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삶의 풍파(風波) 앞에 꺾어 든 매화 가지 하나 게시기간 : 2023-04-0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4-04 16:2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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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박사과정 때의 일이다. 지도교수님은 삼당파(三唐派)[이달, 최경창, 백광훈]의 시를 연구하던 분이셨다. 한동안 진행해 오던 삼당 문집의 번역을 마무리 하실 때였다. 어느 날 나를 부르시더니 두툼한 출력물을 주며 한 번 읽어보라고 하셨다.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원문 대조, 오탈자 교정, 번역문 검토 작업을 했다. 작업을 마무리 할 때였다.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누구의 시가 가장 좋으냐고 물으셨다. 나는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의 시가 가장 좋다고 말씀드렸다. 뜻밖에 선생님도 최경창의 시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다. 논리를 중시하는 선생님은 왜 좋아하는지를 물으셨다. 나는 이달(李達, 1539~1612) 시는 짙은 서정이 마음을 격동시키기도 하지만 때로 자기 한(恨)으로 떨어지고,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의 시는 곱고 호소력이 있지만 유약(柔弱)함이 많은 반면, 최경창의 시는 서정성이 풍부하면서도 꼿꼿한 자아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고 답했다.(이것은 지금의 정리된 서술이고 그때는 매우 어설프게 말했다.) 선생님은 최경창 시에 대해 보다 상세한 말씀을 해 주셨다. 지금도 최경창의 시를 볼 때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던 그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최경창은 이달, 백광훈과 함께 16세기 시풍 변화를 이끈 인물이다. 이전에는 주지주의적이고 사변적인 송시풍(宋詩風) 시가 좋은 시로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최경창 등에 의해 다양한 인간 감정에 주목하고 함축을 중시하는 당시풍(唐詩風) 시가 각광을 받게 된다. 당시풍 시의 창작은 앞서 호남의 이후백(李後白, 1520~1578), 박순(朴淳, ?~1402) 등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최경창은 이후백의 영향을 받았다. <別徐君受>
고개 돌려 어촌을 보니 주막 깃발 날리는데 말 위에서 나직이 읊조릴 때 반쯤 취하였네 무한한 나그네 슬픔 언제나 다하려나 저물녘 봄풀 우거진 강남땅을 지나가네 回看漁戶颭靑帘 馬上微吟酒半酣 無限客魂何處斷 夕陽芳草過江南 최경창은 1539년(중종34)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났다. 1551년 백광훈과 함께 이후백을 찾아가 시를 배웠고 양응정(梁應鼎, 1519~1581)의 문하에도 출입했다.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이래, 31세 되던 1568년(선조1)에는 문과에 합격하여 북평사,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1576년 종사관으로 중국에 다녀왔으며 영광군수에 부임하였다. 1582년 비변사의 천거로 종성부사(鍾城府使)에 특별 제수되었으나 논박(論駁)을 받아 파직되면서 다시 직강에 제수되어 상경(上京)하던 도중 경성(鏡城) 객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혼(成渾), 이이(李珥), 박순, 정철(鄭澈), 신응시(辛應時) 등과 교유했다. 이이는 그의 청고(淸苦)한 인품과 청신준일(淸新俊逸)한 시를 높이 평가했으며, 송시열도 시와 인품 모두 뛰어난 인물이라 칭상하고 있다. 이 시는 서익(徐益, 1542~1587)과 헤어짐의 상황에서 쓴 것이다. 서익은 정철, 최경창 등이 삼청동(三淸洞)에서 어울려 놀던 모임인 이십팔수회(二十八宿會)의 멤버였다. 시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시인은 벗을 두고 길을 떠나고 있다. 말을 타고 가려니 취기(醉氣)가 오른다. 취기를 느끼며 돌아본 어촌(漁村)에는 술잔을 나누던 주막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 시인은 벗으로부터 멀어져 감을 느낀다. 순간 마음속에 깊은 슬픔이 치밀어 오른다. 떠도는 삶 속에서 멈춤을 기약할 수 없는 나그네의 슬픔. 확산일로의 슬픔 앞에서 시인은 정서를 드러내는 대신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것은 저물녘 봄풀 자란 강남땅을 지나는 자신의 모습이다. 담담한 이 그림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봄은 또 올 것이지만, 내년에도 자신은 봄풀 무성한 어느 길 위에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벗과의 이별을 제재로 하고 있지만, 이곳저곳을 떠도는 고달픈 삶에 대한 비애를 적은 시라 할 수 있다.
