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한말 의병항쟁 최대의 격전지 전남 게시기간 : 2023-05-1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5-15 11:2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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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의병이 일어난 곳 일찍이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의병이란 민군(民軍)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를 당하여 정의롭게 일어나 조정의 명령에 따른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적에 대한 의분(義憤)에서 싸움터로 나가는 자들이다”라고 의병의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지금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대개 각도 의병으로 말하자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다”고 하여 호남의병을 최다로 꼽았다.1) 이런 지적은 다음 【표 1】과 같은 통계로 확인된다. 그리고 훌륭한 두 저서의 연구를 통해 다시 확인되었다.2) 그리하여 한말의 호남지역은 1908~1909년 항일의병투쟁의 최대 격전지로서 한말 의병운동사, 나아가서 우리나라 근대민족운동사에서 핵심적 지위를 점하고 있다.
위 【표 1】에서 명백히 알 수 있듯이 전라도 의병이 교전 횟수나 교전 의병 수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단연 많다. 1908년 전라도의 교전 횟수는 전국 대비 24.9%였고, 교전 의병 수는 24.8%를 차지했다. 1909년에는 그 비중이 더욱 높아져서, 1909년 상반기에는 교전 횟수는 47.2%였고, 교전 의병 수는 60%를 점할 만큼 절대적이었다. 전라도 안에서는 북도보다 남도의 비중이 훨씬 높았다. 또 다른 통계인 ‘1907년~1909년 전라남·북도 의병 토벌 개황’을 보면, 다음 【표 2】와 같다.3)
이 【표 2】에서도 확인되듯이 전라남도가 북도보다 충돌 의병 수도 배 이상 많았고, 피해상황도 훨씬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통계상으로 분명히 전라남도가 한말 의병항쟁에서 전국 최대의 격전지였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전라도, 특히 전라남도에서 의병항쟁이 왕성했을까?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전개 한말 의병항쟁은 전기·후기 두 시기로 나누는 것부터 다섯 시기로까지 나누는 등 여러 버전들이 있다. 교과서에서는 해당 연도의 간지(干支)를 따서 을미의병(1895),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1907)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정미의병 때인 1908년 12월, 전국 13도 1만여 명의 연합 의병부대가 서울 진공 작전을 벌인 것을 정점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실패하였고, 이후에는 호남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어 1908~9년의 2년간 오히려 절정에 이르렀다. 1907년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제자인 기삼연(奇參衍, 1851~1908)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설치하면서 의병을 일으킨 것과, 전해산, 심남일 등 의병장의 활동을 부각하고 있다. 따라서 호남의병의 활동을 고려하여 전개과정을 구분해 보면, 을미의병을 ‘전기 의병’(1894~1897)으로, 을사·정미의병을 ‘중기 의병’(1904~1907.7)으로,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를 ‘후기 의병’(1907.8~1909.10)으로 각각 나누고, 남한대토벌 이후 독립군으로의 이행을 목표로 한 시기를 ‘전환기 의병’(1909.11~1915)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4) 이 중에서 1906년 6월 최익현의 순창 거의 이후, 1907년 9월 기삼연의 장성 봉기로부터 본격화하는 ‘후기 의병’이 호남의병 활동 중 특히 주목되는 시기이다. 일제는 1906년부터 1909년까지 호남지방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906~1907년에는 최익현, 고광순, 기삼연을, 1908년에는 김준·김율 형제를, 1908년 후반부터 1909년에는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을 꼽았다. 이들 가운데 기삼연은 의진(義陳)인 호남창의회맹소를 주도하여 결성하였다. 이는 각지의 유생들과 일부 평민 출신이 지도부를 구성하였는데, 전투적이면서도 잘 조직된 의병부대였다. 김준·김율, 전해산, 심남일 등은 모두 호남창의회맹소와 관련된 의병장들이었다.5) 기삼연 의병부대는 1908년 1월 그가 체포되어 사망할 때까지의 약 4개월 동안, 호남지역 의병투쟁의 양상을 보다 전투적이고 대중적인 항일투쟁으로 크게 바꾸었다. 그리고 호남창의회맹소의 의진들이 분화하여 의병투쟁을 지속해 감으로써 전라도는 1908~1909년에 후기 의병의 중심무대가 될 수 있었다. 호남의병은 1908년 3월경(음력 2월) 전라남도 함평의 유생 심남일(沈南一, 1871~1910, 본명은 守澤, 南一은 호. 