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독립운동·통일운동에 앞장선 유혁(柳赫 1892∼1966) 게시기간 : 2023-08-09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8-07 13:3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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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 조각상이 야외에 조성된 아담한 미술관이 있다. 서양화를 비롯한 여러 유파 그림들이 전시된 ‘아천(我泉)미술관’이다. 한적한 시골에 단아한 이러한 미술관이 있는 것에 궁금함을 자아내게 한다. 이 미술관 앞뜰에 흉상이 있다.
흉상에, “독립운동가 우석(友石) 유혁 선생”이라고 적혀 있다. 유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여러 차례 투옥된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에는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및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좌·우를 아우르는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 앞장선 위대한 민족지도자였다. 이 미술관은 조부의 삶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큰 손자가 조부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獻呈)이다. 흉상 앞 자연석에 새겨진 ‘온갖 풍파와 시련에도 백성은 살아 남는다’는 뜻의 “유민유허(遺民遺墟)”라는 글에 유혁의 철학이 담겨 있다.
유혁 흉상 우리는 위대한 민족주의자 유혁을 잘 모른다. 국가기록원 등 여러 자료에는 그의 이름 ‘혁(赫)’ 대신 ‘용희(龍羲)2)’로 나와 있어 서로 다른 인물로 오인하기도 한다. 이제 그의 빛나는 삶을 추적해보기로 한다.3) 유혁은 1892년 10월 16일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서 부친 유흥인과 모친 거창신씨 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이 친정인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에서 출산 준비하고 있을 때, 본가에 머물고 있던 부친이 큰 용이 집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기 때문에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여 ‘용의(龍義)’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다. 문화 유씨 30세인 유혁의 조상 가운데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두 차례 역임한 약재 유상운과 역시 영조 때 좌, 우의정을 역임한 약재 아들 만암 유봉휘가 가문을 빛냈다. 이들은 소론계 출신의 정치인이었지만 노론·소론의 치열한 당쟁을 거부하고 상대방을 포용하는 정치를 지향하여 후인들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영암에서 이들의 학문 세계를 조명하는 학술세미나가 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명문가의 전통을 이어 유혁의 고향 영암 신북은 대표적인 문화 유씨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그가 어렸을 때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민한 두뇌를 소유한 것도 이러한 명문가 후예인 것과 관계가 깊다. 유혁이 태어난 1892년은 나라 안팎이 봉건 지배층의 탐학과 청, 일본 등 외세의 침략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던 격동의 시기였다. 태어날 때부터 그에게는 질곡의 민족사의 거친 파도를 극복해야 할 숙명이 지워져 있었다. 훗날 남겨진 그의 사진 속 얼굴에는 민족의 장래를 한없이 고뇌하고 실천에 옮긴 혁명가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영의정을 연이어 배출한 가문의 전통을 이어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부친 흥인은, 나주 향교의 전교(典敎)를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한 유혁의 4子 인학은, 나주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조부의 나주 향교 전교 역임 사실을 들며 나주와 인연을 강조하곤 한다. 유혁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한학에 밝았다. 그가 훗날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 번역의 책임을 맡았다고 하는 얘기가 전하는데, 그의 뛰어난 한학 실력을 북한 정권이 필요하였음을 알게 한다. 