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일보] 호남누정원림-전남(4) 담양 명옥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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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鳴玉軒)은 연못에 흘러드는 물소리가 구슬 소리 같다 하여 붙여졌다. 다분히 시적이다. 운치가 그만이다. 실제 옥구슬 소리 같지 아니하여도 이름만 들어도 구슬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연상된다. 자꾸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자꾸 귀를 세우게 된다. 요즘처럼 삿되고 번잡한 소음 넘쳐나는 세상에 가만가만 음미하고 싶은 소리다.
세상 만물은 절정의 때가 있다. 흔히들 피크라고 한다. 절정의 순간은 아름답다. 누가 봐도 아름답다. 가장 이름에 값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절정의 순간을 기억하고 상찬한다. 마치 그것이 모든 것인 양 착각하고 치부한다. 절정만을 기억하는 세상, 최고만을 기억하는 세태는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한 순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명옥헌은 8월 중순쯤에 찾아야 제 맛이다. 그 때가 승경의 지고한 품격을 느낄 수 있다. 무더위가 다소 누그러져, 한낮의 열기가 꺾인 즈음인 것이다. 붉은 꽃망울이 불이 난 듯 산마루를 불그스름하게 물들이면 무릉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산자락 흘러내린 물소리 아스라이 들려오고, 누정을 감싼 배롱나무의 꽃은 붉기가 그지없다. 온 산하에 홍염을 토해낸 듯한 풍경에 잠시 선 자리를 의심하고 두리번거리게 된다.
명옥헌은 당초 명곡(明谷) 오희도(1583~1623)가 산천경개를 벗하며 살던 곳에서 유래한다. 그의 아들 오이정이 부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 은둔하면서 지은 정자다. 이후 후손이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중앙에는 방이 있는 구조다. 주변에 마루를 놓은 형식은 소쇄원의 광풍각과 유사한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산마루에 지은 게 아니라 살포시 자리에 들어앉은 정자는 주변의 풍광과 하나인 듯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광주에서 담양 가는 길은 호젓하다. 바야흐로 푸른 방초는 더욱 무성해지고 산야의 빛깔은 더욱 푸르다. 어디에 눈을 둬도 푸르고 푸른 풍경과 마주한다. 답답한 일상을 털어내기 위해 자꾸만 먼 곳을 보게 된다. 마음이 허공에 날리는 연처럼 널뛰기를 한다.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초입에 잘 닦인 널찍한 주차장이 객을 맞는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두 갈래 길을 만난다. 마치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맞닥뜨린 것 같다. 왼쪽은 후산리 은행나무 가는 길, 오른쪽은 명옥헌 가는 길이다. 어느 편을 먼저 가도 후산마을의 절경을 볼 수 있다. ‘훗날을 위해 한 길을 남겨 두고’ 아니 ‘길은 다른 길에 이어져 끝이 없을 것 같으므로’ 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누정은 마을 안쪽 산기슭에 자리한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형국이다. 배롱나무 꽃이 무리지어 피었으면, 그 홍염의 자태를 보느라 넋이 빠졌을 텐데, 먼저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다행이다. 절정을 피해 들어섰기에 마주할 수 있는 본연의 풍경이다.
연못 너머 고갯마루 위에 살포시 자태를 취한 정자는 수줍은 듯 애련해 보인다. 주위를 감싼 수목은 넓은 치마를 펼친 듯 안온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누정이 풍경을 거느린 지세다. 누정을 중심으로 연못과 정원이 살뜰히 편재돼 있는 것이다.
산언덕을 다듬어 들어선 누정 앞에 서면 저 멀리 들판이 보인다. 시원스레 펼쳐진 들판은 들이치는 빛 때문에 실루엣처럼 보인다. 정자는 언덕을 중심으로 앞의 들판과 뒤의 산 언저리 그리고 주변의 경관을 차경하듯 거느린다. 시야를 거둬 가까운 곳으로 돌리면 연못을 에둘러 서있는 배롱나무 군락이 보인다. 배롱나무는 멋을 부리지 않은데도 서 있는 자태가 스스로 예술이다. 단단하면서도 매끄러운 그러면서도 곧고 구부러진 가지의 특성은 조형적 아우라가 남다르다.
