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노비 매매? 문서부터 잘 챙겨야 게시기간 : 2023-04-2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4-24 13:3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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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 우면 어도내산리에 사는 양반 강필성(姜弼聖).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보다 벌떡 일어났다. 종이를 펼쳤다. 붓 끝에 힘을 넣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몇 해 전 손신(孫信)으로부터 여종 1구를 정목(正木) 25필 가격으로 사들여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미년에 임차동(任次同)이라는 사람이 ‘그 여종은 자기가 사들인 것’이라며 손신을 상대로 소송했습니다. 임차동이 소송에서 이겨 그 여종을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갖추어 여종의 몸값 정목(正木) 25필을 되돌려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올렸습니다. 그 값을 되돌려 받는 중에 손신이 4필은 마련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힘 닿는 대로 갚겠다고 애걸하기에 그 말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손신이 죽었습니다. 그와 함께 살던 손신 아내의 여종 임옥(任玉)에게 누누이 이 사실을 알렸지만 계속 딴말만 하면서 갚고자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매우 원통합니다. 임옥을 법정으로 잡아들여 여러 해 동안 갚지 않은 죄를 무겁게 처벌해주시고 그 값을 마저 받게 해주십시오.
1727년 강필성이 제출한 소지. 손신으로부터 사들인 글님의 소유권 문제가 발생하자 그 동안의 사정을 서술하면서 손신으로 하여금 값을 물어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1733(영조9) 3월에 강필성이 제주목에 제출한 소지. 1722년에 사들였던 글님의 값을 손신으로부터 되돌려 받는 도중 손신이 목면 4필을 마저 갚지 못하고 죽자 임옥에게 갚도록 처결해달라고 요청했다. 혹시나 덜 언급한 내용이 있는지, 상황을 정확하게 잘 서술했는지, 소지를 읽을 제주 목사가 ‘임옥’을 잡아 채무를 이행하라고 처결을 내릴 수 있을 만큼 설득력이 있는지 등을 따져 봤다. 글 마디 사이에서 자신의 실수로 생긴 여러 가지 손해에 대한 기억들이 삐져 나왔다.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문서를 다 갖추지 않고 허술한 상태에서 사들였던 여종 값을 언제 다 돌려받을 수 있을지. 벌써 7,8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그 값을 온전히 돌려받지 못했다. 이 일을 생각하면 가슴 저 밑에서부터 뜨거운 불이 솟아 머리끝까지 치올랐다. 손신에게서 다 받아내지 못한 여종값을 마저 받아내야 했다. 1733년 3월, 따뜻한 봄날이건만 강필성에게는 봄 아닌 봄이었다. 떨리는 손을 다잡아가며 짧지만 긴 사연이 깔린 소지 한 통을 썼다. 마지막으로 남은 배상을 받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으며. 불망기(不忘記)를 믿었건만 1722년, 강필성은 손신의 여종 글님(文乙任)을 사들였다. 값은 목면 25필이었다. 글님은 강진에서 온 여종이었다. 김시헌(金時憲)이 제주도로 데리고 들어 와 손신에게 판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손신은 강필성에게 팔았다. 