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재물의 속사정 게시기간 : 2023-07-2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7-25 10:2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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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은 복(福)이야!? “올해는 재물운이 있어” 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떨까. 새해 운수 풀이에 재물운이 있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한다. 재물을 갖고 얻기를 원하지 않거나 또 재물을 버리거나 잃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재물은 복(福)과 연결되고 재물복(財物福)이라고 불린다. 새해 운수나 미래를 점칠 때 포함시키는 항목이다. 재물이 복 받음을 증명한다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그런데 재물이 꼭 복일까. 신응망(辛應望)의 아내 정씨(丁氏) 너무 놀랐다. 가슴이 아직도 벌렁벌렁한다. 온몸이 떨렸다. 시장에 갔던 사내종 일수(一水)가 남의 집 종들에게 두들겨 맞아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고 했다. 일수는 주인집 일로 무명 두 필과 벼 열 말을 갖고 시장에 갔다. 그런데 건장한 남자종 여럿이 와 갑자기 일수를 꽁꽁 묶고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일수가 갖고 있던 무명과 벼도 모조리 빼앗아갔다. 게다가 일수의 아버지인 남종 봉생(奉生)을 공물 준비를 해야한다는 핑계로 뺏아가 가버렸다. 집안의 종이 폭행당하고 종과 물건까지 빼앗겼다.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어서 정씨는 손쓸 겨를이 없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은 이위와 그의 아들 이상익(李相益)이었다. 이위는 옛날에 세상을 뜬 손윗 시누이의 남편이었다. 이위와 이상익 부자가 이런 일을 벌인 건 왜였을까. 결혼한 후 여성이 자식 없이 죽으면 여성의 재산으로 친정으로 사내종 봉생과 관련이 있다. 봉생은 신씨 집안 종이었다. 정씨의 시아버지 신장길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부인 구씨(具方慶 딸)로 2녀 1남을 낳았는데 아들 신응양(辛應陽)은 일찍 죽었다. 두 번째 부인은 이씨(李安鐺 딸)로 딸 둘, 아들 한 명을 낳았고 정씨의 남편인 신응망은 이씨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신장길의 후처 이씨는 1608년에 전처 및 자기 소생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었다. 이 때 재산을 나눠 가진 이들은 딸 넷 그리고 막내인 신응망이었다. 봉생은 둘째딸에게 돌아갔다. 당시 작성한 문기에 ‘차녀의 사위 이위’라고 썼다. 재산을 나누어 줄 때 작성하는 분급문기에 결혼한 여성들의 이름은 정식으로 기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주로 남성의 이름 즉 딸의 배우자 이름을 썼다. 그래서 분급 문기에도 차녀의 사위 이름이 올랐다. 둘째딸 몫으로 주어진 내역에 ‘사내종 복지의 첫 소생인 봉생’이 들어 있다. 봉생은 이때 10살이었다. 10살 사내아이종이 주인집 둘째 따님에게 넘겨졌다. 이위는 아내 덕분에 집안에 어린 사내종을 둘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둘째 딸인 이위의 아내가 자식 없이 죽었다. 이위는 재혼해 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이상익이다. 조선시대 직계 존속으로부터 받은 재산은 부부라도 각각의 소유였다. 상대방의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다. 