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호남누정원림-전남(10) 화순 물염정
무엇에도 물들지 않으리.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으리. 삿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유유자적 하리.
물염(勿染) 송정순(1521~1584)은 조선 명종13년(무오년)에 문과 급제해 사헌부 감찰, 시강원 보덕을 역임했다. 이후 풍기군수 등 7현의 원님을 지냈으며 공주목사를 제수받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는 경치가 수려한 곳에 정자를 짓고, 속된 세상에 물들지 않기로 작정한다.
물염(勿染)은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이다. 크고, 높고, 원대하다. 더없이 고상하고 지극하다. 사사로운 일들로 지고한 뜻을 더렵히지 말라는 의미다.
물염정은 송정순이 16세기 중엽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물염마을에 건립한 정자다. 송정순이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던 때는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시국이 시국이었던 터라 사화와 당쟁 여파는 많은 선비들을 죽음과 유배의 길로 내몰았다. 초야에 은신함으로써 세상의 무도함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것도 방편일 터였다. 송정순은 후자를 택했다. 중종 때 기묘사화, 명종 때 을사사화는 반대파를 숙청하는 광풍의 시간이었다.
송정순은 그 시대, 속됨에 물드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절감했을 터다.
권력에 물들고, 명리에 물들고, 재화에 물든 이들의 허랑한 삶을 보았다. 뜻이 다르다 하여 반대파에게 칼을 휘두르는 무리들의 무도함에 선비는 절망했을 것이다. 무뢰와 무례, 무모가 판을 쳤다.
심신이 피폐해진 송정순이 택할 곳은 자연산천이었다. 그는 정자를 짓고 스스로를 격리했다. 후일 물염은 외손자 금성나씨 창주 나무송, 구화 나무춘 형제에게 이 누정을 물려준다. 1591년 즈음의 일이었다. 이후 정자는 수차례 중수와 보수를 거쳤으며, 2001년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된다.
물염정은 수려한 절벽이 대장관을 이룬 화순적벽 인근에 자리한다.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이 7km에 걸쳐 빼어난 승경을 이룬 곳과 연해 있다. 근동은 어디를 가도 맑은 물과 적벽의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 창랑천을 사이로 물염정과 가까운 창랑적벽, 망미적벽 등은 동양화의 병풍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세상의 것들로 물들어 있던 내면을 잠시 닦아본다. 닦아도 닦아도 이런 저런 상념과 회오들로 가득하다. 사사로운 것들이 틈을 타고 밀려온다. 더더욱 씁쓸한 것은 정도를 벗어나고 금도를 벗어난 일들이 무시로 일어나는 세상의 풍습을 보는 일이다.
웃자란 나뭇가지들과 수풀이 앞을 가려 창랑천 너머의 물염적벽을 오롯이 볼 수는 없다. 가까이 다가가 어른거리듯 보이는 너머의 풍경을 보고 나면 막혀 있던 마음이 툭 터질 것도 같다. 바위 사이로 뿌리를 내린 나무들로 적벽의 모습은 반은 가려져 있다.
적벽은 기묘사화에 연루돼 화순으로 유배 온 신재 최산두(1483~1536)와도 인연이 있는 곳이다. 그는 ‘제물염정’(題勿染亭)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맑고 깊은 서정은 한폭의 그림을 펼쳐놓은 듯하다.
백로가 고기 가만히 엿보는 모습
마치 강물이 백옥을 품은 듯하네
노란색 꾀꼬리가 나비를 쫓는 모습
산머리가 황금을 토하는 듯하다
정내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들의 시문들이 게액(揭額)돼 있다. 류성운이 지은 ‘물염정기’ 외에도 김인후, 김창협, 황현 등이 남긴 시문도 있다. 어림잡아 20여 개는 넘을 것 같다. 이곳이 당대 시문학의 중심이자 선비들의 교유처였음을 알 수 있다.
누정은 팔작지붕 형태이며,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뒤편으로는 부드러운 지세의 산들이 병풍처럼 안온하게 감싸고 있고, 너머너머 앞으로는 물이 사시사철 흐른다. 사방이 탁 트여 고혹의 미가 아슴하다.
왜 이곳을 ‘물염적벽’ 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다.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는 마음을 간직하라는 뜻이려니 싶다.
다음은 하서 김인후가 물염정을 노래한 시문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잠시 빌려 볼 뿐이라는 의미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명양주에 크게 취해
돌아와 보니 삼월 봄이다
강산은 천고의 주인이려니
사람은 그저 백년의 손님일 뿐이구나”
물염정에서는 방랑시인 난고 김삿갓(김병연)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누정 아래에 김삿갓 기념비와 시가 적힌 비문이 세워져 있다.
김삿갓에게 적벽이 있는 동복 일대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청정의 산세와 지순한 풍취에서 고향의 안락을 느꼈다. 그에게 방랑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다. 패륜을 지우는 고결한 자해였다. 조부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능멸하는 시를 지었던 그는 후일 모든 사실을 알고 깊은 회오에 빠진다.
새와 짐승들도 제 집이 있는데
나의 한평생 돌이켜보니 슬프네
짚신에 대지팡이로 떠도는 천리길
흐르는 물 뜬구름처럼 사방이 내집이네
남을 탓함도 옳지 않고 하늘도 원망키 어려우니
세모의 슬픈 감회 창자가 끊기려 하네
(‘평생시’ 중에서)
김삿갓은 적벽에 배를 띄우고 시 한수 짓고 싶었을 거다. 동가식서가숙하던 그도 이곳이 마지막 심신을 의탁할 거처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인생은 다만 광야와 같은 세상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음을 그의 삶은 보여준다. 머리 둘 곳 한칸 없었으나, 세상천지가 김삿갓의 거처였다.
사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물들어 있다. 부질없는 욕망에,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물질에 물들어 있다. 어떤 이는 모래처럼 무너질 명예에, 또 어떤 이는 한철 지나고 나면 시들고 마는 이성의 아름다움에 탐닉한다. 물들고 나면 모른다. 그러므로 물들기 전에 그 ‘티끌’이 곁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채야 하는 것이다.
물염정에서 한 줄기 물들지 않는 정신의 청정함을 본다. 양심마저 온통 세상의 것들로 착새이 돼 버린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혼마저 팔아버리고 세상의 부와 권력과 하나가 돼 버린 이들도 부지기수다. 평생 추구해오던 가치마저 헌신짝처럼 던져버린 이들, 변색돼 버린 이들에게 물염정에 한번 들르라고 말하고 싶다.
‘물염’이라는 그 다함없이 깊은 뜻을 한번이라도 되새기길.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