유혁은 어렸을 때 외가인 거창신씨 집성촌인 영보리와 진외가인 해주 최씨 집성촌인 영암 구림에서 지냈는데, 이 동리들이 모두 조선의 명문거족들이 대를 이어 살았던 곳이어서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학문의 토대를 닦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전교 출신답게 기개가 강직한 흥인은, 일제강점기에도 집 울타리에 무궁화를 심어 민족의식을 표출하였고, 그의 아들 혁이 독립운동을 한 관계로 일본 경찰이 수시로 집을 드나들 때도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망건을 쓴 모습으로 꿈쩍 않은 채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기개가 아들에게 전해져 어렸을 때부터 혁의 언행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유년기에 한학을 공부하던 유혁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사실상 국권 상실 상태에 빠진 대한제국을 구하고자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특히 1907년 8월 1일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자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나주, 남평, 영암지역이 전남 중남부 지역 의병 전쟁의 무대였다. 특히 고향 모산리와 가까운 국사봉은, 심남일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 ‘호남의소(湖南義所)’ 사령부가 있었다. 의병들이 흘리는 피가 영암, 나주 벌판을 적셨다. 우석의 나이 16세 무렵이었다. 2년 넘게 처절히 전개된 영암 의병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주먹을 불끈 준 우석은, 힘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1909년 1월 적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그는 1913년 10월까지 만 4년 동안 공부하였는데 조선 학생이 많이 공부한 메이지대 전문부였다. 이 무렵 조선에서 건너온 유학생들은 대부분 낮에는 노동을 통해 학비를 벌고 야간에 학업을 하는 ‘고학생(苦學生)’이 많았다. 유혁도 이에 해당하지 않은가 추측된다. 대표적인 조선 유학생으로, 조만식·김병로·현준호·조소앙·정노식·이인(메이지대), 최남선·송진우·김성수·신익희·안재홍·장덕수(와세다대), 영암출신 김준연(도쿄 제국대) 등이 있었다. 유혁이 일본에 건너간 이듬해 대한제국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겼다. 이에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귀국하여 민족, 민중과 함께 투쟁하고자 하였다. 그는 귀국 후 이 지역의 여러 독립운동가와 접촉을 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1917년 광주에서 강석봉 등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 비밀조직 ‘신문잡지종람소’를 결성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강석봉과 유혁은 독립운동, 해방 후 건국준비 운동에 이르기까지 평생의 동지였다. 이로 미루어 강석봉 등 광주의 독립운동 세력과 유혁이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1920년 조선일보가 창간되자 지역 주재 기자로 활동하였던 그는, 농촌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보며 독립운동의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13년 유혁이 귀국하였을 때 조선의 농촌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였다. 일제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농촌의 가난한 소작농들은 기한부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있었다. 게다가 1920년부터 시작된 산미증식계획은 빈한한 한국의 농촌사회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1923년 유명한 암태도 소작쟁의가 일어나던 당시 평균 수확량의 40%를 내는 것이 원칙이었던 소작료가 70%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러한 농촌사회의 붕괴는 일제 식민지배의 모순에 비롯된 것이라고 유혁은 인식하였다. 그런데 유혁의 투쟁 노선의 토대는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였다. 그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시기를 일본 유학 시기로 생각하기도 하나 사실과 다르다. 일본에 사회주의 사상은 1887년 처음 소개된 후, 1910년 ‘대역사건’으로 쇠퇴기를 맞았다가 1917년 소비에트 혁명 이후 1918년 동경제국대학 학생들이 신인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일본 유학한 한국 학생들도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것이 이 무렵이다. 유혁 귀국 이후이다. 전남지역에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된 것은 광주 3·1운동 주동자로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갔다 귀국한 강석봉이 일본의 신인회를 모방하여 1923년 ‘신우회’를 광주에서 결성하였을 때부터였다. 강석봉과 가까이 지내던 유혁도 이 무렵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것으로 보인다. 강석봉과 함께 공산당 세포조직인 목포 야체이카 결성에 주동적인 역할은 같은 영암 출신 조극환, 유혁이었다. 