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호남누정원림 - 전남 (12) 나주 영모정
백호(白湖) 임제(1549~1587)는 대표적인 조선의 대장부다. 그저 그런 대장부가 아니다. 그의 기백은 보통의 사내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편이 보기엔 ‘조무래기’에 불과한데 스스로를 ‘대장부’라 앞세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오늘의 세태에 비춰 백호의 호연한 기상이 그리워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백호는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목청을 높였던 사나이 중의 사나이이다. 그런 그가 살아 돌아오면 ‘아닌 것임에도 맞다’고 부득불 우겨대는 이들을 향해 죽비를 내릴 것 같다.
나주 백호문학관에 들어서면 마주하는 글귀가 있다. 백호의 호방한 천품을 엿볼 수 있는 문구다.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세상이 싫어하네” ‘이 사람(有人)’이라는 시의 일부다. 백호 스스로가 자신을 지칭한 가장 적합한 표현인 것 같다.
백호는 풍운아이자 퓽류남이었다. 문장가였던 그는 늘 검(劍)과 퉁소를 지니고 다녔다. 당대 파벌싸움에 신물이 났던 그는 미련 없이 벼슬을 내던지고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명산을 주유하며 1천 여 수에 이르는 시문을 짓고 한문소설을 썼다.
영모정(永慕亭)을 찾아가면서 조선 대장부이자 풍류남 백호 임제를 떠올렸다. 영모정은 나주 다시면 회진리 신걸산에 자리한다. 올곧으면서도 헌걸찬 조선 사내의 풍모가 느껴지는 곳이다.
백호는 조선 명종 4년 병마절도사 임진과 어머니 남원 윤씨 사이에 5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사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이루어졌다. 1576년(선조 9) 진사에 급제했으니 당시 나이가 만 27세였다.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 정자에 배수되었으며 이후 흥양현감, 서북도 병마평사, 관서 도사,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그러나 선비들이 동서로 나눠 다툼을 일삼는 정쟁에 환멸을 느꼈다.
어느 시대나 당대의 부조리와 불의를 바꾸고자 하는 개혁파들이 있었다. 그러나 선구적인 사상은 곧잘 위험한 견해로 치부돼 표적이 되곤 했다. 백호는 주자학의 강고한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했다. 조선의 통치 이념인 유학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대의 정치 지형은 선 굵고 호방한 기질의 선비를 품기에는 협애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권력을 쥔 자의 편에서 주자학은 더없이 좋은 통치와 억압의 도구였을 것이다.
영모정에 당도하기까지는 영산강과 다시(多侍) 들판을 지나야 한다. 가을날 강과 들을 거느리며 가는 길은 호젓하면서도 운치가 있다. 다시는 곡창 나주평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논과 논이 겹치고 들과 들이 겹쳐 평야를 이룬 곳이다. 비옥하기가 이를 데 없다. 영산강이 부리고 키워낸 농토와 곡식은 오늘의 남도를 있게 했다. 한편으로 일제강점기 수탈의 대상이 되었음은 불문가지다.
강물이 가을볕에 살랑인다. 신걸산 기슭 영산강을 마주하며 선 영모정은 조선 대장부의 풍채를 닮았다. 백호는 양반으로 태어났지만 역설적으로 그 양반 사회의 모순과 억압적 구조를 견디지 못했다. 자연과 벗하고자 하는 성정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정내를 에워싼 숲에는 400여 년 된 팽나무와 기품이 서린 소나무, 은은한 정취를 발하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잘 가꿔진 흔적과 자연 그대로가 아슬아슬한 조화를 이룬다.
영모정은 당초 1520년 조선의 문신 임붕이 건립했다. 임붕이 누정을 지어 자신의 호를 따 ‘귀래정’(歸來亭)이라 불렀다. 임붕은 중종 17년(1522) 부친 임평(백호의 증조부)이 죽자 3년간 이곳에서 거려했다. 그러다 1555년 후손이 재건하면서 지금과 같은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82년 중창됐으며 1987년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예스럽고 소박한 멋에 영산강을 조망할 수 있어 여느 누정과 비할 바 아니다. 누정 아래에는 ‘歸來亭羅州林公鵬遺墟碑(귀래정나주임공붕유허비)’·‘白湖林悌先生紀念碑(백호임제선생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누정은 기단에 덤벙주초를 놓은 뒤, 장대석 주초에 나무기둥을 세운 구조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형태다. 멀리 저편을 바라보면 영산강의 물줄기가 보인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보이는 저편의 풍경은 정겹기 그지없어 우리네 강토의 넉넉함과 유순함이 느껴진다. 임제의 호가 백호(白湖) 외에도 풍강(楓江), 소치(嘯癡)인 것을 보면 강골의 기백 이면에 고아하면서도 여린 감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벼슬길에서 물러난 임제는 39세를 일기로 눈을 감을 때까지 이곳에서 시문을 짓고 벗들과 교유했다. ‘화사’(花史), ‘수성지’(愁城誌), ‘임백호집’(林白湖集),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 등은 그가 남긴 저서들이다.
벼슬자리를 박차고 나온 백호는 명산을 주유한다. 한때는 속리산에 들어가 성운이라는 선비에게 사사를 받기도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죽임을 당하자 속리산에 은거했다. 백호가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로 기록돼 있다.
당대 문사였던 허균이나 양사언 등은 백호의 문재와 기상을 알아봤다. 그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백호의 문장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허균은 백호의 ‘수성지’(愁城誌)에 대해 “인류문자가 생긴 이래 별문자(別文字)이다. 천지간에 이 문자를 얻지 못했다면 하나의 결함으로 될 것이라”고 상찬했다.
아울러 백호가 황진이 무덤을 지나며 읊은 시조는 국문학사에서 손꼽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평안도사로 부임 받아 가는 길, 백호는 잠시 송도의 황진이 묘에 들렀다. 술잔을 올리고 추도시를 읊은 사연이 전해지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오늘의 관점에서는 로맨티스트다운 풍류남의 호기라 할 수 있겠지만 당시는 엄연한 유교사회였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오늘의 감성에도 어필할 만큼 절창이다. 당대의 관습을 뛰어넘는 사내 대장부다운 일면이다.
백호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조선의 기백과 호연을 유언으로 남긴 일화는 유명하다. 죽음 직전에 남긴 말은 여전히 오늘에도 유효하다. ‘사방의 족속들이 황제를 일컬어보지 않은 자 없거들 자고로 우리만 못해봤다. 약소한 나라에서 태어났다가 가는데 그 죽음을 슬퍼할 것이 무엇이랴! 곡을 하지 말아라.’
백호는 너무 큰 그릇이어서 시대가 품기에는, 아니 그 시대를 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취하면 노래하고, 깨면 비웃으니” 당연지사 좋아할 이가 없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가 품은 뜻과 기상을 감히 범접할 이가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백호가 보았던 당대의 정치와 오늘의 정치가 겹쳐진다. 45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당쟁과 파당, 무리지음과 패거리정치는 여전하다. 공정과 상식 이면에 불의함과 부조리 또한 여전히 판을 친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당쟁은 반복된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백호가 살아온다면 과연 오늘의 정치판을 두고 뭐라 말을 할까. 대장부다운 대장부, 사내다운 사내, 개혁가 다운 개혁가가 없는 오늘의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