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호남누정원림 - 전남 (11) 화순 임대정
오늘의 행선지는 화순 임대정 원림(臨對亭 園林). 지난 2012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89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대표적 별서(別墅)다. 별서는 거주하는 가옥과 인접한 경승지에 조성한 공간을 이름한다. 구체적으로 강학과 풍류, 은둔을 위해, 또는 자연을 벗할 목적으로 만든 정원이 딸린 곳이다.
임대정 원림은 지형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숲과 누정이 조화를 이룬다. 대나무 숲과 정자, 연못이 일품이다. 무엇보다 배롱나무 붉은 꽃이 발하는 처연함과 연못 위로 맑게 피어난 연꽃의 무심함을 삽상하게 감상할 수도 있다.
이곳은 1862년 무렵 병조참판과 사헌부집의를 역임한 사애 민주현이 지었다. 초가를 짓고 원림을 만들어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정자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자연이 걸어오는 소쇄한 소리들을 들을 수 있다.
당초 임대정 원림이 있던 곳은 조선 선조대의 문인 고반 남언기가 정자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반이란 “세상에서 은둔하여 자신만의 즐거움에 잠긴다는 뜻”을 일컫는다. 남언기는 일대 정원을 고반원이라 지었고, 정자에 수륜대(垂綸臺)라고 명칭을 붙였다. 수륜대란 “대 아래 못에 낚싯대를 드리고 즐긴다”는 뜻이다. 정취를 품은 이름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그 후 300여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륜대는 잠시 역사의 뒤안에 있었다. 그러다 19세기 후반 민주현(1808~1882)이 이곳으로 귀향해 고반원 옛터에 정자를 건립했다. 그리고 임대정(臨對亭)이라 이름을 붙였다. 풍광도 풍광이지만 유서가 자못 깊은 것은 저간의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어느 결에 여름의 끝자락이다. 어떻게 뜨거운 한 철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아득한 시간이었다. 흐름이 정지된 듯한, 움직이지 않는 장면의 연속을 보는 듯했다. 여름이 간다고 하니 다소나마 아쉽기도 하지만 시원섭섭하다. 애면글면 하지 않고 고이 여름을 보내련다. 가고 오는 것은 계절의 변화이니 순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아닌가.
화순에 갈 때면 지명의 의미를 다복하게 생각하게 된다. 화순(和順)은 순후한 고장이라는 뜻이다. 그럴 만도 하다. 무등산 줄기를 타고 뻗어 내린 산수가 부드럽기 그지없다. 완만한 지세는 온후하여 정겹기 이를 데 없다. 산의 줄기가 겹겹이 에워싸인 형국은 포근하면서도 도탑다.
그 산에 안겨 한 시절 무릉도원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태엽 시계처럼 바삐 돌아가는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말이다. 산들바람 불어오고 새소리 귓가를 적시는 아늑한 산에서 한 철을 보내면 세상의 이런저런 소음은 흔적없이 사라질 것 같다. 계곡 아래 흐르는 물소리 벗 삼아 낙엽 위에 몇 글자 적어 띄워 보내는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넘치는 호사다.
화순에 들어서면 그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산수가 주는 상상의 발원이려니 싶다.
전해오는 옛적 서사에 따르면 고려 말 공민왕은 한때 화순 모후산 인근으로 피신했다. 홍건적에 쫓겨 모후산 아래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남도의 산하에서 은거지로 삼을 만한 곳이 비단 화순뿐이었겠는가. 그럼에도 그가 모후산 자락에 몸을 의탁한 것은 지형이 주는 안온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이곳에서 절치부심 이후를 도모했을 거였다. 에워싸인 지세는 요새의 형국이었다. 한 숨 돌릴 만한 거처로 이만한 곳이 없다고 봤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모후산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산이 순수한 정기를 감추고 있으니 발설하기 쉽지 않다.”
화순은 그렇듯 산의 순기(順氣)를 품고 있다. 순기는 바른 기상(氣象)과도 상통한다. 흐르는 기운은 고을의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졌을 게다.
화순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다. 흘러가는 구름과 차창으로 비끼는 나무들이 반갑다 손짓을 한다. “에헤라 친구야!/ 내꿈은 하늘이라/ 거칠은 바다를/ 포근히 감싸는/ 내 꿈은 하늘이어라” 가수 남궁옥분이 불렀던 ‘에헤라 친구야’라는 가요가 뇌리에 떠오른다.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다 몇 소절 불러본다. “에헤라 친구야!/ 내꿈은 구름이라/ 파란 하늘아래/ 한가로이 떠가는/ 내꿈은 구름이어라”
그래 그런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지. 꿈이 하늘이고 구름이던 빛나던 시절이 있었지. 흑백 사진 같은 아련한 시간, 하늘과 구름만 바라보아도 풍요롭고 아름다웠던 때가 있었지. 그저 그렇게 좋았지. 흥이 동하고 기쁨으로 충만했었지. 헌데 돌아보니 그 시절이 너무나 빨리 증발해버렸다. 비누가 닳듯 세월이 닳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렸다. 이제 오십대 중반이 넘은 이 즈음의 꿈은 무엇인가. “에헤라 모르겠다”라는 체념이 문득문득 입술 새로 흘러나올 때가 있다.
각설하고, 다시 정한 길을 내달린다. 화순읍에서 보성 방향으로 20여 분 남짓 달리다 보면 사평면 사평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외남천 상사교를 건너면 주차장이 나온다. 상사길을 따라 200여m 쯤 내려가면 마침내 목적지 임대정 원림이 나온다.
소문대로 풍광이 뛰어나다. 아름다운 요처다. 산자수명(山紫水明)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테다. 이보다 적실한 표현은 없을 것 같다.
‘임대정’의 뜻은 송나라 주돈이의 시구에서 연유한다. ‘아침내내 물가에서 여산을 대한다’는 뜻의 ‘종조임수대노산’(終朝臨水對盧山)에서 명칭을 취했다고 전해온다.
정자 건물은 팔작지붕 형태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정내에는 20여 개 시문이 걸려 있다. 뒤쪽에는 ‘낚싯대를 드리우며 즐기는 집’이란 의미를 담은 ‘수륜헌’(垂綸軒)’을 새긴 오래된 현판이 걸려 있다. 오래된 것의 운필의 힘이 느껴진다.
원림의 구조는 세미하며 정교하다. 임대정은 구릉 위에 살포시 얹혀 있고 주변으로 섬이 있는 네모난 연못이 자리한다. 인근 수림은 배롱나무를 비롯해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에둘러 있다.
정자 아래로 돌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거대한 인공 연못과 마주한다. 상지(上池), 하지(下池)라고 불리는 연못은 주인장의 심미적 감성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듬성듬성 핀 연꽃과 요염하면서도 화사한 자태를 드리운 배롱나무, 마치 긴 머리를 풀어헤치듯 물가로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들은 선계의 풍광을 옮겨온 듯하다.
다시 이끼 낀 돌계단을 올라와, 누정 마루에 걸터앉는다.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의 땀을 씻어낸다. 멀리 사평리의 들녘이 수목 사이로 듬성듬성 보인다. 이런 저런 소음들은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만 그윽하다. 이 편과 저 편의 경계 너머로 구름만이 살짝 걸쳐 있을 뿐이다. 나도 모르게 노래 한소절이 밀려나온다. 가만히 읊조린다. “에헤라 친구야!/ 내꿈은 구름이라/ 파란 하늘아래/ 한가로이 떠가는/ 내꿈은 구름이어라”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