조극환의 판결문에 그가 1925년 무렵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였다고 나와 있고, 유혁의 본인 진술 조사서에 1927년 6월에 후에 공산당으로 명칭이 변경된 M.L당에 가입하였다고 하였다. 목포 야체이카 결성은 강석봉이 주도하였는데 강석봉이 주도한 M.L당은, 레닌의 사상을 추종한 ‘화요회계’와 달리 민족독립을 최우선시한 자생적인 조직인 ‘서울회계’ 계열로, ‘화요회계’로부터 이념적으로 부르주아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화요회계를 주도한 박헌영이 해방 이후 김일성의 북한 공산정권을 추종하는 남한공산당(남로당)을 창당할 때 유혁 등의 서울회계 출신을 ‘반동’이라고 공격하였다. 이기홍의 증언에도 나와 있지만, 한국전쟁 때 광주에 들어온 박헌영계가 유혁 등을 ‘반동’으로 단정하여 그의 죄를 찾으려 혈안이 된 것은 이때의 사정을 잘 말해준다. 서울회계는 ‘사회주의적 민족주의’로 레닌 추종의 공산주의와 전혀 성격이 다르다.4) 한편 1920년대 초반부터 순천, 광주, 나주, 구례, 무안지방에서 일어난 소작쟁의가 항일농민운동의 발화점이 되었다. 1923년 2월 11일 순천농민대회연합회 창립총회가 개최된 데 이어 1924년 3월에 광주에서 전남도내 40여 단체 100여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전남노동연맹’이 조직되었다. 이 조직 결성에 유혁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25년 결성된 ‘민족해방자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유혁은 본격적으로 대외적인 활동에 나섰다. 이들 운동의 핵심인물이 강석봉이었다. 곧 강석봉, 김재명, 유혁 등이 농민운동의 대표급 지도자였다. 농민운동의 조직책이자 대표적 이론가로 이름을 날린 유혁은 여러 지역의 농민운동을 격려하고 다녔다. 신문기록에 나와 있는 것만 보더라도 1926년 7월 함평 청년회 6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고, 조극환과 함께 신간회 목포지회 창립일(1927.7.17.)에 특강을 하였다. 조극환은 ‘강역과 민족’, 유혁은 ‘사회운동과 신간회 사명’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영암 출신 인물이 목포 신간회 창립식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영암이 사회변혁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특히 “사회운동과 신간회의 사명”의 주제를 통해 유혁이 청년 사회운동의 이론가로 대중의 우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28년 6월 목포 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식 때, 유혁을 목포 경찰이 검속하고 있는 데서 그의 행동을 일제가 철저히 감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유혁을 여러 구실로 구속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1928년 8월 강석원 등이 창립한 ‘전남소년연맹창립대회’에 참여하였다 하여 금고 4월을 받아 복역하다가 ‘御大典’으로 1개월 감형되어 12월 29일 출옥하자마자 곧 경기도 경찰부에 끌려갔다. 그리고 이른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20여 일 조사를 받은 끝에 1929년 1월 17일 경성지법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의 죄목은 1927년 6월 조선공산당(유혁은 그가 가입하였을 때는 M.L당이었는데 뒤에 조선공산당으로 변경되었다고 진술)에 가입하여 전남도당 간부 및 목포 야체이카에서 활동 혐의로 1929년 7월 15일 징역 2년이 선고되어 복역하고 1931년 출옥하였다. 유혁은 출옥하자마자 영암지역 농민운동 조직 결성을 주도하였다. 곽명수, 김판권, 최판옥, 유혁 등이 영암 사회주의 운동을 활발히 하고자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농민 야학, 강습회를 조직하여 농민 계급 각성과 소작권 옹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가 적색노동조합을 거쳐 1932년 4월 18일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로 발전하였다. 물론 유혁이 이 조직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판옥을 책임자로, 교양부 김판권, 연락부 유용희, 출판부 곽명수로 임원진을 구성했다. 이들 단체의 조직 및 활동의 특징은 다음 표와 같다. <영암 농민운동을 이끈 단체>
이들은 1932년 유명한 영보 형제봉 농민항쟁을 이끌었다. 이 항쟁은 이웃 나주 공산면장 김상수가 영암 땅의 소작권을 신 소작인에게 양도하면서 구소작인을 격분시킨 것이 계기였다. 1932년 3월 13일 덕진면 운암리 청년회관에서 청년 수십 명이 모여 소작권 이전 횡포에 맞설 대책을 의논했다. 신 소작인들은 이들 청년을 고소하였다. 1932년 6월 3일 청년 70여 명을 비롯해 농민 수백 명이 형제봉에 모여 노동절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들은 영암청년회와 농민운동조합 회원들로, 형제봉에서 산유회(山遊會)를 개최하여 소작권 문제를 토론하였다. 산에서 내려온 100여 명이 붉은 깃발을 들고 신 소작권 이전을 성토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이들은 불응하는 지주와 신 소작인을 찾아가 실력행사를 했다. 