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호남누정원림-전남(6) 장성 청계정
후텁지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장마철 궂은 날씨 탓이려니 싶다. 비가 오락가락 한다. 언제 하늘에서 낭창한 빗줄기가 쏟아질지 모른다. 대기가 불규칙한데다 습도까지 높다.
물론 장마가 긍정적인 것도 있다. 강수량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장마철의 비다. 논농사에도 일정부분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집중호우로 인한 수해는 늘 생채기를 남긴다.
우리 속담에 ‘가뭄 끝은 있어도 장마 끝은 없다’는 말이 있는데 장마의 위력은 상상을 넘는다. 어떤 이는 호환마마보다 무섭다고도 한다. 매년 이맘때 의례적으로 찾아오는 ‘손님’이려니 싶어도, 막상 장마철에 들어서면 많은 이들은 걱정을 하게 된다.
꾸물꾸물한 날씨면 어떠랴. 오늘도 행장을 꾸렸다. 해가 비쳤다 구름 뒤에 숨었다 반복한다. 숨바꼭질을 하려는 심사인가 보다. 해와 구름이 애 닳도록 연정과 질시의 냉온탕을 오간다.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들끼리의 사랑싸움은 사랑싸움으로 두고, 길을 떠나는 이는 또 길을 떠나는 것이다. 복잡한 머리 비우고 세상의 이런저런 소리 잠시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싶은 시절이다.
오늘의 행선지는 장성 청계정(淸溪亭). 이름만으로도 귀가 시원해진다. 맑은 계곡이 그려진다. 혹여 눈앞에 그런 골짝이 없어도 명칭이 부여하는 것은 푸르고 맑은 기운이다.
장성 진원면 진월리 산동마을에 자리한 청계정(전남문화재 97호)은 박원순(1510~1560)이 1546년(조선 명종1)에 건립했다. 박원순은 하서(河西) 김인후의 제자다. 하서는 조선의 문신이자 해동 18현 중의 한명으로 꼽힌다. 그런 하서의 제자라면 청계의 학덕과 인품도 어떠할지 가늠이 된다.
광주에서 청계정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장성 진원면은 광주와 가까운 생활권이다. 광주과학관을 지나 장성 방향으로 난 지방도를 달리다 보면 허허벌판을 만나게 된다. 예전에는 논과 밭, 마을과 산이 포개지듯 한가지로 이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몰라볼 정도로 풍경이 바뀌었다.
바야흐로 한창 개발이 진행 중인 첨단3지구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산천은 의구하지 않고 인걸도 간 데 없다. 기다랗게 둘러 처진 담장에 유명한 아파트 브랜드가 새겨져 있고 덤프트럭이 쉴 새 없이 도로를 오간다. 폴폴 흩날리는 먼지 위로 하오의 태양이 내리 비추는 도로를 달리다 보면 오른쪽에 오래된 마을을 보게 된다.
바로 산동부락이다. 이곳은 4월이면 하늘 아래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정취는 여느 관광지의 운치와 비할 바 아니다. 4월이 지나고 6월 하순에 들어선 때라 유채꽃은 상기도 그 흔적마저 남아 있지 않겠지만, 마을은 충분히 꽃의 감성을 머금고 있다.
산동마을에 들어서 왼편으로 꺾어 돌면 저만치 누정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돌올하다고 할까, 홀연한 모습이 세상사에 흔들리지 않는 고고한 선비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객을 맞이하는 것은 오래된 은행나무다. 수령이 약 500여 년 가까이 됐다 하니 아우라가 범상치 않다. 시끄러운 속세와 일정하게 거리를 둔 현자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러고 보니 누정은 청계정 본채 건물이 유일하다. 여느 누정에나 있을 법한 일각문이 없고 다른 부속건물도 없다. 뒤편으로 대나무 숲이 정자를 호위하듯 두르고 있을 뿐이다. 쥔장의 천품이 대나무를 닮았을 거였다. 바람이 불어오면 ‘쏴아’하고 맑은 소리가 번져온다. 대숲이 함께 흔들리면 소리는 현실적이되 모양은 몽환적이다. 저편에서 무슨 말을 건네 오는 것 같아 귀를 세우게 된다. 저잣거리 소음이 아닌 마음을 향해 밀려오는 소리들이다. 맑고 바르고 깨끗이 하라는 진언의 말이려니 싶다.
