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의 재발견] 진도의 상장례 다시 읽기 01 게시기간 : 2023-04-12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4-10 09:3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민속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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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도의 상장례 다시 읽기를 시작하며 진도의 상장례 다시 읽기를 시도한다. 기왕에 내가 써두었던 글들의 소환이기도 하고 새로운 해석과 이론을 만들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민속원, 2018)의 부제를 ‘진도 상장례와 재생의례’로 부기한 바 있다. 진도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윷놀이, 초분과 오쟁이쌈 등을 재생의례로 해석하여 쓴 책이다. 유네스코 무형유산 지정을 생각하며 쓴 글이었다. 관련자들로부터 얼마나 지지를 받았는지 아직 내가 알지 못한다. 5년여 지난 지금 훑어보니 수정할 부분도 있고 급하게 쓰인 부분도 있다. 새로 묶을 단행본은 물론 그와 다른 책이다. 스포일러가 되겠기에 제목이나 목차 구성을 귀띔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기왕의 원고 중 불가피하거나 각별한 내용들은 다시 가져와 재구성하게 될 것이다. 또 언급해두어야 할 게 있다. 국립국악원 저널 <국악누리>에 2021년 1년간 연재, 기독교 잡지인 월간 <기독교사상>에도 2019년부터 1년간 연재하였다. 광주 국악방송과 광주 MBC에서는 ‘국악뒷풀이’, ‘훤한 이박사의 문화재 이야기’, ‘이윤선의 명인명창 열전’ 등 2022년까지 약 3년간 매주 한 번 이상 토크와 대담을 진행하였다. 씻김굿이며 다시래기며 초분장 등의 이야기들이 마치 시루떡처럼 포개져 있다. 자랑하자는 게 아니다. 이 속에 진도의 상례 읽기 내용이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니 중언부언을 감안해 달라는 뜻이다.
2016년부터 지금까지 전남일보에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을 8년째 상재(上梓)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전판 연재다. 현재 350회를 바라보고 있다. 10년 정도 기한을 정하여 500회 정도로 마무리하지 않을까 싶다. 간혹 신문사로부터 독자들의 반응을 전해 받는다. 페이스북 등 SNS 독자들의 반응도 접한다. 성원해주시는 이들은 남도 문화에 대한 마니아라고 생각된다. 일상이던 민속이 어느새 특수한 문화를 설명하는 시대가 되었다. 두루마기와 장삼을 이야기하면 일단 어렵다고 느낀다. 왜 입는지 어떻게 입는지를 설명해야만 한다. 내 글 전반이 그러하다. 가능하면 풀어쓰려고 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한국학호남진흥원에 쓰는 이 칼럼도 가능하면 흥미 있고 의미 있는 내용으로 진행해나갈 예정이다. 진도의 상장례 다시 읽기라는 방향을 정하고 키워드를 뽑아보니 항목이 100여 개를 훌쩍 넘는다. 예컨대 ‘이슬털이’, ‘넋반’, ‘초분’ ‘윷놀이’ 등이다. 많은 항목을 모두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능하면 유네스코 지정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키워드를 추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해 나가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등을 훨씬 넘어서는 얘기들이다. 앞서 밝힌 이전의 내 글들과 새로운 키워드들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내용을 바꾸거나 보충하거나 삭제하기도 할 것이다. 최종 수정이나 교정은 이 글이 묶여 단행본이 되는 2년 후로 예정한다. 그럼에도 각각의 칼럼은 일종의 완결성을 갖는다. 진도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이지, 진도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안동을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얘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상장례 자체에 국한 시킬 필요도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상장례는 확산된 의미들까지 포괄한다. 그렇다고 한국 혹은 세계 보편의 풍속들을 횡단하여 장황하게 인용하진 않는다. 진도의 특별한 풍속을 이야기하되 그것이 어떻게 인류 보편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무림 제현의 질정을 고대한다.