이날 영암 경찰은 장암리 농민 10여 명을 검거 후 조선인 차림으로 변장하고, 덕진면 운암리, 신북면 명동리, 금정면 아천리를 접한 백룡산 일대를 포위하여 수십 명의 농민과 청년을 체포하였다. 그 가운데 73명이 6월 22일 예심에 회부되었다. 21명이 구속되고 52명은 불구속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하 최대의 항일농민운동이었다. 하지만 이 항쟁은 사회주의 운동으로 해석되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2018년 6명, 2019년 3명, 2020년 4명, 2021년 23명, 2022년 6명 등 최근 들어 이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60여 명이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단일 사건으로 최대의 서훈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영보 항일운동 전개과정>
<영보농민시위사건 주요 관련자 판결내용>
이들 주동자 및 가담자에 대한 형량 가운데 유혁, 김판권, 곽명수 3인이 징역 5년으로 가장 많다. 유혁은 1933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유혁은 세 번째 투옥되었다. 그가 징역 5년 형을 받은 것은 실질적인 주동자임을 알려준다. 형제봉 사건으로 구속, 투옥된 사람들 가운데 일제의 집요한 회유, 협박에 넘어가 전향서를 쓰거나 군청 직원, 면장 등의 직책을 맡아 변절을 하였다는 비판을 받는 이도 꽤 있다. 끝까지 정체성을 지켜낸 이는 유혁, 곽명수 2인이었다고 영암인들은 말한다. 출옥 후 유혁은, 강석봉이 목포에서 해운업을, 변극이 화순에서 금광업에 종사하며 독립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 알 수 있듯이, 일제의 가혹한 감시하에 일체의 대외적인 활동 대신 금광 채굴업에 종사하며 항일운동 세력을 비밀리에 관리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유혁은 곧 통일 조국 건설에 앞장섰다. 1945년 8월 17일 광주극장(현재 무등극장)에서 개최된 전남지방건국준비위원회 결성식에서 사회를 보았다. 그가 사회를 보았다는 것은 일제 말에 이미 여러 독립운동세력과 꾸준히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남건국준비위원회가 ‘치안대’ 결성문제로 일부 세력이 반발하면서 다음 달인 9월 3일 ‘건국준비개편대회’가 역시 다시 광주극장에서 열렸다. 이때도 사회를 본 유혁이 우익인사로 구성된 한민당 발기인 명단에 김시중(전남건준부위원장), 고광표(전남건준재무부장), 최흥종(전남건준위원장), 국기열(전남건준총무부장)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고함으로써 전남 건준의 주도권이 보수 우파에서 진보계열로 넘어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될 때도 김종선, 이익우와 함께 유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유혁은 건준이나 인민위원회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맡지 않았다. 그가 요직을 맡지 않음으로써 한민당 계열로 넘어간 보수파를 공격한 그의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유혁의 투철한 멸사봉공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유혁은 해방 공간에 좌, 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이념을 초월하여 통일국가를 건설하려 하였다. 그는 레닌 추종의 화요회계가 아닌 서울회계로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를 공산주의자로 생각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그가 1945년 9월 15일 조선공산당 전남도당 결성을 위한 준비 모임에 임시 위원장을 맡아보았기 때문이다. 이 조직은 처음에 서울회계(강석봉, 유혁)와 화요회계(박헌영, 윤가현)가 연합하여 결성하였으나 곧 주도권이 화요회계로 넘어가면서 김영재가 위원장, 유혁은 농민부장으로 유혁이 2선으로 물러났다. 유혁 등은 레닌 사상을 추종한 화요계로부터 변절자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조선공산당 전남도당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가 화요회계가 장악한 남로당계열 및 레닌 세력이 득세한 북한에 건너갈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실제 해방 공간 유혁의 활동을 보면 조선공산당보다는 광주 전남 최대의 좌우합작 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부위원장)’과 ‘전국농민조합총연맹(부위원장)’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사상이 좌, 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사상을 띠고 있음을 말해준다. 특히 한때 이승만이 주도한 우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는 것도 유혁의 사상적 기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때 ‘독촉’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면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반대하고 있었다. 