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장성 황룡 달맞이 누정이 완성되었다기에_기대승의 누정시 게시기간 : 2022-12-07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2-12-05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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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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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대승의 누정시(樓亭詩) 이 시는 기대승(1527~1572)이 현재 전남 장성군 황룡면 황룡리에 소재한 요월정(邀月亭)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지은 것으로, 누정시라 말할 수 있다. 시 제목이 「호숫가 누정에서 우연히 읊어 제공에게 주다」인데, 여기서 말한 ‘호숫가 누정’은 바로 요월정을 가리킨다. 또한 시 제목에서 ‘우연히 읊어’라는 말을 했으니, 격식을 정하고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제공에게 주다’라 했으니, 당시 기대승이 시를 지을 때 요월정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기대승의 입장에서 다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요월정이 완성되고, 술이 익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님들이 수레를 몰고 누정에 모였다. 때는 저녁으로 어둑해져 촛불 잡고 잔치를 여니 즐거움이 넉넉하였다. 그때 마침 찬 달은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와 그 빛이 일렁인 듯하였고, 저녁안개는 물을 감싸니 물빛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옥과 같이 맑고 깨끗한 술잔은 자주 나는 듯이 오고 갔으며, 주변에 핀 고운 국화꽃은 마치 자연스럽게 웃는 듯이 보였다. 술에 취해 흥이 일어나니 멀고 가까움이 헷갈려 “하늘과 땅이 여관인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시의 제1구에서 ‘집〔堂〕’이라 했으나 제목에서 ‘호숫가 누정’이라 했고, ‘호숫가 누정’은 곧, 요월정을 말하는 것이기에 서술문에서 ‘요월정’이라 바로 말하였다. 요월정의 ‘요월’은 ‘달맞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당나라 때 시인 이백(李白)이 지은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의 “술잔 들어 밝은 달을 마중하노니, 나와 달과 그림자가 세 사람을 이루었다.〔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라는 내용에서 차용하였다. 그리고 제2구 “촛불 잡고〔秉燭〕”는 중국의 「고시19수」 중 열다섯 번째 작품의 “사는 나이 백 년도 채우지 못하는데, 언제나 천 년의 시름 품고 있도다. 낮은 짧고 밤이 긴 것이 괴로우니, 촛불을 손에 잡고 노닐지 않을쏜가.〔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晝短苦夜長 何不秉燭游〕”와 이백이 지은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 중 “옛사람이 촛불을 잡고 밤늦게까지 노닐었던 것도 참으로 그 이유가 있었다.〔古人秉燭夜遊 良有以也〕” 등에 등장한다. 이로써 “촛불 잡고”라는 말은 덧없는 인생을 아쉬워하며 밤늦도록 어울려 노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또한 제8구 원문에 나온 ‘거려(蘧廬)’라는 시어는 『장자』 「천운(天運)」편 “인의는 선왕의 거려이다.〔仁義 先王之蘧廬〕”에서 유래한 말로, 훗날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여관’의 뜻으로 풀이한 것이다.
2. 기대승과 요월정 주인 김경우(金景愚)의 교유 그렇다면 기대승은 어떻게 요월정 시를 짓게 되었을까? 그 속에 기대승과 요월정 주인 김경우(1517~1559)의 우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두 사람의 이력을 살펴보자. 기대승의 자는 명언(明彦)이요, 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이며,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빛고을 광주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났으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숙부이다. 25세 때 알성시에 응시하였으나, 윤원형(尹元衡)이 그의 이름을 꺼려 낙제한 바 있었고, 32세 때 문과에 합격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후 병조ㆍ이조 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ㆍ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41세(1567, 명종22) 때 원접사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였고, 전한 벼슬에 올라서는 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46세 때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가던 길에 객사하였다. 이와 같이 기대승은 32세 이후부터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그러던 중에 김인후(金麟厚)ㆍ이항(李恒) 등과 함께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고 이황(李滉)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이황과 12년 동안 편지를 통해 여러 의견을 나누었는데, 특히 33세 때부터 40세까지 8년 동안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에 큰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요월정 주인 김경우는 어떤 사람인가? 