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호남누정원림-전남(5) 장성 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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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럽다. 흐린 물처럼 혼탁하다. 혹자는 사람 사는 곳이야 시끄럽기 마련이라고들 하지만 그 도가 더하는 듯하다. 물론 허물 많은 세상에서 고고하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터다.
‘탁영탁족’(濯纓濯足)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는 요즘이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의미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詞)에 나오는 사자성어다. 세상이 깨끗하면 벼슬길에 나아가되 그렇지 않으면 물러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근자의 세태는 자리를 탐하는 이들은 많지만 탁영탁족의 깊은 뜻을 새기고 실천하는 이들은 없어 보인다. 무릇 선비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바른 정도를 걸어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시류에 영합하는 이들이 득세하는 걸 보면 ‘탁족’은 문헌에나 나오는 옛적 풍습에 지나지 않나 보다.
이번 행선지는 물과 연관이 있다는 누정이 있는 곳이다. 여름에는 물에 연하여 있는 정자가 좋다. 장성 관수정(觀水亭). 조선의 대표 청백리(淸白吏)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지지당(知止堂) 송흠(1459~1547)이 만년인 1539년(중종 34) 지었다. 성품과 행실이 바르고 탐하는 마음이 없는 관리를 일컬어 청백리라 한다. 지지당의 천품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선비의 고장인 장성에 청백리가 없어서야 말이 되려나 싶었다. 물론 장성에는 백비로 유명한 조선의 문신 박수량이 있다. 일반인에게 백비의 박수량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지만 지지당 송흠은 고문이나 고문헌 등 우리의 전통 문예에 관심이 있는 이가 아니라면 모르는 경우가 많다.
송흠을 부르던 별칭으로 삼마태수(三馬太守)가 있다. 말 그대로 ‘세 필의 말과 관리’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전해온다. 송흠이 고을에 부임할 시 늘상 말 세 마리만 이용했다 한다. 자신이 타는 말, 어머니가 타는 말, 그리고 부인이 타는 말, 이렇게 세 필에 가족들이 나누어 타고 임지에 왔기에 민초들이 그와 같은 별칭을 붙여준 것이다. 당시 벼슬아치들 대부분이 7~8필의 말을 대동해 부임한 것과는 대조된다. 기록에 따르면 송흠은 1538년(중종 33년)에는 청백한 관리로 뽑혔다고 한다.
바야흐로 계절은 망종을 넘어 하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옛말에 ‘보리는 망종(芒種) 전에 베라’고 했다. 소만과 하지 사이에 든 절기로 양력 6월 6, 7일 경이 망종이다. 특히 남도 지역에서는 망종 때 ‘보리 그을음’이라는 풍습이 전해 내려왔다. 보리밭에 듬성듬성 남아 있는 풋보리를 베어 그을려 먹으면 다음해 보리농사가 잘 된다는 설 때문이다.
남도를 다니다보면 늘 산하와 들녘을 보게 된다. 그 유순한 풍경들과 자연스레 눈맞춤하게 된다. 도심을 떠나 교외로 방향을 돌리면 곰비임비 이어진 산들을 보게 된다. 도심의 인위와 기교와는 거리가 먼 풍경들은 도심에서 짓눌렸던 마음을 푸근히 감싸준다.
이맘때 들녘은 군데군데 심은 모들로 정겹기 그지없다. 수굿하게 선 채로 갓 뿌리를 내린 모들에선 가을의 풍성함이 느껴진다. 미처 보리 베기가 끝나지 않은 논에선 누렇게 익은 보리로 다사로운 풍경이 연출된다. 유명 화가의 화폭에나 나올 법한 그림 속 풍경 같아 자꾸만 눈이 가는 것이다. 새참과 들밥을 먹는 논둑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농사철 풍경은 아련한 기억 너머 풍년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관수정은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천방마을에 있다. 마을은 천반산 아래 아늑하게 터를 잡았다. ‘물결을 보면 물의 본질을 알기에 맑은 물을 보고 흐릿해진 마음을 씻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당연히 그러할 것이었다. 심성이 깨끗하고 행실이 바른 선비는 흐르는 물에 자신을 비춰봤을 것이다.
정자가 있는 곳은 황룡강 지류인 용암천 인근이다. 유구한 세월에 냇가는 예전의 천이 아니지만 그것의 본성은 맑은 흐름이었을 것이다. 농사철이라 물이 마르면 안 될 터인데 하는 심사로 지류를 바라본다. 풀은 무성하고 물의 양은 빈약하다. 그럼에도 흘러가는 물은 여일하게 세월을 넘어 그 너머의 세계로 흘러간다. 송흠은 이곳에서 흐르는 물살을 바라보며 자신의 생애를 반추했을 것이다.
덕성을 갖춘 자만이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법이다. 유년의 시절부터 순후하며 총기가 있었던 송흠은 늘 물의 본성을 사유하며 지지했을 것이다. 정자 내부에 걸린 관수정기(觀水亭記)에서 지지당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는 바람에 수면이 출렁이는 모습, 이후의 맑음 등 기태만상의 풍경은 외부로 드러나는 모습일 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의 본질을 알기에, 맑은 물을 보고 탁해진 마음을 씻은 연후에라야 ‘관수’(觀水)라 이름할 것이다.
지지당은 정자에 올라 저편을 굽어보며 늘 자신의 내면을 물로 씻곤 했을 것이다. 지금은 내(川)와 거리가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오래 전 콘크리트로 천방을 단장하기 전에는 바로 인근에까지 물살이 흘렀을 것 같다.
누정은 아담하면서 품격이 느껴진다. 청백리 선비의 청정한 심상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다소곳이 손을 모으게 된다.
송흠은 21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3세에 문과에 급제, 승문관 정자로 관직에 입문했다. 연산군 폭정기에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이곳에서 시문을 짓고 제자를 양성했다. 이후 중종반정 후 복직해 요직을 두로 거쳤다. 담양부사를 비롯해 장흥부사, 전주부사, 광주목사, 나주목사, 전라도관찰자 등을 역임했다.
누정 안쪽에는 우의정 홍언필을 비롯해 김인후, 임억령 시가 걸려 있다. 또한 면앙 송순의 시도 볼 수 있는데, 송흠은 송순의 9촌 조카다. 당대 송흠과 교분을 나눴던 이는 김굉필, 김안국 등이 있었으며 문하생으로 송순, 양팽손 등을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자를 둘러보면서 지지당의 인품과 학식, 덕망을 생각한다. 그의 정신이 묵향처럼 밴 이곳은 장성의 자랑이다.
홍영기 한국학호남진흥원장은 “오늘날 장성의 선비 정신은 오랜 세월을 걸쳐 여러 문사들의 삶과 학덕 등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왔다”며 며 “관수정에 깃든 지지당 송흠 선생의 청백리 정신도 오늘에 되살려야 할 소중한 가치”라고 말했다.
다음은 송흠의 시 가운데 한수다. 시에 담긴 민초에 대한 마음, 청빈한 삶의 모습 등을 엿볼 수 있다.
민초들 잘 살고 태평한 적 언제였던가
쓸쓸하기만 한 빈한한 이 시절에
백성을 자식같이 보살폈건만
정치를 한다며 연못을 바라보누나
궁벽한 이곳에 친구는 찾아오지 않고
먼 하늘 기러기도 늦게 오구나
시를 쓴다고 사람들이여 웃지들 마시게
글씨가 없다면 비석은 못 되거늘.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