전남 제일의 首將이란 의미)이 남평에서 호남지역 서남부를 중심으로 의병투쟁의 새 장을 열면서, 전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호남창의회맹소에 가담하였다가 1908년 음력 2월에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의진간의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등 전라남도 남부지역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활약하였다. 심남일에 이어 4월(음력 3월)경에는 머슴 출신 안규홍(安圭洪, 1879~1910, 호 澹山)이 전라남도 보성의 동소산(桐巢山)을 중심으로 동남부 지역에서 과감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하반기에 들어 호남지역 의병운동에 또 하나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것은 전해산(全海山, 본명은 基泓, 海山은 호. 1879~1910)의 봉기였다. 이때부터 일제의 남한대토벌이 실시되기 직전인 1909년 8월까지가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고조기였다. 이때 전라남북도를 통틀어 의병들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호남 각지에서 의병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또 이 시기에는 전라북도 동부 산악지대의 의병투쟁도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다. 나아가서 의병들은 전라남도 남부 해안으로까지 세력을 뻗쳐 해상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제 호남 전역이 격전장이 되었다. 이처럼 호남지역의 의병투쟁이 2년 가까이 장기화하자 일제는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을 자신들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화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의병들의 과감한 투쟁으로 인하여 지방행정기구가 마비되고, 일본 실업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는 등 통감부의 식민지화 정책이 난관에 부딪혔다. 이에 일제는 1909년 9~10월 두 달에 걸쳐 ‘남한폭도대토벌(南韓暴徒大討伐)’이라는 이름으로 호남지역의 의병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다. 이상과 같은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전개과정을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다. 즉 경기, 강원, 충청, 경북 등 호남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1907년 군대 해산과 함께 의병투쟁이 고양되었다가 1908년 초부터는 일제의 토벌 공세로 인해 점차 퇴조하였다. 반면에, 호남지역은 초기에는 오히려 잠잠하다가 1908년 하반기 이후가 되면 거의 전역이 ‘의병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이런 호남의병의 특징 중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점은 ‘의진(義陳)간의 연합전선 형성’을 꼽을 수 있다. 후기 의병에 들어서 “무릇 일은 합치면 강해지고 분열되면 약한 것이다. 지금 의병들이 봉기하는 것을 보니 모두 병사가 천 명을 넘지 않고 총은 백 자루가 채 안 된다. 마땅히 일제히 통고해서 일정한 장소에 회맹하여 동심합력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성공하고 그렇지 않으면 패한다. (중략) 이로부터 일이 있을 때는 합치고, 일이 없을 때는 나뉘었다.”6)
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어 갔다. 그 후 전라남도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전해산 의병부대를 중심으로 11개의 의병부대가 연합하여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을 결성하였다. 당시 전라남도의 남부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심남일 의병부대는 연합전선의 형성에 적극 참여하여 호남동의단의 제1진이 되었다. 이렇듯 호남의병은 연합투쟁 내지 공동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또 하나 더 주목한다면, 호남의병은 1907년경 장기 항전에 대비하여 국내에 영구적인 의병기지의 건설을 추진하였던 점이다. 이들은 지리산과 도서지역을 의병의 기지로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초 특히 전남의 도서지역은 ‘의병의 소혈(巢穴)’로 인식될 정도였다.7) 또 다른 어떤 지역보다 평민 의병장들이 많았고, 여느 지역과는 달리 2년여의 장기간에 걸쳐, 그리고 강력하게 투쟁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한말 의병은 독립유공자의 첫 자리에 있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대상요건을 보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모두 기본적으로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한 분들이 대상이다. 