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무등독서회 결성을 주도한 곽이섭(郭以燮, 1928~1950) 게시기간 : 2023-03-22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3-21 09:33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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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풍향동 소재 광주교육대학교에는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의 항일운동을 기념하는 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탑이 건립된 것은 10여 년 전 일이다. 이 탑은 두 개의 탑신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나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다른 하나는 1942년 결성된 비밀결사 무등독서회를 조직한 빛나는 선배들의 항쟁을 각각 기념하고 있다. ‘무등독서회’를 사람들은 1942년에 광주서중 재학생·졸업생들이 조직한 항일운동 단체인 ‘무등회’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학생독립운동사가 광주서중의 전신인 광주고등보통학교 중심으로 서술된 것과 관련이 깊다. 무등독서회는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이 1942년 결성한 비밀결사이다. 이 단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연합국의 본토 상륙작전에 필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학생운동 단체와 성격이 다르다. 무등독서회 회원들은 사범학교 재학생이었기 때문에 해방 후 전남 교육계에 교사로 투신하여 전남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민족교육에 헌신하여 오늘의 전남교육의 기틀을 닦았다. 무안 출신으로 이 단체 창립에 앞장 선 곽이섭 전 목포 유달국민학교 교사를 통해 이들의 빛나는 항쟁사를 추적하고자 한다. 곽이섭은 무안군 현경면 양학리 병곡 (屛谷) 출신이다. 병곡은 신학1리에 해당하는 마을로, 창포만 주변의 5머리 중 ‘갈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즉 학이 마른 목을 축이는 형국을 하고 있는 곳이다. 병곡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마을 뒤에 있었다는 숲에서 비롯된다. 지금은 개간으로 대부분 밭이 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철룽이라 부르는 둔덕을 중심으로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상산 김씨, 현풍 곽씨, 밀양 박씨 등 세 성씨로 이루어졌다. 세 성씨는 독특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곽씨 가문에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면 박씨 가문에서 양자를 들이는 등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곳에 터를 잡은 입향조는 현풍 곽씨로, 처음에는 병산 기슭인 현재의 광산 김씨 세장산이 있는 곳에 터를 잡으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마을 앞 서당 너머 자리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곳이 창포만의 갯가에 위치하고 있어 좋지 않은 데다 호랑이 피해가 잦아 현재의 위치에 터를 잡았다 한다. 이 마을을 빛낸 현풍 곽씨로 곽이섭의 조부인 곽기영(1885-1967)이 유명하다. 곽기영은 송사 기우만과 면우 곽종석 등 당대의 성리학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기우만은 한말 의병봉기를 처음 주도한 인물이고, 곽종석은 ‘파리장서사건’ 서명운동의 대표를 맡은 인물이다. ‘파리장서사건’은 3·1 운동 후 심산 김창숙이 파리강화회의에 유림이 연대한 서한을 보내 일제의 조선 강점을 고발할 것을 제안하자, 곽종석이 서명운동의 대표를 맡고, 장서의 초안도 작성하였다. 김창숙이 장서를 들고 중국으로 갈 때 그 비용도 유림에서 지원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 때문에 징역 2년 형을 받고 대구 형무소에 투옥되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으로 나온 직후 순국하였다. 한주 이진상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처럼 일제의 침략에 정면으로 맞선 성리학자들을 스승으로 둔 곽기영은 향리에서 성리학을 깊이 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무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달려와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마을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우헌곽선생 기영 기적비’가 있다. 그런데 곽기영은 한학과 더불어 한의학에 조예가 깊었다. 기영의 아들 근원 곧 이섭의 부친은 1945년 11일 25일 광복되던 해에 42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의 묘소가 고향인 현경에 있지 않고 함평군 나산면 수상리 월현촌에 있다. 처음에는 현경 선영에 묘를 썼으나 조부가 아들의 묘를 명당을 찾아 옮겼다고 한다. 이섭은 자(字)가 성구(誠求)로 1928년 1월 1일 태어났다. 조부로부터 한학과 독립정신을 배워 어려서부터 항일 의식이 깊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가 광주사범학교에 진학한것은 제자 양성에 주력한 조부의 영향 때문이었다. 곧 독립의 길을 교육을 통해 찾으려 하였다. 그는 광주사범 심상과 4회로 1941년 4월 입학하였다. 같은 무안 출신 옥대호, 함평 출신 허종철과 함께 옥대호의 자취방에서 형제처럼 지냈다. 옥대호는 1984년 무안청계중 교감을 역임하였다. 옥대호는 교직에 있었을 때 고문 후유증으로 어눌했지만, 독립운동가로서의 기대는 대단하였다고 한다. 곽이섭의 광주사범학교 학적부에는 성격이 명랑 활달하고, 사교적이라고 나와 있다.