봉생은 신장길의 둘째 딸이 받은 것이었다. 비록 이위 집에서 부겼지만 그 소종래를 따지면 신씨 집안에서 온 종이었다. 그런데 둘째 딸이 자식 없는 상태에서 죽었다. 봉생은 어느 집 소유일까. 조선시대에 결혼한 여성이 자식 없이 죽었을 경우 그 여성에게 주어졌던 종들은 본가 즉 여성의 친정으로 되돌려 보내야 했다. 『경국대전』에 ‘자녀 없이 죽은 적모의 종들은 양첩 자녀들이 1/7, 중승자면 3분을 더 주고 그 나머지는 본족(本族)에게 돌려준다.’고 했다. 이는 고려 때부터 그랬다고 하며 조선 초기에도 유지되고 있었다. 1397년 태조 때 노비변정도감(奴婢辨正都監)에서 노비와 관련한 쟁송 문제를 다루면서 시행해야할 조목을 작성했다. 거기에 ‘자식이 없는 부부의 노비는 비록 증서가 없더라도 본인들이 부리고 쓰는 것을 허용하되, 부부가 죽은 뒤에는 본손(本孫)에게 주는 것을 허용한다.’고 되어 있다. 또 1442년 세종 때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올리는 말에 ‘지금 세상의 풍속에는 자식 없이 죽은 아내의 노비(奴婢)는 그의 남편이 그대로 부리다가, 다른 아내를 다시 맞이하게 되면 그 노비를 즉시 죽은 아내의 친정집에 돌려줍니다.’라고 하였다. 결혼한 여성이 자식 없이 죽으면 친정에서 받은 노비는 친정으로 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것이 법률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봉생, 신씨와 이씨 사이에 낀 ‘재물’ 신응망은 누나가 이위와 결혼한 후 자식 없이 죽자 봉생을 도로 데려왔다. 그때 봉생은 장성에 있었는데 신응망이 직접 가서 ‘찾아’ 데려왔다. 신응망과 그 아내 정씨는 이후 40여 년 동안 봉생이를 신씨 집안 종으로 부렸다. 이쯤되면 봉생은 신씨 집안 사내종이다. 이위는 그렇게 생각했을까. 이위는 첫 부인 신씨로 인해 봉생을 데려다 부릴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죽자 처남이 봉생을 데려갔다. 신응망은 합법적으로 봉생을 데려왔지만 이위에게는 쓸모 있는 사내종 하나가 없어진 셈이다. 게다가 그 아들 일수까지 제 아비에게 갔다. 가치 높고 쓸모 있는 재물 둘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씨 집 ‘재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신씨 집 재산이 되었고 그것도 40여 년이나 보고만 있어야 했다. 사내종의 값어치는 쌀 수십 석이다. 이건 사내종 몸값일 뿐이다. 사내종이 만들어내는 경제력도 계산에 넣어야 했다. 집안의 모두 잡스런 일을 할 뿐 아니라 신공(身貢) 수입도 있었다. 종들은 주인집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는데 주인집으로부터 멀리 살아 노동력을 직접 제공하지 못할 경우 그에 해당하는 만큼의 ‘재물’을 바쳐야 했다. 자기 집 종이 다른 집으로 가 일할 때에는 그 종을 부리는 집에서 종의 주인집에 곡식 등의 재물로 보상했다. 이위 처지에서 보면 봉생의 경제적 가치는 꽤 높은데 40여 년간 그 혜택을 전혀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위의 불만이 그 아들 이상익에게까지 미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상익은 제집 사내종 여럿을 데리고 시장으로 와 일수를 두들겨 패고 물건까지 빼앗았다. 또 봉생이까지 탈취해갔다. 봉생은 신씨와 이씨 사이에 낀 재물이 되었다. 과부는 재산 지키기도 힘들어 정씨는 손윗 시누이가 죽자 남편이 되찾아 온 봉생을 40여 년이나 부렸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봉생을 빼겼다. 봉생 아들 젊은 사내종도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너무 억울해서 견딜 수 없어 탄원서를 냈다. 이위 처에게 나누어준 재산 중 제사를 위한 것을 빼고 모두 본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위는 되돌려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봉생 한 구(口)가 장성에 있어서 남편이 장성에서 찾아내 데리고 와 부린 지 사십 여 년이 되었습니다.