유혁 역시 반탁에 앞장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혁이 김구·김규식·정인보 등 민족주의자들과 연계되어 민족 통일운동에 앞장섰다는 것도 유혁의 정치 노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특히 유혁은 대표적인 민족주의자로, 이승만정권에서 반민특위를 이끈 위당 정인보와 각별한 관계였다고 하는 것은 위당이 유혁의 고향 내력을 칭송하는 글인 ‘아천정기(我泉亭記)’에서 알 수 있다. 그는 남과 북에 각기 정부가 수립되어 민족이 분단되는 것을 온몸으로 막고자 하였다. 1948년 4월 김구가 북한을 찾아 남북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으려 한 직후, 북한에서 제의한 남북 노동당 합당을 상의하기 위해 북으로 갔다는 얘기가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실제 그가 북에 건너가 김일성을 만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때는 북한에서 박헌영이 부수상으로 김일성 정권의 2인자였다. 반 박헌영계열인 유혁을 북한 정권에서 대화의 상대로 인정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한편 남한에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조되면서 친일 부역 세력들이 유혁 등 민족주의 세력을 공산당으로 공격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광주 3·1운동을 기획한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인 김범수도 서북청년단으로부터 무수히 공격을 받았다. 유혁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한길상의 아들 한세원의 증언에 따르면 유혁도 우파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혁은 민족의 장래를 누구보다 고민하였다. 그가 이승만 정부 수립 후 초대 감찰위원장이었던 정인보와 수시로 만나고 있었다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유혁이 한국전쟁 당시 정인보와 함께 서울에서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는데 전쟁 발발 당시 유혁이 서울에 있었다는 증거이다. 반박헌영계의 선봉에 있던 유혁을 체포한 북한 당국은 정인보와 함께 북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유혁이 한국전쟁 때 강제 남북되었다는 사실은 북한에서 유혁을 만난 박병엽5)의 증언에서 확인된다. 역시 북한의 고위간부로 지내다 남한에 넘어온 북한 전문가 김남식도 유혁이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후퇴할 때 강제 납북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여러 증언과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그는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체포되어 북으로 끌려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한 연구자가 한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유혁이 자진 월북하였다고 추정하였는데, 이후 이 주장이 마치 사실처럼 여러 글에 반복되어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을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곧 북한 김일성이 추진한 남북노동당 합당에 유혁이 기여하였기 때문에 월북하였다는 것인데, 유혁은 기본적으로 북한 정권의 노선을 따르지 않았고, 더구나 반박헌영계로 한국전쟁 당시 광주에 주둔한 인민군들이 유혁의 죄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자진 월북하였다고 하는 것은있을 수 없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운동에 온몸을 바친 순수한 독립운동가·민족주의자인 유혁을 해방 이후 반대파들이 낙인한 ‘공산주의자’, 또는 ‘월북’ 주장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라 하겠다.6) 한편 강제로 북에 끌려온 유혁이 김일성·박헌영 정권에 쉽게 동화될 수는 없었다. 반탁을 주장한 이승만이나, 민족주의자 정인보 등과 가까워 레닌 사상에 기초한 북한 정권과 기본적으로 노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유혁이 북한정권에서 어떤 고위직을 맡았다는 증언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북한 공산정권에서 조선왕조실록 번역의 4분과 책임을 맡았다고 한다. 그의 뛰어난 한학 실력을 북한 정권에서 필요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혁은 조선왕조실록이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번역작업에 참여한 것이었다. 이를 가지고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게 북한 체제에 부역하였다고 판단한다면 옹졸한 생각이다. 북에 홀로 남은 유혁은 자식이 있는 전쟁미망인과 결혼하였으나 소생은 없었다고 한다. 