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해남 녹우당(綠雨堂)에서 한(恨)을 토파(吐破)하다:갑자년 자부 간찰 규한록 게시기간 : 2025-04-1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5-04-14 14:3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
|||||||||
종이 한 장이라구? 천만에. 음력 3월. 보성 한실마을 광주이씨집. 이제 갓 서른 넘긴 윤생원댁 며느리는 마루 끝에 걸터 앉아 뜰에 핀 꽃을 보았다. 따스한 봄날 햇살을 받아 꽃이나 풀이나 생기가 넘쳤다. 윤생원댁 며느리 광주이씨 속은 죽을 기운만 가득했다. 신랑 죽었단 소식을 십 여년 전 이맘 때 들었다. 저리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못 봤고, 십 년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저버리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할 말은 모두 쏟아내야 적어도 원귀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마님 감ᄒᆞ옵소셔’
맑은 하늘, 내리친 날벼락-19세에 번개같이 과부가 되다 청상(靑孀)이 어디 없겠습니까만 청상도 간이 있지, 남편 면목도 알지 못하고 유언도 못 들어습니다. …(중략)…성인한 지 달수는 삼 삭이지만 불과 날수는 오십 일이나 오순도 다 차지 않습니다. 심신에 조화한 마음이 없다가 이 모양 이 신세 되었으니 어찌 세상에 머물 뜻이 있겠습니까.
1821년 신사년 겨울 12월. 이씨의 할아버지는 혼서를 받고 기뻐했다. 조선 제일 명문가로 꼽히는 해남윤씨 자식을 손자 사위로 맞게 되어서였다. 해남윤씨라면 이씨도 익히 들었던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여동생인 고모할머니가 해남윤씨 집안 사람인 윤규회(尹奎會)의 부인이기 때문이었다. 윤규회도 잘된 일이라고 좋아했다. 그렇게 해서 이씨는 윤광호(尹光浩)와 혼례를 올렸다. 첫 대면인지라 고개 들어 신랑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혼례식 끝나고 신랑은 해남으로 갔다가 다시 보성 한실로 와서 며칠 머물다 다시 해남 제집으로 갔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 기운 한창 따스하고 하늘 맑던 3월에 벼락이 내리쳤다. 신랑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한실에 전해졌다. 결혼 생활이란 게 달수로 치면 석 달, 날수로 세면 겨우 50일어치였다. 함께 있었던 시간은 더 적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신랑은 어떤 사람일지 생각해보거나 좋아할 마음조차 생길 겨를도 없었다. 딱 두 번 보고 백년을 같이 살겠노라 기대에 부풀었지만 보성과 해남에 잠깐동안 각각 떨어져 있는 사이에 과부가 되었다. 세상에 이런 인생도 있나 싶었다. 죽어 저 세상 가도 얼굴 몰라 아는 체도 못할 형편이었다. 이승에서 임자 없는 여편네 된 일도 억울한데 저승에서도 신랑을 못 찾을 처지일거라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렸다. 믿기지 않아 해남으로 내달렸다. 살아서 봤던 이가 시신인 된 채 누워 있었다. 잘못된 소식이겠지라는 희망은 꺼졌다. 신랑은 번개같이 왔다가 번개처럼 갔다. 이씨는 번개같이 과부가 되었다.