따라서 1895년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는 의병항쟁부터 독립유공자 대상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연히 의미 있지만, 현재 독립유공의 첫 자리에는 1895년 을미의병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의병은 반침략민족운동의 첫장을 장식하고 있으며 그 맥락에서 이어지는 2차, 3차 의병운동도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의병항쟁은 반침략민족운동의 선구이며 그중에서도 호남의병은 그 중심에 있었다고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다. “남한폭도대토벌” 작전 - 1909년 호남의병 대학살사건 여타 지역과는 달리, 장기간에 걸쳐 강력한 의병들의 항쟁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지속되자, 1909년 후반 일제는 호남지역의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고서는 의병세력을 소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쳤다.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이었다. 일제의 추산에 의하면 ‘남한폭도대토벌’ 작전 직전 호남지역의 의병은 의병장 약 50명을 포함하여 약 4,000명 내외에 달했다. 이 작전을 통해 그야말로 씨를 말리는 토벌에 들어갔고, 남한, 즉 전라도의 주민들은 학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남한폭도대토벌’ 작전은 1909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에 걸쳐 실시되었다. 일제는 2,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작전구역인 전라남북도를 【지도 2】에서와 같이 3구역으로 구분하여 세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였다. 남한이라 했지만, 토벌작전의 대상은 부안-태인-남원-구례-하동을 잇는 선의 서남쪽 지역으로, 섬진강 이서의 도서·연안 및 해상까지 포함하는 전라남북도 거의 전역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교반(攪拌)적 방법으로 학살에 가깝게 자행되었다.8) 이런 수법은 사실 이미 동학 때 역시 전남이 당했던 만행이기도 하였다. 또 “폭도의 검거에는 밀정을 사용하는 것 외에 독(毒)으로써 독을 제(制)하는 수단에 의거하여 규문(糾問)에서 얻은 것과 감언으로써 유도하여 다른 폭도를 적발하고 순차로 다수의 폭도를 검거한다”는 등 모든 야비한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9) 일반 주민까지도 의병과 구별하지 않고 체포하거나 구타 살해하는 등의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당시 전남경찰서의 보고에 의하면, 1909년 8월 25일부터 10월 21일까지 이 작전으로 사망한 전라남도 권역 의병은 420명, 체포자 또는 자수자는 1,687명이었다. 특히 심남일(沈南一), 안규홍 등 약 26명의 주요 의병장이 체포되었고, 이들을 포함해 체포된 의병 대다수가 현장이나 감옥에서 처형당했다. 이 기간 동안 희생된 의병장만도 103명에 달하였다. 이때 일본군에 잡힌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 - 보성 - 낙안 - 순천을 경유하여 광양 – 하동까지 이어지는 도로작업이었다.10) 그래서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불렀다. 대토벌로 인하여 1909년 말에 이르러 호남지역에서 의병은 사실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 작전 이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들은 만주 ·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게 된다.
호남의병들의 의분(義憤) 한국주차헌병대장(韓國駐剳憲兵隊長)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가 경무국장(警務局長) 마츠이 시게루(松井茂)에 올린 보고서11)에 보면, 호남의소 심남일의 이름으로 쓴 광고에 “의병이란 본래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죽어 한국의 산토(山土)에 묻힐 뿐, 어찌 여한이 있겠는가?”라 하였다.
또 잘 알려진 기록이 있다. 영국인 종군기자 프레더릭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가 저술한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1908) 중 1907년 양평(당시 양근)에서 만난 의병에 대한 기술이다. 매켄지는 그가 만난 의병들에 대한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은 매우 측은하게만 보였다. 그들은 전혀 희망이 없는 전쟁에서 이미 확실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오른쪽에 서있는 군인의 반짝이는 눈과 미소를 보았을 때, 나를 질책하는 것 같았다. 동정심! 어쩌면 내 동정심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들은 그들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그 표현 방식이 잘못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12)
라고 하여 의병들이 겉으로는 측은해 보일지라도 그들의 내면에서 그들은 동포들에게 애국심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고 느껴, 이에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그중 한 의병장교와의 대화에 대하여 “그는 자기들의 전도가 반드시 밝은 것만은 아님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13)
