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처음의 계(契)처럼 게시기간 : 2023-03-15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3-03-13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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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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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때문에 광주극장에 간 사람들 1955년 2월 10일. 영하의 한파가 매서웠지만 많은 여성들이 광주극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어두운 표정이거나 화가 난 얼굴이었다. 영화를 즐기러 온 표정은 아니었다. 극장 자리는 거의 다 찼다. 그녀들은 국회조사단이 주최하는 공청회에 참석하기 위해 추위도 무릅쓰고 광주극장까지 왔다.
공청회에서 다룰 문제는 ‘계(契)’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전국적으로 사설계(私設契)가 생겨났다. 전쟁으로 일상은 어지러운 상황이 되었는데 전쟁이 끝나 일상생활로 돌아가게 되자 사람들은 생활 자금이 필요했다. 계는 해결 방법 중 하나였다. 서울에서는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還都) 이후 매일 늘어가는 것은 다방과 계”라고 할 정도로 계가 많이 생겨났다. 곗돈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그 이자가 월 1할 이상이어서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를 만들고 가입했던 이들이 주로 여성들이어서 ‘부녀계(婦女契)’라고도 불렀다. 광주에 사는 여성들도 계를 많이 만들었다. 여성 1명이 동시에 여러 개의 계에 가입했다. 이 곗돈으로 저 곗돈을 채워 넣어 이른바 ‘곗돈 돌려막기’를 했다. 그러다 보니 한쪽 계가 깨지면 다른 쪽 계들도 잇달아 깨지게 되어 있었다. 1954년 8월부터 1956년까지 계가 깨지는 ‘계 소동’이 지속되었는데 이 때 광주에 있는 계의 85%가 깨졌다. ‘곗돈’을 타는 날만 기다리며 다달이 계돈을 부었던 이들에게 ‘곗날’은 ‘목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계가 깨지면 그 희망은 산산히 부서져 절망으로 바뀌는 날이기도 했다. 이 일로 인해 광주 시내에서 여성들끼리 싸우는 일이 잦아지자 1954년 10월에 광주 경찰청에서 ‘사설계 해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곗돈을 받지 못한 여성들 사이에 있던 갈등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결국 국회에서 ‘광주지방 부인계 진상 조사단’을 꾸렸고 1955년 2월에 광주극장에서 공청회를 개최한 것이다.
1950년대 광주극장 전경,
<동아일보> 1954년 12월 21일 기사. ‘계’라는 말은 ‘개인들이 합의하여 모임을 만들어 미리 정한 곗날에 돈을 내고, 그날 걷힌 돈을 한 명이 가져가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곗날’은 ‘목돈을 만질 수 있는 날’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일종의 사금융(私金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계는 한말 또는 일제강점기에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애초의 계는 마음 맺어 서로 돕기 사실 계(契)의 역사는 매우 길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공존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끼리 스스로 만든 자치적 조직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계가 활성화되어 17세기 즈음에는 마을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이 참여하는 대동계가 결성되었고, 18세기 이후부터 문중계나 상여계, 송계(松契)와 같이 특정 목적을 위한 계도 생겨났다. 계의 가장 큰 목적은 ‘상호 부조(相互扶助)’ 즉 ‘서로 돕기’였다. 특히 혼인이나 상장례(喪葬禮) 같은 일에는 짧은 기간 동안 한꺼번에 다양하고 많은 물품이나 돈, 사람들의 수고가 필요했다. 죽음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어서 언제 많은 물품이나 돈이 들어갈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대개 계는 상장례 때 서로 도와주는 데에 힘썼다. 영암 망호정의 대동계에서는 계원이 상을 당했을 때 다른 계원들이 해야할 일들을 약조 곧 규칙으로 정했다. 계원의 부모나 아내가 죽었을 때 부의(賻儀)하고, 계원의 집안에 상이 나면 계 운영하는 일을 맡았던 하유사(下有司)를 불러 상유사(上有司)에게 알리게 하며, 상유사는 즉시 각 계원에게 부고를 돌리게 한다든가, 계원의 집에 초상이 났을 때 알리지도 않고 아무 이유 없이 호상(護喪)하지 않으면 벌로 술을 내게 했다. 상례나 장례를 치를 때에 할 일이 많아 사람들의 손을 빌려야 할 일들이 있는데 계원이나 마을 사람들이 그 일을 대신 도와주는 것이다. 계는 또 마을 풍속을 바로 잡고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도 했다. 순암 안정복은 일찍이 목천현감으로 부임하면서 그곳의 동계(洞契)에 대해 언급했다. 이곳에는 모두 동계(洞契)가 있다고 들었다. 무릇 한 동네 안에서 선함을 크게 드러내고 악함을 미워하는 일이 있다면 이로 말미암아 그 동네의 정사가 잘 닦여져서 교화가 밝아지고 명분이 바르게 서는 일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는 실로 옛사람이 행한 향약(鄕約)의 뜻이다.