그때 손신은 글님에 관해 그 이전에 작성되었던 문서들을 건네지 않았다. 김시헌과 여종을 매매했다는 사실을 관청으로부터 아직 인증 받지 못했으므로 인증 받은 후 모든 문서를 갖추어 주겠다고 했다. 이듬해인 1723년에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망기도 썼다. 불망기란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쓰는 것으로 일종의 각서이다. 그 각서에 따르면 ‘관청의 인증 문서가 나오는 그 사이에 혹시나 다른 말이 생기면 이 각서를 갖고 관청에 가서 밝히라.’고 했다. 조선시대 국가는 노비 매매를 엄격하게 규정했다. 노비 값도 법적으로 규정하여 ‘15세부터 50세에 해당하는 노비는 저화(楮貨) 3천장’이라고 『경국대전』에 기재했다. 노비 1구당 거의 쌀 20섬 정도에 해당한다. 물론 법정 가격이 실제 매매 가격은 아니지만 가격까지 법적으로 규정할 정도로 조선 정부는 노비 매매를 엄격하게 관리했다. 노비를 매매할 경우 ‘반드시’ 관청에 신고하고 인증을 받아야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경국대전』 <호전(戶典)>에 따르면 ‘매매를 한 후 물리고자 한다면 15일 이내로 하고, 매매 이후 100일 이내에 관청에 신고하여 입안(立案)을 받을 것’라고 분명하게 기재했다. 입안이란 관청에서 어떤 내용을 인증해주는 일종의 증명서이다. 노비를 사고 판 사실을 관청에서 증명해주는 문서인 것이다. 그런데 인증 받는 과정이 쉽지 않다. 노비를 사들인 매수자는 인증해달라는 청원서 즉 소지(所志)를 작성하여 제출해야 한다. 이때 서류를 첨부해야한다. 노비의 정체와 이전 이력이 기록된 구문기(舊文記)가 있어야 한다. 본문기(本文記)라고도 하는데 노비의 이름 출생년, 나이를 비롯해 소유주 및 매매 이력 등이 기재된다. 그러다보니 구문기는 여러 장이 나란히 붙어 있기도 하다. 그 노비가 언제 태어났고 누구에게 소유되었다가 언제 누구에게 얼마에 팔렸는지 등에 관한 정보가 있다. 이 문서와 함께 매매할 때 새로 작성한 서류인 명문(明文)도 제출한다. 여기에는 매도인, 매수인, 증인, 필집-문서를 쓴 사람- 등의 이름과 서명이 있다. 이렇게 소지, 옛 문서, 새 문서를 갖추어 관청에 제출하면 관청에서는 서류를 검토한다. 한편으로는 매매 현장에 있던 매도인, 증인, 필집 등을 불러 ‘그 노비를 정말 사고 판 사실’이 있는지 증언하게 한다. 이들이 그 내용을 문서로 작성하여 제출하는데 이를 초사(招辭)라고 부른다. 관청에서는 모든 서류를 검토한 후 ‘노비 매매’가 확실하게 이뤄졌다고 판단하면 인증서를 매수인에게 발급한다. 이로써 사들인 노비의 소유권이 법적으로 공식으로 확정된다. 강필성도 이런 규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신으로부터 글님을 살 때에는 일이 커질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손신이 ‘이전 문서는 관청의 인증을 받는 즉시 넘겨준다.’고 각서를 썼기 때문이다. 강필성은 손신의 불망기를 믿었다. 게다가 손신이 그 문서를 가지러 직접 육지로 나간다고 했다. 당시 제주도에서 육지로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날씨가 좋아야 하고 순풍이 불 때까지 기다렸다. 날씨와 바람의 눈치를 봐 가며 출발했다. 출발했어도 도중에 날씨가 바뀌어 순풍이 폭풍으로 바뀌면 목숨도 잃을 수도 있었다. 그 만큼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가는 일은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손신은 직접 갔다오겠다고 하면서 정말 제주도를 떠나 강진을 향해 갔다. 더욱 믿음이 갔다. 그런데 손신은 제주도로 돌아와 ‘오는 도중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문서가 없다.’고 했다. 강필성은 문서를 기다렸다가 잘 갖추어 관청에 제출하여 인증서를 받으려고 계획했었다. 문서를 잃어버렸다는 손신의 말은 충격을 넘어서 허탈하게 만들었다.
