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공모전 수상작] 호남이 낳은 세계 속의 한국인 게시기간 : 2023-08-1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8-08 11:1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원고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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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내가 ‘옥장’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도, 옥의 아름다움에 빠져든 것도 순전히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사진 속의 청춘남녀는 이제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답게 서로의 손가락에 커플링을 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커플링이 다름 아닌 옥반지였던 것이다. 중년을 훌쩍 넘어선 나 역시 옥반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한복과 자개장롱이 떠오르는 마당에 이십 대 젊은이가 옥반지를 낀 모습은 자못 신선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렇게 옥에 빠져들었다. 그렇다면 옥은 무엇일까? 옥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니 옛사람들은 옥을 천지의 정수이며 순결한 보석으로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부의 상징이자 미학적인 장신구의 역할을 했으며, 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례용기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우리가 흔한 말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옥석을 가린다’고 하는 것처럼 ‘옥’은 그야말로 좋은 것의 대명사와 같은 말이다. 그래서 부드럽고 고운 여자의 손을 ‘섬섬옥수’라 하며, 잘생긴 사내아이를 일컬어 ‘옥동자’로 부르고, 심지어 도가(道家)에서 ‘하느님’을 이르는 말인 ‘옥황상제’에도 ‘옥’이 들어간다. 이쯤 되고 보니 돌처럼 단단한 옥을 어떻게 가공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바로 전남 목포 출신의 옥장(玉匠)이었다. 우리는 흔히 오랫동안 한 가지 일을 업으로 해온 이들을 ‘장인’이라 칭하는데 그가 바로 옥을 다루는 장인 중의 장인인 세계적인 옥공예가 장주원 선생이었다. 그에 따르면 옥은 그 무엇보다 부드러운 빛깔을 띠면서도 적당한 굳기를 지녔기에 화려한 조각이 가능하다고 한다. Ⅱ. 금속세공사에서 옥공예가로의 첫걸음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00호 옥장 기능보유자인 선생은 1937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늘날 목포를 대표하는 예술인으로 꼽히는데 금은세공일을 하던 부친과 숙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눈썰미와 손재주가 남달랐다고 한다. 일례로 모교인 문태 고등학교의 모표(帽標)가 장주원 선생이 중학교 2학년 때 디자인한 것이 당선되어 사용되었을 정도로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부모의 권유로 19세의 나이에 결혼한 그는 무작정 상경해서 목조각 제작소와 초상화 교습소를 전전했고, 중고교 시절 악기 연주를 했던 경험을 발판 삼아 악단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갓 스물을 넘은 1959년에 금은세공장에 들어가 부친으로부터 배운 세공기술을 바탕으로 귀금속상가에서 일했는데 역시나 세공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가 운명적으로 옥을 만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타고난 손재주가 남다른 그에게 어느 날 깨진 옥향로를 수리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그는 훗날 그날을 회상하면서 부서진 곳을 접합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옥공예품을 보고 처음으로 막막함을 느꼈다고 한다. 세공사로서 명성을 얻은 그에게도 옥의 가공법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그가 옥공예에 모든 인생을 걸기로 한 것도 그래서였다. Ⅲ. 하늘이 내린 명장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도 생소한 분야를 독학으로 공부하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현실이다. 하물며 60년대에, 스승은 고사하고 교본 하나 없는 척박한 현실에서 옥공예에 뛰어든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의 아내는 ‘옥’만 아니면 된다면서, 옥 공예가의 길을 급구 반대했다고 한다. 아무리 영예로운 일일지언정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그가 금속세공사에 머물렀다면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는 누구도 남부럽지 않았을 테니 쉬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5년 목포시 죽교2동 19번지에 옥공예 방을 설립한 그는 상업적인 옥공예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단순히 옥을 가공하여 상품화하는 데 그쳤을 뿐 예술과는 무관할 때였다. 오히려 사업적인 측면에서 실패를 거듭하고서야 진정한 조형 미술로서‘공예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상경과 귀향을 반복하던 그는 1980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창작품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에 이른다. 각종 공예경진대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수록 옥공예에 관한 갈증은 깊어만 갔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 전이라 다양한 공예품을 접할 수 없었기에 그가 택한 방법은 대만의 ‘중정 기념당’에서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영감을 얻는 것만이 유일했다고 한다. 그가 TV 인터뷰에서 빵과 우유를 사들고 박물관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디어를 얻고자 했던 일화를 소개할 때는 실로 막막했을 그 심정에 나조차 먹먹해졌다. 1984년에 들어 <동아일보> 측에서 옥공예 초대전을 제의하면서 점차 그의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목포시 대성동에 작업장과 전시실을 신축하여 옥공예에 한층 전념하였으며, 특히 1991년에는 목포시 산정동 자택에 조형 전시관을 건립하여 그동안 제작한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척박한 현실에서 출발한 그였지만, 오천 년에 이르는 옥공예의 종주국이라 일컫는 중국에서조차 그의 공예품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하니 그가 기울인 노력이 얼마만 한지 짐작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중국 보옥석 협회가 2015년 5월 상하이에서 주최한 옥룡상 경선대회에 그가 총 8점의 작품을 출품했을 때였다. 그는 대상, 금상, 은상, 창작상과 특별상 등 무려 다섯 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중국 정부로부터 옥공예 최고명예인 ‘특급대사’ 칭호를 획득한 건 지금도 유명한 일화다. 당시 대상을 받은 ‘삼원관통향수병연결목걸이’는 특기인 고리연결기법과 회전관통기법을 사용해 만든 목걸이다. 