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호남누정원림-전남(7) 장성 백화정
장성은 선비의 고장이자 학문의 고장이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 그 방증이다. “글과 문장이 장성만 못하다”는 말은 자부심과 자신감의 표현이다.
장성 지역이 앞서서 내세운 말이 아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여러 고을을 둘러본 소감을 표현했는데 어느 결에 일반화된 것이다. 조선 과거시험 초장에는 경기도 포천 출신이, 종장에는 장성 선비가 많았다. 이른바 ‘포초장추’(抱初長推)라는 말은 ‘문불여장성’과 궤를 같이한다.
예나 지금이나 선비는 많다. 그럼에도 장성의 학문, 장성의 선비는 여느 고장의 그것에 견줄 바 아니다. 장성의 대표 유학자들은 유서 깊은 서원인 필암서원(하서 김인후), 고산서원(노사 기정진), 봉암서원(망암 변이중)을 중심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교우를 했다. 장성이 선비의 고장, 청백리의 고장, 학문의 고장으로 불리게 된 데는 그 같은 면면한 학풍과 학맥의 저력 때문이었다
문불여장성’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다. 흔히 대유학자를 가리켜 거유(巨儒)라 한다. 하서는 학문과 덕행이 높았는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에 포함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도학(道學), 문장(文章), 절의(節義)는 전인적인 면모를 가늠하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오늘은 김인후 생가이자 후일 시문을 짓고 학문을 논했던 백화정(百花亭)을 찾았다. 정자는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의 대맥동에 자리했다.
장성 황룡면에서 황룡강을 가로 질러 필암리 쪽으로 방향을 틀어 올라 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필암서원과 백화정이 갈리는 지점이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타든 상관은 없다. 필암서원이나 백화정은 하서라는 한 뿌리에서 분화된 가지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왔을 때도 굳게 문이 걸려 있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관리의 어려움이 있어 매번 열어 두지는 못할 것이다. 관리자에게 부탁을 해 잠시 백화정 안으로 든다. 잘 가꿔진 집이다. 이름대로 갖가지 꽃과 나무와 식물이 번성하듯 자라 있다. 뒤로는 우거진 숲에 정밀한 정적이 깃들어 있다. 언제 찾아도 고매한 학풍과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가만가만 정내를 둘러본다. 어디쯤 조용히 글 읽은 소리가 들려올 법하다. 시원한 바람 한 점 머물지 않으나 풍경만으로도 속이 트인다. 하서는 이곳에서 학문과 선비의 도리 등을 깊게 사유하며 앎의 세계에 대한 지평을 넓혀갔을 것이다.
“백화정(百花亭)은 1552년에 건립된 하서선생(河西先生)의 외헌(外軒)이다. 민씨(閔氏) 할머니께서 낙남(落南)하여 손수 잡은 이 집터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선고(先考)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복상중(服喪中)에 서둘러 사당(祠堂)과 외헌(外軒)을 짓고 안채를 개축하였다. 난산(卵山)을 바라보며 죽림(竹林)에 둘러싸인 백화정(百花亭)은 선생의 지극한 효성(孝誠)과 충절(忠節)이 서려있는 곳이다.
선생은 1549년에 순창에서 대학강의발(大學講義跋)과 천명도(天命圖)를 짓고 1550년에 맥동본가(麥洞本家)로 돌아온 후 10년 동안 오로지 학문에 전심하셨다. 노소제(盧蘇齊), 이일제(李一齊), 기고봉(奇高峯)과의 강론(講論)과 질정(質正). 선생의 심오한 도학(道學)을 집약한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의 저술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뜰에 서면 백화(百花)를 심어 완상하고 천시(天時)를 살펴 천명(天命)에 화순(和順)함을 노래한 자연가(自然歌)가 들리는 듯하다.”(백화정에서)
하서는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3년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는다. 이후 별시 문과에 급제했으며, 1543년에는 세자시강원설서라는 직임을 맡아 세자(훗날 인종)를 가르쳤다. 세자는 하서의 사람됨과 학문을 높이 평가해 주자의 ‘성리대전’과 직접 그린 대나무 그림까지 하사했다.
김인후는 의리와 기개의 선비이기도 했다.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죽은 제현(諸賢)의 원을 풀어달라는 소를 제기하기도 했다. 신원 복원을 위한 노력은 의당 선비로서 해야 할 본분이었다. 그러나 복원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545년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는 급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 부왕인 중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궁중 내의 복잡한 역학관계에서 비롯된 죽음이었을 것이다. 하서는 더 이상 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미련없이 벼슬에서 물러났고, 후로는 인종을 추모하며 신하의 도를 견지했다.
하서가 인종이 승하한 매년 7월 1일 고향 난산에 들어가 통곡했다는 것은 알려진 대목이다. 후일 하서의 깊은 충절을 기리기 위해 통곡단과 난산비가 세워졌다.
백화정을 나와 인근 필암서원으로 향한다. 하서의 학문과 학맥에 대한 자료가 집결된 곳이다. 필암서원은 김인후와 그의 사위인 고암 양자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서원에 장인과 사위가 동시에 배향된 것은 이례적이다. 학문을 탐구하고 학풍을 진작한 것으로 보아 장서 관계를 넘는 호방한 사이였음을 보여준다.
필암서원은 선조 때인 1590년 장성읍 기산리에 세워졌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려 1624년에 다시 건립된 후, 1662년에 필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1672년에 이르러서다. 현재 이곳에 소장된 문서들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필암서원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건물은 확연루(廓然樓)다. ‘확연’은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유래된 것으로 “거리낌 없이 확 트여 공평무사하다”는 의미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확연루기’라는 책자에는 이름을 지은 연유가 기록돼 있다. ‘정자(程子)의 말에 군자의 학문은 확연하여 공정하고, 하서 선생은 맑고 깨끗해 크게 공정하므로’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서원 안과 밖을 완상하듯 걷다 보니 하서의 ‘자연가’가 절로 생각난다. ‘산수도 절로, 녹수도 절로, 산수간 나도 절로…’ 입에서 붙는 운율이 맞춤하다. 어디에 눈을 두든 시가 나올 풍경이라 그렇듯 시심이 발원한다. 서원 곳곳에서 자연을 대하는 대학자의 심상을 한가지로 느껴본다.
언젠가 노창수 시인은 ‘장성문학대관’이라는 책자에서 장성 문(文)의 근원을 자연으로 상정한 바 있다. 필암서원과 백화정을 둘러보면 그러한 평에 절로 감응하게 된다,
“남도에서 빼어난 경치와 사찰, 서원, 정자 등이 장성에 많은 것이 ‘문불여’와 관련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문학은 지상의 산맥입니다. 산맥은 거침없이 나아가 낮고 높은 산을 끼고 흐르는 계곡물을 품어 풍수를 이루지요. 종착엔 바다로 이르러 문학의 제 세상을 맞구요. 또한 문학은 하늘을 기록하고, 사람 사는 곳의 역사와 현장을 대변하며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문학이란 인간이 사는 굴곡진 산을 내려와 골짜기를 비집고 구비 도는 내와 강의 모습을 닮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