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독립운동가·교육자·종교인의 삶을 산 변극(邊 極, 1903~1980) 게시기간 : 2023-05-0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3-05-02 10:0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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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극·변장성·변동화·변중선 변극은 20대 초반,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지금의 국회의원 격인 ‘대의사’에 선출되어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투옥된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해방 후 국립 전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말년에는 원광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의 삶 전반부가 독립을 위한 처절한 투쟁기였다면, 후반부는 교육을 통한 대한민국 발전의 토대를 닦은 시기였다. 전남대 교수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약사’라는 강의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사를 강의하였지만 그를 독립운동가로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도 이름은 극(極), 이명으로 ‘장성(長城)’, ‘동화(東華)’를 사용하였다고 나와 있고, 2018년 원광대에서 그의 사후에 그를 다룬 문집을 정리한 책에도 ‘중선’이라는 다른 이름이 나오는 등 여러 이름이 사용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는 1977년 건국포장은 그의 생전에, 승격된 건국훈장 애국장은 1990년 사후에 받았다. 1977년 그가 처음 서훈 신청할 때 공적서에 ‘변극’으로 되어 있다. 본명이 변극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활동 자료는 변장성으로 나와 있다. 1977년 서훈 신청할 때 ‘변장성’과 ‘변극’이 동일인이라는 증명을 제출하였다. ‘장성’은 상해에서 독립운동할 때 사용한 별명이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려고 여러 이름을 사용하였다. 광주 학생독립운동의 영웅 이경채도 중국에서 독립운동할 때, ‘김판수’, ‘이중환’, ‘이일휘’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하였다. 변극은 상해에서 ‘장성’을 주로 사용하였지만, 간혹 ‘동화’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장성’은 휘문고보 재학시절 국어교사가 지어 준 ‘갓돌(변장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가 장성 출신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황주 변씨 26세손인 변극의 항렬은 ‘동(東)’으로 ‘동화’가 족보상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운암’이라는 자(字)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남대 도서관의 변극 교수 기증 코너에 ‘운암문고’라고 나와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중선(衆船)은 원불교 법명, 선산(禪山)은 법호이다. 말년에는 원불교 법명인 ‘중선’을 주로 사용하였으니 여기에 혼재된 여러 이름까지 섞여져 이를 잘 알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의 빛나는 공적을 알 수 없게 하였다. 그의 출신지 또한, 일반인들을 혼란하게 한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공훈록에 탑재된 그의 본적은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333번지”, “전라남도 화순 사람이다”라고 되어 있다. 공훈록만 살피면 그가 화순 출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호적 등본을 보면, 장성군 북일면 월계리 202번지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화순이 본적으로 나온 것은 그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3년의 수감생활 한 후 풀려나와 화순 이서에서 은둔하며 후일을 기약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화순이 그의 본적이 되었다. 공훈록에 그가 “광주 무등산에 은거하였다”라고 하였는데, 화순 이서가 무등산 자락이기 때문에 잘못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부끄럽게도 독립운동가 변극의 참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가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인물로 나와 있고, 공훈록에 해방 후 공적이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광대학교 원불교 사상연구원이 펴낸 『선산 변중선』(2018)이 그를 아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이 책 또한 바로 잡을 부분이 있었다. 