![]() 윤광호의 혼서. 윤종직이 썼다. 윤종직은 윤광호 삼촌이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훔쳐 산 목숨, 애 썩인 이씨의 종부살이 남편 윤광호의 장례도 치렀다. 이씨는 멍하니 벽만 바라보았다. 살 뜻은 없었고 살아갈 힘도 없었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쉽지 않았다. 자부 지각이 순전히 없어 당돌하게도 죽기를 버린 후 숨값이 두 싀삼촌에게 있었으니 두 시삼촌들께서 ‘윤씨 12대 종가 명문 사당, 산소, 우마장이 원통하고, 삼 십 와가(瓦家) 쑥대밭이 안 되는 일은 자네에게 있네. 저 불쌍하고 불쌍하신 아주머니 자네 없으면 어디에 의지하여 부지하실 터인가. 나는 명 짧았던 조카 성장하여 귀한 집 딸 생으로 공연히 죽게 둘 리가 없으며 원귀되리’란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지요. 자부가 먹으면 잡수시겠노라 하시면 제 옆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형제 목숨이 자네에게 있으니 위에 어머님 계시고 아래에 딸이 있다고 생각하여 보시게’라고 하며 아무쪼록 살아야한다고 하셨습니다. …(중략)…목숨만 지니고 살아주면 설움만 빼고 다른 근심은 없게 하여주시겠노라 하시기에 금석같이 믿고 투생하였습니다. 두 분 아자바님께서 십 년이 넘었다고 잊으셨겠는지요.
윤씨댁에서 종부가 마당과부 되어 자결했단 말이 나는 게 꺼려졌을까. 시할머니부터 시어머니, 시삼촌까지 이씨를 어르고 달랬다. 마당과부란 마당에서 혼례를 올리자마자 과부가 된 이를 세상에서 일컫던 말이었다. 두 시삼촌은 함께 굶어 죽겠노라 으르기도 하고, 윤씨 종가와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들먹이머 애원했다. 애쓰는 정성은 바다보다 더 깊었다. 친정에서도 ‘네 목숨 살리신 시삼촌 은혜를 잊으면 사람 아니다.’고 말했다. 이씨는 목숨을 지녀 살기로 결심했다. 30세에 과부된 시모라 공손히 대하지 않는다는 말 듣지 말고 잘 모시기, 자기가 죽지 않게 다독여주신 시삼촌 은혜에 잊지 않고 보답하기, 종들을 시켜 제사 빠드리지 않으며 천하 명문가 윤생원댁 종부로 당당히 살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종부살이 현실을 깨닫는 데에 거의 10여 년이나 걸렸다. 우선 빚이 많았다. 한때 나랏살림만큼 부유하다며 국부(國富)라는 명성이 있다 들었다. 현실은 달랐다. 소문과 달리 빚이 많았다. 종가 살림을 꾸리는 데 드는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제사는 일 년에 30번이나 되었고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종가 제사는 제삿상차림 비용만 드는 게 아니었다.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이 오가는 비용까지 부담했다. 가족과 집에서 부리는 종들까지 먹이려면 곡식이 충분해야 했지만 늘 모자랐다. 해남윤씨의 땅과 간척지가 많다고 들었건만 각 지역에서 바치는 물량은 들쑥날쑥이었다. 백치에서 올 짐들의 수량이 제대로 왔느니, 한 뭇이 안 왔느니 등 종들마다 말이 다를 정도였다. 1828년 무자년에는 제곡이 없어 시삼촌이 백포에 갔지만 곡식을 구하지 못했다. 겨우 제삿날 가까이 되어서야 곡식을 가져와 제삿밥을 해서 올렸다. 자부가 아는 빚만 해도 순재의 것 저번 해에 선복을 못 주었으니 삼십 관의 길미, 금년 선복을 주면 오십 금이고, 서천으로 간 돈 세전, 세후에 이십 금 남아 있다 하시고, 세곡은 모자라고 꾼 돈 거의 백 금이라 하시니 또 선복 나오면 갚아야 합니다. 빚 안지기는 자부가 (해남 시댁에)안 가는 데 있습니다. 아무쪼록 웅철이 장가들 때에 빈명(貧名)이나 안 나오게 하고 혼수에 빚 안 쓰는 것이 평생 소원입니다.
