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고인돌 왕국, 전라남도 게시기간 : 2023-04-05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4-03 17:4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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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적, 고인돌[支石墓, Dolmen) 청동기 시대의 특징은 청동이라는 새로운 재질로 된 금속의 사용이다. 청동은 잘 알다시피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동상을 만들 때 많이 사용하는 금속재료이다. 한편 청동과 함께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그 수가 워낙 많은데, 현재까지 전세계에 5만여 기가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전라남도 지방에는 2만 기 이상의 고인돌이 있다. 그 밀집도는 세계 최고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도 있다. 그래서 전라남도를 ‘고인돌 왕국’이라고 한다. 서울 근처에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는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고인돌이 수십 개씩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발이 급속도로 이루어져 무더기로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다. 아파트나 골프장을 짓는 것도 좋지만 문화에 대한 애정과 식견을 조금만 가지고 있으면 상당수의 고인돌이 보존될 텐데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간혹 고인돌이 수만 개가 넘는다는데 왜 내 눈에는 잘 띄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고인돌이라고 하면 밑에 받침돌이 있고 위에 큰 돌이 올려져 있는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인돌은 형태에 따라 탁자식, 바둑판식(기반식), 개석식, 위석식 등으로 구분한다. 판돌을 세워 탁자 형태로 만든 탁자식은 강화도를 비롯하여 북쪽에 많이 있다. 반면, 받침돌 4개를 일정하게 고이고 있는 바둑판식은 대개 남쪽 지방에 많이 있다. 개석식은 언뜻 보면, 벌판에 큰 돌이 덩그렇게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채석장이 아닌 벌판에 큰 돌이 있을 경우, 일단 고인돌이라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고인돌은 대부분 족장들의 무덤이었다. 이로 보아 청동기 시대가 지배-피지배 관계로 이루어지는 계급사회였음을 보여준다. 거대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의 인원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런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과 그 일에 동원되는 사람들 간에는 분명히 상하의 차이가 있었다. 계급사회였다는 뜻이다.
고인돌이란? 고인돌은 선돌과 함께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거석문화란 자연석 또는 가공한 돌로 기념물이나 무덤을 만들어 이용하는 문화를 말한다. 거석[Megalith]이란 하나의 구조물이나 기념물로 사용된 돌이며, 거석물[Megalithic]은 돌로 숭배 대상물을 만든 구조물이란 뜻이다. 세계의 거석문화는 고인돌을 비롯하여, 선돌[立石, Menhir], 열석[列石, Alignments], 환상열석[環狀列石, Stone Circie], 돌무지무덤[石塚, Carin], 석상[石像, Stone Statue] 등으로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거석문화는 북유럽 남쪽에서 서유럽, 남유럽에 걸친 대서양 연안 지역, 지중해 연안과 흑해 연안,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인도양 연안 지역과 동북아시아 등 태평양 서안 지역까지 분포되어 있다. 한국 고인돌의 축조는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즉 기원전 1200년에서 기원전 200년 무렵까지 약 1천 년 동안 이어졌다. 고인돌은 주로 청동기시대의 무덤이지만 일부는 집단의 특정 행위를 위한 의례용으로 축조되기도 하였다. 즉 의례용 고인돌은 벼농사와 같은 농경이 가능해지면서 일정 영역에 정착하게 되고, 그에 따라 혈연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집단을 이루게 되면서 그 집단의 의례 행위를 위해 축조되었다. 이 행위는 공동체사회의 힘의 결집과 협동 단결을 이루면서 사회적 통합과 집단의 응집력을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의 고인돌은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만들어진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 문화를 함축적으로 집약하고 있어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화유적이다. 고인돌의 분포 한국은 세계적인 고인돌 밀집 분포지역이다. 그중에서도 전라도 지역에 고인돌이 가장 많고 밀집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 고인돌 통계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고인돌의 분포는 다음 표와 같다. 【표 1】 최근 고인돌 분포 통계표. 출처: 세계유산 화순고인돌 유적 누리집
이 통계에 의하면 전국 35,966기 중 전라도 지역에 24,529기가 있어 전국 고인돌의 약 68%가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남도만 보아도 63%에 이른다. 따라서 고인돌이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한 지역은 전라도, 그중에서도 전라남도임을 알 수 있다. 한국과 인접한 중국 랴오닝 지역에 750여 기와 일본 규슈 지역에 6백여 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북아시아 다른 모든 지역에 있는 고인돌을 다 합친 것보다 전라도 지역 내의 고인돌 수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고창·화순·강화 고인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세계유산은 1972년 유네스코(UNESCO,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에 의거하여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유산을 지칭한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선사시대 유적은 그리 많지 않다. 등재 기준 제3항에 따르면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이어야 한다. 