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호남누정원림 - 전남 (14) 나주 벽류정
영산강은 순한 강이다. 농도인 남도의 고을들을 에둘러 돌아가는 강은 순박하다. 어디를 가도 투박한 시골의 정취가 묻어난다. 물론 승경이 없는 것도 아니다. ‘죽림연우’인 담양 습지도 아름답고, 몽탄의 곡강(曲江) 지형인 늘어지도 신비롭다.
그러나 영산강을 아름답다고 하면 고답적인 수사에 갇힐 것 같다. 영산강은 삶으로서의 강이자,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강이다. 남도인들의 먹먹한 숨결이 살아 있는, 굵은 땀방울 같은 훈김이 스며 있는 따스운 강이다. 강을 보고 있노라면 심중의 한켠에 깃들어 있는 답답함이 풀어지는 것 같다.
영산강 굽이굽이마다 풍경과 역사, 인물의 이야기가 드리워져 있다. 지금까지 광맥 같은 화제(話題)들은 이야기꾼들에 의해 가공이 되곤 했다. 인문자원의 보고라는 말은 그런 연유에서 이르는 말일 것이다.
물길을 따라 산재한 유서 깊은 정자는 시문학의 산실이었다. 영산강 인근에 자리 잡은 누정만 해도 어림잡아 수백 개는 이를 것이다. 본류와 가까운 곳 외에도 지류에 인접한 곳에 누각이 산재한다. 우리 선조들은 강을 보며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논했다. 찰랑이며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자연의 순리와 삶의 엄정함을 헤아렸을 것이다.
강에 젖줄을 댄 시심에는 진정과 비움이 묻어난다. 벽류정(碧流亭)을 찾아가면서 드는 생각이다. 나주시 세지면 벽산리에 자리한 누정은 품격이 느껴진다. 언덕배기에 오도카니 앉은 자태는 너무도 자연스러워 건립되기 이전부터 이미 누정의 자리로 택정되었을 듯싶다.
‘푸른빛이 흘러가는’ 뜻을 담은 벽류는 말 그대로 시어(詩語)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람한 수목들이 즐비하다. 뒤편으로는 하늘 높이 키를 높인 대나무가 지천이다. 푸른빛이 차고 넘친다. 이곳은 영산강 지류인 금천(錦川)을 끼고 있다. 누정 아래로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간다. 물길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비단’ 금(錦) 자를 썼을까 싶다. 여러 빛깔로 무늬를 넣어 짠 천을 비단이라 하는데, 아마도 이곳 해질녘의 풍경이 그럴 것 같다. 석양빛을 받아 비단처럼 반짝이며 저물어가는 강물은 옛 선비들에게 시를 안겼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예전의 풍광만 못하겠지만 금천의 영화가 가늠이 된다. 전남도 유형문화재인 벽류정은 1640년(인조 18)에 김운해(1577~1646)가 지었다. 그의 호 또한 벽류정(碧流亭)이다. 누정은 정면 세 칸에 측면 세 칸의 규모다. 특이한 것은 가운데 방을 중심으로 사방에 마루를 들였다는 점이다. 겨울에도 거하며 학문과 시문을 배양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래로부터 누정 언저리까지 돌계단이 놓여 있다. 보수를 한 것인지 새로 놓은 것인지 계단에는 이끼나 세월의 흔적은 깃들어 있지 않다. 틈새에 푸른 이끼나 작은 잡풀이 있었으면 운치가 있었을 텐데. 못내 아쉽지만 관리하는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나마 주변을 에워싼 아름드리 고목들이 누정의 역사와 유서를 대변한다. 느티나무, 느릅나무, 팽나무 등 노거수들이 수문장처럼 일대를 지키고 있다. 헌데 어떤 느티나무들은 밑둥만 남겨져 있어 헛헛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태풍에 아니면 병으로 몸체를 잃어버리고 그저 그루터기 같은 존재로만 남아 지나온 세월을 버겁게 증명하고 있는 것일 터다.
누정의 건립연대가 1640년이니 어림잡아 4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후 1678년(숙종 4), 1862년(철종 13) 중수한 것으로 돼 있다. 100여 년의 시간이 네 번이나 지났으니 과거와 현재라는 도타운 연이 깊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400년이 흐르면 벽류정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금천은 마르지 않고 흐를까. 자꾸만 상실되어 가는 우리의 옛 모습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당초 벽류정은 세종 때 호조참판을 지냈던 조주의 별서였다. 그는 세종 때 문과 장원에 급제한 명망 높은 선비였다. 조주는 외손인 김운해에게 별서터를 양여했고, 그는 외조부의 학문과 인품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벽류정을 건립했다고 전해온다.
김운해는 32세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어가를 모시고 공주까지 이동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남한산성에서 호전에 관한 일을 보며 공을 세웠다.
누정에 앉아 보니 수풀 너머로 금천과 들판이 보인다. 우거진 숲 사이로 비쳐드는 볕이 ‘벽류’와 ‘금천’이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골기와 팔작지붕이 발하는 처마의 곡선은 유려하다. 차분히 앉아 있노라니 마음에 어떤 문장들이 가물거린다. 옛 선비들은 글을 읽으며 동시에 풍경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선비는 벗의 심상을 읽었을 테다.
벽류정은 영산강 인근에 자리한 누정의 일반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제주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한 주강현 해양문화 전문가의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서해문집, 2018)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한국적인 산수화를 논할 때나 절창의 산수시를 논할 때 어찌 누정을 빠뜨릴 수 있으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에서 누정이 빠지지 않았던 것을 봐도 누정문화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시 또한 그러하다. 모란봉 부벽루에 올라서서 차마 시를 끝내지 못하고 내려왔다는 고려시대 김황원의 일화처럼 선비라면 누정에서 시를 겨루었다. 가희 ‘누정시단’이라 할 만한 세력이 나타났을 정도다.”
주 교수의 말처럼 우리 문학사에서 누정을 근거로 창작된 작품은 여럿이다. 백광홍의 ‘관서별곡’을 비롯해 정철의 ‘관동별곡’, 송순의 ‘면앙정가’ 등이 대표적이다. 당대 언어의 마술사들인 최고 문사(文士)들이 누정을 출입하며 뛰어난 시문을 창작했다. 누정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편액은 또 어떤가. 당대 명필과 문장가들의 작품이 누정의 품격을 더해주었다.
벽류정에는 세 개의 현판이 있다. 민규호, 신헌, 김수항의 필체로 된 글씨다. 각기 다른 서체는 이색적인 묘미를 준다. 또한 이곳에는 11개의 현액이 걸려 있어 정자의 내력과 이곳을 출입했던 선비들의 시문을 볼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누정에 걸터앉아 저편 금천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잠시 멈춰 있는 느낌을 받는다. 흐르는 것이 강물뿐이겠는가. 흐르는 것이 세월뿐이겠는가. 금천에 나뭇잎 떨어지는 것에서 사람들의 시간이 가고 있음을 새삼 생각한다. 벽류정 푸른빛은 저물고 가을바람은 덧없이 불어만 오는데, 떠나간 이들은 다시 오지 않는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