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1568년 2월 광주 수월정의 시 모임에서 시심이 일어_박광옥의 시회시 게시기간 : 2022-10-2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10-2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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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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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순이 나를 수정으로 찾아와 사성과 함께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이순이 우선 한 수를 쓰고, 나와 사성이 그를 이었으며, 이군현이 뒤에 이르러 시첩을 벽 위에 두도록 하였다. 2월 9일〔高而順 訪余於水亭 與師聖 共開小酌 而順先題一首 僕與師聖 繼之 李君賢後至 使帖諸壁上 仲春初九〕」
1. 박광옥의 시회시(詩會詩) 이 시는 박광옥(1526~1593)이 그의 나이 43세(1568, 선조원년) 2월 9일에 수월정에서 지은 것이다. 시 제목을 통해 보면, 박광옥은 ‘수월정’을 ‘수정(水亭)’이라고도 했다. 사실 이 시는 누정 공간에서 지었기 때문에 누정시(樓亭詩)라 할 수 있으나 시 모임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지었기 때문에 시회시라 규정하였다. 주목되는 부분은 시 제목이 다른 시에 대비했을 때 상당히 길다는 점이다. 또한 시 제목 맨 마지막 부분에서 그 지은 시기를 적었는데, ‘중춘초구(仲春初九)’라 하였다. ‘중춘초구’는 바로 음력 2월 9일을 가리킨다. 한편, 당시 수월정에 모인 사람은 박광옥, 고이순(高而順), 사성(師聖), 이군현(李君賢) 등 총 네 명이었다. ‘고이순’의 ‘이순’은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자이고, ‘사성’은 고경순(高敬順)을 가리킨다. 우선 박광옥, 고경명, 고경순 이 세 사람이 작은 술자리를 가졌다. 그러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고경명이 먼저 시를 지었고, 이어 박광옥과 고경순이 시를 지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술자리를 갖고 시를 짓고 있을 때 이군현이 이르니 그에게 시첩을 벽 위에 두도록 하였다. 곧, “시첩을 벽 위에 두도록 하였다”라는 내용을 통해 현장에서 시를 짓고, 그것을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시첩은 현재 전하고 있지 않아 아쉬울 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작자 박광옥의 입장에서 시를 다시 한 번 적어본다. 나는 몇 년 동안 앓아누워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앓아누워 있다 보니 계절도 잊고 지냈는데, 어느덧 청명절이 가까워져 홀연히 놀랬다. 수월정 주변에는 무성한 버드나무 가지만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자연의 모습과 별도로 오늘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보니 예전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광옥의 시를 보면,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시회를 열기 이전에 몇 년 동안 병석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병석에 있다 보니 세월이 흐르는 것도 잘 몰랐는데, 청명절이 가까워지고 있다 생각하니 갑자기 놀란 마음이 들었다 하였다. 청명절은 24절기 중 하나로 동지 후 100일이 되는 날을 가리킨다. 완연한 봄을 알리는 절기라 할 수 있다. 음력으로 2월 9일에 사람들이 수월정에 모였으니 양력으로는 3월 중순 쯤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바야흐로 청명절이 가까워지고 있다 말한 것이다. 점점 봄이 무르익어가는 시절이니 겨울철 눈에 안 들어오던 버드나무도 물이 올라 하늘하늘 바람에 움직였을 것이다. 분명히 수월정 주변에 다른 나무도 있었을 텐데,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거리는 버드나무였으리라. 그래서 3구에서 “들판 정자엔 천 가지 버드나무만 있을 뿐”이라 말한 것이다. 그런데 4구 “오늘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다 옛정 지녔다”라는 언급을 통해 박광옥, 고경명, 고경순, 이군현 이 네 사람은 2월 9일에 처음 모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네 사람의 끈끈한 우정은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2월 9일 수월정에서 그 우정은 다시 확인되었던 것이다.
2. 박광옥의 애민의식과 수월정에서의 시 모임 (박광옥은) 개산(盖山) 남쪽에 물을 끌어서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작은 정자를 만들어 ‘수월당(水月堂)’이라 하였다. (그리고) 고제봉(高霽峯)ㆍ이매정(李梅亭) 등 여러 어진 사람들과 함께 때때로 이곳에서 시를 읊었다.