2. 씻김굿에 대한 한 시선 아래글은 2017년 6월 23일자 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중 일부다. 별도의 인용 없이 전재한다. 나승만 전 목포대 교수가 현지답사하고 채록한 남도 어느 섬의 유명한 당골 구술담을 토대로 작성했다. 월간 <기독교사상> 연재 때도 이 대목을 차용하여 풀어냈다. 나승만 교수가 라이프스토리 단행본을 준비 중이기 때문에 이 내용은 그의 글에서 보완되고 수정될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구술 당사자와 나승만 교수께 다시 감사드린다. 본인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 당사자나 아들 등의 실명이나 기타 컨텍스트는 여기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그냥 ‘어머니’로 표기하겠다. 무당이 되었다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해서 신앙심 깊은 종교인으로 변화한 이야기가 무궁하다. 여기에 다 풀어놓기 어렵다. 아마 몇 편의 소설로도 부족할 것이다. 도회지 성경학교에 다니던 둘째 아들이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목사 된다고 학교 다니기 시작한 지 일 년인가 이년인가 되던 해였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 뒷산에다가 기도처를 마련해놓고 기도하던 아들이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내려온 이유부터 수상했다. 어머니에게 연락이 닿아 달려와 보니 눈알이 뒤집히고 게거품을 뿜어냈다. 가루농약을 물에 타 한입에 털어 넣어 버렸다고 했다. 죽으려면 곱게 죽지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뭣이고 예수는 또 뭣이당가?”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을 놔두고도 불끈불끈 부아가 치밀었다. 굿을 하는 어미더러 예수를 믿으라는 것 아닌가. 눈 흰 창이 돌고 사지를 비트는 것을 보니 끝났다 싶었다. 그래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리어카에 싣고 건너편 내륙 해안마을 병원으로 달렸다. 연육된 다리가 출렁였든가 파도가 출렁였든가 달리는 내내 땅들이 일어서고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둘째 아들은 사지를 비틀며 보리뜨물 같은 물들을 연신 뿜어냈다. 사지는 뻣뻣해지고 눈조차 뜨지 못했다. 어머니는 혼잣말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분명히 하나님이 있어서 당신의 종으로 맹글라믄 이렇게 연단을 받고 훈련을 받었응께 살려만 주시쇼. 내가 자석이 살어서 주의 종으로 나간다믄 나도 굿 완전히 치어뿔고 당신 앞으로 갈랍니다.” 되뇌던 자신을 들여다보고 흠칫 놀랐다. 이건 기도 아닌가? 그렇구나. 어머니는 연신 죽어가는 아들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죄는 내 죈디 당신 종으로 쓸라면 살려주셔야 안 쓰겄소?”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면 어쩌고 칠성님에게 비는 소리면 어쩌리오. 어머니의 기도가 통했는지 아들의 뻗은 삭신이 풀어지는 듯했다. 닝겔을 꼽고 시간이 지나니 피부 색깔이 돌아왔다. 다행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녹두 풀어 죽 쑤고 인근 오일장에서 명태 사다 폭폭 고아서 먹였다. 여러 날 후에야 비로소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가 이 섬으로 시집온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1940년 일본의 침략전쟁이 막바지를 달리던 무렵, 온 나라가 뒤숭숭하고 민심 또한 흉흉했다. 친정에서는 손 하나 까닥 해보지 않아 베틀 일도 해보지 못했다. 시집와서야 남편에게 베 짜는 일을 배웠다. 노래 부르며 베틀질 하다가 남편뿐 아니라 시아버지와 베틀을 사이에 두고 잠을 잤다. 구십이 가까운 할머니와 한방을 썼다. 신혼이라고 하지만 남편을 만져볼 수도 없었다. 방 한 칸의 생활이니 원망할 수도 없었다. 하루는 남편이 손을 잡아끌었다. 궁여지책으로 뒷산 맷등(산소)으로 갔다. 주검들이 수도 없이 묻혀있는 그곳 잔디에서 신혼 잠자리를 했다. 바스락거리는 풀들이 등을 찔러댔다. 바람이 잔솔들을 스칠 때마다 누가 보는 것 같았다. 놀란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면 무심한 부엉이들만 부엉부엉 울어댔다. 어떤 날의 하늘에는 어찌나 별이 많던지, 남편을 받아들이던 그 자리, 자미원의 별들이 어머니 품으로 무리 지어 쏟아져 들어오곤 했다. 그렇게 해서 아이 셋을 낳았다. 