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호남누정원림 - 전남 (13) 나주 쌍계정
한낮의 햇볕이 많이 누그러졌다. 자연의 섭리는 엄정하다. 추석이 지나고 추분(秋分)이 지나자 바람 끝이 달라졌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이슬이 내린다는 백로(白露)가 지나도 한낮의 더위가 맹위를 떨쳤다.
그러나 추분이 지나자 비로소 가을이 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밤의 길이가 낮보다 길어지면서 계절의 분기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시골을 다니다 보면 문득문득 계절이 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물극필반(物極則反)이라 했다. 사물은 극에 도달하면 원위치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절정에 다다랐던 푸르른 기운도 신열처럼 뜨겁던 자연산천의 열기도 사위어 간다.
사실 하늘 아래 자연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이편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모든 만물은 보이지 않는 원리에 따라 궁극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화려하게 타올랐다 어느 순간 잦아드는 것이 비단 계절뿐이랴. 인간의 모든 삶도 그러할 것이다. 보이지는 않으나 은미하게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생의 종착을 향해 떠밀려 가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의 변화를 눈에 담으며 천년 목사골 나주로 향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나주를 ‘소경’(小京)이라 칭했다. 한양과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 한다. 뒤로 금성산, 앞으로 영산강이 있어 고을의 지세가 한양과 유사한 형국이라는 얘기일 터다. 조선 실학자의 선구적인 안목쯤으로 치부한다 해도 나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지역이다. 그 때문일까. 나주에 올 때면 어떤 중심부로 부상하고자 하는 열망 같은 기운을 느끼게 된다.
그것의 중심에 금성산이 자리한다. 나주의 진산인 금성산은 역사적인 사건들과 결부돼 있다. 견훤과 왕건의 격전지였으며 예로부터 최고 명당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큰 인물들을 배출한 고장은 그러한 지형, 명리와 연관이 되는가 보다. 태조 왕건의 둘째 부인인 장화왕후, 의병장 김천일, 호방한 풍류남 시인 백호 등은 금성산이 낳은 걸출한 인물들이다.
‘호남의 3대 명촌’인 금안동도 금성산 품에 깃들어 있다. 오늘 찾은 나주 쌍계정(雙溪亭)도 다시면 금안리에 자리한다. 설재(雪齋) 정가신(1224~1298)이 고려 충렬왕 6년 때인 1280년 건립했는데 설재는 나주 정씨의 금안동 정착 시조로 알려져 있다.
마을은 시골의 정취가 남아 있어 고즈넉하다. 골목은 옛고을의 모습이지만 집들 가운데는 도심 단독주택 형태로 개량된 곳도 보인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 더 많은 집들이 현대적 분위기의 주택으로 변모될 것이다.
정겨운 골목길을 따라 5분 여 남짓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커다란 팽나무가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보초를 서듯 누정 앞을 지키고 선 나무는 말 그대로 수문장의 느낌이다. 400여 년 수령의 나무는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선 기품 있는 노(老)장수를 닮았다. 오랜 세월 풍상을 이겨낸 나무에게선 의연함과 담박함, 어떤 선비정신 같은 게 배어나온다. 팽나무는 한여름이면 풍성한 그늘과 푸른 녹음으로 더위를 막아주고, 가을에는 홍엽의 정취로 낭만과 서정을 베풀었을 것이다.
금안동은 400년 간 대동계를 운영해 왔는데 쌍계정은 그 대동계를 열고 향약을 시행한 역사적인 처소였다.
나주 정씨, 하동 정씨, 풍산 홍씨, 서흥 김씨 등 네 성씨가 대대로 대동계를 만들어 관리를 해오고 있다. 이곳을 사성강당(四姓講堂)이라 부르는 연유를 알 것도 같다. 특히 연중가절에는 시문을 짓기도 했는데 쌍계정이 계회(契會)와 시회(詩會)의 역할을 담당한 주요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안내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요약돼 있다. 문정공 정가신이 쌍계정을 지을 무렵 문소공 김주정, 문헌공 윤보가 서로 도를 닦고 학문을 강구하였다. 삼현당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그런 연유와 관련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정서, 신숙주, 신말주, 죽오당 김건, 홍천경 등이 강학을 했다.
해동 남쪽에는 금성산이 있는데
산 아래 나의 집은 초가 두어 칸이라
마을 앞 버드나무와 복숭아를 손수 심었건만
봄이 오면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리라
설재 정가신의 시를 통해 오래 전 이곳의 풍경을 그려본다. 그는 금성산 아래 소담한 초가를 짓고 유실수를 심으며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했다.
정가신은 동강면 양지리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노안면 금안동으로 이주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했으며 1277년(충렬왕 3) 보문각대제에 임명됐다. 도원수 김방경과 탐라의 삼별초 토벌에 나서 공을 세웠다.
쌍계정(전남유형문화재 제34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다. 낮은 기단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둥근기둥을 올렸다. 기록에 따르면 옛날에는 방이 딸린 정각이 있었고 서당도 열렸다고 하니 강학과 교유가 활발하게 전개됐던 모양이다.
정자에서 눈에 띄는 것은 쌍계정이라는 현판이다. 일필휘지의 글씨는 당대 명필 한석봉의 작품이다. 묵격에서 풍기는 고상함과 활달한 운치가 범상치 않다. 한석봉의 서체가 발하는 아우라와 정가신의 천품이 오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이다.
강직한 성품에 전고(典故)에 밝았던 연고로 임금의 명령이나 외교문서가 상당부분 설재의 손을 거쳤다.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스승의 자격으로 동행하기도 했다. 그의 문장과 식견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이 되는 대목이다.
쌍계정의 명칭은 이곳을 흐르는 내(川)에서 비롯됐다. 앞으로 금안천이, 뒤로 시냇물이 흘러 그와 같은 이름을 득했다. 시대가 흘러 예전의 지형은 다소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근동 풍경이 미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지명 유래보다 대동계의 강학과 향약이 시행된 장소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건물은 1601년, 1642년, 1736년, 1842년, 1938년 중수를 했다. 고려시대부터 문장에 일가견이 있는 선비들이 학문을 논했던 유서 깊은 정자다. 정자에는 46명 선비들의 시가 걸려 있다. 남강(南岡) 김려를 비롯해 사암(思庵) 박순 등의 글이 대표적이다. 특히 서경덕 문하생 출신인 박순은 학문, 문장, 덕망 3박자 갖춘 인물로 평가받는다. 나주 왕곡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광주 서모집에서 성장했다. 31세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며 57세에 영의정에 올랐다. 중간에 윤원형의 미움으로 관직에서 쫓겨나 낙향해 시련을 겪기도 했다.
‘시냇가에 있는 쌍계 산문 대했으니/ 좋은 모임은 한 마을에서 이루어진다/ 겨우 자란 곡식이지만 잔치에 쓰고자 하나/ 채소와 죽순을 따오니 안주로 적당하다/ 단사에 우물이 있어 사람들은 오래 살고/ 사회의 장원으로 글을 숭앙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대를 좇아 결사를 하고자 하니/ 원하건대 화죽을 나누며 정원을 같이 하시게’
쌍계정과 멀지 않은 노안면 영평리에는 설재서원이 있다. 숙종14년(1688)설재를 배향하기 위해 노안면 금안동에 건립됐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구조로 현재는 9위를 향사하고 있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