기실 최경창의 삶은 아웃사이더의 그것이었다. 이산해(李山海)의 불공(不公)한 마음을 미워하여 절교한 뒤로 전랑(銓郞)에 선발되지 못했고, 종성부사에 제수되지만 품계를 뛰어넘은 임명이라는 간언(諫言)에 의해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에 비해 관직 생활은 순탄치 못했고 주로 외직(外職)을 전전해야 했다. 이러한 삶을 고려할 때, 마지막 두 구는 삶이란 밝은 전망이 어려운 것이라는 낙담(落膽)의 언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경창의 시를 최경창의 시답게 하는 것은 다른 데에 있다. 그는 암울한 삶에 솔직하게 반응하며 세계의 어두운 그림자를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어두운 그림자를 있게 한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지만은 않는다. 어떤 작품들은 그러한 질서에 맞서는 지점을 부각한다.
<自奉恩歸舟>
떠나는 이 이별에 앞서 매화 가지 꺾어서는 모래 언덕으로 걸어가면 해는 또 기우네 물길 따라 산을 돌아 배는 멀리 가는데 이별의 시름 강 가득히 풍파를 일으키네 歸人臨發折梅花 步出沙頭日又斜 水轉山移舟去遠 滿江離思起風波 봉은사에 갔다가 돌아올 때의 마음을 표현한 시이다. 내용상 봉은사를 떠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저물녘이 가까워 오자 시인은 이곳을 떠나 배를 타고 돌아가야 한다. 봉은사는 한창의 봄날이라 매화가 활짝 피었다. 시인은 매화를 뒤로 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그때 문득 매화나무에 다가서서는 가지 하나를 꺾는다. 그리고는 매화 가지를 손에 들고 모래언덕으로 걸어간다. 온전한 밝음을 기대했던 해는 여느 날처럼 또 기울어가고 있다. 3, 4구는 배를 타고 돌아가는 과정이다. 돌아가는 길은 험난하다. 거친 물길 따라 험한 산을 돌아 배는 봉은사로부터 멀어져 간다. 저물녘 거세지는 강물은 나의 서글픔이 전이(轉移)된 것일까? 시인의 마음은 일상의 권역으로 가야하는 자신에 대해 서글픔을 느낀다. 눈여겨 볼 것은 1구에서의 시인의 행위이다. 떠나야 할 때에 매화 가지를 꺾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매화 가지를 꺾는다는 것은 곧 활짝 핀 정점(頂點)에서의 멈춤이다. 가지를 꺾는 순간 매화는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성(永遠性)을 획득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외계(外界)의 제약에 맞서는 유일한 저항의 방법이다. 저항의 연장선상에서 시인은 매화 가지를 들고 밝음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그렇지만 해는 벌써 기울어가고 시인은 시간의 흐름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시간성에 지배 받고 부수(附隨)되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 존재란 말인가? 그 순간 세계의 그림자는 눈앞 가득한 거센 강물과도 같이 시인을 압도한다. 시간의 흐름 앞에 ‘매화 가지를 꺾음’의 행위는 결국 무의미할 뿐일까? 무의미할 뿐이라면 이러한 논리의 끝에는 우리는 탄생과 동시에 죽음의 소유물일 뿐이라는 사고만 있을 것이다. 죽음의 위치에서 보면 일체의 삶의 과정이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정으로서의 삶이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삶을 무의미한 귀결로 치부하는 그러한 사고에 저항하는 지점에서 시작될 것이다. 꽃은 시간 따라 저버리고 봄 풍경은 기억 속에서 잊혀질 것이지만 시인은 그러한 시간의 흐름에 동의하지 않았다. 마주한 꽃을 꺾어서는 아직 기울지 않은 태양 아래 더 밝은 빛으로 꽃을 보고자 했다. 일방적인 세계의 횡포 앞에서 시인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이다. 그러한 저항이 결국은 시간의 흐름 속에 묻혀버릴지라도 삶은 그 순간에 찬란히 빛나는 것이리라. 최경창이 바라보는 세계는 결코 밝지 않다. 기본적으로 삶을 개선 가능한 것으로 파악하거나 개인의 진취성이 밝은 미래를 보장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세계의 폭압성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다. 어느 지점에서는 압도하는 세계에 저항하는데, 저항하는 그 지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개성을 창조하고 있다. 선인들이 말하는 청고(淸苦)한 인격미가 드러난 것일 수도 있고 세계와의 타협을 거부한 완강함이 빚어낸 멋일 수도 있다. 삶이 어려운 것은 오늘에도 마찬가지다. 최경창의 시를 읽으며 나를 옥죄는 세계의 틀, 팍팍하고 힘든 일상에 어떻게 대응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글루미한 날들 앞에서 한 번쯤은 우리도 우리만의 ‘매화 가지’를 손에 쥐어봄직 하지 않을까? 글쓴이 김창호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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