고창·화순·강화(전북 고창군 죽림리·도산리 고인돌군/ 전남 화순 효산리·대신리 고인돌군/ 인천 강화의 부근리·삼거리·오상리 고인돌군)의 고인돌은 바로 그 희귀성, 역사성 그리고 특수성 등의 여러 측면에서 “아주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으로 평가되어 2000년 12월 국제연합 교육과학 문화기구(UNESCO)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전 인류를 위하여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탁월한 세계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으로 공인되었다.1) 고창·화순·강화지역의 고인돌은 한국에서도 가장 밀집도가 높을 뿐 아니라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밀집도는 세계적으로 사례가 드물다. 그 숫자가 방대할 뿐만 아니라, 탁자식, 바둑판식 등 형식도 다양하다. 또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알 수 있는 채석장도 있어서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 및 성격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증거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세계 거석문화는 영국의 스톤헨지나 프랑스의 열석과 고인돌이 있어 대서양 연안지역이 거석문화의 중심지뿐 아니라 발생지로 알려져 있다. 이제 한국 고인돌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우리나라 또한 세계 거석문화 중심지 중의 한 곳으로 세계가 인정하고 평가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세계 유산 화순 고인돌 유적 화순고인돌 유적(국가 사적 제410호,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동헌길 23 소재)은 영산강 지류인 지석강 주변에 형성된 넓은 평야를 배경으로 지금부터 3000년 전에서 2500년 전을 전후한 시기인 청동기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남쪽 산기슭을 따라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를 잇는 보검재(일명 보성재, 해발 188.5m)의 계곡 일대 해발 45~120m 사이 약 5km에 걸쳐 596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4㎞ 주변에 50개 군 400여 기가 밀집 분포되어 있다. 그래서 총 1,000여 기 이상으로 영산강 유역에서는 가장 많이 밀집된 것으로 보고 있다. 1995년 12월 당시 국립목포대학교 이영문 교수가 처음으로 발견하여 학계에 보고되었다.2)
【표 2】 화순고인돌 유적 군집별 분포현황
화순고인돌 유적의 특징으로는 첫째, 좁은 지역 내에 고인돌이 집중 분포하고 있으며 둘째, 덮개돌의 무게가 100톤 이상 되는 커다란 고인돌 수십 기와 200톤이 넘는 고인돌이 있는 점, 셋째, 주변의 자연환경 및 보존상태가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되어 온 점, 넷째, 덮개돌을 채석한 채석장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 고인돌 축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채석장은 각각의 고인돌군 위쪽 산등성 사면(斜面)에 짝짓듯이 있어, 채석하여 아래로 이동하기 편한 지형의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축조했는지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요인들이다. 고인돌 축조에 사용된 바위는 이 지역 백악기층인 응결응회암(화산재가 쌓여서 굳은 암석)에서 산출된 것이며 응회암이 땅거죽에 드러나 있는 이른바 노두(露頭)가 4㎞에 걸쳐 나타난다. 덮개돌로 응결용회암을 사용한 것은 퇴적암인 응회암이 판상으로 쪼개지는 풍화 특성을 활용한 것이다. 그런 특성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 감투바위 채석장이다.
한국 최대=세계 최대의 고인돌 - 춘양 대신리 핑매바위 고인돌 핑매바위 고인돌지구는 춘양 대신리 지동마을에서 보검재로 올라가는 산비탈을 따라 133기가 분포되어 있다. 그중에서 핑매바위 고인돌은 산기슭 약간 높은 대지상에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고인돌이다. 각시바위 채석장 아래에 우뚝 서있는 고인돌의 덮개돌은 길이 7.3m, 폭 5.0m, 두께 4m, 무게 200여 톤이 넘는다. 이는 실로 세계 최대 규모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이 전남 화순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음이 신비롭다. 덮개돌 오른쪽 윗면은 떼어낸 흔적이 뚜렷하고 덮개돌의 아랫면도 다듬은 흔적이 분명하다. 그 밑에 5개의 고임돌이 있다. 또 시옷(ㅅ)자 지붕을 가진 덮개돌 오른쪽 위에는 길이 40cm, 너비 25cm 정도의 타원형 구멍이 파여 있다. 이 고인돌은 돌을 주워 던진다는 의미에서 핑매바위라 이름 붙여졌다. 마고할매가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를 짓기 위해 거대한 돌들을 치마에 담아 운반하다 떨어진 돌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시기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것인데 운주사는 고려시대에 지어졌으니 시간이 거꾸로 흐르면 모를까 앞뒤가 맞지 않다. 다만 인근에 있는 독특한 사찰인 운주사와 연결되어 있는 전설이라 흥미롭다. 또 고인돌 위 구멍에 왼손으로 돌을 던져 들어가면 시집, 장가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그밖에도 장군바위 전설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크기만큼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덮개돌 정면 중앙에 “여흥민씨세장산(驪興閔氏世葬山)”(1929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화순 고인돌 유적 둘러보기
이상 살펴본 감투바위, 핑매바위 외에 다른 고인돌에 대하여 ①대신리 발굴지, ②마당바위, ③달바위, ④관청바위, ⑤괴바위 고인돌군 순으로 각 고인돌군의 특성과 대표적인 고인돌에 대하여 아래에 사진들과 함께 설명을 붙였다. ① 대신리 발굴지
② 마당바위 고인돌군
③ 달바위 고인돌군
④ 관청바위 고인돌군
⑤ 괴바위 고인돌군
1) 한국의 고인돌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의 과정과 관련 유적에 대한 설명은 이영문, 「화순 고인돌의 세계유산 의미와 등재과정」(『향토문화』 41집, (사)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22년)에 상세하다.
2) 이 고인돌은 능주목 학술조사 일환으로 실시한 주변 일대의 고고학적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이영문, 「능주목의 고고학적 배경」(『능주목의 역사와 문화』 목포대학교박물관·화순군, 1998년)에 소개되어 있다. 이하 화순 고인돌 유적에 대하여는 이영문, 『세계문화유산 화순 고인돌』((재)동북아지석묘연구소, 2004년); 『고인돌, 역사가 되다』(학연문화사, 2014년); 이영문·신경숙, 『고인돌, 세상과 소통하다–세계유산 화순 고인돌 이야기-』(지성사, 2014년) 등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고인돌 관련 소중한 자문을 해주신 이영문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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