옥으로 조각한 향수병 내부까지 실제로 비어있어 액체를 담을 수 있는 데다 연결한 줄은 하나의 원석에서 발굴하듯 이어져 당시 감정사와 경쟁자들이 “신의 기술이다”, “진정한 천공(天工)이다”라는 평을 내렸다고 한다. 옥룡상에서 외국인이 최고 장인으로 선정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으니 그야말로 옥공예에 있어 종주국이라 자부하는 곳에서도 명장 중의 명장으로 인정한 셈이다. 1968년 발견된 우리나라 유일의 백옥 광산인 춘천 백옥 광산을 비롯해서 지금은 옥이 나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라도 발품을 파는 그이지만, 그의 옥에 대한 도전은 수많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실패는 육체적,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크나큰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환주기법’과 ‘고리 연결 기법’, ‘회전 관통기법’은 그런 인고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탄생한 독보적인 기능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를 정교하게 깎아내는 기술은 중국에서 수천 년간 이어온 제작기법을 뛰어넘은 것으로 세계인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 꼽히는 ‘녹옥사귀용문해태향로’는 제작 기간만 9년 가까이 걸린 대작인데 시비나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동서남북, 네 귀퉁이에 만들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더구나 오묘한 것은 해태 입에 든 여의주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점이다. 턱 밑에는 상징적으로 고리를 겹고리로 조각하여 동서남북을 나타냈으며, 그 위에 뚜껑에는 24시간 수호한다는 의미로 스물네 마리의 해태를 조각했는데 이들 모두가 여의주를 물고 있다. 또한 꼭대기에는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는 의미로 해태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서로 희롱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어느 한 곳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장주원 선생은 먼 훗날 후손들의 교육적 자료로 쓰일 것까지 염두에 뒀다 하니 실로 그가 옥공예품에 담아낸 정신적 가치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작품 이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남 목포시 남농로 옥공예 전시관은 일생을 옥과 함께 살아온 그의 삶이 오롯이 투영된 곳이기도 하다. Ⅳ. 천공(天工), 옥빛으로 민족의 전통을 말하다 1996년 장주원 선생은 마침내 옥공예에 대한 기능을 인정받아 국가무형문화재 제100호 옥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오늘날 그는 이미 옥장을 넘어 천공으로까지 불리는데 이는 그가 단순히 공예가로서의 기술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 전통의 얼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서양의 대표적인 보석인 다이아몬드가 그 자체로 화려함을 외부로 드러냈다면 동양의 옥은 은은한 빛깔을 내부로 향한다. 동양에서도 중국의 옥공예가 각종 치장에 무게를 둔다면 우리나라의 그것은 있는 듯 없는 듯한 단아함으로 그 영롱함에 깊이를 더하는 식이다. 이는 한 국가의 정체성으로까지 이어지는데 그런 점에서 선생의 작품은 예술적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각종 장신구 수준에 그친 공예를 전통문화로 연결해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한 인간의 집념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옥은 그 자체로만 보면 특이한 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돌에서 그윽한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는 건 오롯이 인내심을 가지고 갈고 깎는 자의 몫이다. 그래서일까, 선생의 작품에서 유난히 많이 보이는 게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이중연결고리이다. 원석의 옥에서 일일이 쪼고 파내고서야 완성되는 이 기술은 외부뿐만 아니라 그 내부도 한결같아서 이미 세계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기예에 속한다. 그런 그를 향해 첸전평 중국공예미술학회 부회장은 “매우 뛰어난 그의 조각 기술뿐만 아니라 노력하는 자세와 인성 또한 중국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옥장 장주원 선생의 평소 신념은 ‘남이 못 만드는 거 하다가 죽자’라고 한다. 이는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독창적인 면에서 오늘날 중국 옥공예가에게 던지는 숙제와 같은 질문이기도 하다. Ⅴ. 나가는 말 사실 조선시대에도 옥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사진으로 첨부한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남양의 돌이 소리가 좋다는 구체적인 기록까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발전하지 못했던 것은 당시 중국에서 요구하는 공물 중의 하나가 바로 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옥의 채취는 백성에겐 커다란 짐이었을 것이다. 또한 후대에 이르러 다이아몬드와 유리가 들어오면서 옥과 옥공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던 것도 옥공예 기술이 사라진 원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목포가 낳은 천공 장주원 선생은 국내에서가 아니라 해외에서 더욱 찬사를 받는 예술가가 됐다. 누가 봐도 이 작품은 한국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한국적인 철학을 새기고자 했던 사람, 조형미와 창의적인 디자인을 고민해온 사람, 지금도 그의 작품은 감정가조차 매길 수 없다 하니 이제 선생의 기예와 정신을 온전히 이어가는 일만 남았다. 오늘날은 문화강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시대다. 국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는 일은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국가적 지원도 반드시 함께하길 바라본다. 활비비로 구멍을 뚫고 발판을 굴리느라 그의 원석 같은 검은 머리칼도 이제는 하얗게 세었다 세월을 먹어야 말을 하는 돌처럼 선생의 일생은 옥빛을 섬겨온 시간이다. 무지나 다를 바 없었던 척박한 분야를 세계의 유산으로 발전시킨 선생의 삶은 그야말로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그는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 대한 후대의 평가로 ‘옥 아니었으면 그 사람 생은 없었을 거야’라는 말을 들으면 좋겠다면서 옥 같은 그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호남이 낳은 세계 속의 한국인, 일평생 걸어온 선생의 뜻을 많은 이들이 기억해 주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참고자료 1. 한국문화재단 문화유산 이야기
2. 언론매체 인터뷰 기사 3. MBC 9사 공동기획 다큐 '명인' 9부작 中 2편 - (광주MBC) '코리아 환타지, 각도인(刻道人) 장주원'(11/23 방송분) 4. YTN 사이언스 - 한국의 옥, 다시 태어나다 2013년 방송분 집필자 최형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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