어 벌인 마당극 포럼 기조 대담의 일단을 옮겨둔다. 지금은 이런(탈춤을 말함, 인용자 주) 대등창작을 밀어내고 차등창작이 득세했다. 극작, 연출, 공연, 관람이 담당자나 작업 순서에서 엄격하게 구분되고, 앞의 것이 뒤의 것 위에서 군림하는 차등창작이 세계를 휩쓸어 예술사의 위기가 조성되었다. 기이한 재주를 자랑하는 전문가가 횡포를 자행하고, 최하위의 관람자 신세로 전락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창조주권이 유린된다. 극작, 연출, 공연, 관람이 하나인 대등창작의 원리를 재현하는 투쟁을 일제히 일으켜야 한다.
너무 강하게 얘기한 듯하지만 시선 자체가 옳다. 잘난 사람들이 앞서 걷는 것이 차등창작이고 못난 사람들이 뒤따르는 것이 대등창작이다. 평등이라는 개념과는 결이 다른 얘기다. 비유하자면 일부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남녀를 평등하게 할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대등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조동일의 이름짓기에 영감을 얻어 그간 써오던 ‘호혜 평등’이라는 언설을 ‘호혜 대등’으로 바꾸었다. 대등의 제시야말로 시대의 진전을 바라보고 장차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를 자각한 이정표이다.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탈춤을 통해 조동일이 보고자 했던 극론의 보다 원형질적인 맥락이 이른바 상례극 만들기의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에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역할도 대사도 정해져 있지 않지만, 반드시 나타나서 서사극을 완성하는 메커니즘 말이다. 졸저의 한 대목을 다시 빌린다. (위 졸저, 94~95쪽) 다시래기에서 중이 사당과 삼각관계로 연애하는 장면은 구춘홍과 강준섭 등이 고안해낸 이야기다. 어디서 가져 온 이야기일까. 바로 심청전의 뺑파막이다. 뺑파와 심봉사의 역할을 거사와 사당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여기에 강준섭의 장기이기도 한 심봉사 연기가 막중한 역할을 하게 된다. 본래의 다시래기가 거사와 남장한 사당이 노래를 주고받는 공연이었던 점에 비하면 현재의 다시래기는 심청전에 기반한 탄탄한 스토리의 상장례극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이를 이야기 구조로 풀어보면 일종의 피카레스크식 심청전이 된다. 심청이나 당달봉사라는 캐릭터가 기타의 소설이나 악극, 의례 구조에서 살아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피카레스크식 구조란, 본래 악당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에서 출발한 개념이었으나. 동일한 인물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전개하는 구성으로도 사용된다. 하지만 의문이 생긴다. 지난 신문기사(일제 강점기 다시래기 관련 기사)등을 참고하면, (다시래기라는 상장례극은) 백제 때부터 전승되던 연희이고 일제 강점기에 중단되었다고 한다. 물론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 다만 추론되는 것은 상장례 마당에서 즐겁게 놀거나 상주와 더불어 춤을 추던 것이 고구려 기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오래된 연행이라는 점이다. 호상(好喪)이라 하여 북, 장고를 울리며 춤추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것을 꿔다가도 하는 지랄, 바로 상장례극 만들기 구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민요의 혼자 부르기와 여럿이 부르기에 대하여-진도의 유희요를 사례 삼아-(한국민요학 26집, 2009)’과 ‘연행방식을 통해서 본 남도소리의 축제적 성격’(구비문학연구 제24집, 2007)에서 선창자와 후창자, 메김소리와 받음소리, 끼워 넣기와 겨루기(어루기), 추임새로 남은 공동창작자 등에 대한 논의를 한 바 있다. 대체로 혼자부르기에서만 말하기 기능이 우위를 보이며 여럿이 부르기에서는 겨루기가 우위를 보이는 것으로 해석된다. 위에서 음악양식화 중 판소리를 언급한 것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판소리 연행의 양상을 보면, 향토민요나 잡가의 경우보다 선창자에게 가창의 역할이 전적으로 위임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향토민요에서 보이는 돌림노래 형식도, 잡가에서 보이는 창자들의 서열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창자와 고수의 밀고 당김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향토민요에서 볼 수 있었던 끼워 넣기와 겨루기가 일인 창자와 고수에게 일임되면서 그 역할이 배가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판소리 노래형식을 보면 판소리가 형성되고 발전해 온 과정 속에서 끼워넣기와 겨루기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더늠의 역사가 그것이다. 판소리에는 기본적으로 많은 명창들이 낸 더늠이 수도 없이 들어가 있다.