(박광옥, 『회재집』 권2, 「연보」 43세 조) 박광옥의 자는 경원(景瑗)이요, 호는 회재(懷齋)이며,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빛고을 광주 선도면 개산리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현재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이다. 10세 때 조광조(趙光祖)의 제자 정황(丁熿)을 찾아가 학문을 연마했으니, 그 학맥을 추정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글은 박광옥의 나이 43세 때의 일을 기록한 「연보」 내용이다. 박광옥의 43세 때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적었다. 첫째, 개산 남쪽에 물을 끌어서 연못을 만들었다는 점과 둘째, 연못 위에 작은 정자를 만들어 그 이름을 ‘수월당’이라 한 점이다. 이 시점에서 박광옥이 왜, 개산 남쪽에 물을 끌어서 연못을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당시 개산 남쪽의 농부들은 물이 없어서 농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많았는데, 박광옥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에 저수지가 있으면 물을 편하게 쓸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그 구체적인 방도를 찾아보았다. 그래서 드디어 43세 되던 해에 사재(私財)를 털어 저수지를 만들고, 그 이름을 ‘개산방죽’이라 하였다. 이 개산방죽은 그 뒤에 전평호라 불리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농민들의 고충을 귀담아 들었던 박광옥. 만일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당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의 고충은 심하여 농사짓는 일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농사짓는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마치 목숨을 끊는 일과 같은 것으로 박광옥은 그러한 사정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재를 털어가며 농부들을 도왔던 것이다. 박광옥의 애민정신이 돋보인 한 장면이다. 또한 박광옥은 개산방죽을 만든 뒤에 그 중앙에 섬을 만든 뒤에 작은 정자를 세웠다. 이 정자를 연보에서 ‘수월당’이라 했는데, 이는 후대인이 그리 적은 것이고,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박광옥은 ‘수정’ 또는 ‘수월정’이라 불렀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당(堂)’과 ‘정자’는 형태가 다르다. ‘당’은 대체로 사면이 벽으로 둘러져 있는 형태의 방을 갖춘 건물을 말하고, ‘정자’는 사면이 막히지 않고 탁 트인 형태의 건물을 말한다. 따라서 박광옥이 ‘수정’ 또는 ‘수월정’이라 부른 것을 통해 건물의 사면이 막히지 않은 정자였다고 생각한다. 연보에 따르면, 박광옥은 이 정자에서 ‘고제봉’, ‘이매정’ 등 여러 어진 사람들과 함께 때때로 시를 읊었다고 하였다. ‘고제봉’의 ‘제봉’은 고경명의 호이고, ‘이매정’의 ‘매정’은 이만인(李萬仁)의 호이다. 고경명은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무등산을 유람한 뒤에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긴 바가 있다. 고경명은 무등산을 본격적으로 오르기 이전에 증심사에서 하룻밤 유숙(留宿)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만인도 함께 했다는 내용이 「유서석록」에 나온다. 이로써 고경명과 이만인이 어느 정도 친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박광옥과 수월정에서 때때로 만나 시를 읊었다고 했으니, 또한 세 사람의 친밀도를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이만인과 수월정에서 지은 작품이 2제 4수가 전하고 있어서 거기에 눈길이 간다. 그 2제 중 한 작품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데, 시 제목은 「수정에서 일원과 함께 짓다〔水亭 與一元 共賦〕」이다.
시 제목에서 말한 ‘일원(一元)’은 이만인의 자이다. 박광옥이 수월정을 지을 당시 선조 임금이 막 왕 위에 올랐었다. 그래서 임금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컸을 것이다. 1구와 2구 내용에서 조정에 거는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기대가 컸으니 임금님을 축수하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했겠는가. 봄철의 파룻파릇한 초목 같은 마음으로 임금님을 축수한다 했으니 시를 통해 왕을 향한 박광옥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헤아릴 수 있다.
3. 박광옥, 임진왜란 때 의병들과 함께 하다 박광옥은 개산방죽을 만든 이듬해 44세 12월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이 되었고, 49세(1574, 선조7) 때 별시 문과에서 을과 제2인에 합격하여 곧이어 운봉 현감에 부임한다. 박광옥은 이 운봉 현감 시절에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세웠는데, 이 비는 조선전기 황산대첩의 전승을 되새기기 위해 세운 전공비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전라도와 충청도 도사를 역임하였고, 54세 때 정5품 예조 정랑, 다음해에 사헌부 지평에 올랐다. 또한 그 뒤를 이어 성균관 직강이 되었고, 57세 때 영광 군수, 60세 때 밀양도호부사가 되었다. 특히, 영광 군수와 밀양도호부사를 역임하는 중에 선정(善政)을 했다 하여 두 곳에서 숭덕비를 세워주었는데, 박광옥의 애민정신은 어디를 가나 드러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박광옥은 61세 때 광주 교수, 63세 때 전라 교수가 되었으며, 64세 때 사첨시정ㆍ봉상시정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64세 때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되었다. 이 해에 당시 경기도 영평(永平, 현 경기도 포천)에서 지내던 박순(朴淳)을 찾아가 뵙고 10여일을 그곳에서 머물다가 돌아왔다. 이어 67세(1592, 선조25)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주 목사를 찾아가 계책을 논의하였고, 5월에 고경명ㆍ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박광옥은 비록 전쟁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대의 정비와 양식을 조달하였다. 또한 당시 용만(龍灣, 의주)으로 피난하였던 선조의 안부를 살폈고, 전라 감사 이광(李洸)의 죄목을 낱낱이 드러내었다. 이 무렵 새로 전라 감사에 부임한 권율(權慄)을 도와 공을 세웠다. 이렇듯 공을 세워 덕분에 나주 목사에 부임하는데, 곧이어 사직 상소를 올린 뒤 고향 집으로 돌아간다. 박광옥은 몇 해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는데, 그 병세가 심해져 더 이상 관직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개월 뒤에 생을 마감한다. 이때가 선생의 나이 68세였다.
4. 전평제, 살아있는 교육 현장이 되길 바라며 박광옥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관직에 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 모두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투철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교육을 통해 지역민들을 교화시키려는 의지도 강하였고,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거기에서 구하려 애를 썼다. 한편, 감성도 뛰어나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을 시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따라서 박광옥은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애민, 감성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 광주광역시 서구의 전평제와 전평제근린공원은 살아있는 교육의 현장으로서 손색이 없다 생각한다. 보통 도시 안에 있는 공원의 경우, 역사적 의미가 없는 경우가 허다한데 전평제와 전평제근린공원은 박광옥이라는 걸출한 인물과 관련한 곳으로 소중한 이야기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교육 현장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해본다.
<참고 자료> 박광옥, 『회재집』
김만호, 「회재 박광옥의 의병활동과 추숭」, 『호남학』 31집, 2020. 박래호, 『국역 회재집』, 동양학연구원, 1994. 박명희, 「懷齋 朴光玉의 시를 통해 본 삶의 軌跡」, 『우리말글』 84집, 우리말글학회, 2020. 이종일,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의 생애와 학문」, 『향토문화』 30,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03.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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