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도 동료들에게 자주 농담을 할 정도로 낙천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통솔력도 있고 말을 명료하게 한다고 학적부에 적혀 있다. 그가 리더십을 지니고 상대를 감동시키는 능력이 뛰어남을 말해준다. 학적부에는 그를 평하기를 ‘표리(表裏)가 있다’, ‘사상적으로는 선도할 필요가 있다’라고 적혀 있다. 필자는 이 구절을 보고 당시 사범학교 일본인 교사가 곽이섭 등 무등독서회 관련자들을 정확히 관찰하고 있었다고 여겨졌다. 즉 표리(表裏)가 있다는 말은 ‘명랑 활달하다’는 성격 설명과 모순이다. ‘명랑 쾌활’한 사람들은 대체로 감정을 잘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곽이섭이 ‘표리’가 있다고 학적부에 적힌 것은 그가 활달한 것 같지만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느낌을 담임 교사는 느꼈음을 알 수 있다. 옥대호의 학적부에 있는 ‘음울(陰鬱)’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1943년∼1944년 무렵에는 무등독서회가 조직적으로 항일 운동을 준비하며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곧 곽이섭은 겉으로는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깊은 내면으로는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굳은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감정이 표정으로 나타난 것이라 여겨진다. 담임 교사는 이들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교내외 행동에서 불온한 모습이 자주 보이므로 사상적으로 선도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곽이섭은 검도, 옥대호는 유도부에서 활동하는 등 운동을 같이하였다. 이때 광주사범에는 무안 출신들이 비교적 많았다. 지금은 무안, 신안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당시는 신안이 무안의 행정구역이었다. 무안은 염전과 농업이 발달하여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 사정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인데다, 서남해 해상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개방적 요인이 많아 다른 지역으로 유학을 떠난 학생이 많은 편이었다. 곽이섭은 무안향우회를 만들자는 옥대호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허종철도 역시 찬성하여 다른 무안 출신 동료들을 만나 동참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렇게 해서 1941년 심상과 4회로 입학한 옥대호 등 무안 출신 사범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무안향우회가 결성되었다. 그때가 1학년 여름방학 직후인 1941년 9월 무렵이었다. 이때 참여한 무안향우회 인물은 옥대호, 안동영, 이경채(광주학생독립운동 이경채와 동명이인), 곽이섭, 허종철, 정병광 등이었다. 이들이 향우회를 결성하려 한 데는 독립운동을 준비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곽이섭은 조부를 통해 독립 의식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었고, 옥대호는 그의 둘째 형 평호가 만주에서 임시정부의 조직책으로 활동하고 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한 일본군의 공격으로 충칭으로 밀려난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 역시 1940년에 충칭에 터를 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주석으로 선임된 김구가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통합을 이루어 독립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같은 해 9월 임시정부 직할부대로 광복군을 창설해 국내외 청년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다. 옥대호와 곽이섭은 당시 임시정부 연락책과 연락이 되고 있었다. 이들이 무안향우회를 결성한 것은 단순히 친목 도모가 아니라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기 위한 사전 단계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곽이섭과 옥대호는 결전의 시기가 다가왔음을 인식하고 임시정부와 연계된 비밀결사조직을 만들려 하였다. 1942년 2월 무안향우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독서회를 결성하였다. 무등독서회가 탄생한 것이다. 이 모임은 임시정부와 연결하여 연합군의 상륙을 돕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며 항일 운동을 모색하였다. 특히 1943년 6월 만주 봉천에 거주하고 있던 임시정부 연락원 옥평호(옥대호의 둘째형)로부터 일본이 망하고 조국이 해방된다는 말을 듣고 연합군을 맞이할 구체적 계획도 수립하였다. 이러한 목표와 더불어 군사훈련 반대 투쟁도 하였다. 당시 광주사범학교에는 일본군 사등병(士等兵) 1명, 배속장교 중위 1명, 대좌 1명이 배치되어 군사교육을 강제로 시키고 있었다. 곽이섭 등 무등독서회 회원들은 한국 학생들이 잘못이 없는데도 ‘엎드려 뻗쳐’ 등을 시키고 목검으로 학생을 구타하자 군사 훈련 시간에 침묵 부동 연좌로 훈련을 거부함으로써 일본인 장교의 사과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한편 일제는 패전이 다가올수록 수업 대신 근로봉사라는 이름으로 매일 노동력 동원을 하였다. 이들은 송정리 군사 공항 건설하러 다녔는데 일부러 천천히 걷는 등 태업을 하였다. 우리가 공부하러 온 것이지 일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공공연하게 태업을 하였으며, 과로, 질병을 핑계로 교대 결석 등을 주동하였다. 그가 3학년 때 질병으로 5회, 4학년 때 질병으로 30일의 결석을 하였다. 4학년 때인 1944년에 노골적으로 결석을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1944년 10월 전국 학도대 결성 임무를 지닌 전북 순창 출신 홍완표가 전북 경찰에 체포되어 무등독서회의 실체가 드러났다. 