1723년에 손신이 강필성에게 써 준 불망기. 손신이 글님을 팔면서 옛 문기는 입안한 이후에 주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이미지출처:한국학자료센터호남권역http://hnkostma.org/emuseum 癸卯三月十四日姜弼聖前不忘記 믿음으로 얻은 건 병, 잃은 건 재산 충격을 온몸으로 받다 보니 결국 앓아 누웠다. 글님은 당시 16살이었다. 물건 가치가 최고였다. 목면 25필짜리 아닌가. 나이도 어려 자식도 많이 낳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여종의 자식들 또한 큰 재산이었으니 이른바 ‘미래 자산 가치’까지 생각했을 터이다. 노비의 가치는 나이가 젊을수록 높았고 특히 여종은 출산 능력으로 인해 그 값이 남자종보다 높게 매겨졌다. 강필성은 최고 등급의 ‘물건’을 사들이기는 했지만 소유권을 인증받지 못해서 불안함을 떨칠 수는 없었다. 문서가 없다는 충격과 소유권 확보에 대한 불안감으로 얻은 건 병이었다. 글님을 자기 집에 두고 부릴 수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불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글님을 사들인 지 3년이 넘어 갈 무렵인 1726년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임차동(任次同)이란 사람이 손신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어 글님의 소유권을 다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임차동이나 손신이나 글님을 샀다는 인증을 받은 적이 없었다. 손신은 김시헌으로부터 글님을 샀다고 했는데 임차동 또한 글님을 샀다고 했다. 두 사람 모두 글님을 샀다는데 둘다 관청에 신고하지도 않았고 관청으로부터 인증을 받지 못했다. 당시 제주 관청에서는 ‘두 사람 모두 입안 받은 적이 없으니 글님을 관비로 소속시켜야 한다.’고 처결했다. 다만 그 동안 흉년이 들었고 흉년 기간 동안 먹여 살린 이가 우선 집에 두고 부려도 된다는 조항을 넣었다. 노비 매매를 신고하지 않고 개인끼리 사고 판 경우 그 노비와 노비값을 나라에 귀속시킨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필성은 손신에게서 글님을 샀고 손신은 김시헌에게서 샀다. 그렇다면 임차동은 누구에게서 산 것일까. 김시헌 이전의 글님 소유자는 김석태(金碩太)였다고 한다. 이런 ‘말’뿐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옛 문서가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글님을 두고 벌어진 소송에서 임차동이 승소하자 그는 강필성에게 와 글님을 즉시 데려가겠다고 주장했다. 옛 문서 없이 샀다가 하루 아침에 큰 재산을 날리게 된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유형원이 ‘사람들이 얼마나 부자인지 따질 때 반드시 땅과 노비를 언급한다.’고 할 정도로 노비는 부의 척도였다. 그런 재산을 갑자기 잃을 처지가 되자 1727년 4월에 강필성은 관청에 청원서를 넣었다. ‘여름까지 글님을 두고 부렸다가 가을 이후에 내어주는 것을 허락해 줄 것, 손신을 잡아다 벌을 주고 글님을 살 때 치렀던 값인 목면 25필을 되돌려 주도록 처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거의 3년 넘게 글님을 먹여주면서 부렸으므로 강필성은 글님을 ‘고공(雇工)’의 사례를 따르려고 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고공은 겨울에 먹이고 여름에 부린다.’는 관례가 있었다. 그는 하루라도 더 글님을 부리고 싶었을 터이다. 판결은 강필성에게 냉혹했다. 글님의 일은 ‘고공’의 관례에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처결이 내려져 글님을 내주어야만 했다. 그나마 손신으로부터 글님의 값을 되돌려 받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좋은 물건이어서 선뜻 목면 25필을 지불하여 사들이고 문서조차 제대로 챙기지 않았는데 그 결과는 참담했다. 큰 재산을 잃고 얻은 건 마음과 몸의 병이었다. 이제부터 그 목면 25필을 되돌려 받든지 그와 맞먹는 것으로 되돌려 받을 일이 남았다. 이 일도 쉽지 않았다.