그가 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에서 시위에 참여하다 수감된 사실을 담은 판결문이 부록에 있다. “성명 변장성, 본적 강원도 통천, 주소는 경성부”로 나와 있다. 장성 출신을 그를 강원도 통천으로 본적을 표기한 까닭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다시 원문을 자세히 보니 ’1월 19일 생, 당 21년‘이라는 세주(細注)가 있어 판결문의 변장성은 변극이 아닌 또 다른 변장성임을 알 수 있었다. 변중선은 1903년생이므로, 1919년 당시에는 17세로, 21세와 맞지 않을뿐더러 그가 쓴 공적서를 비롯하여 여러 글에 그가 1919년 당시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내용이 없다는 점도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하였다. 곧 국가기록원 판결문에서 ‘변장성’을 검색하여 이름이 나오니 동명이인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수록한 데서 나온 착오라고 생각되었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의사와 빛나는 독립투쟁 변극(邊極, 1903~1980)은 부친 변복연과 모친 심평촌 사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일본 교육기관에서 수학하기를 거부하고 12세 되던 1914년 전북 부안군 계화도에서 당시 명망이 있는 한학자이던 전우(田愚) 선생에게 보냈다. 그의 문하에서 17세 되던 1919년까지 한학을 배웠던 변극은, 17세 되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계화도에서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가 한성강습원에 입학해 수개월 간 공부했으나 신학문을 끝까지 반대하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구례 천은사로 들어갔다. 3개월가량 불경을 읽으며 수양을 하였는데, 이때 당대의 고승 용화 스님으로부터 받은 설법이 후일 그가 원불교에 귀의하게 된 동기였다. 하지만 신학문에 대한 열정이 강한 그는, 부모를 설득하여 중동고보에 입학했고, 몇 개월 후 편입시험을 치러 휘문고보를 다녔다. 그는 휘문고보를 다닐 때 역사와 영어 공부에 집중하였다. 우리 역사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국제정세를 알아야겠다는 소명 의식 때문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학문하는 것을 거부한 변극은 상해 유학을 꿈꾸었다. 그것은 당시 상해가 동서 문화의 용광로이자 독립운동의 공간이었고, 진단, 동제, 호강 대학 등 외국인이 운영하는 고등교육기관이 많았기 때문이다. 1922년 그가 상해로 건너갈 기회가 생겼다. 그가 불교단체의 장학금을 받아 비밀리에 유학을 떠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백남연이라는 친구가 변극이 상해 유학을 간절히 원함을 알고 여비를 부담했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사정을 종합할 때, 그가 불교단체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서울에서 출발할 때 그 단체의 도움으로 유학을 온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 대의사로 활동하며 동제 대학을 다닐 때 장학금을 받은 사실을 말한다고 여겨진다. 변극은 한 살 아래인 백남연과 함께 상해로 망명하였는데,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에 도착하여 비밀리에 나룻배를 물색하여 한밤중에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에 도착한 다음, 다시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상해로 가는 경로는 크게 네 갈래였는데, 압록강을 건너 봉천을 지나 경봉, 진포 두 철도 노선을 거쳐 육로로 남경, 상해에 이르는 길로 3일 소요, 단동현(현 단동시)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가는 길로 비교적 경비가 저렴하고 3일 소요, 일본 나가사키에서 배로 상해로 이동하는 길로 이틀 소요, 인천, 부산, 목포, 군산에서 상해로 이동하는 길 등이었다. 변극 일행은 두 번째 길을 이용하였다. 변극 일행이 상해에 도착하니 임시정부 직원 3인이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동현에서 출발할 때 임시정부에 미리 연락을 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미루어 백남연이 임시정부 인사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해에 도착한 변극은 그곳 거류민단에 적을 두었는데, 당시 19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나이를 25세로 여섯 살을 올려 등록을 하였다. 