라고 썼다. 이렇게 그는 의병들의 애국심과 자유민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인에게 ‘비겁하다’거나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 ‘무심하다’는 식의 조롱은 이제 그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다”14)고 하여 한국인의 저항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 한말의 의병전쟁은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오로지 ‘의분’으로 일어난 투쟁이었다. 따라서 승패는 당초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승패는 처음부터 불 보듯 뻔했는지도 모른다. 그 점은 의병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하였으며, 일제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면서도 추호도 굴복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의병들은 일제가 자신들을 강도나 살인범으로 취급하는 사실에 분노하며 전쟁 포로로 취급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양상기(梁相基)와 유병기(劉秉基)의 재판 기록에 분명하다. 이들은 각각 내란·강도·방화·살인 사건과 폭동·강도 사건으로 재판 받았는데, 그 판결문을 보면, “피고 등(양상기와 유병기)은 한국의 시운이 날로 기울어져 감을 좌시할 수 없어서 이를 회복코자 하는 기대를 가지고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종종 수비병, 또는 헌병과 교전하였으므로, 그간 원 판결이 인정한 것과 같이 피해 사실을 발생케 한 일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는 전쟁으로부터 발생한 당연한 귀결로서 피고 등은 당초부터 원 판결과 같은 범행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또 하나의 범행도 없으며, 필경 피고 등의 행위는 충군애국을 위한 데에 불과하며 그리하여 포로가 된 오늘에 있어서는 적이라고 해서 피고 등을 살륙하는 것은 실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이며 법률의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5)
라고 하는 의병들의 주장을 담고 있다. 즉 나라의 시운을 회복코자 의병을 일으켜 교전하였으며 이는 충군애국을 위한 것일 뿐, 범행이 아니기 때문에 포로가 되었다고 해도 교수형 등 법률로 제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의병으로서 정당한 전쟁을 하다가 포로가 되었으니 전쟁포로로 대우받아야 마땅하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8세의 동갑내기 이들은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순국하였다. 의병의 전통 – 정의로운 정신은 이어진다. 전남 내지 호남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의미로 ‘의향’을 첫손에 꼽는다. 전남에게 ‘의향’의 정신은 충만하다. 그런 정신을 만든 역사 중 분명한 하나가 한말 의병전쟁이다. 더구나 그 연원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이 자리잡고 있다.16)임진의병의 정신이 그대로 한말로 이어졌다. 한말 의병들은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통을 임진의병부터 이어지는 호남지방의 역사 전통과 연결시키면서 당위성을 내세웠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09년 윤2월(3월) 도통대장(都統大將) 박용식(朴鏞植)이 대장(大將) 조경환(曺京煥)을 위해 쓴 제문을 보면, “예부터 호남의 의성(義聲)은 가장 높았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충용이 높아 제봉 고경명과 중봉 조헌 등이 금산에 들어가 순국하였으며, 또한 삼장사도 진주에서 운명함으로써 강역을 회복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17)
라 하여 예부터 “호남은 ‘의성’이 최고였다”고 말하면서 임진란 당시 호남지역 의병들의 순국 정신을 상기시키고 있다. 또 1908년 4월에 익명의 의소(義所) 이름으로 곡성순사주재소(谷城巡査駐在所)에 보낸 치장(馳章)을 보면, “너희들은 또한 임진 8년의 일을 생각하지 않느냐? 임란시에도 너희들은 불량한 일을 한 까닭에 성공하지 못하고 크게 천벌을 받았으며 … 이 죄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 한국을 지금 다시 침범하니 어찌 분노하지 않겠는가? 우리 한국 2천만 동포 중 누군들 선조가 임란 8년에 너희들 손에 죽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 원한이 이와 같으니 마침내 서로 내응하여 예기치 못한 재난[즉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속히 돌아가 명을 보전하라.”18)
라 하였다. 이렇듯 의병들은 과거 임진란에서 일본의 패배를 상기시키고, 오늘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이미 양국 간에는 역사적으로 구원(舊怨)이 있는 까닭에 우리 민족의 저항은 총체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일제의 침략은 재난으로 끝날 것이니 속히 물러나라고 일갈하였다. 의병들의 이런 인식은 일제도 알고 있었다. 