강필성이 제주목에 제출한 소지. 1725년 7월에 조후준(趙後俊)으로부터 노비를 사들인 후 이 사실을 관청으로부터 공증받기 위해 제주목에 제출한 입안신청소지. 증인 문해환(文解還)과 보증인(證保) 이만실(李萬實, 32세)이 진술한 초사들. 1725년 7월에 강필성이 조후준으로부터 여종 만덕과 일상을 사들였다는 사실을 진술한 내용. 8월 초3일에 작성했다. 두 사람은 노비 매매의 증인, 보증인이었다. 제주목에서 강필성에게 발급한 입안. 1725년(영조元) 8월에 강필성이 조후준으로부터 노비 2구를 사들였다는 것을 인증해주었다. 조선시대 노비 소유권을 완전히 확보하기 위해서는 노비 매매 내용이 담긴 명문, 인증 요청하는 소지, 증인들의 진술서인 초사, 관청에서 인증한 입안 등이 모두 함께 있어야 했다. 건네주기 쉬워도 건네받기 어려운 게 돈 강필성이 글림을 사들일 때 건넨 값은 목면 25필. 쌀로 치면 거의 20섬 안팎이니 금세 되돌려 받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7,8년이나 걸릴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손신은 가끔씩 나누어 갚은 듯했다. 요즘 일로 말하면 분납한 셈이다. 관청 처결대로 목면 25필을 물어주어야 했는데 나머지 4필은 끝내 마련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을 주면 힘 닿는 대로 마련하여 갚겠다면서 애걸했다. 강필성은 손신의 사정을 봐 주었다. 그런데 그 사이 손신이 죽었다. 채무자가 죽었으니 채무는 가족에게 돌아갔다. 강필성은 손신 아내의 여종 임옥(任玉)에게 일의 앞뒤 사정을 설명하고 4필 목면값을 마저 갚으라고 했다. 여러 번 말해지만 그때마다 임옥은 듣는 둥 마는 둥, 동문서답했다. 주인의 채무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손신에게서 목면 20필을 받아내고 임옥에게 재촉하는 기간이 7,8년이었다. 시간을 질질 끌면서 배상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죽은 손신, 차일피일 미루며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임옥에게 화가 났다. 남은 4필을 받아내고자 소지를 쓴 것이다. 매매 사기는 어느 사회든 어떤 때이든 늘 발생한다. 문서를 위조하고 이중으로 매매한다. 이런 일에 엮인 이들이 손해 배상을 제대로 받아내기는 쉽지 않다. 상황 설명을 반복적으로 해야 하고 갖춰야할 서류들도 다양하다. 문서를 제대로 확인하고 갖춘 매매조차 사기인 경우도 적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강필성이 매매 사기를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매매할 때 문서를 제대로 챙겨 받지 못하고 선뜻 값을 치르는 ‘실수’를 했다. 사람을 너무 믿었다. 제주목사는 임옥을 데려오라는 처분을 내렸다. 임옥을 심문하고 채무 이행을 명령할 참이었겠지만 강필성은 목면 4필을 받아냈을까. 그 사이 다친 마음을 얼마나 보상받았을지. 매매 과정에서 건네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매매가 속임수일 때 되돌려 건네 받는 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도움 받은 글들> 최승희(1981), 『한국고문서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소은(2004), 「16세기 매매관행과 문서양식」, 『고문서연구』 24, 한국고문서학회. 이정수․김희호(2008), 「조선후기 奴婢賣買 자료를 통해 본 奴婢의 사회ㆍ경제적 성격과 奴婢價의 변동」, 『한국민족문화』 31,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김용만(1988), 「조선시대 사족의 노비소유권 연구 - 그 성격과 이동형태를 중심으로-」, 『대구사학』 35, 대구사학회. 오창명(1995), 「노비매매문기의 이두문과 이두 해독」, 『백록어문』 11, 제주대 국어교육연구회. 고창석(1997), 「17세기 제주지방의 노비매매실태」, 『제주도사연구』 6, 제주도사연구회. 안승준(2014), 「朝鮮時代 奴婢市場과 去來-1707년 매매 흥정 書簡과 尙州牧奴婢賣買立案을 중심으로-」, 『장서각』 31,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정곤(2018), 「조선후기 제주지역 노비 거래의 양상-제주(濟州) 어도(於道) 진주강씨(晉州姜氏) 강수황(姜受璜) 후손가(後孫家) 고문서(古文書)를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53, 한국고문서학회. 이미지 : 한국학자료센터호남권역http://hnkostma.org/emuseum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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