그가 나이에 비해 조숙한 탓도 있지만, 너무 나이가 어리면 등록하는 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부지불식간에 나이를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1922년 불과 25세(실은 만 19세)의 나이로 임시정부 의정원의 대의사(代議士)가 되었다. 당시 임시정부 헌법에 25세부터 대의사가 될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19세였다면 대의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의원은 각도 대표로 구성되었는 데 한 도에 6명씩이었고, 아메리카와 만주는 3명씩, 그 외 경기, 강원, 황해도는 1명씩이었다. 실제 19세 소년이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엄청난 사건인 셈이다. 그런데 그의 증언과 달리 그가 대의사가 된 것은 한 해 늦은 1923년이었던 것 같다. 그가 대의사로 선출된 과정을 정리하고자 한다. 상해로 망명한 변극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독일인 의사가 세운 동제대학 부속중학교를 들어가기 위해 수개월 중국어 공부를 하였다. 그가 동제대학 부속중학교를 입학하려 한 이유는 동제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국내에 있을 때 1918년 1차 세계대전 직후 유행한 스페인 독감으로 조선인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한 것에 충격을 받았었다. 망명 이듬해인 1923년 동제대학 부속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그 학교에 있는 동제사(同濟社)라는 한인 학생단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동제사는 상해 지역의 최초 한인 학생단체로 1912년 설립되었는데, 1921년 화동유학생회로 개명하며 교육 및 선전 활동에 진력하였다. 이 단체의 회원이 당시 105명에 이르렀는데, 이 단체에서 주도적 활동을 한 변극은 교민사회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변극은 1923년 10월 24일 임시정부 내무총장 입회하에 실시된 상해교민단 제4회 의원 총선거에서 동구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치러진 상해교민단 선거에서 본구 조상섭, 김승학, 윤기섭, 여운형, 최석순, 이규서, 한정근, 옥성빈, 백기운, 김봉준, 조완구가 선출되었고, 동구에는 변동화(변극)를 비롯하여 황재건, 서구에 민재호, 북구에 옥관빈이 당선되었다. 여운형, 조완구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도 이때 대의사로 선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변극은 1932년까지 10년간 의정원 대의사로 활동하였다. 의정원 대의사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학업에 정진하던 변극은 상해에 있는 유학생들을 조직화하는 일을 맡았다. 1924년 2월 상해 한인 유학생회 총무, 동년 9월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학생운동 본부가 프랑스 조계로 이전하여 화동한국유학생회로 조직이 재정비될 때 재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학생운동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역량을 키우던 변극은 1925년 5월 30일 있은 중국의 ‘배영(排英)’ 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다. 이른바 5·30 사건으로 유명한 이 운동은, 영국 조계에 있는 방적공장에 근무하는 중국인 근로자를 탄압하는 일본인 사업주를 영국이 옹호하는 것에 반발한 대규모 폭동을 영국 경찰이 무력으로 진압하여 13명이 사상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 내에서 반영운동이 일어났는데, 변극은 재중 유학생 300여 명을 규합하여 배일독립운동 단체인 ‘해외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26년 9월 동제대학 의학부 산부인과에 입학하였다. 그가 산부인과를 전공한 것은 당시 독일인 교수의 강권 때문이었다고 한다. 동제대학에 입학한 바로 다음 달인 10월 23일 상해의 3개 유학생 단체를 통합한 한인학우회 사교부를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그는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듬해인 1927년 3월 한인재중청년회의 상해지구 대표로 선임되었고, 동년 10월에는 중국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를 규합한 연합단체인 한인청년동맹의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의 그의 활동을 보도한 언론 내용이다. 상해의 통일 단체로 한인 청년회 창립
