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다락방 서점 주인에서 호남 기록문화유산 지킴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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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한국학호남진흥원 초대 원장 이종범 교수
전남 담양의 유희춘(1513~77) 집안은 한때 책이 많아 ‘만권댁’이라고 불렸지만 지금 문헌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전남 화순의 실학자 하백원(1781~1845)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던 고서들도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호남지역의 많은 고서와 문서들이 다른 지역으로 유출되기도 했고, 개인이나 문중, 기관이 소장하던 것들도 훼손·멸실될 위기다. 하지만 이러한 고문헌을 한데 모아 보존할 공간조차 없었다. 광주광역시와 전남도가 손잡고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을 설립한 것은 이런 우려 때문이다.
이종범(64) 초대 한국학호남진흥원장은 25일 “지역에서 지역의 기록문화유산을 스스로 연구하는 것은 미래를 향한 자기 전통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신 반대’ 서울대 제적에 강제징집
이대앞 책방 차리고 출판사도 운영
1980년 복학·박사 따고 조선대 재직
호남 역사인물 연구서 내며 지역 유대
광주시·전남도 손잡고 ‘진흥원’ 설립
“늦었지만 ‘글로벌 한국학’ 마중물로”
호남진흥원은 한국학중앙연구원(수도권)과 한국국학진흥원(영남권)에 견줘 한국학 연구기관으로선 후발 주자다. 1995년 경북 안동에 설립된 국학진흥원은 고문헌을 수집·연구하고 유교 목판 6만여장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2015년)하는 등 의미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 호남지역 연구자들도 2007년부터 점차 사라져가는 지역의 고문헌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다행히 광주시와 전남도가 2014년 10월 광주·전남 상생과제로 채택해 설립추진단을 꾸려 호남진흥원을 설립하는 결실을 맺었다.
호남진흥원은 일단 광주시 광산구 소촌동 광주시공무원교육원 4층에 사무실을 마련한다. 시와 도는 2021년까지 200억원을 들여 수장고·연구동·행정동을 갖춘 호남진흥원을 신축할 계획이다. 시·도는 운영 및 사업추진비로 내년부터 10억여원씩 5년 동안 100억여원을 출자한다. 내년 관련 사업비로 국비도 10억원이 확보됐다. 하지만 한국학호남진흥원에 전북도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 원장은 “전북지역 연구자들과도 경계를 뛰어넘어 자료 발굴에 함께 나서고 협동연구를 하는 방안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호남진흥원의 초창기 주춧돌을 놓는 작업과 압축적 도약에 큰 구실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조선대 교수(역사문화학과)로 재직해온 그는 “한 사회가 비약하려면 국가적인 학술·학문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줄곧 학술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또 한국학자료센터와 한국고전번역센터 책임연구원으로 문집 번역 사업 등에 참여했으며, 호남사학회장도 지냈다. 호남의 역사인물들을 다룬 <나는 호남인이로소이다>와 16세기 조선 선비들의 삶과 사상을 소개한 <사림열전 1·2>를 집필하면서 지역 문중이나 지방문화원과 관련 인사들과 유대가 깊다.
사림을 연구하기 전 그는 ‘민란’이나 근대 사회경제사, 민족운동사 분야의 논문을 많이 쓴 학자였다. 이런 경향은 1970년대 서울대 국사학과 재학 당시 유신 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제적당하고 군에 강제징집을 당했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군 제대 뒤 78년 서울 이화여대 앞에 ‘다락방 서점’을 차려 1년 남짓 운영하다 양길승 녹색병원장에게 넘긴 뒤 도서출판 ‘동평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1980년 뒤늦게 대학에 복학해 졸업한 뒤 연세대 대학원(사학과)에 진학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원장은 “한말부터 일제시기 민중운동사를 공부하면서 토지·세금 문제에서 균평과 균등을 주장하는 글을 많이 접했다”며 “그 연원을 좇다가 조선 후기 선비들의 향약정신과 과학정신, 세상을 반듯하게 하려는 경세사상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비정신이 곧 의병정신-실학정신-동학정신-독립정신-민중정신으로 연결된다”는 관점을 갖게 됐다고 했다.
호남진흥원의 급선무는 호남지역에 흩어져 있는 기록문화유산을 수집·분류·연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원장은 “뒤늦은 출발이 장점이 되려면 지역이 공감하고 전국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주제와 분야를 선정해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붓으로 쓴 필사본은 인쇄·출판되지 못한 채 문중을 통해 전해져 오는 유일본으로 희소성이 높아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 원장은 “문중이나 시군에서 국역 수요가 많지만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국역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불교계 호남 문헌을 집성하는 사업도 호남진흥원만의 주요 과제로 꼽힌다. 이 원장은 “나말여초의 선종산문, 고려 중기 불교개혁운동 이후 한국 불교는 호남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며 “호남에서 많은 선승을 배출했지만 그 전모가 묻혀 있다”고 말했다. 호남의 선승들이 당대 지식인들과 주고받았던 편지와 시, 그리고 전집 등 번역해야 할 문헌들이 적지 않다. 호남 지식인들이 쓴 문집 등엔 중국·일본 등지에 사신이나 통신사 일원으로 갔던 경험을 쓴 기록도 남아 있다. 이 원장은 “호남지역의 한국학 연구성과를 튼실하게 내 아시아적 보편성을 갖게 하면서 점차 ‘글로벌 한국학’의 위상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문화의 기본자료인 고문서를 문화콘텐츠화하는 것은 시민의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이다. 이 원장은 “독창적이며 조형미가 뛰어난 ‘옛 한글편지’도 하나하나가 문화자원으로서 가치와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현능한’ 인재를 두루 널리 찾아야 한다. 옛 한글편지엔 중세국어와 한문용어도 섞여 있어 이를 해석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서와 행서 등으로 기록된 고문헌을 독해할 수 있고 연구능력이 뛰어난 전문직을 임용하고 차세대 인재를 양성할 방침이다.
이 원장은 “학술사업, 학술운동이 시대와 역사를 바꾼 사례가 많다”며 “그간 겨레 역사의 물꼬를 바꿔냈던 호남이 새로운 세기를 맞는 데 호남진흥원이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