…(중략)… 대개 법에 의하면 자식 없이 죽으면 제사조 외에 재산을 돌려 주어야 하는데 이위는 전답 30여 두락과 노비 4구가 생산한 것들을 모두 갖고서도 탐악한 마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해 봉생까지 탐내어 빼앗아 갈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중략)…남편이 살아 있을 때 봉생을 찾아 데려 와 부린 지 4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이위는 이 일에 대해 한번도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갑자기 아들과 종놈들을 데리고 와 시장에서 일수를 묶고 때리고 물건까지 다 가져가고 봉생까지 빼앗아 갔습니다. 이는 자식 없는 외로운 과부라고 여겨 갑작스레 빼앗아 간 것입니다.
이 글은 1658년 4월에 제출했다. 정씨가 탄원서에서 ‘추(推)’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이위가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위의 아내는 1608년 재산을 나눌 때 여종 3구, 남종 2구 외에 전답도 받았다. 그런데 아내가 죽은 후 되돌려 주지 않은 것이 많은데 봉생과 일수까지 다 탈취해갔다. 무엇보다 정씨가 분노했던 건 봉생을 데려와 40년 여년 부렸는데 그 동안 아무말이 없다가 느닷없이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 40여 년이란 남편 신응망이 살아 있을 때였다. 신응망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아래에서 컸다. 그의 어머니는 마음 고생을 많이 하면서 아들을 길렀다. 신장길의 첫 부인 구씨가 아들 신응양을 낳았지만 이른 나이에 죽어서 신씨 집안에 아들이라고는 자신의 소생인 신응망뿐이었다. 1618년 신응망이 사마시에 합격했을 때 여종 2구를 특별히 주었고 1624년에 문과 급제 때 사내종 2구, 여종 2구를 또 특별히 주었다. 그 만큼 아들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급제 후 신응망은 승문원 주자로 벼슬을 시작하면서 함평 현감, 공조 및 예조의 정랑, 경상도 및 공청도 도사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고 사헌부 장령까지 올랐다. 봉생을 부린 지 40여 년이라고 했으니 1618년 즈음이었고 이때 신응망은 사마시에 합격했고 6년 쯤 지나 문과에 합격해 조정에서 근무할 때다. 그리고 계속 벼슬살이를 하다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654년 2월 13일에 죽었다. 봉생을 탈취당한 때는 1658년 3월이다. 정씨의 남편이 죽은 지 4년차 즈음에 일어난 일이다. 정씨의 처지에서 볼 때 남편이 살아있을 때 이위가 아무말 하지 않다가 남편이 죽자마자 ‘재물’을 탈취해간 것이다. 게다가 신응망은 집안을 이을 아들이 없는 상태로 세상을 떴다. 신응망은 두 번 결혼했다. 첫 부인은 부인 김씨로 金渷의 딸로 1639년에 죽었다. 정씨는 두 번째 부인이었다. 김씨는 신익진(辛翊震), 신소달(辛小達) 등 아들 둘을 낳았지만 신익진은 1649년에 죽었고 신소달도 이른 나이에 죽었다. 두 아들이 신응망보다 먼저 죽은 것이다. 아마 정씨가 신응망과 결혼했을 때에는 전처 아들인 신익진이 살아있었겠지만 신응망이나 정씨보다 먼저 죽었다. 정씨에게는 딸 한 명뿐이었다. 신응망과 친분이 깊었던 신천익(愼天翊)은 신응망을 애도하는 시에서 ‘아들 한 명도 또한 젊은 나이에 죽고 어린 손자는 아직 강보에 싸여 있으며, 딸 또한 아직 어리네.’라고 하면서 애달파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처 아들인 신익진의 아들이 있다는 것인데 아직 강보에 싸여 있다. 정씨는 집안을 이어갈 아들이 없는 ‘자식 없는 외로운 과부’ 신세였으므로 이위가 이런 틈을 노려 봉생과 물건을 탈취해가는 일을 벌였다고 여겼다. 과부이고 아들도 없는 데다 재물까지 빼앗긴 횡액(橫厄)을 만난 셈이다. ‘재물’은 다툼을 부르고 정씨와 이위가 다툰 것은 ‘재물’ 때문이다. 