청년의 통일적 기관으로 상해 한인 청년회를 창립 상해 지방의 청년들이 통일적으로 단결하는 청년의 기관을 조직하려 여러 번 발기 총회를 열어 만반의 의사를 진행하고 지난 3월 26일 하오 7시 법계(法界) 삼일당에서 상해 한인청년회의 창립총회를 열고 주요섭 씨 사회로 선언 강령과 규약을 통과한 후에 집행 위원회를 선정하였는데, 강령은 1. 본회는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선구가 되기를 기함 2. 본회는 우리 청년의 공고한 단결과 분열된 전선의 통일을 기함 3. 본회는 민족 운동의 유일당이 속히 완성되기를 노력함 4. 본회는 우방의 민족해방운동과 제휴함 5. 본회는 우리 운동의 이론과 실제적 정책을 연구하여 세우기로 함 집행위원 주요섭 신형철 변장성 정태희 김도현 엄항섭 황의춘 염은동 최화운 후보위원 신언준 박영창 김종선 (하략)(신한민보 1927년 5월 19일, 동아일보 1927년 4월 15일) 1928년 초에 개최된 상해한교대회(上海韓僑大會)에서 안창호, 이동녕, 김두봉, 조소앙, 진덕삼, 김명준, 조완구, 차이석, 최석순, 김기진, 황의춘 등 당시 쟁쟁한 인물과 같이 15인 전무위원에 선출되어 지도적 위치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게 되었다. 당시 상해 한인 유학생들의 항일 독립운동은 처음에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조직과 연계되었으나, 차츰 중국의 항일운동 세력과 연대하면서 정치 군사적으로 활동 폭이 넓어졌다. 해마다 3·1절이나 국치일 등 중요 행사에 참여하여 독립선전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28년 4월, 변극은 한인청년동맹을 주시하고 있던 일제의 사주를 받은 프랑스 경찰에 의해 동료 9명과 함께 체포된 후 상해의 일본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 20여 일간 유치장에 갇혀있다가 일본의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을 경유, 열차 편으로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당시 해외 관할구가 신의주 경찰서였다. 신의주 감옥에서 미결수로 1년을 보내고, 평양 감옥에서 6개월을 보내는 등 무려 10개월(1928.8-1929.6)의 재판 끝에 1929년 6월 10일 3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서 수감 생활하다 1932년 6월 10일 만기 출옥했다. 미결 과정까지 포함하여 4년 2개월이 소요되었다. 당시 출옥 장면을 보도한 동아일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해한인청맹사건 현정건 등 만기
해외에서 활동하던 두 사람 명일(明日) 평양에서 출옥 상해, 만주 등지에서 조선 독립운동을 위하여 여러 해 활동하다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3월에 중국 본부 한인청년총동맹과 이 동맹 상해지부 사건으로 상해 법계에서 불란서 경찰의 후원하에 상해 일본총영사관 경찰의 손에 체포되어 신의주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있다가 평양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3년의 판결 언도를 받고 이래 평양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현정건(41)과 변동명(일명 장성, 31)은 명 10일이 만기로 이날 오전 7시경에 평양 형무소에 출감되리라 본다. 이 두 사람은 명 10일 오후 8시 50분 경성역착 열차로 경성에 도착 되리라 한다. 두 사람과 가족과 친지 중에는 그 출옥을 환영하고자 경성, 진주 기타에서 금 9일 평양으로 내려가리라 한다. -동아일보 1932년 6월 10일 출옥한 현, 변 양(兩)씨
상해한인청년동맹 사건으로 평양형무소에 복역중이던 현진(정)건, 변동화 양 씨는 기보와 같이 10일 아침 가족과 친지의 출영리에 건강한 몸으로 출옥하였다. 양씨는 모두 10수년 전 고국을 떠나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체포 후송되어 미결 2년, 기결 3년 5년 동안이나 있다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어 고국 땅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양 씨는 모두 마중 나온 가족과 함께 10일 밤 11시 58분 남행열차로 평양을 떠나 경성으로 갔다 한다. -동아일보 1932년 6월 12일 변극의 출옥 사실을 동아일보가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이는 상해에서의 그의 활동을 국내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22년부터 1928년 체포될 때까지 김구, 이동녕, 조소앙, 김두봉 등 좌우를 망라한 민족지도자들과 상해 임시정부에서 조국독립을 의논한 20대의 전남 출신의 대표적 애국지사였다. 완도 소안면지를 보면, 소안면 출신 송내호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수위위친계’에서 임시정부에 자금을 전달하러 갔을 때 우리 고장 출신 변장성의 안내를 받았다고 한다. 변극이 전남 출신이 찾아오니 반가워 직접 안내하고 환대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가 어린 나이에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지만, ‘장성’이라는 별명을 그의 가명으로 쓰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라도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음을 알려 준다. 3. 