알려진 대로 명옥헌 원림은 배롱나무 꽃이 아름답다. 후텁지근한 열기 아래 고개를 늘어뜨린 붉은 빛깔의 꽃잎은 보는 이에게 선연한 이미지를 드리운다. 선계의 진경이 이와 같을지 모른다. 봄날이라 선연한 붉은 꽃은 보이지 않는다. 외려 지천을 덮은 나무들의 잎들로 푸르른 세상이다. 붉은 화엄은 없지만 푸른 녹음에 차라리 마음은 차분해지고 물빛마저 푸르다.
명옥헌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정홍명의 ‘명옥헌기’(鳴玉軒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내 문도 중에는 오명중(오이정)이라는 이가 있는데 그는 강직한 사람이다. 지조를 중요시 여기기에 구차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뒷산에 들어가 두어 칸 집을 지었는데 뒤로는 샘이 있어 그 물이 아래로 흘러든다. 마치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더러운 때가 씻겨지는 듯한 느낌과 청량한 기운을 준다.’
누정 뒤편에는 사시사철 솟아나는 샘물이 있다. 물줄기는 가느다랗지만 연신 솟아나 아래로 흐른다. 수량은 많지 않지만 그침이 없는 물은 아래로 흘러 연못을 이룬다. 작은 연못이라 부르기에는 수량도 넉넉하고 품도 제법 넓다. 가운데에는 조롱박을 엎어놓은 것처럼 소담한 섬이 자리한다.
명옥헌은 장계정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오희도의 아들 오이정의 호가 장계(藏溪)였던 데서 연유한다. ‘계곡을 품은 정자’, 또는 ‘계곡을 감춘 정자’라는 의미다. 이편에서 보면 물이 졸졸 흐르는 산골짜기를 안았거나, 다른 이들에게는 승경을 내보이고 싶지 않아 감추었거나, 동일한 의미로 다가온다.
명옥헌을 알현하고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후산리 은행나무가 그것이다. 누정과 은행나무, 얼핏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다. 마을에 들어와 ‘가지 않은 길’을 환기했던 왼쪽길을 택해 300여 미터 걸었을까. 우람한 거인 같은 은행나무가 비스듬한 언덕에 서 있다. 현자의 자태가 이런 모습일까. 반듯한 자세로 선 은행나무는 후대에 전하는 ‘기록’의 의미로 다가온다.
은행나무 내력을 담고 있는 오희도 후손 오상순이 쓴 ‘장계고동기’라는 글이 있다. 은행나무는 명곡 선생과 인조대왕의 일화가 전해온다. 전남도가 펴낸 ‘병암유고’(향토문화연구자료 제 10집, 1987)에 실린 글이 있다. 명옥헌 현판으로도 걸려 있다.
“나의 명곡 선생은 혼조에 두문불출하여 십 년의 도를 지키며 늙어서 시냇가에 손수 심고 가꾸었으니 가히 알 수 있다. 인조대왕 당시 정승 원두표와 더불어 시냇가의 오동나무 아래 말을 매어 놓은 것을 보았는데 이백년 뒤 오늘에도 그 흔적이 완연하다. 한 자리의 풍운이 당시 몇 개의 벽옥(碧玉)을 띠었으니 어찌 천지의 원기를 부지함이요, 귀신의 조화가 아니겠는가. 북돋아 심고 그렇고 그렇지 아니함과 능치 요절치 않고 장수함이 기이하다. 우리 집 북쪽 동산에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역시 그러했다. 인조대왕이 말을 매는 은혜가 기이하고 계동과 더불어 다름이 없어 나아가 그 느낌을 아울러 기록하노라.”(국윤주, ‘독수정·명옥헌’, 심미안, 2018)
/글·사진=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