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호남누정원림-전남(8) 화순 영벽정
화순 능주(綾州)는 매력 넘치는 고장이다. 유서도 깊은데다 산세도 빼어나다. 역사면 역사, 풍광이면 풍광, 인물이면 인물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다. 문헌에 따르면 마한시대에는 부족국가 여래비리의 소재였으며 백제시대에는 이능부리 또는 연주부리, 중순부리라 불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능성군으로 칭함을 받았다.
예로부터 능주에서는 누에를 많이 쳤다. 누에머리의 형상을 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능성을 비단 능(綾) 자로 쓰는 능성으로 개작됐다.
그러다 인조 10년(1632), 능성고을이 인조 어머니인 인헌왕후 성씨인 능성구씨의 성향이어서 현에서 주목으로 승격, 능주로 개칭됐다고 전해온다.
조선말 무렵만 해도 능주의 정치적, 사회적 입지는 화순에 비할 바 아니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는 우리나라와의 강제 합병 이후, 능주군을 화순군으로 개칭하고 군청을 화순으로 이전한다. 이후 근대화라는 물살에 밀려 능주는 사실상 화순군에 통합되기에 이른다.
역사의 고풍과 깊이를 느끼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가벼운 차림으로 길을 나선다. 정처 없이 길을 떠나 불현듯 들리고 싶은 고장에 들어서는 것이다. 화순 능주는 그런 곳이다. 능주에는 가벼이 흘려들을 수 없는 상흔의 역사와 감춰두고 싶은 비경이 자리한다. 해찰하듯 게으름을 피우며 왔다가, 가슴 깊이 저며오는 통증을 안고 돌아가는 곳이 능주다.
영벽정(映碧亭). 그 정자로 간다. 능주면 관영리에 있는 그곳에서 다리쉼을 하고 싶다. 넥타이 모양의 비좁은 도로를 지나, 차단기가 있는 철길 건널목을 지나, 푸른 산바람이 불어오는 정겨운 공간을 지나, 영벽정으로 간다. 누정이 자리한 곳은 지석천 상류라 사시사철 물이 흐른다
영벽정을 모르고서는 능주를 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 정자에 앉아 지석강 푸른 물을 보지 않고는 산자수명 화순을 안다고 자랑해서도 안 될 것 같다. 병풍을 두른 듯 얌전하게 에두른 산자락 자태를 삽상하게 보지 않고는 시인묵객의 풍류를 안다고 해서도 안 될 것 같다.
영벽(映碧). 사물의 상이 되비쳐 보인다는 말이다. 정자의 맞은편 연주산 자태가 지석천의 수면에 어린다. 물은 스크린이다. 가장 부드럽고 역동적인 스크린이다. 잔물결에 상이 스며든다. 물빛에 어린 자신의 모습에 반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신화 속 인물 나르시스가, 이곳에서만큼은 이해될 것도 같다.
과연 영벽정이다. 이름을 능가하는, 이름을 무색하게 하는 풍광이다. 불어오는 산바람에 물비늘이 미세하게 반짝인다. 반짝이다 못해 물비늘이 누각의 처마 위로 튕겨져 오를 것만 같다. 하루에 몇 차례 경전선 열차와 화물 열차가 쇳소리를 내며 이곳을 지난다. 휘어진 곡선을 따라 내달리는 열차의 질주는 또 하나의 진풍경이다. 경전선 철길이 지석강을 가로질러 영벽정 뒤를 지나면서 계절마다 색다른 풍경이 만들어졌다.
영벽정의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학포 양팽손이 이곳에 와 시를 읊은 것으로 보아 16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짐작하건대 그의 ‘사상적인 벗’ 조광조가 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이곳에 와 울분을 달랬을 것이다. 정자는 바깥세상에서 안으로 숨어든 선비들이 시문을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었다.
영벽정은 이후 인조 10년(1632)에는 능주 목사 정윤이 개수해 아전들의 쉼터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종10년(1873)에 목사 한치조가 중건했다. 대개의 정자는 단층인데, 영벽정은 2층 형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의 모습은 고아하다. 전형적인 한식목조 누각으로, 맺힘이 없는 시원한 구조다. 가장 큰 특징은 지붕 처마에 있다. 세 겹으로 단장한 처마는 자못 화려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마루를 계자난간으로 장식한 점도 미학적인 양식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현판의 글귀는 옛 사람들의 풍류가 담겨 있다.
백구가 날아오니 영백정(映白亭)이요
홍료(붉은 여귀)가 붉게피니 영홍정(映紅亭)이요
백구가 날아가고 홍료가 떨어지니 영백정(映碧亭)이다
능주의 아름다운 경치는 산수화로 표현이 어렵구나
백성들도 화목하고 만물이 풍요롭기만 하다
남쪽의 명승지를 어디에서 찾아볼까
서석산(무등산)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이 정자 찾아보소
정내에는 양팽손, 김종직 등이 쓴 시가 걸려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미루어 조선시대 명종대나 선조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영벽정 뒤로도 몇 편의 시가 걸려 있다. 그 가운데 만의재 양진영의 시가 눈에 들어온다. 화순 이양 출신으로 1859년(철종 10) 7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된 만학도였다. 많은 이들이 그의 시를 찬탄할 정도로 문재가 뛰어났다.
바람이 대숲을 건들자 “쏴-”하는 쌀 씻는 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물이랑이 수면에 뜬다. 물에 비친 산그림자가 지워지고, 풍경마저 부서진다. 천하의 진경도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나 보다. 계절이 바뀌면 이곳의 절경은 색다른 풍취를 펼쳐 보일 것이다.
인근이 하수관로 공사 중이라 다소 번잡하다. 예전만큼 고요하지는 않지만 풍광은 여전하다. 오솔길을 따라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진다. 아름드리 왕버드나무가 기다란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마치 여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머리를 감는 형상이다. 영벽정이 능주팔경의 하나로 꼽히는 것은 그런 풍경과 무관치 않을 터다.
영벽정을 들러 잠시 조광조의 충혼이 서린 곳으로 간다. 그는 조선 중종 때 개혁가로 도학정치를 주창했다. 오늘날로 치면 쇄신파로 분류할 수 있겠다. 소리만 요란한, 용두사미로 끝나는, 뻔히 속셈이 보이는 그런 쇄신은 아니다.
중종은 연산군의 패정으로 왕위에 올랐던 터라 지지기반이 미약했다. 조광조는 그런 중종의 신임을 받는 사림(士林)파의 대표 주자였다. 사림은 말 그대로 지방 사대부를 지칭하는 세력으로, 공신 세력인 훈구(勳舊)파와 대척점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반대파의 음모를 알지 못했고, 역설적이게도 그는 자신이 개혁 대상이 되어 죽임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