임시한국파견대사령부가 1909년 10월 27일 작성한 『임시한국파견대의 남한대토벌 실시보고의 건』을 보면, 호남지역의 ‘폭도’가 왜 치성한 지에 대하여 “문록(文祿)의 옛일[임진왜란]을 몽상하여 방인(邦人, 일본인)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 눈에 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의 경험이 한말 의병에게 전해지면서 호남의병들에게 명분과 함께 정의감을 심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19) 이렇듯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이 한말 의병항쟁의 귀감이 되었듯이 한말 의병항쟁은 이후 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렇듯 임진의병은 한말 의병으로 이어졌고 또 이는 반침략민족운동의 선구가 되어 강점기 민족해방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정의로운 정신은 이어진다. 그런 점에 의병의 역사적 존재이유가 있고, 이것이 ‘의향’이 갖는 역사성이다. ‘의향’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여기서 의병을 돌아보며, ‘의향’에 대해 생각해보자. 의병은 이겨야만 의미가, 또는 가치가 있을까? 임진의병은 국난극복의 동력이 되었기에 당당하게 드러내며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한말의 의병은 그렇지 못했다. 저항은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그런 저항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비록 나라를 지키는 데까지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의로운 행위들이 있다. 농민들의 항쟁은 “패배하기 일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이를 가치있게 평가한다. 물론 그 이유 중 하나는 그 과정에서 성장하고, 훗날 성공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개인의 좋음을 실현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지만, 민족이나 국가를 위한 좋음을 실현하는 것은 더 고매하고 더 신적(神的)인 일”이며, 이를 통해 행복을 얻는다고 하였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인데, 그중 가장 고매한 죽음은 가장 고매한 위험 속에서 죽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전쟁터에서의 죽음이며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20) 또 그는 『수사학』에서 말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가장 이로운 것이 가장 큰 미덕인데, “용기는 전쟁 때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고, 정의는 평화로울 때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라 하여 정의와 용기가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하였다. “그것으로 얻는 것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그 자체로 선호”한다는 것이다.21)설사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정의를 위해 보여준 용기야말로 가장 큰 미덕인 것이다. 부당함에 대해 의분을 느끼는 것은 마땅하며, 그런 의미에서 의분을 ‘신(神)의 감정’으로 여겼다. 호남의 의병은 바로 이런 해석에 부합한다. 의병이야말로 민족이나 국가를 위한 좋음의 실현을 목적으로 고매한 위험 속에서 고매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시민적 용기를 보인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스스로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신들의 감정인 의분으로 개인보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좋음을 실현하는 용기를 갖고 있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는 곳이 곧 ‘의향’인 것이다. ‘의병의 날’과 남도의병역사공원 호남의병은 전라도민들은 물론 나라 전체의 민족의식을 고양시켜 국권을 끝까지 지키려는 저항의식이 살아남게 하였다. 이는 훗날 국내외의 끈질긴 독립운동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것이 의병항쟁의 성과였다. 당시의 일시적 승패만으로 그 의미를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표 3】 전국도별 의병유공 서훈 선열 수
정부는 2010년 대통령령으로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제정해 국가기념일로 지내오고 있다. 경북 청송군은 2011년도에 ‘항일의병기념공원’을 조성해 전국의 의병을 기리고 있다. 여기에는 전국도별 의병유공 서훈 선열들의 명단이 도별로 정리되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 【표 3】과 같다.22) 이 표를 보더라도 전라도의 선열 수가 760명으로 전체의 28.6%나 될 만큼 가장 많다. 그런 점에서 늦었지만, 남도의병역사공원이 전남 나주시 공산면 영상테마파크 일원(약36만㎡)에 들어서게 된 것을 환영한다. 이 사업은 전남도 민선 7기 공약으로 위기 때마다 구국에 앞장섰던 의병들의 충혼을 기리고 역사를 정립해 도민들의 영예와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다. 사업의 성공을 통해 한말 의병전쟁 최대의 격전지 전남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보훈에 앞장서서 ‘의향 전남’의 전통을 길이 이어가길 바란다. 1)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중 “義兵者民軍也 國家有急直以義起 不待朝令之徵發 而從軍敵愾者也”(上編 17쪽), “蓋以各道義兵言之 全羅道爲最多 而今未能得其詳也 且有待於後日焉”(上編 24쪽) 참조.