그는 마을 사람끼리 합의하여 약속한 것을 바탕으로 풍속을 바로 세우고 질서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으로 부모에게 순종하고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기, 어른이나 윗사람을 능멸하지 않기, 술에 취해 난동 부리지 않기, 도둑질이나 간사한 짓 하지 않기 등과 같은 규약을 지키자고 했다. 아울러 이런 내용을 매달 1일에 크게 읽어 마을의 모든 이들에게 알리도록 조처했다. 영암 망호정 대동계도 ‘풍속을 바르게 하는 조항[正風俗條]’을 따로 두었다. 내용 몇 가지를 보면 이렇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형제 사이나 삼촌 조카 사이에 화목하지 않거나, 기타 사람의 도리를 어그러뜨리면서 마을에 전파하는 사람으로서 계원이면 영원히 내쫓고 다시는 계원으로 가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사풍(士風)을 더럽혀 부모나 형제까지 욕되게 하는 사람은 5개월 동안 계원 자격을 정지시킬 것. 마을 사람으로서 관청과 관련한 일에 걸려 들었는데 그 억울함을 펼칠 데 없는 이가 있으면 유사는 사람들에게 글을 보내 서로 구해주어야 한다. 이에 아무 이유 없이 참여하지 않는 계원은 그 집 노비를 대상으로 매 10대를 칠 것.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도리나 염치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이를 계원에서 배제하여 준수하도록 했다. 특히나 소송과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해 호소할 곳이 없는 이들을 위해 계원이나 마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호하는 일을 강조했다. 이런 것을 보면 예전의 계는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생존하고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 계에 돈을 내는 것은 1차적으로 마을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각 계원들이 규약에 정해진 대로 곗돈을 넣으면, 계 운영을 맡은 이들은 거두어 들인 곗돈을 계원이나 마을 사람들을 부조(扶助)하는 데에 썼다. 혼인이나 초상, 장례 같은 큰일이 생기면 물품이나 돈을 대주고 사람의 힘도 빌려주었다. 한편으로는 식리(殖利) 곧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일도 했다. 매년 강신일이 되면 돈을 빌려간 사람들은 원금과 이자를 내야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재산은 계 또는 마을 공동 재산이 되었다. 그 돈으로 논과 밭을 사서 소작(小作)하게 했다. 소작은 논이나 밭을 빌려 농사를 짓고 그 소득의 일부를 땅 주인에게 주는 방식이다. 계가 소유한 땅을 빌려주어 소작하게 하고 소작한 사람에게 받아 낸 소작료는 계의 재산이 된다. 곗돈, 이자, 소작료 소득 등은 계의 공동 재산이 되고, 이 재산으로 계원이나 마을 사람들의 생존, 생활에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돕는 데에 썼다. 계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여유 있을 때 조금씩 내어 모아두었다가 어려운 이가 있으면 도와주는 것. 아마 십시일반(十匙一飯)하자는 마음은 아니었을까. 돈만 모아 이자를 놓는 일에만 골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도 계는 돈이 있어야? 그렇다고 계가 서로 돕는다는 의도를 시종일관 지키지는 못했던 듯하다. 어떤 계는 다른 목적보다 오히려 돈과 관련된 규약에 주목하기도 했다. 대략 이 계는 이익을 도모하는 다른 계와는 달리 성의에 힘쓰고 처벌을 가볍게 적용한다. 죄에 해당하는 법을 어기거나 늦게 오는 것과 같은 부류에 대해서는 모두 벌을 부과하지 않고 다만 그 당사자에 대해서 무겁고 가벼움을 따져 질책한다. 돈을 거두는 일에 대해서만은 벌을 적용하기로 한다. 강신(講信)하는 날에 돈 10냥 이상은 마땅히 유사에게 의논하여 높은 벌을 부과하고, 5냥 이하는 중간 벌을 적용하고, 2~3냥을 거두지 않았다면 비록 이것이 적다하더라도 마땅히 작은 벌을 부과하여 각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할 일이다.