진원면 진원리 출신인 박원순 선생은 진사시까지 합격한 도량이 넓은 선비였다. 그러나 당대는 불의와 부조리가 만연한 시대였다. 그는 부정과 추함, 모사가 끊이지 않은 염량세태(炎凉世態)에 환멸을 느꼈을 거였다.
선비의 도를 추구하고자 했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문우들과 시문을 지었다. 또한 후학들을 가르치며 마을의 풍속을 바르게 하는 데도 마음을 쏟았다. 과연 청계정이라는 뜻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것도 같다. ‘청(淸)은 가훈이며 계(溪)는 물이 맑아 흐름이 그치지 않는다.’ 라는 의미가 다함없이 깊다.
박원순의 제자 중에는 장성 출신인 망암(望菴) 변이중(1546~1611)을 들 수 있다. 망암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고 수리에 밝았다. 특히 임진왜란 때 화차, 총통 등 성능이 향상된 병기를 제작해 행주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던 인물이다.
누정은 소담하고 담박하다. 멋스럽지 않으나 멋이 있고, 화려하지 않으나 기품이 있다. 선생의 천품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금의 누정은 선생의 13대손인 박정현이 중건하였다고 전해온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양식이다. 기단은 그리 높지 않고 그 위에 덤벙 주춧돌을 대고 원형기둥을 받쳤다. 정면 2칸 중 왼쪽 칸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른쪽 칸은 마루가 깔려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오른쪽 뒷면에 문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현재와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흥미로운 점은 마루 주위로 평난간이 설치돼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루와 난간 사이를 호롱병의 형상이 받치고 있다. 무기교의 기교다. 은은한 조형미가 은근히 눈길을 붙든다. 이곳 누정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이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볼 수 없을 만큼 은거해 있다.
그럼에도 누정에서 대화할 이는 있다. 바로 노거수인 은행나무다. 알현하듯 인사를 건넨다. 나무는 이곳의 모든 역사를 그러안은 채 오랜 세월을 품에 안고 있다. 은행나무와 관련해 전설이 없을 수 없다. 안내판에 기술된 내용은 대강 이러하다.
선생이 정자를 지을 당시 은행나무도 심고 연못도 조성했다. 그러나 50세를 일기로 선생이 별세를 하자 이전에는 없던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매년 봄이면 파랗게 잎이 돋던 은행나무 잎이 피지 않은데다 인근 방죽의 물도 말라버린 것이 아닌가. 그런 이상한 징후는 3년 상이 끝나고 나서 멈췄다. 거짓말처럼 다시 은행나무 잎이 돋아나고 방천의 물도 다시 흘렀다. 사람들은 말했다. 선생은 인품이 청백하여 주변의 산수도 그렇게 감화한 것이라고.
정내에는 다양한 기문의 편액이 걸려 있다. 시문보다 기문이 많은 것은 청계정의 특징이기도 하다.
김성갑의 ‘청계정기’(淸溪亭記, 1789년)는 하서(河西)의 제자인 박원순에 대한 기록은 물론 연못 가운데 단을 세운 것 등 청계정 모습을 담고 있다. 기정진의 ‘청계정중건기’(淸溪亭重建記, 1879년)에는 박원순과 누정 주변의 자연 경관, 은행나무와 관련된 전설 등이 기술돼 있다.
누정 마루에 앉아 저 멀리 들녘을 바라본다. 은행나무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온후하다.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모습이지만 분명 예전과는 다를 것이다. 박원순이 살았던 때는 당대 시끄러운 소리들이 난무하던 때였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선비는 가고 없지만 그의 고매한 정신은 남아 있다.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저렇듯 불어오는 바람에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