빚이 빚을 낳는 형편이어서 개미 쳇바퀴 돌듯 빚에서 헤어나기 쉽지 않았다. 빚으로 살림 꾸리다보니 양자 웅철이 혼사 때 들어갈 비용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다. 빚으로 혼사 치러 빈한하단 소문이라도 나면 윤생원댁 체면이 말이 아닐 터였다. 명문 윤씨가 종부로서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형세가 옛날만 못하고 소문 같지 않아 그런지 상전 대하는 종들 태도도 달랐다. 또철이와 차강이는 세를 받으러 온 곳과 온 섬을 다니다 보니 상전댁 경제 형편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기세 기운 상전댁 일은 충실히 부지런히 봐 줄 필요가 없었다. 정성 없는 태도를 대놓고 드러냈다. 종년들은 어찌나 드센지 시삼촌들의 매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죽은 신랑이 신혼 때 썼던 수저까지 훔쳤다. 종살이 할 집을 골라 드네 나가네하며 지들 맘대로 결정했다. 분통하지만 ‘몹쓸 것들’이란 말도 못 꺼낼 형편이었다. 집안 이어갈 후사 찾는 일은 더 급했다. 집안 어르신들은 되도록 빨리 결정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양자 들인 아이를 여기저기 물색했다. 어느 누가 자식을 남의 집 양자로 보내고 싶으랴. 쉽지 않았다. 재물도 제법 썼다. 이씨는 양자 찾아 정하는 데에 ‘윤씨댁 재물을 허탄이 많이 썼다.’고 했다. 결국 남편 윤광호의 10촌 형 윤명호의 아들 웅철이를 양자로 결정했다. 충남 서천에 있는 먼 친척이었다. 시어머니는 탐탁치 않게 여겼고 시삼촌은 놀란 표정이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윤씨 집안에서는 대개 3촌 또는 5촌 사이에서 양자를 보내고 받았다. 어초은댁 종가를 이어간 윤유기는 큰아버지 윤홍중에게 입양되었고, 윤유기는 조카 윤선도를 입양하여 종가를 잇게 했다.
![]() 윤지정-윤종경-윤광호 등이 종가를 이었다. 윤종경은 윤규상의 아들이다. 동생으로 윤종직, 윤종민이 있다. 양자로 들어와 윤광호를 계승한 이가 윤주흥(尹柱興)이다. <만가보(萬家譜) 중에서> 이미지출처:http://yoksa.aks.ac.kr/ 윤두서는 5촌 아저씨 윤이석의 양자가 되었고 윤종경은 윤덕희의 증손이었고 5촌인 윤지정의 양자가 되었다. 윤종경은 이씨의 시아버지였다. 윤종경에게는 두 동생 윤종직, 윤종민이 있었다. 그들은 종손이 된 맏형이 죽자 옆에서 윤씨댁 종부인 형수 양천 허씨와 조카 며느리 광주이씨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광주이씨가 당연히 3촌, 5촌 조카들, 적어도 윤덕희 핏줄 가운데 양자를 선택하리라 기대했을 터이다. 기대는 빗나갔다. 11촌 조카라니. 윤종직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조카 며느리 이씨는 증조부 윤덕희 핏줄이 아닌 윤덕훈 집안의 후손을 양자로 정했던 것이다. 윤덕훈은 윤덕희 동생이다. 윤덕희 후손도 아니고 촌수도 너무 멀었다. 집도 멀었다. 충남 서천이라니. 300KM, 거의 760리에 달하는 먼 거리였다. 자식을 내어준 보상도 해야하고, 양자 살피러 오갈 때 드는 비용, 웅철이 부모 왕래 비용까지 대려면 천하의 부자인 석숭도 감당치 못할 터였다. 윤종직과 윤종민은 조카 며느리 이씨의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웅철이 부모는 마치 딸 시집보내 듯 웅철이를 양자로 보냈다. 자식 빼앗겼다느니 어린 아이한테 종가 제사 같은 어려운 일만 시키다는 둥 원망 소리도 들려왔다. 철빈(鐵貧)하다고 표현할 만큼 가난했다. 