노비는 경제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재산이어서 다툼의 수위도 매우 높았다. 또한 ‘결혼한 여자가 자식 없이 죽는 경우에 그녀가 친정에서 받은 재산을 본족으로 돌린다.’는 조항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했고 다툼을 더 격렬하게 만들었다. 일례로 최득충과 손광서 집안과의 다툼이 있다. 1560년 최득충의 고모 최씨는 손중돈의 후처로 들어갔고 자기 소생 자식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할머니 이씨로부터 받았다는 재산이 있었다. 최씨는 그것을 손중돈의 전처 자식들 곧 의자녀(義子女)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의자(義子)인 손경(손曔)의 아들 손광서를 자신의 친정 조카인 최득충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했다. 그 후 두 최씨는 모두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죽었다. 손광서는 경주김씨와 재혼하여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두 최씨 여자의 재산은 어떻게 처분해야할까. 최득충는 손씨 집안을 상대로 재산 소송을 걸었다. 고모 최씨와 자신의 여동생 최씨 몫의 재산이 손광서 처인 경주김씨와 그녀가 낳은 자식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최득층은 고모와 여동생의 재산은 최씨 집안 할머니 이씨가 준 것이고 둘 다 자식 없이 죽었으므로 손씨 집안은 제사조를 제외한 고모 및 여동생의 재산을 최씨 집안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혈연 관계가 전혀 없는 경주김씨와 그 아들이 최득충의 고모와 여동생의 재산을 물려받지 못하게 한 것이다. 결국 할머니 이씨의 분급문서가 위조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법에 따라 나누어 가졌다. 자식 없이 죽은 여성의 재산을 본족에게 준다는 조항은 ‘재물 다툼’을 일으켰고 이 재산이 다른 사람에게 건네졌을 경우에는 문제가 매우 복잡했다. 이쯤되면 재물은 복이지만 화(禍)를 같이 끌고 오기도 한다. 속사정을 헤아리는 혜안을 ‘탐욕스런 사람은 재물에 목숨 바친다.’라는 말이 있다 한나라 때 문장가 가의(賈誼)의 <붕조부>에 나오는 말이다. 재물이 그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강력하다는 말로도 들린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도 있다. 고려 때 명장 최영이 평소 아버지로부터 들은 말이라고 한다. 요즘은 아마 황금을 황금으로 여겨 어떻게 재테크를 해야할까 고민해야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방법일 수 있다. 그렇다면 재물이 꽁꽁 싸 안고 있는 다툼의 가시를 꿰뚫어보는 혜안도 필요할 것이다. <도움 받은 글들> 한국고전종합 DB https://db.itkc.or.kr
디지털장서각 고문서자료관 https://archive.aks.ac.kr/ 김경숙(2021), 「17-18세기초 사대부가 여성의 친소(親訴)·친송(親訟) 활동 - 영광 영월신씨가 고문서를 중심으로 -」, 『여성과 역사』 35, 한국여성사학회. 문숙자(1994), 「조선전기 무자녀망처재산의 (無子女亡妻財産) 상속을 (相續) 둘러싼 소송사례 (訴訟事例)」, 『고문서연구』 5, 한국고문서학회. 문숙자(1996), 「의자녀(義子女)와 본족(本族)간의 재산상속분쟁(財産相續分爭) : 1584년 학봉(鶴峯)김성일(金誠一)의 나주목판례(羅州牧判例)분석」, 『고문서연구』 8(1), 한국고문서학회. 손경찬(2018), 「자식 없이 사망한 배우자의 재산상속」, 『홍익법학』 19(4), 홍익대 법학연구소. 한상권(2011), 「17세기 중엽 해남 윤씨가의 노비소송」, 『고문서연구』39, 한국고문서학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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