홍완표는 같은 마을에 사는 집안 아우 홍창기1)와 함께 조직을 확대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걸렸다. 홍완표가 체포될 때 무등 독서회 명부가 일본 경찰의 손에 넘어가 조직원들이 모두 검거되었다. 홍완표가 체포된 사실도 모른 채 곽이섭 등은 교실에서 학우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무장봉기의 기회를 보자고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아들 곽수민은 증언한다. 곽이섭은 그림 그리기, 기타 연주 등 예능에 소질이 있어 밤마다 몰래 태극기를 그려 액자 뒤에 숨겨 놓았다 한다. 하지만 다른 자료에는 수업이 끝나고 청소 작업 중 전남 경찰부 고등계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의 학적부에 4학년 때 구인으로 60일 결석하였다고 나와 있다. 곽이섭이 10월 말 전후로 체포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10월 2일 체포된 옥대호보다 약간 늦은 셈이다. 이는 먼저 체포된 동지들이 끝까지 비밀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목은 ‘비밀결사조직의 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이다. 이들은 광주, 나주, 순창, 목포, 전주 등 여러 경찰서로 분산되어 조사를 받았다. 일본 경찰은 이들의 배후에 임시정부가 있다고 단정하여 관련자들을 경찰서별로 분산하여 조사하였다. 무등독서회 조직 책임자인 옥대호는 고향 무안에서 체포되었지만, 홍완표를 체포한 전북 경찰부로 이송되어 조사받은 후 다시 전남 경찰부로 옮겨져 조사를 받았다. 곽이섭은 사범학교 교실에서 광주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된 후 전북 경찰부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장성 경찰서로 넘겨졌다. 이들이 체포된 시기는 1944년 10월이었으나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 거의 11개월 동안 미결수 상태로 재판에 넘겨지지 않은 채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 경찰이 무등 독서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전국 사범학교 연합 학도대라는 조직과 광주사범학교 등 7개 학교의 졸업생, 재학생이 임시정부와 연계된 사실이 밝혀져 전모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곽이섭 등은 구속되어 처음 2개월 동안 가족과 연락도 하지 못한 채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아 거의 기아 상태에 있었다. 이들은 몽둥이 구타는 물론, 물고문, 전기고문, 불인두 지지기 등 각종 고문을 하면서 조직의 상부 인사, 조직원의 포섭 대상자 등을 밝힐 것을 강요하였다. 미군 폭격기의 공습이 있을 때는 방공호에 가두어 놓고 기관총을 겨누며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무등독서회 회원들 가운 일본 경찰의 온갖 고문과 협박에도 단 한 사람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만큼 무등독서회 회원의 항일 의지는 강하였다. 이 가운데 회의 대표를 맡은 옥대호와 곽이섭에 가해진 고문은 더욱 심하였다. 곽이섭은 원래 성격이 밝아 교도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동료 동지들에게 농담을 하여 분위기를 북돋는 역할을 잘하였다. 그러다 보니 곽이섭은 간수들로부터 더 심한 고문을 받았는데 억지로 콩을 많이 먹여 이질을 앓아 두발이 빠졌다고 한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곽이섭의 사진이 머리가 빠져 있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해방이 된 이튿날 8월 16일 밤에 풀려난 곽이섭은 업혀서 겨우 집에 돌아왔다. 그의 부친 근원은 아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아 시름시름 앓다가 불과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곽이섭은 다른 무등독서회 회원들과 함께 1945년 8월 16일 출옥하였다. 1년 가까이 미결수로서 온갖 고문을 받았던 그는 학교에 복학하였다. 옥대호는 1944년 10월 2일 무안 몽탄 사창 본가에 있다가 지서장에 의해 목포 경찰서로 연행되어 3일간 구류를 살았다. 죄목이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그리고 일본 경찰은 사건을 임시정부와 연결시켜 독립운동 세력의 일망타진을 꾀하고 있었다. 출옥 후 이섭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사범학교에 복학하였다. 사범학교에서는 이들을 사고로 인한 장기결석자로 분류하여 놓았다. 이들이 정상적으로 5년제 과정을 마쳤다면 1945년 3월에 졸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수업 일수도 부족하고 교생 실습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1945년 9월에 복학하여 이듬해 1946년 1월 14일에 졸업하고 꿈에도 그리던 교단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때 졸업한 곽이섭은 1946년 4월 고향인 무안 현경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나이 갓 스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때 그가 현경국민학교 6학년 담임교사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처음 가르쳤던 제자를 곧 아내로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정정자라는 총명한 제자에 이끌린 이섭은 제자가 졸업한 후 정식 청혼을 하였다. 정정자의 나이는 1930년생으로 이섭과 불과 두 살 차이였다. 아들 수민이 1948년생이니 제자가 졸업한 이듬해 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곽이섭은 아내 정정자와 이제 걸음마를 하는 아들의 재롱을 떠는 모습을 보며 잠시 행복을 느꼈다. 