도와주는 일도 해야했다. 이 일로 시삼촌과 사이가 벌어졌다. 이씨는 ‘자부 위한 양자이오니까?’라고 하며 양자 결정에 사심이 없고 다만 윤씨 가문만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발명했다. 이씨는 ‘팔도에 유명유명한 윤생원댁 12대 종가’를 위해 십 여년 애를 쓰며 살았다. 오장육부가 다 썩어 벌통처럼 구멍이 숭숭났다. 하지만 위 아래로부터 조소를 들었고 우세만 샀다. 죽은 남편만 생각하고 손끝 하나 하지 않는다느니 놀면서 종들에게만 일 시킨다 말이 돌았다. 종들을 순화하게 못 부리면서 반심을 먹었다느니, 일은 시어머니에게 모두 맡기고 친정에 편안히 있으며 시가에 안 온단 말도 들었다. 이런 말 들으려 남편 죽던 임오년과 그 다음해인 계미년 사이에 죽어버리지 않고 구차히 목숨 지녀 지금까지 살았단 말인가. 과부 삶도 고달프고 억울하지만 종가 며느리 삶은 더 기구했다. 목숨 훔쳐 산 보람은 일도 없었다. 오죽하면 ‘물은 건널수록 깊고 산은 넘을수록...’이라고 했을까. 과부 사정 과부가 안다고? – 더 큰 한(恨) 삭이며 사는 싀어마님 1822년 3월. 이씨의 시어머니 양천허씨는 넋 놓고 누워 있는 아들만 내려다 보았다. 혼례하여 어른이 된 아들이 장가간 지 50여 일 만에 죽었다. 이리저리 흔들어댔지만 아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18살이었다. 스무 해도 못 넘겼다. 이씨가 본 시어머니 첫 모습은 아들 잃어 정신줄 놓은 40대 중반 아낙네였다. 기가 온몸 온구멍을 막았는지 눈물조차 나오지 못하는 듯했다. 그 와중에도 돌아 앉아 벽 보던 어린 며느리가 혹여 자진할까 가슴 졸였다. 양천 허씨가 남편과 함께 한 세월은 10여 년 남짓이었다. 아들 윤광호는 태어난 지 다섯 해도 다 못 채웠을 때였다. 1810년 기사년에 호남에 대흉년이 들었다. 6월에 심한 가뭄으로 모내기를 거의 못했고 그 이후에도 비가 안 와 벼가 다 말라 죽었다. 1795년과 1796년의 이른바 ‘을병대기근’보다 더 심해서 100년 만에 든 기근이었다. 전라도 관찰사였던 이면응의 보고에 의하면 굶는 이들이 20여만 명이 넘었고 해남과 진도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해남과 진도는 윤씨 집안 토지가 집중된 지역이었다. 윤씨 집안도 기근을 피해 가지 못했다. 봄보리조차 나오지 못했다. 윤종경도 제대로 먹지 못해 병을 얻어 1810년 5월에 세상을 떴다. 허씨는 다섯 살 안 된 아들을 과부로 혼자 키웠다. 과부 자식이란 소리 안 듣게 하려 애도 썼다. 종부 역할, 남편의 생부인 시아버지, 두 시동생 돌보는 일도 허씨 몫이었다. 공부하다가 집에 온 시동생들이 떡을 먹고 싶다고 보챌 때면 7월 제삿날까지 기다려보자고 달랬다. 다행히 시동생들은 형수가 종가 살림을 잘 꾸릴 수 있게 옆에서 도와주었다. 윤종직은 조카 윤광호 혼인도 주선했다. 아들 윤광호가 혼례식 치르러 보성 한실로 갈 때에 그 기쁨은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었다. 이제 아들 며느리가 금실 좋게 지내며 종가 살림을 꾸릴 미래를 상상하는 즐거움도 생겼다. 두 달도 지나지 않아 기쁨과 즐거움은 말 못할 원한으로 변했다. 아들이 죽었다. 남편도 아들도, 종손도 없게 되었다. 종가 주인 자리가 비었다. 남편과 아들 없는 여주인에게 정성을 바치는 종들은 거의 없었다. 어린 며느리는 늘 종들이 순종치 않는다 불평했지만 허씨는 이십 년 넘게 겪었다. 아들조차 죽으니 더했다. 추운 겨울에 안채 방엔 불도 때지 않아 냉방에서 지냈다. 불 때라 하면 나무 없다 냉랭히 답하고, 불도 안 때고선 아궁이에 이미 나무를 넣었다고 거짓말까지 해댔다. 시동생 거처하는 사랑채는 ‘버쩍 덥게’ 해주었다. 입으로만 걱정해댈뿐이었다.