사정을 보면 계원끼리 정한 서로 돕기 관련 규약은 그런대로 잘 지켜진 듯하다. 계에 대해 특별히 정성을 기울이고 마음을 쓰도록 하려고 했다. 여러 가지 규약, 이를 테면 강신날이나 모임하는 날 늦게 오는 사람에 대해 벌을 주는 규약이 있었을 터인데 이런 것들을 잘 지키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가볍게 책망하고 넘어가려는 의도가 보인다. 규약 위반에 대해 가혹하게 벌을 주면 계원들의 마음이 멀어질까 그랬을까. 규약을 조금 어기는 일에 대해 관대하게 처리하자고 했다.
그렇지만 돈과 관련되는 일에는 단호하다. 벌을 강하게 적용하자고 한다. 10냥 이상을 내야 하는 사람이 그 돈을 내지 않는다면 수준 높은 벌을 부과하기로 했다.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내지 않으면 작은 벌이라도 주어야 한다고 했다. 돈을 내지 않는 사람이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용한다. 심리적 압박감을 주어 돈을 반드시 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경자년 기록에 ‘덕추는 2냥 8전인데 도망가서 (그 돈만큼) 잃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원래 계산대로라면 165냥 9전인데 2냥 8전이 걷히지 않아 163냥 1전만이 있다고 했다. 계원이 모두 참석하여 돈을 내야 하건만 덕추가 도주해버려 덕추 분의 곗돈이 걷히지 않았다. 아마 지금의 계라면 덕추가 내야 할 돈만큼 누군가 곗돈을 덜 타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분쟁이 생기거나 계가 깨지기도 할 터이다.
<병신년 계안> 중, 나주 회진임씨 창계후손가 소장. 처음의 계 마음으로 계(契)라는 글자는 ‘맺다’는 뜻이다. 뜻과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관계를 맺는데, 그 뜻이란 어려울 때,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 있을 때 서로 돕고자 하는 데에 있었다. 거기에는 같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잡고 잘 유지한다는 마음도 있었다. 재물이나 돈이 중간에 끼어 있기는 했어도 이것만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 1954년 12월 21일 동아일보는 광주의 계 소동을 기사로 다루면서 ‘광주시는 호남지방에서도 계의 역사가 가장 깊고 또한 그 세력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라고 썼다. 광주는 다른 지역보다 이른 시기인 조선초기부터 향약을 실행했다. 덕을 권하고, 예로 서로 사귀며, 서로 잘못을 일러 주어 고치게 하고, 어려운 이가 있으면 도와주려는 정신을 착실하게 실천해왔다. 계는 향약의 뜻을 착실히 이어받았다. 계의 규칙에 잘 담아냈다. 여기에는 재물, 돈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일상은 변한다. 병신년 계안에 ‘경자년에 여러 다른 조약은 한꺼번에 씻어버리고 때에 맞게 변통’한다고 했다. 계라고 변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다만 계의 초심까지 버리며 돈 계산(計算)에만 몰두하는 일은 재봐야 할 일이다. <도움 받은 글들> 한국학호남진흥원, www.hiks.or.kr/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자료관, http://archive.aks.ac.kr/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newslibrary.naver.com/ 오미일(2021), 「1950년대 사설계(私設契)와 지역 경제 -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 『한국사연구』 194. 유숙란(2006), 「1955년 광주 계소동을 통해 본 젠더관계」, 『사회교육과학연구』 9(1). 이해준(1990), 「조선후기 洞契․洞約과 촌락공동체조직의 성격」, 『조선후기향약연구』, 민음사. 이해준(2006), 「한국의 마을문화와 자치·자율의 전통」, 『한국학논집』 32.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영암향약』1,2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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