민족을 사랑한 교육자·종교인의 삶 1932년 6월 부모님이 계시는 전북 고창으로 귀향하였다. 그런데 그를 일제는 공산당 수령이라고 선전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 1934. 2. 26) 출옥 후에도 그를 계속 감시하였고, 수시로 가택 수사를 하였다. 심지어 뚜렷한 증거가 없음에도 전북 도경으로 압송하여 강제 수사를 하기도 하였다. 강제 압송되다 신태인역에서 열차 바퀴에 오른쪽 다리가 끼여 중상을 입는 사고까지 당하였다. 이렇게 철저히 감시를 받고 있을 때 마침 동료들이 광산업을 권하였다. 그는 일본의 감시도 따돌리고, 독립운동을 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전북 순창과 화순 등지에서 금광 채굴업을 하였다. 뜻밖에도 금광업 투자가 성공하여 적지 않은 재산을 축적한 변극은 금광업을 곧 정리하고 화순 이서면 무등산 기슭으로 80여 평의 집을 짓고 독서를 하며 민족 해방을 위해 그가 할 방도를 모색하였다. 동제대학에서 수학한 산부인과학에다 옥고를 치르면서 익힌 한방과 침술로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해방이 되자 상경하여 상해의 청년당원들을 주축으로 한 ‘민의사(民意社)’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좌우로 갈라진 현실에서 뜻을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화순으로 귀향한 후 현실 정치와 완전히 손을 끊고, 교육사업에 매진하였다. 화순군 이서면에는 1927년 세워진 이서공립보통학교가 있었지만, 교통이 불편하여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한 학생이 많았다. 1947년 변극은 사재를 내어 7칸짜리 이서북국민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의 재정 기반 마련을 위해 3천여 평의 논까지 내놓고 후원회장을 맡았다. 1947년 4월 서울 정치대학에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강사 생활을 한 그는, 1951년 1월부터 동년 11월까지 이리 농과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하였다. 1952년 1월 전남대학교 전신인 광주 농과대학 부교수로 임용된 이후, 1965년 8월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명예 퇴임을 하였다. 그는 이들 대학에서 ‘독립운동사’를 강의하였다. 국한문체로 된 ‘독립운동 약사’는, 을사늑약 성립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소개한 서언부터 제1장 을사늑약과 의병, 제2장 광무황제의 양위와 한국군 해산, 제3장 안중근 의사와 경술국치, 제4장 경술국치 이후의 독립운동 과정, 제5장 윤봉길 의사와 한중 합작까지 서술되어 있다. 이 강의는 해방 후 대학 강단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독립운동사 강의였다. 이러한 강의가 전남대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이미 일제 강점기 목포상업학교, 광주농업학교의 학맥을 계승한 민족 전남대학교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60년대 이후 전남대학교가 민족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것은 변극의 교육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항상 잔잔한 미소로 학생을 지도한 변극 교수는 불의에는 단호하였다. 1961년 교수협의회 의장으로 있을 때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전남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한 이가 교수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자 크게 꾸짖어 사과를 받아내기도 하였다. 독립투사의 강한 기개가 살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민족 교육의 주춧돌을 닦는데 혼신을 다한 변극의 삶에 또 다른 변곡점이 왔다. 변극은 천은사의 용화 스님을 1932년 귀향한 후 자주 만나며 불교의 진리에 심취하였다. 1950년 대 광주의 불교 신자 단체인 광주불교 선우회에서 활동한 것도 스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1965년 그의 나이 63세, 전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광주교당에 입교하면서 교단과 공식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그는 퇴임 후, 옛 동화병원 빈방 한 칸을 빌려 한약방을 차렸다. 전국에서 환자들이 밀려들 정도로 명의로 소문이 났다. 변극은 원불교 후원 기관인 동아병원장, 중앙요양원장을 역임하며 교역자의 의료복지에 도움을 주었다. 원광대학교에 한의과대학이 신설되자 초대 한의과대학장을 역임하였다. 변극은 5·18 민중항쟁으로 한국 사회가 요동치던 1980년 열반하였다. 그는 청년 시기는 독립운동가로, 중년에는 교육자로, 만년에는 원불교에 귀의한 종교인으로 평생을 살았던 위대한 민족주의자였다.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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