곽이섭은 현경국민학교에서 4년 근무한 후 1950년 4월 목포 유달국민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그러나 그는 같은 달 곧 사망하였다. 족보에 따르면 그의 사망 연월일은 1950년 3월 10일이다. 족보 기재가 음력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양력으로 1950년 4월 27일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 수민이 세 살 때, 그의 나이 겨우 25세였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있는 인물 사진이 그의 모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사진이다. 이 사진은 광주사범학교 검도부로 활동할 때 검도복을 입고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을 보면 그가 매우 튼튼한 체구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가 1년 가까이 고문을 받아 피골이 상접하여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된 것이다. 비록 그의 조부가 유명한 한의사였지만 손자의 건강을 지켜주지 못하였다. 그가 일찍 사망한 것은 1년 가까이 미결수 상태에서 받은 온갖 고문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결국 곽이섭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하다 사실상 옥사(獄死)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국가보훈처에는 그의 사망 연월일이 196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망 연월일이 이렇게 적힌 데는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이섭의 부친 근원이 40대에 사망한 데 이어 손자 이섭이 이른 나이에 죽자 조부 기영은 이 사실을 숨긴 채 호적 정리를 하지 않았다 한다. 아들과 손주가 본인보다 앞서 떠난 것을 부끄럽게 여겼던 옛 성리학자의 모습이다. 곽기영이 1967년 사망하자 이섭의 배우자인 정정자는 비로소 그의 남편의 사망신고를 하였다. 이섭의 사망 연월일이 호적에 1968년으로 나와 있는 까닭이다. 이제는 호적은 물론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있는 사망 연월일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한편 이섭의 아들 수민은 세 살 때 부친이 사망한 후 독립운동가 후손의 슬픈 운명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수민은 무안 현경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사범병설중(후에 목포동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어 미술교사의 꿈을 지녔던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광주사범학교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을 좌익으로 공격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교직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꿈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광주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곽이섭 등의 공적이 적혀 있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1945년 3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하여 1944년 10월에 체포된 역사적 사실과 달리 기록되어 있는 등 이들의 빛나는 항일운동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특히 미결수 신분이라 판결문도 남아 있지 않아 이들이 그들의 공적을 인정받으려 할 때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더구나 수감 기간도 사실보다 짧게 정리되어 이들 모두 ‘대통령표창’에 그치고 있다. 한편 옥대호 선생은 공적 사실이 잘못 적혀 있고, ‘대통령 표창’이라는 낮은 등급을 바로 잡으려 동분서주하다 그만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곽수민은 비록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었지만 어느 후손보다 부친의 자랑스런 애국정신을 선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국화가인 그는, 2022년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광주학생독립기념관에 100호 크기의 독도를 그린 대형 그림을 기증하여 부친의 뜻을 잇고 있다. 곽이섭은 해방된 조국에서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교사의 길을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23세로 순국하였다. 그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을 때, 무등독서회원 노동훈 선생이 쓴 묘비명을 옮긴다. 조국을 평화통일로 완전독립
조국의 민족단결과 번영으로 세계 일등국가 건설을 위하여 한 평생을 바치셨으니 이제 조국의 품에 편히 잠드소서 1) 홍창기는 광주사범학교 심상과 5회로, 무등독서회 조직이 노출되었을 때 체포되어 개성소년형무소에 갇혀 있다 해방을 맞았다. 그는 사범학교에 복학하였으나 일제에 협조한 사범학교 선생이 미군정과 연결되어 사범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자 이를 반대하는 일에 앞장섰을 정도로 민족의식이 뚜렷하였다. 그는 일체의 공직에 나아가지 않은 채 그의 지조를 지켰다. 그가 환갑을 맞았을 때 같은 심상과 동기인 오병문 교육부 장관 등 동기들이 엄청 시골에 왔다고 그의 아들이 증언한다. 이는 오병문 장관 등이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동기의 뜨거운 애국심을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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