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성좌] 우물에 몸을 던진 노모(老母)의 아들, 조점환(趙占煥, 1907~1940) 게시기간 : 2025-02-05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5-01-2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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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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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이 어두운 일제강점기에 빛난 크고 작은 항일의 별들
‘성좌(星座)’, 우리말로 ‘별자리’다. 별은 빛난다. 밝기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때로는 무리를 짓는다. 그것이 ‘별자리’다.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빛난다. 어두울수록 더 밝게 빛난다. 칠흑같이 어둡던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빛난 무수한 항일의 별들이 있었다. 그 별들의 자취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칼럼의 제목을 이렇게 붙이면서 영화 두 편의 제목이 떠올랐다. “이름없는 별들”(1959)과 “대지(大地)의 성좌(星座)”(1963)이다. 전자는 광주학생운동을, 후자는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모르고 있던 ‘항일의 별들’이 이 칼럼을 통해 좀더 빛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별들을 모아 ‘별자리’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출처: 공훈전자사료관 우물에 몸을 던진 노모(老母)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다 보면 안타까운 순간들이 종종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피와 땀, 눈물로 얼룩진 사연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필자의 가슴에 오래도록 꽂혀 있는 장면이 있다. 1929년 11월에 일어난 목포학생만세시위에 연루되어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아들이 광주형무소로 이감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집 우물에 몸을 던진 60세 노모(老母)의 사연이다. 아들의 이름은 조점환(趙占煥), 독립유공자(2005년 애족장 추서)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은 아니다. 그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고 자료도 빈약하나 대강이나마 그의 생애의 퍼즐을 맞춰보려 한다. 목포상업학교 졸업과 일본 유학 조점환은 1907년 7월 16일 전라남도 목포부 대성동 73번지에서 강성녀(姜姓女) 여사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언제인지 모르나 부친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초등·중등·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집 안에 깊은 우물도 있었으니 경제적으로 그리 곤궁하지는 않았던 것같다. 목포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3월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전라북도 임실금융조합 서기로 근무했다. 안정된 직장이었지만 그는 “로동이라도 하야서 고등지식을 어더보랴고”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 1929년 5월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 경제과에 입학했다.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타지로 떠나보낸 모친은 잠시라도 귀국해서 만나자는 편지를 아들에게 자주 보냈고, 4월에 출국한 그는 7개월만인 11월에 귀향했다. 그리고 같은 달 19일,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는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이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경찰에 체포되면서 그도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그가 귀국한 시점이 만세시위 전이었는지 후였는지, 만약 전이었다면 그가 이 만세시위와 관계가 있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목포상업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기 5달 전인 1929년 6월 4일, 목포상업학교 2·3·4학년 학생 89명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문제의 시정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나섰다. 1. 조선인·일본인 공학제 철폐의 건(① 조선어 문제 ② 조선역사 문제 ③ 조선인·일본인 차별 문제 ④ 조선인 입학률에 관한 건 ⑤ 조선인 졸업생 취직에 관한 건) 2. 학교당국의 부정사건(① 신입생 선발상 부정사건 ② 공금횡령에 관한 건) 3. 우편물 및 서적을 무조건으로 압수·검열·심문에 관한 건 4. 결원교사에 관한 건 5. 언론자유에 관한 건 6. 교내 회의에 생도대표대원 참가의 건 7. 무자격 교원 배척의 건
한마디로 민족차별교육의 철폐와 조선인 학생의 자치를 요구한 것으로, 조선인 학생(122명)과 일본인 학생(130명)이 함께 다니는 공학이어서인지 다른 중등학교 맹휴의 요구조건에 비해 구체적이었다. 1920년대 후반 이같은 맹휴의 배후에는 광주의 성진회와 같은 비밀결사가 있게 마련인데, 맹휴 당시 목포상업학교에도 사회주의적 경향을 띤 독서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런데 광주학생운동 기간인 11월 19일 일어난 목포상업학교의 만세시위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뚜렷했다. 학생들은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적기(赤旗)를 흔들며 다음과 같은 구호가 담긴 전단을 뿌렸다. ◦피감금학생을 탈환하자 ◦총독폭압정치 절대반대 ◦교육에 경찰간섭 반대 ◦치안유지법 철폐 ◦중국혁명 지지 ◦적색러시아 지지 ◦제국주의전쟁 절대반대 ◦식민지해방 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이같은 격문은 광주학생운동 기간에 나온 어느 격문보다도 격렬한 것이며, 정치적 성격이 분명했다. 6월의 요구가 식민교육 철폐를 내건 것이라면 11월의 격문은 식민통치 타도를 외친 것이다. 그만큼 일제의 탄압도 거셌다. 학생 12명이 검거되고 신간회 목포지회 간부와 청년동맹원 10여명도 체포되었다. 학생들은 11월 22일 다시 가두시위에 나섰다가 4명이 연행되었다. 두 차례의 시위로 구속된 학생이 36명, 정학·근신 처분을 받은 학생이 70명이었다. 아들은 ‘투옥(投獄)’, 노모는 ‘투정(投井)’ 조점환은 “일본서 도라온지 닷새만에” 경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고 치안유지법위반으로 학생들과 분리심문을 받았다. 이어 1929년 12월 26일 기소되어 1930년 3월 5일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모친은 상황을 비관하며 식음을 전폐하던 끝에 3월 7일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다음은 관련 기사이다. 지난 7일 일은 아츰 다섯시경에 목포부 대성동 73번지에서 사는 강성녀(60)는 자긔집 우물에 ᄲᅡ져 자살하얏다는데 … 강성녀는 공부하는 자식을 자긔가 불너다가 그런 변을 당케 되엿다고 한탄함을 마지아니함으로 뎜환의 지우들은 오늘 나오느니 래일 나오느니 하는 말로써 위로하여 나오던바 동사건은 예심이 종결되자 광주로 이송됨을 알고 “내 자식을 내가 불러다가 이런 화를 당케 하엿스니 차라리 내가 죽겟다”고 하며 밤낫 호흡 장탄으로 가위 실성 디경에 이러섯던 중 아모도 모르는 틈을 타서 그와가티 만흔 유한을 품고 자살한 것이라는데 일반사회에서도 매우 측은히 녁인다더라(『중외일보』 1930.03.11. 「入監한 愛子를 생각하야 老母가 投井自殺」)