김경우는 사실 역사적으로 크게 이름을 떨친 인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조선환여승람』ㆍ『호남읍지』ㆍ『장성읍지』 등에 간단하나마 김경우에 대한 이력이 나와 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김경우의 호는 요월정이고,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아버지 이름은 옥곡(玉谷) 김기(金紀)이고, 장성에서 태어났다. 또한 동천(東泉) 김식(金湜)의 문인이고, 김인후ㆍ기대승ㆍ양응정(梁應鼎) 등과 교유했으며, 좌랑 벼슬을 지냈고, 사복시 정으로 증직되었다. 이상과 같이 기대승과 김경우의 이력을 살폈다. 그러고 보면, 김경우가 기대승보다 열 살 더 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김경우가 어느 해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자신의 호를 딴 누정 요월정을 완성하였다. 기대승의 시 「호숫가 누정에서 우연히 읊어 제공에게 주다」를 통해 보면, 계절은 국화꽃이 핀 가을이었다. 김경우는 요월정을 완성한 뒤 기대승을 비롯해 여러 사람을 초대하여 술잔치를 벌였다. 김경우 입장에서 요월정을 사람들한테 보이고 싶었을 텐데, 그 사람들 속에 기대승도 있었다. 김경우는 1559년(명종14)에 세상을 떴고, 이 해에 기대승은 33세였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기대승은 그의 나이 32세 때 문과에 합격하였다. 이렇듯 여러 정황을 따져보면, 김경우가 요월정을 완성한 시기는 기대승이 아직 관직에 나아가기 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대승은 고향 광주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김경우는 요월정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기대승을 초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거리가 가깝다 하여 김경우가 기대승을 요월정에 초대했을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과 마음 간의 소통인데, 기대승과 김경우는 모두 사림(士林)으로서 당연히 대화가 잘 통했을 것이다. 그러니 김경우는 요월정을 완성한 뒤 마음이 잘 통하는 기대승이 마침 가까이 살고 있어서 초대해 늦은 밤까지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기대승이 지은 「호숫가 누정에서 우연히 읊어 제공에게 주다」 시만 보더라도 당시 잔치 분위기가 어떠했으며, 요월정 주변의 자연 풍광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제3,4구에서 요월정 주변의 자연 풍광을 자세히 읊었는데, 구름 낀 하늘에 찬 달이 새어나와 마치 그 달빛이 일렁인 것처럼 보였고, 물을 감싼 저녁안개로 인해 그 물빛이 일제히 사라진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리고 제6구에서 “곱디고운 국화꽃은 자연스레 웃는 듯하다”라고 말하여 요월정 주변의 자연과 동화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처럼 기대승은 요월정 주변의 풍광과 분위기에 흠뻑 젖어 흥을 타다보니, 땅의 멀고 가까운 것도 헷갈려 하늘땅이 여관인가 의심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3. 김경우의 죽음, 그리고 이은 기대승의 만시(挽詩)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김경우는 1559년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때 기대승은 33세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뒤 이제 막 벼슬살이를 시작한 시점이었다. 기대승은 당연히 김경우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를 슬퍼해 「요월정 시〔邀月亭韻〕」와 「김사안에 대한 만장〔挽金師顔〕」 등 총 2제 4수의 만시를 지었다. 이 중에서 「김사안에 대한 만장」 세 번째 작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시 제목 「김사안에 대한 만장」의 ‘사안’은 아마도 김경우의 자인 듯하다. 이 만시를 통해 볼 때 기대승이 김경우의 죽음을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 수 있다. 우선 제1,2구에서 기대승은 김경우가 남긴 문자는 집안의 업적으로 남았으나 운명이 기구하고 외로워 나이가 늙을 때까지 큰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였다. 현재 김경우가 남긴 시와 문장은 없다. 그러나 기대승이 제1구에서 한 말에 따르면, 김경우는 분명히 시와 문장을 많이 지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어 제3,4구에서 김경우가 들판에서 흥취를 즐겼던 것을 말하는 한편, 그 마음이 가엾다 하였고, 제5,6구에서 김경우가 살아생전에 달을 맞이하고, 향초를 캤던 일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제7,8구에서 기대승은 김경우와 평생에 최고로 어울렸다라고 말한 뒤에 슬픔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하였다. 능력은 있으나 그 능력을 펴지 못한 채 평생 동안 자연에 묻혀 살았던 김경우. 기대승은 그의 죽음을 심히 슬퍼했는데, 이 시에 그러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참고 자료> 『장성읍지』
『조선환여승람』 『호남읍지』 기대승, 『고봉집』 김세호, 「장성 요월정의 역사와 기록」, 『문헌과 해석』, 태학사, 2019. 박명희, 「지역전통의 형성과 누정문학의 전개 –전남 장성군 황룡면 소재 요월정을 중심으로-」, 『한국언어문학』 51집, 2003.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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