시동생들은 없는 남편 대신 바깥일 봐주며 ‘같은 종가에서 누군들 먹지 않으랴’며 종가 재물에 관심이 많았다. 원래의 곡수대로 주지 않기도 하고, 며느리가 재물을 허탄이 쓴다 타박하기도 했다. 재물 쓰는 일로 인해 허씨나 며느리와도 사이가 소원해졌다. 며느리가 서천의 10촌 친척 자식을 양자로 결정하자 시동생들은 불평을 터뜨렸다. 입양된 아이가 먼 촌수일수록 종가 일에 끼어들 여지가 줄어든다고 생각했을까. 무자년 …(중략)…그 칠팔월에 어머님 환후 극히 위태위태했을 때 미음할 것 없었는데, 그 때 아자바님께서 지금 같으시면 어머님 어찌 회춘하여 계셨겠습니까
허씨나 며느리 이씨를 대하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며느리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1828년 무자년에 거의 죽을 뻔 했을 때 시동생들이 지극히 돌봐주어 미음도 먹고 회생했다. 하지만 양자 들이는 일로 틈이 생기자 데면데면해졌다. 오죽하면 남포에 사는 숙주가 시동생들에게 ‘동기간에 어찌 재물로 서로 마음 상하게 하는가.’, ‘하는 일을 명백히 하라.’고 충고했으랴. 남편이 살아 있고 종손이 아들이 녹우당 사랑채에 버젓이 있었다면 이리할 수 있으랴. 며느리는 또 어떤지. 이십 전에 마당과부되어 애잔하고 측은했다. 십여 년 종부살이 모습을 보니 한편으로 믿음직스럽기도 하건만 종들 부리기는 여전히 미숙했다. 시가 11촌 조카를 양자로 들인 일은 허씨에게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윤덕희 집안에서 윤덕희 핏줄이 아닌 아이를 양자로 들여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어린 양자를 제 친정에서 기르겠노라 사오 년 말미를 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며느리는 시삼촌과 사이가 뜸해지자 친정으로 가 버렸고, 시가로 오고자하니 행차 차려달라고 했다. 오지 않겠다는 속내인 것일까 자부가 가서 주로 쓰기난 하고 먹기만 할뿐이니 그 해로움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몫으로 사오년 말리 주시면 빚이나 덜어 웅철이 혼수나 넉넉히 쌓아 놓을 수 있지 않습니까. …(중략)…자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임자 없는 몸이라 그러하오니 제 조부모 발치에 묻힐 생각이지 해남 땅에서 공중에 뜬 귀신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중략)…이런 인생이 가서 시집살이 하겠습니까. 오히려 가서 우환이 되어 괴로이 여기실 것이니 웅철이 성장하도록 자부집에 두시는 것이 여러 가지로 긴할 것입니다.