하지만 먼저 낳은 아이가 죽고 말았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곯고 한시도 쉬지 않고 노동일을 해서였을까? 죽은 아이를 가슴에 묻었다. 남편과 잠자리하던 맷등의 잔디로 쏟아지던 그 무수한 별 밭 속에 묻었다. 아이는 북두칠성 운행하는 칠성의 나라로 갔으리라. 남편이 징용 갔다가(한국전쟁 참여를 구술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돌아왔다. 동네에 도깨비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났다. 길 건너 안산 방죽에 밤마다 헛것이 나와 목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동지섣달 어느 밤이었다. 사람들이 방죽으로 모여들었다. 도깨비를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방죽에 돌을 던지면 얼음장 속의 시커먼 물체가 물속에 들어갔다가 조금 있으면 나타나곤 했다. 그런 날들이 연속되었다. 그런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도깨비가 다름 아닌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견딜 수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살아온 얘기를 어찌 다 할 수 있을 것인가. 남편 군대 가버리고 홀로 살림을 맡았다. 먹을 것이 부족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래도 역부족이었다. 아이들을 제대로 먹일 수조차 없었다. 혼자 미쳐가기 시작했다.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길 건너 안산 방죽으로 밤마다 올라가 목욕을 했다. 천불이 나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무엇이 차디찬 얼음물 속에 들어가 몸을 씻도록 했을까? 무엇이 어머니를 불덩이 같은 것으로 칭칭 휘감아 몽유병환자처럼 동네를 돌아다니게 했을까. 귀신이 들었다. 친정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이가 신으로 몸속에 들어왔다. 그녀의 나이 스물아홉, 넘기지 못할 것 같은 인생의 고비였을지도 모른다. 무당 일을 시작했다. 누구에게 사들인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당골판이 형성되었다. 굿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인근 섬이며 내륙이며 남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굿을 했다. 영험하다고 했다. 병원에 가서 고칠 병들을 굿을 해서 고쳤다. 돈도 많이 벌었다. 그간의 빚도 차근차근 갚아나가기 시작했다. 남편이 마흔여덟에 죽고 난 후, 가세가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굿해서 번 돈으로 아들 신학교를 보냈다. 작은아들이 자살 기도에서 살아나 복학을 했기 때문이었다. 복학하고 나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모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다. 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제주도로 굿을 하러 갔다. 한달 가량, 큰 판이었다. 어느 날 밤이든가 상여 나가는 꿈을 꾸고 벌떡 일어났다. 상여가 삼층인데 만사가 수십 백 척이 뜨고 수천 명이 몰려들어 상여소리를 하는 꿈이었다. 고향이었다. 굿을 하다말고 고향 섬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목사가 된 아들이 와 있었다. 부흥회를 하는데 마치 꿈속의 상여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모양이다. 아들은 다짜고짜 교회 나가자고 했다. 밥 먹던 상판을 엎어버렸다. 어머니가 굿을 하지 않았으면 어찌 목사가 되었을까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게 갈등의 세월이 흘렀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아들이 목회하는 교회에 나갔다. 부흥회를 하고 있었다. 통성으로 울면서 기도를 했다. “죽어도 좋고 살어도 존께 아조 (나를) 처분해서 당신 맘대로 하시쇼.” 목숨을 걸고 드린 기도였다. 성령이었을까? 몸을 오랏줄로 칭칭 동여맨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굿하던 풍경이며 교회의 풍경들이 뒤섞여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친정아버지가 꿈결처럼 와서 말했다. “삼십 살도 못 되았을 니 명(생명) 잇을라고 인간 적선을 해서 밍을 얻었응께 고생 많았다. 