2) 洪淳權, 『韓末 湖南地域 義兵運動史 硏究』(서울대출판부, 1994);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일조각, 2004) 참조. 이 글은 두 저서에 크게 의존하였다. 특히 자료도 제공해주고 친절하게 자문도 해 준 홍영기 교수에게 감사드린다. 3) 홍순권, 같은 책, 〈부표 2〉(420쪽)에서 발췌하여 작성. 4) 이 구분은 홍영기, 앞 책, 476쪽 참조. 이 책의 부록에는 약 2,500명의 호남의병에 대한 분석표를 수록하고 있어 호남의병의 규모 및 역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5) 홍영기, 같은 책, 223쪽. 6) 『湖南義兵將列傳』(『독립운동사자료집』2, 1970, 652~653쪽). 홍영기, 앞 책, 471쪽에서 재인용. 7) 홍영기, 같은 책, 469쪽 8) 교반적 방법이란, “토벌군을 세분하여 한정된 一局地 안에서 수색을 실행하여 전후좌우로 왕복을 계속하고, 또 奇兵的 수단을 써서 폭도로 하여금 우리의 행동을 엿볼 틈을 주지 않는 동시에, 해상에서도 수뢰정·경비선 및 소수 부대로서 연안·도서 등으로 도피하는 폭도에 대비하는 등, 포위망을 농밀하게 하여 드디어는 그들이 진퇴양난에 걸려 자멸 상태에 빠지도록 하였다”라고 설명하였다. 홍순권, 앞 책, 154쪽. 9) 홍순권, 앞 책, 158쪽. 10) 【지도 2】 참조. 11) 內部 警務局 편찬, 『暴徒に關する編冊』, 韓憲警 乙 第八七九號, 隆熙 二年(一九○八·明治 四一) “義兵本意 朝討賊 而夕死葬於韓國山土矣 豈有餘恨哉” 12) F. A. Makenzie, CHAPTER XVIII WITH THE REBELS,『THE TRAGEDY OF KOREA(대한제국의 비극)』(E. P. Dutton & Co, NY., 1908), 201쪽. “A pitiful group they seemed – men already doomed to certain death, fighting in an absolutely hopeless cause. But as I looked the sparkling eyes and smiles of sergeant to the right seemed to rebuke me, Pity! Maybe my pity was misplaced. At least they were showing their countrymen an example of patriotism, however mistaken their of displaying it might be.” 13) 같은 책, 203쪽. “He admitted that the men were in anything but a good way. ‘We may have to die.’ he said. ‘Well, so let it be. It is much better to die as a free man than to live as the slave of Japan.’” 14) F. A. 매켄지 지음/ 신복룡 역주, 『한국의 독립운동』(집문당, 2019), 140쪽. 15) (판결 명치 43년 형상(刑上) 제88호·89호,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 의병항쟁재판기록,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16) 임진전쟁에서 분연히 일어나 이름없이 죽어간 수많은 남도의병들의 자취를 발로 뛰며 찾아 정리한 김남철, 『남도 임진의병의 기억을 걷다』(도서출판 살림터, 2022)가 있어 남도 의병의 역사를 다시 기억하게 한다. 17) 內部 警務局 편찬, 『暴徒に關する編冊』, 羅警秘發 第四一號, 隆熙 三年(一九○九·明治 四二) 四月/ 홍순권, 잎 책, 341쪽; 홍영기, 앞 책, 110쪽 참조. 18) 內部 警務局 편찬, 『暴徒に關する編冊』, 光秘收 第五○七號, 隆熙 二年 五月 十二日(一九○八·明治 四一), 馳章(戊申四月 日)/ 홍순권, 앞 책, 340쪽 “汝亦不思壬辰八年之事乎아 壬亂時에도 汝行不良之事故로 成功은 不記고 大被天罰며 … 此罪를 不爲生覺고 有名韓國을 方今亦侵니 豈不憤怒乎아 吾도 韓國二千萬同胞中 何人先祖가 壬亂八年에 不死汝手乎아 … 讎寃이 如此니 終末에는 相爲內應야 難免不測之禍리니 速歸保命事” 19) 홍순권, 앞 책, 136쪽. 20) 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도서출판 숲, 2018), 24, 110, 119쪽. 21) 아리스토텔레스/ 박민재 옮김, 『수사학』(현대지성, 2020), 제9장 신전을 위한 연설, 59, 62, 141쪽. 22) 공훈전자사료관의 통계에 따르면, 2023년 4월 현재는 2,715건으로 다소 늘었다.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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