4,5년 동안 친정에 있겠다고 하고 양자 웅철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집안을 이어갈 종손을 종가에서 키워야하건만 며느리 생각은 달랐다. 죽어 조부모 발치에 묻힐지언정 해남 윤씨 집안에서 오갈 데 없이 헤매는 귀신조차 되기 싫다고 했다. 이게 시어머니에게 할 말인가. ‘주인 없고 남편 없는 과부 시어머니라서 가벼이 여겨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며느리는 말했다. 또 며느리는 시가살이 어려움을 ‘한번 도마에 오르기 어렵지 두 번 오르면 칼을 무서워하리잇가’라며 당돌히 토파했다. 하지만 허씨는 힘없는 과부 시어머니여서 이런 말까지 듣는 자기 신세가 한스러웠다.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시어미 마음을 며느리는 얼마나 알랴. 시동생들 간섭 받으며 종부 노릇을 한 허씨의 고난을 이해나 할까. 허씨는 묵묵히 살았다. 한을 안으로 삭이면서. 허씨는 ‘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편지를 불에 넣을까. 그런데 ‘짜증내며 불에 넣지 마시고 두 세 번 조용히 읽어보라.’고 은근히 압박했다. 며느리의 미친 소리, 취한 소리를 듣는 시어미가 처참할지 헤아렸을까. 화증이 치올랐다. 며느리 화와 원억이 나보다 더하랴. 속에 웅크렸던 설움과 한이 물 솟듯 뿜어져 나와 녹우당 지붕도, 하늘도 뚫을 것만 같았다. 13M 자부 편지, 규한록 광주이씨는 1834년 봄 3월 4일에 이 편지를 썼다. 취한 듯 미친 듯 쓰고 보니 두서도 없었다. 29장이나 썼다. 이어 붙이니 두루마리가 되었다. 10대 후반에 번개같이 과부 되어 종가 살림을 꾸려가며 쌓인 한을 넣었고, 30 초반에 과부되어 종가를 지키며 18년간 고이 키운 아들을 잃은 과부 어미의 원통함도 실었다. 이 두 종부가 있었기에 유명유명한 윤생원댁은 명맥을 이어 다시 흥성했다. 양천허씨는 허랄(許㻋) 딸로 1853년에 생을 마쳤다. 광주이씨는 이복항(李福恒) 딸로 1863년에 세상을 떴다. 두 사람 모두 종가를 이을 종손인 윤관하(尹觀夏)가 태어나는 걸 보았고 두 번째로 태어난 윤익하(尹益夏)도 보았다. 광주이씨는 세 번째로 태어난 윤태하(尹泰夏)도 보았다. 서천에서 해남에 양자를 보냈던 윤명호 집안에 윤익하를 계손(系孫)으로 보냈다. 양자 준 은택에 보답했다.
과부 삼 년이면 깨가 서말이라느니, 은이 서말이라느니, 구슬이 서말이라는 말들이 있다. 알뜰히 살아서 그렇다고도 한다. 그것이 깨이든, 은이든, 구슬이든 그 속에는 과부의 한과 눈물이 박혀 있을 터이다. 종부의 권한이 막강하다고들 한다. 막강한 권한 안에는 종부살이의 고난과 속 털린 애씀이 숨겨져 있다. 13M짜리 ‘자부의 편지’는 은이나 막강 권력 속에 서린 그것들을 생생히 보여준다. 굽이굽이 펼치면 원한의 길이는 얼마일까.
<도움 받은 글> 김보현(2019), 「<규한록>의 서사적 읽기에 대한 인지시학적 연구」, 『기호학연구』 59, 한국기호학회.
김정경(2005), 「<규한록>의 구조적 특성과 여성 서술자의 기능 고찰」, 『한국고전연구』 12, 한국고전연구학회. 박범(2021). 「19세기 전라도 재실분등의 추세와 자연재해의 지역성」, 『조선시대사학보』 97, 조선시대사학회. 박요순(1970), 「신발견 규한록 연구」, 『국어국문학』 49.50 합집, 국어국문학회. 박요순(1973), 「조용히 감하시옵소서」, 『문학사상』 1973년 3월호, 문학사상사. 박혜숙(2001), 「여성적 정체성과 자기서사:『ㅈㆍ긔록』과 『규한록』의 경우」, 『고전문학연구』 20, 한국고전문학회. 정경민(2019), 「투생 대신 투쟁하다, 「규한록」의 광주 이씨부인」, 『이화여문논집』 48, 이화어문학회. 정윤섭,「과부였던 광주이씨 부인과 ‘규한록’」, 『오마이뉴스』, 입력일 2007.3.28. https://v.daum.net/v/20070328155310915, 검색일 2025.4.13. 09:51. 조혜란(2007), 「<규한록>, 어느 억울한 종부의 자기주장」, 『여성이론』 16, 도서출판여이연. 『만가보』 한국학자료센터 https://archive.aks.ac.kr 『해남윤씨대동보』, 해남윤씨대동보소, 2016.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
![]()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