인자는 하나님 앞에 옳은 질(길)로 갔응께 거그서도 인간적선 많이 해라”하며 천도복숭아 세 개를 던져주었다. 천도복숭아라니! 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내가 가기는 간다마는 니 눈깔은 빼 갖고 갈란다. 대신에 세 가지 기술을 주고 가마”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워매 워매 내 눈깔”하며 소리 지르다 기도인지 꿈결인지 모른 잠에서 깨어났다. 그 후로 어머니는 채 내리는 기술, 민간 침놓는 기술, 뼈 맞추는 기술을 얻게 되어 또 한 번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그간의 신당을 폐하고 삼 년 반 동안 새벽기도를 했다. 백일기도를 쉬지 않고 열 번을 한 셈이다. 어머니는 열일곱에 시집와서 서른아홉에 신이 들렸다. 신을 받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나이 불혹이 되어 무당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업을 해서 번 돈으로 아들 신학교를 보냈다. 아들은 자살을 기도하면서까지 어머니의 무업에 대해 항의하였다. 다행히 장성해서 목사가 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녀도 이후 기독교인이 되었다. 개종하면서 얻은 꿈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다. 꿈속의 세 개 천도복숭아는 무업의 신격 친정아버지가 주신 것이다. 눈을 빼앗아 가고 세 가지의 기술을 다시 주셨다고 했다. 그 세 가지의 기술로 많은 사람을 고치는 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어머니 구술담을 풀어쓰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있다. 도대체 종교는 무엇일까? 이와는 반대로 기독인이었다가 무업에 종사하는 사례도 있다. 각종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고 현몽의 경험들을 얘기한다. 귀신의 이야기며 도깨비의 이야기, 성령의 이야기들이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신학교 보내기 위해 굿을 했다고 말한다. 이 관계들을 어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머니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한 방 살이를 하던 신혼기를 떠올린다. 하는 수없이 안산 맷등에서 풀잎 소리 들으며 아이들 만들던 그때를 말이다. 어머니 가슴으로 쏟아지던 칠성의 별들이 지금도 쏟아지고 있을까?
3. 나는 왜 진도 상장례를 재소환하는가? 나승만의 구술 기록이 절절하다. 마치 나의 어머니를 대하는 듯 말이다. 다시 보니 졸저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의 서문이 그러하다. 이 책을 준비하고 편집하는 중에 내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문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나를 낳아주신 생모다. 아들자식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예순여섯의 내 아버지에게 씨받이로 오신 분이다. 음력 5월 24일 유시(酉時), 내가 태어난 날 바로 그 시간이었다. 자미원의 궁문을 열어 나를 이 땅에 내려놓으신 그 날 그 시에 어머니가 운명하시니 참으로 기묘하였다. 오랜만에 들른 고향 땅 선산의 맹감(청미래 덩굴)이 주렁주렁 지천이었다. 유골함을 놓을 자리 흙 향이 어찌나 좋던지. 넋 놓고 하늘을 바라보다 왔다. 사랑하는 내 어머니에게 이 글을 바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재생과 부활 그 거듭남을 묵상하며 애달픈 내 사랑을 어머니께 보낸다.” 내가 저 책의 부제를 왜 ‘진도의 상장례와 재생의례’로 붙였는지 내력을 밝힌 대목이다. 상장례 다시 쓰기를 하며 서문을 소환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나는 왜 이런 유형의 글쓰기를 계속하는가? 두 가지의 변명을 옮겨둔다. 지난번 출간한 졸시집 『그윽이 내몸에 이르신 이여』(다할시선 08, 2021)를 참고할 수 있다. 사실 저 시집은 아버지에게 드리는 것이었다. 세 분의 어머니에게 드리는 시집은 차례차례 준비해나가고 있다. 차차 내 어머니들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 중 일부는 완성하여 출판을 준비 중이다. 내 시를 읽어본 분들은 표명되지 않은 재생의 기호들이 갈피마다 널브러져 있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씻김굿의 당골이 연신 흔들어대는 지전(紙錢)이나 상여길에 뜯어 흩뿌리는 돈전처럼. 