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호남누정원림-전남(3) 담양 식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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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자에 담긴 뜻이 다함없이 좋다. ‘그림자도 쉬어 가는 정자’, 아니 ‘그림자도 쉬고 있는 정자’. 식영정(息影亭), 지극히 시적이다. 이름만으로도 흥건한 기운이 느껴진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허랑한 그림자는 벗어 버리고 잠시나마 유유자적 하고 싶다.
세상 만물 가운데 그림자 없는 사물은 없을 것이다. 형체가 있는 사물은 반드시 그림자를 거느리는 법이다. 그림자가 쉬어갈 정도의 아늑한 누정이라면 풍광은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을 터다. 벌써부터 삽상한 흥취와 경치를 즐기는 유흥상경(遊興賞景)의 경지가 그려진다.
식영정은 소쇄원, 환벽당과 함께 일동지삼승(一洞之三勝)이라 불린다. 한 동네에 명승이 세 곳이나 있다는 말이다. 지근거리지만 행정구역으로 보면 식영정과 소쇄원은 담양에 속하고, 환벽당은 광주에 속한다. 행정상 나뉘어 있을 뿐 근동에는 이들 정자 외에도 취가정, 독수정, 부용정 등 내로라하는 정자들이 즐비하다. 담양의 문화가 가사문학을 근저로 꽃 피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동지삼승인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의 명승을 소담히 그러안는 것은 창계천이다.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광주호로 합수되기 전 이르는 곳이 창계천이다. 예전에는 인근에 배롱나무가 많아 자미탄(紫薇灘)이라고도 불렸다. ‘배롱나무 여울’이라는 뜻에서 지극한 운치가 느껴진다. 과연 승경에 값하는 이름이다.
식영정(息影亭)은 조선 명종 때 서하당 김성원(1525~1597)이 1560년 건립했다.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石川) 임억령(1496~1568)을 위해 지었는데, 그만큼 장서사이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족이라는 인연을 넘어 문장과 학문의 연이 도타웠다
잠시 석천과 서하의 삶을 살펴보자. 임억령은 연산군 2년인 1496년 해남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4세에 광주로 올라와 눌재 박상과 박우 형제에게서 수학했으며 21세에 진사시험에, 30세에 문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1545년 명종 즉위와 맞물려 윤원형 일당이 권력을 내세워 모략을 일삼게 된다. 을사사화라는 피비린내 나는 평지풍파를 예감한 임억령은 미련없이 벼슬을 내리고 향리로 돌아온다.
김성원은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김인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92년 동복현감으로 있을 당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에 참여한다. 그러나 1596년 조카인 김덕령이 무고를 당해 억울하게 옥사를 당하자 은거한다. 그는 임억령, 고경명, 정철과 함께 성산사선(星山四仙)으로 불릴 만큼 문장이 뛰어났다.
두 문인의 각별한 사이를 아는 터라 식영정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담양을 오고가며 수시로 들렀던 터라 언제 와도 좋다. 풍취가 그만이다. 어디다 눈을 둬도 청명한 풍경들이다. 앞으로는 창계천, 뒤로는 성산이 자리한다. 호방한 문사들이 근동에 머물거나 오가며 시문을 짓고 교분을 나누었다. 이곳을 오갔던 이들은 송순, 김인후, 양산보, 기대승, 송순, 고경명, 백광훈 등 기라성같은 문사들이었다
선비들은 누정에 올라 심회에 담긴 글들을 풀어내곤 했다. 당화라는 시대적 격변과 중앙정계라는 권력에 물들지 않으려 했던 담담한 심사가 읽혀진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곁불을 쬐려는 이들은 항시 있어 왔다. 한편으로 불의한 권력에 옷깃만 스쳐도 타버릴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가진 이들도 더러 있었다.
식영정은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있는데 계단을 올라야 한다. 누정에 오르면 저 멀리 광주호가 보인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물빛은 푸르기 그지없다. 나붓나붓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하늘빛도 비쳐든다. 선비들은 배롱나무 흩날리는 그늘 아래 자비탄을 바라보며 풍경을 시제 삼아 시를 지었다.
임억령의 ‘식영정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석천의 철학적 사유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장주가 이르기를 옛적에 그림자를 무서워 한 이가 있었다. 그가 햇볕 아래 빨리 도망하면 그림자가 쉬지 않고 따라왔다. 나무 그늘에 이르러서야 보이지 않게 됐다 한다. 무릇 그림자는 사물의 형상으로 사람의 형체를 따르는 법. 사람이 엎드리면 그도 엎드리고, 사람이 일어나면 그도 일어난다. 가고 오고 다니며 머무는 일은 모두 형체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늘과 밤에는 사라지고 불빛이 비추거나 낮일 때만 생긴다. 사람의 처세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 그림자는 햇빛 아래 달빛 아래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훤한 날에는 흔적없이 자취를 감춘다. 그러므로 ‘나무 그늘에 이르러서야 그림자를 볼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새록새록 심중에 와 박힌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밝은 곳, 양지만을 지양한다. 그것이 세상 이치일 게다. 그러나 밝음이 있으면 음지도 있기 마련이다. 해가 비추는 곳에서는 그림자도 시간에 따라 길게 키를 높이지 않던가.
아마도 석천이 식영정에서 상정한 사유는 은일, 칩거의 미학인 듯 싶다. 밝은 세속으로 나아가기보다 승경의 아름다움에 묻히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그림자도 쉬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림자 주인이 쉬어야 한다. ‘그늘’ 속으로 들어와야, 비로소 쉼을 득한다. 밖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나그네 이제는 돌아가야 하리
가을바람 불어오고 누정을 떠나네
허랑한 마음 더 이상 붙들지 못하고
성성한 백발 어찌할 수 없구나
물이 좋아 다시 난간에 오르니
아담한 소나무 아래 뜰을 거닐며
내년에 따시 만날 일을 기약하니
나를 위하여 이것들을 지켜주오
위 시는 임억령이 성산동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가면서 썼다. 김성원이 송별시를 보내준 것에 대한 화답시다. 일명 ‘김성원의 송별시에 차운하다’. 승경을 떠나기 싫지만 어찌할 수 없이 고향으로 향하는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다.
식영정은 팔작지붕 한옥 양식의 구조다.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앞에서 보면 정사각형의 모양을 띈다. 뒤쪽에는 작은 방이 있고, 나머지는 마루로 돼 있다.
잠시 멀리 밖의 풍경을 응시한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누정에 들어 앉으니 모든 그림자는 눈 녹듯 사라진다. 애초에 그림자는 없었던 것도 같다. 아마도 임억령의 마음도 그러했으리라.
더 많은 것을 가지려, 더 높이 오르려 무던히도 애쓰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그림자의 미학’은 한낱 공허한 수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쯤 식영정에 들러 ‘그림자가 쉬어가는’ 의미를 생각했으면 싶다.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