“노모(老母)의 투정자살(投井自殺)”이란 제목이 붙은 이같은 기사는 『동아일보』·『조선일보』·『중외일보』 모두에 비중있게 실렸다. 자신이 보고 싶다며 아들의 귀국을 보채지 않았다면 이런 수난이 없었을텐데 자기 때문에 아들이 투옥되었다는 자책감을 떨치지 못한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투옥된 무수한 학생들의 부모들이 걱정과 한숨으로 지내며 피눈물을 흘렸지만 이같이 비극적인 사례는 전무후무했다. 기소(起訴) 혐의과 면소(免訴) 석방 첫 공판은 1930년 3월 1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이때 그와 이병우(李丙祐)·이상원(李尙源) 3명은 ‘학생결사(學生結社)’ 혐의를 받아 목포상업학교 학생들과 분리하여 심문을 받았다. 「예심종결결정서」에 따르면 이병우는 조점환과 같이 1928년 3월 졸업하고 1929년 9월 일본 관서대학(關西大學)에 입학했으며, 이상원은 1929년 9월 4학년을 중퇴했다. 조점환·이병우는 후배들과 함께 1927년 10월경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며, 1929년 4월 조점환의 집에서 또다른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가 5월 해산되었다는 것이다. 즉 조점환은 4학년 재학 중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졸업 직후 후배들의 비밀결사 조직을 지도하고 일본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예심종결결정서」에는 1929년 5월 “일본대학 전문부 경제과에 입학”한 조점환이 1929년 6월 후배들과 함께 “민족차별 철폐와 일인교사 배척을 표방한 동맹휴학 감행”했다고 나온다. 시기가 맞지 않아 모순된다. 결국 “공판에 부칠 충분한 범죄혐의가 없슴으로” 그를 비롯한 대부분 피고들이 면소(免訴) 판결을 받고 1930년 7월 석방되었다.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이 없었던 셈이다. 따라서 정말 그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동맹휴학을 지도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청년단체에서의 항일활동과 수난의 반복 석방 이후 목포청년동맹에서 활동하던 조점환은 1931년 9월 다시 경찰에 검거되었다. 어느 청년이 목포상업학교 교정에 “과격한 격문 다수”를 살포했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경찰은 증거를 찾지 못해 그를 방면했다. 이처럼 경찰의 감시가 계속되었지만 그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1932년 3월 목포부 북교동 김정수(金正秀)의 집에서 이기동(李琪同)과 함께 회동하고 8월 무안군 이로면 이로공립보통학교 뒷산에서 농민·노동자를 위한 사회주의계열의 비밀결사를 조직했으며, 같은 달 목포부 연동 자신의 하숙집에 다시 모여 비밀결사의 명칭을 ‘레닌주의자동맹’으로 결정하고 박흥복(朴興福) 등을 가입시켰다. 이후 그는 목포를 떠나 1932년 10월 경성 안국동에 ‘코리안 스타일’이란 양복점을 개업했고, 1933년 3월 경성 청진동에 ‘고려공예사’라는 칠기점도 개업했다. 목포에서는 이미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혔기에 활동이 쉽지 않았으며,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조직은 1934년 2월 경찰에 발각되어 세간의 이목을 끌었으니, 이른바 ‘목포공산주의자동맹사건’이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목포와 무안의 남녀 청년 수십명이 체포되고 12월 공판에 회부되었는데, 정작 공판은 열리지 못했다. 핵심인물인 조점환이 종적을 감추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엔가 그는 만주 길림성 연길현 도문(圖們)의 한인촌으로 도피하여 간판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의 집요한 추적 끝에 1935년 8월 현지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1936년 3월 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열린 공판 때 검사는 그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고, 3월 20일 재판장은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다. 이렇게 조점환은 다시 2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 1940년 11월 17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목포항일운동계의 ‘장재성’ 조점환은 광주학생운동의 대표적 인물인 광주고등보통학교 출신 장재성(張載性, 1908~1950)과 유사한 점이 있다. 목포상업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 계열의 비밀결사에 참여했고, 일본에 유학했다가 귀국하여 학생만세시위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이후 수차례 옥고를 치리면서도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했다. 나이도 1살 차이다. 같은 전라도의 광주와 목포에서 힘겹지만 뜨겁게 동시대를 살았던 ‘항일의 별’들이다. 장재성의 모친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만세시위의 주역인 딸 장매성(張梅性)이 오빠와 함께 투옥되자 법정에서 실신했다는 점도 어딘지 유사하다. 2029년 우리는 광주학생운동 100주년을 맞는다. 여러 가지 기념사업이 펼쳐지겠지만, 아직도 이념의 잣대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장재성과 같은 인물의 서훈을 위한 노력, 그리고 비록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조점환과 같은 인물에 대한 조명이 모두 시급하다. 그것이 이른 새벽 ‘단장지애(斷腸之愛)’를 가슴에 품고 차디찬 우물에 몸을 던진 모정(母情)에 대한 우리의 도리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매일신보』
「예심종결결정서」(광주지방법원, 1930.07.26.) 「조점환 등 판결문」(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1936.03.20.) 『독립유공자공훈록』(국가보훈부) 글쓴이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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