시평을 써준 목포대 김선태 시인은 나를 이렇게 평했다. “이윤선은 직장을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현재 자기 방식대로 자유롭게 살고 있다. 그런 만큼 살림살이가 궁하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엄살 안 부리고 꿋꿋하다. 위 시(돼지감자라는 시를 평하며)는 그가 지닌 풍모와 삶의 지향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자화상이다. ‘돼지감자=어머니=나’이다. 돼지감자와 같은 삶을 살아오신 분은 어머니이지만, 그런 어머니의 삶을 닮고자 하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심중의 내강(內剛)을 들켜버렸다고나 할까. 꿋꿋함이 본시 감춰둘 수 없는 바람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2020년에는 단편소설 ‘바람의 집’으로 목포문학상 남도작가상을 받았다. 내가 글쓰기 하는 한 까닭을 당선 소감에 이리 밝혀두었다. 인용부호 없이 일부를 고쳐서 옮겨두겠다. 아버지는 어린 내게 글쓰기를 시키셨다. 선거 때마다 나누어주던 한 장짜리 달력의 뒷면이며 어쩌다 얻은 빛바랜 종이들이 내 공책의 전부였다. 아버지, 무슨 글자를 쓸까요? 무슨 글이든 써라. 글자라고 생긴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 일자무식 아버지는 내가 쓰는 것이 무슨 글자인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셨다. 단지 여백을 채우기를 바라셨다. 희거나 빛바랜 폐지들이 까맣게 채워지는 것을 흡족해 하셨다. 마을 구장께 쌀섬 져다 주고 수학했던 천자문, 일찍 깨친 한글들, 아무런 의미 없는 그림들을 마구 그렸던 것 같다. 망매산 꼭대기 성근 별 같던 글자들은 그렇게 우리집 마당에 내려 앉았다. 폐지의 여백이 영문 모를 낙서로 채워졌던 유년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와버렸을까? 어느 해 한 장짜리 달력 뒷면을 절반가량 채우던 즈음, 아버지는 꿈길로나 오실 길을 떠나셨다. 그래서일 것이다. 세 살 버릇, 낙서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이 섬 저 섬, 동아시아 사람들을 쫓아 민속 풍정을 기록했다. 삼십여 년을 훌쩍 넘겼다. 불혹이 지났다. 지천명도 지났다. 동남의 마파람이 참으로 모질었다. 서북의 북풍한설이 매몰찼다.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 저만치 길모퉁이 육십갑자가 기다리더니 이내 그 길목에 다다라 있다. 소설이라곤 공부해본 바 없는 내게 뜬금없이 덧씌워진 이 무게를 어찌 감당해야 할까. 동아시아 나들이를 천명처럼 여기고 살았지만 새로운 이 여행은 두렵고 떨리기만 하다. 내 삶의 마지막 순례이리라. 다시 채비를 한다. 쓰여지지 않은 지상의 시간, 다만 아버지 일러주신 흰 종이가 놓여있을 뿐이다. 무색의 여백이 가없이 넓다. 지난 감상을 인용해두는 이유는 지금 시도하는 연재가 이 맥락의 글쓰기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어서이다. 소설이 아닌 칼럼이라고 다를 리 없다. 두렵고 떨리는 여행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도 상장례 다시 읽기를 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유네스코 지정 논의를 수월하게 이끌려는 점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심은 내 아버지와 어머니, 예컨대 나승만의 구술에 나타나는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위해서일지 모르겠다. 서론이 장황하여 송구스럽다. 차차 만회해가겠다. 봄가뭄이 해소되려나. 밤새 내린 빗소리가 내게는 자장가이자 상여소리 같다. 늘 인용하는 장그르니의 『섬』 한 토막으로 연재의 문을 연다.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저 자신 속에 너무나도 깊이 꼭꼭 파묻혀 있어서 도무지 새벽빛이 찾아들 것 같지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득 수의를 밀어붙이며 나사로처럼 일어서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란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수의란 다름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배내옷이었던 것이다.”
글쓴이 이윤선 진도학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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