그가 남한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여 일부러 자녀를 두려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고혈압을 앓은 그는, 치료차 주을온천, 금강산온천 등을 다녔다고 한다. 1966년 평북 선천 요양원에서 한(恨)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함경남도 평성시 하차면(손자 유수택은 ‘하고면’으로 기억하나 북한 소개 자료에 있는 ‘하차면’으로 나와 있다)에 그의 유택이 있다고 한다. 조부의 행적을 단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그의 장손 유수택은 2011년 모산리 생가에 기념 미술관과 흉상을 세워 조부의 빛나는 업적을 길이 역사에 남게 하였다. 고인돌을 세계유산에 등재하고, 마한 역사의 체계화에 앞장선 유인학(전 국회의원)은 그의 4남이다. 미술관 건립 당시 장손의 추도문의 일부이다. “(전략)모산리 생가에 돌을 쌓고 나무를 심었습니다. 연못도 팠습니다. 미술관을 짓고 생가터에 유물관도 지었습니다. 숨결이 살아 있는 할아버님의 흔적을 모두 모셔놓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한없이 뵙고 싶은 할아버님! 왜 고향에는 한 번도 안 오셨습니까? 못 오셨습니까? 이 손자의 눈에는 이슬이 맺힙니다.”
유혁 선생은 아직 미서훈 독립운동가이다. 그가 월북하고, 북한 정권에 협력하였다는 이유이다. 하지만 살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역사적 진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에게 ‘서훈’은 의미 없는 하나의 종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올바른 평가는 후세를 위해 필요하다. 1) 유혁의 출생연도에 대해 여러 기록이 있어 차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1928년 일경에 체포되었을 때 수감기록에는 명치 27년(1894년)생으로 나와 있고, 가족들이 펴낸 자료집에는 1892년으로 나와 있다. 음력과 양력, 또는 실제 출생과 호적 등재 시기의 차이 때문일 수 있다. 일단 가족들이 펴낸 자료집의 수록연대를 따랐다.
2) 가문 족보에는 용의(龍義)로 나와 있다. 곧 그에게는 혁(赫), 용희(龍羲), 용의(龍義) 등의 이름이 있었다. 3) 본 글의 작성에 오수열(「우석 유혁의 생애와 정치이념」, 『서석사회과학논총』 4-2, 2011)의 글과 유혁 선생의 장손인 유수택(전 광주광역시 부시장)이 작성한 「독립운동가 우석 유혁 선생」(2011)이 참고되었다.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만난 80이 넘은 장손의 조부에 대한 절절한 효심에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 없었다.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표한다. 4) 서울회계 출신들 상당수가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을 받은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5) 박병엽(1922-1998.9)은 전남 강진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월북하여 북한에서 노동당 중앙위원을 역임하는 등 북한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죽마고우로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무안 몽탄 출신 옥만호가 대만 대사로 나가 있을 때 만나러 대만에 건너왔다가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복역한 후 국내(분당)에서 거주하다 1998년 9월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는 출옥 후 해방 직후부터 북한 정권 초기 역사에 대해 많은 증언과 저서를 남겼다. 다만 그의 노년의 기억에 의존하여 구술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와 차이가 있기도 하나 대부분 사실로 확인되고 있을 정도로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유혁의 북한에서의 생활도 그의 진술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유혁의 손자 유수택은 우연히 박병엽이 성남에 거주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만나 북한에서의 조부의 행적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6) 유혁은 강석봉, 한길상 등 광주의 사회주의 활동가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특히 한길상 집안의 女가 유혁 가문과 혼인을 하는 등 두 집안은 교류가 활발하였다. 한길상의 아들 한세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우파들이 우석을 공산주의자로 공격을 하였다고 한다. 곧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반공과 친일이 상대를 공격하는 주된 수단으로 작동할 때 우석도 공격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경성의전 출신 독립운동가 김범수도 서북청년단으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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