(추임새를 하는 까닭에 대해서 말했다.) 판을 운영할 사실상의 공동 역할을 창자와 고수에게 대부분 일임한 형태가 판소리다. 따라서 공동 창자의 위치를 상실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들은 추임새를 통해 판소리에 적극 참여하면서 끼워넣기와 겨루기의 간접 효과를 누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판을 짜서 자기 바디를 후세에 전해 온 것이 판소리의 발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 명창들이 많은 더늠을 넣고 스스로의 창조적 안목으로 자기 더늠을 포함시켜 판을 짜기 때문에 전승과 창조라는 이중 작업이 이루어지게 된다. 판소리 바디마다 더늠의 구성 방식이 다른 것이 이 때문이다. 술 한 잔 마시고 노래방에 가면, 이 메커니즘이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도 위 논문들에 자세하게 지적해두었다. 이 문제 제기와 더불어 상례극 전반의 서사를 완성하는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을 주장해왔다. 상례 전반을 전통극 혹은 사회극이라 했을 때, 주인공과 대립 인물의 갈등과 해소는 굿의 기본적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탈춤이나 협의의 다시래기가 정해진 각본과 대사에 의해 구현되는 구조라면, 상가판의 ‘꿔다가도 하는 지랄’은 내면화된 혹은 무의식적 레퍼토리에 의해 구현되는 이야기 만들기의 원형 구조다. 결말을 알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긴장감이 높고 그 와중의 ‘어루기’와 ‘겨루기’에 의해 예술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그 정점에 시나위라는 기악합주가 있고 판소리라는 성악이 있다. 희생양을 매개 삼는 번제(燔祭)나 인신공희가 향불 올리는 방식으로 변화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제사를 포함한 우리의 전통적인 극의 대등창작 원리에 ‘꿔다가도 하는 지랄’을 하는 캐릭터가 왜 거론되어야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의를 한정 없이 끌고 가면 책 한 권도 부족할 것이기에 이 정도로 소개한다. 더 세밀한 논의는 졸저나 졸고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극이 지향하는 목표나 목적을 망실하고 제멋대로 까부는 캐릭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꿔다가도 하는 지랄은 상장례극이라는 이야기 만들기를 성사시키는 토대이자 원칙이다. 우리 사회 전체를 하나의 총체극이라고 한다면 청소년기에 떠는 지랄 또한 총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토대이자 원칙이랄 수 있다. 항간에 회자되는 지랄 총량의 법칙으로 이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지랄이 소요되고 혹은 요구되는 시기와 장소, 무대를 벗어나는 것에 있다. 제 때에 지랄을 떨지 않고 청장년이 되어서나 혹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시기와 장소에서 지랄을 떨게 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한 나라의 법을 집행하고 결정하는 자리라면 더욱 그러하다. 상장례극의 ‘꿔다가도 하는 지랄’이 내면화된 의미를, 나아가 수천년 혹은 수만년 학습된 이치를 거듭 살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주로 사춘기나 청소년기를 중심으로 거론되는 지랄총량의 법칙과 더불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원리이자 이론임을 다시 깨닫는다. 이를 전거 삼아 각종 학교의 시스템이나 교육 방향을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정리하자면 의례극, 전통극, 사회극이라는 때와 장소와 배경을 명확하게 하여 공생체가 떠안게 된 상실이나 위험, 장차 이르게 될 위험을 극복해가는 것이 내가 주장해온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이다.
글쓴이 이윤선 진도학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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