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신문] 국립의대 유치, 지혜로운 책문·도민의 인화 절실 / 홍영기
‘전통을 이어 미래를 연다.’ 호남 한국학의 연구와 진흥을 주목적으로 하는 한국학호남진흥원의 모토다. 선조들의 지혜를 모아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그리고 내일의 지표로 삼자는 취지다. 그래서 오늘도 시·도민들이 가문 대대로 전승해 온 고서, 고문서 등 기록문화유산들을 수집 및 보전하고 기록, 공유하는 데 힘쓰고 있다.
한국학호남진흥원은 난해한 한문으로 작성된 시권(試券)을 국역해 최근에 간행한 바 있다. 시권은 전통시대 관리 선발 시험인 과거(科擧)의 문제와 답안지이다. 책(策)·부(賦)·표(表) 등 여러 형태로 분류된다. 이 중 압권은 책문이다. 응시자가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답안지이다. 그 문제와 답을 합해 책문(策問)이라 하는데, 고답적인 내용도 없지 않지만 당대 현안의 해결 방안을 물으면 신진 기예의 응시자들이 재기발랄하게 응답한 내용이 많다. 그것을 이른바 대책(對策)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서 당대의 국가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어느 해에는 ‘북쪽 변방은 항상 인구가 줄고, 남쪽은 항상 인구가 늘어나는 데 효율적이고 균형 잡힌 국토 발전 계획’을 물었으며, 어느 해에는 ‘술의 사회적 병폐와 근절 방안’을 제출하라는 문항도 있었다. 과거 시험 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대책을 호소한 경우도 있었다. 철종 13년(1862)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이 경상·전라·충청 등 삼남 지방을 휩쓸자, 국왕은 해결 방안을 요구하였다. 다양한 대책이 궁궐로 답지했음은 물론이다. 이른바 ‘응지삼정책(應旨三政策)’이라 하는데, 국왕의 물음에 답한 대책이란 뜻이다.
최근 전남의 국립 의과대학 유치와 관련한 상황을 지켜보며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주요 과목인 책문이 떠올랐다. 전남은 전국에서 가장 고령화된 지역으로 응급·필수 의료가 시급한 상황이다. 도민의 건강권과 생명권이 달린 문제여서 누구 할 것 없이 의대 유치에 똘똘 뭉친 이유이다. 공동 건의문도 내고, 자발적인 유치 성명도 발표하고, 추운 겨울 국회 마당에서 수백 명의 도민들이 서로의 체온을 맞대며 하나의 목소리가 돼 열망을 전했다. 감동적인 순간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지난 3월 대통령 발언과 정부 합동 담화문에서 전라남도 국립 의과대학 설립 추진을 공식화하는 쾌거를 이뤘다. 무려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결같은 노력으로 얻어낸 눈물겨운 결실이었다.
기쁨도 잠시, 지금은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파열음이 고조되는 상황이다. 남과 북의 대결도 모자라 전남은 동서로 갈려 아전인수의 주장이 갈등을 넘어 자못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도민의 한 사람으로 작금의 사태를 지켜보며 착잡함을 넘어 자괴와 비애를 감출 수 없다. 우리는 언제쯤 상식과 합리, 이성과 논리를 갖춘 성숙한 토론을 통해서 도민 전체의 화합을 도출할 수 있을까. 다른 주장은 쇠 귀에 경 읽듯 내치고, 내 주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한다면 누가 동조하겠는가. <맹자(孟子)>에도 천시(天時)와 지리(地理)가 인화(人和)만 못하다 하지 않던가. 국립의대 유치를 통해 도민의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을만한 혜안이 도출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서양의학을 최초로 도입한 제중원(濟衆院)은 백성들을 널리 구제한다는 숭고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제중원은 ‘국가의 인정을 베푸는 한 단서(發政施仁)이자, 널리 민중을 구제하는 공덕(博施濟衆)’을 표방했다. 이는, ‘병이 있는 자는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다’는 조선의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의 전통적 의료정책을 계승한 것이었다. 외딴섬과 산간벽지가 많고 노령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전남의 의과대학 유치는 도민의 일치된 화합을 통해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김칫국부터 마시고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지 않던가.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지금은 동서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지혜로운 책문(策文)을 제시해 도민의 열망과 염원인 국립의대를 유치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