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조선중기 나주인, 사춘기 소녀 감성을 시로 읊다_임제의 향렴체시 게시기간 : 2022-12-2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12-20 11:2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
||||||||||||||||||||||||||
1. 임제의 향렴체시(香奩體詩) 이 시는 임제(1549~1587)가 읊은 것으로,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이 『지봉유설』에서 말한 것에 근거해 향렴체시로 분류하였다. 한자 ‘향렴’은 화장품이나 화장 도구를 넣는 함을 말하며, 이 뜻에 근거해 부녀자 신변의 자잘한 일을 소재 삼아 지은 시를 ‘향렴체시’라 불렀다.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몇 가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임제는 왜, 시 제목을 「말없이 이별하다」라고 했을까? 그리고 시적 화자는 이별을 하는데 왜, 말이 없었을까? 이별을 하는데, 말이 없는 경우 이별을 하는 상대방과 친하지 않다면 그냥 무심코 아무 말없이 헤어질 수 있다. 그러나 친하거나 좋아하는데, 말없이 헤어졌다면, 그 까닭을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임제가 「말없이 이별하다」라는 제목을 지은 까닭은 할 말은 많으나 상대방이 너무 좋은 나머지 그것을 다 드러낼 수 없어서 그냥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시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생각할 밖에 없다. 또한 이 시는 마치 열다섯 살의 아리따운 소녀가 하는 행동을 따라가며 읊은 듯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소녀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다시 서술해보았다. 열다섯 살 아리따운 소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소녀는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뒤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워서 이별하는데,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좋아하는 사람과 이별한 뒤 집으로 돌아가 두 겹으로 된 문을 닫고, 창가 배꽃 사이의 달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소녀의 나이가 열다섯 살이라 했으니, 사춘기 감정이 풍만한 때라 말할 수 있다. 사춘기를 맞은 소녀는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좋아한다는 말도 못한 채. 그래서 집으로 돌아간 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두 겹으로 된 문을 꼭 닫은 채 창가 배꽃 사이로 비친 달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곧, 소녀는 왜, 좋아한다는 말을 못하고 이별을 했을까? 하는 후회와 함께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등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일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 때문에 소녀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한편, 이 시는 수록한 문헌에 따라 제목이 다른데, 교산(蛟山) 허균(許筠)은 그의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과 비평서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규원(閨怨)」이라 하였다. ‘규원’이란 ‘아녀자의 시름’이라는 뜻인데, 비평가 허균은 「말없이 이별하다」 시에서 여인의 걱정 근심을 느낀 것이다. 아울러 제1구의 원문 ‘월계녀(越溪女)’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말없이 이별하다」 시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풀이했는데, 필자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제1구를 “열다섯 살 아리따운 소녀가”로 옮겨보았다. 즉, 원문 ‘월계녀’를 “아리따운 소녀”로 옮긴 것인데, 이럴 경우 지나치게 의역을 했다 말할 수도 있다. ‘월계녀’를 직역하면, “월나라 시냇가 소녀”가 되는데, 그렇다면 ‘월나라 시냇가 소녀’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힌트는 당나라 이백(李白)의 시 「서시(西施)」에서 찾아진다. 이백은 중국 춘추 시대 월나라의 미녀 서시의 일생을 14구의 오언고시로 읊었는데, 그 처음 두 구에서 “월나라 시냇가의 소녀 서시는, 저라산에서 태어났다네.〔西施越溪女 出自苧蘿山〕”라고 하였다. 서시는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중국 역대 4대 미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와신상담(臥薪嘗膽)과 서시빈목(西施矉目) 등 한자성어에도 등장하는 서시. 그녀는 월나라의 대표 미녀로 뽑혀 적대국인 오나라로 가기 이전에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소녀였다. 따라서 만일 필자처럼 제1구를 “열다섯 살 아리따운 소녀가”로 의역했다면, 그에 합당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임제,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은 감성의 소유자 …… 오직 후하게 타고나서 박하게 펴낸 자 나의 벗 임자순(林子順) 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군은 무예를 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인물이 얽매이지 않고 출중하였다. 젊어서는 재주로 드날리며 강개한 마음에 연대(燕代)의 기풍을 사모하여 때로 향렴ㆍ주사(酒肆)에서 자유분방하게 노니는가 하면 가끔 슬픈 노래로 강개한 기분에 잠기기도 하니, 사람들은 그 실마리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항복, 「임백호집서」 중 일부분, 『임백호집』) 임제의 자는 자순(子順)이요, 호는 백호(白湖)ㆍ겸재(謙齋)ㆍ풍강(楓江) 등이 있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아버지는 무관 임진(林晉)이다. 22세 때 비로소 속리산에 살던 대곡(大谷) 성운(成運)을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학문을 연마했는데, 이때 『중용』 책을 800번 읽었다. 이후 29세(1577, 선조10) 때 문과에 급제한 뒤 흥양 현감ㆍ서도 병마사ㆍ북도 병마사ㆍ예조 정랑을 거쳐 홍문관 지제교 등을 역임하였다. 이상 임제에 대한 간략한 이력을 적었는데, 이외에 위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서문을 통해 임제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이항복은 임제를 가리켜 우선 “오직 후하게 타고나서 박하게 펴낸 사람”이라 평가한 뒤 여러 가지 사실을 알렸다. 첫째, 무예를 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 둘째 인물이 어떤 한 곳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 셋째 젊어서 연(燕)나라 대(代)나라의 비분강개한 기풍을 사모하여 때때로 향렴ㆍ술집에서 자유분방하게 노닐었다는 것, 넷째 가끔 슬픈 노래로 강개한 기분에 잠기기도 했다는 것 등을 언급하였다. 아버지가 무관이니 무예를 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은 당연한 것일 텐데, 그 외 세 가지는 임제의 성격과 지향하는 바를 말한 것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어떤 한 곳에 얽매이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은 임제가 호일(豪逸)한 기상을 지녔음을 뜻한 것으로, 자유분방하면서 구속되지 않는 성품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성격이 이러하니 당시 짜진 틀에 맞추어 살아가던 사람들은 임제를 싫어하며 멸시하였다. 한 마디로 임제는 당시 자유분방함을 허락하지 않은 시대와 맞지 않은 인물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임백호집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는 백사공과 함께 백호에 대해 자주 논했는데, 백사는 늘 그를 ‘기남자(奇男子)’라고 일컫고, “시에 있어서는 일찍이 삼사(三舍)를 물러나서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고각(鼓角)을 세우고, 단(壇)에 올라 맹주를 세운다면, 백호 그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흠, 「임백호집서」 중 일부분, 『임백호집』) 이 글에 따르면, 신흠은 평소 이항복과 함께 임제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그럴 때마다 이항복은 임제를 가리켜 ‘기남자’라 했다는 것이다. ‘기남자’는 ‘특별한 남자’ 또는 ‘뛰어난 남자’라는 뜻으로, 이로써 이항복이 임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 수가 있다. 또한 임제의 시 창작 능력에 대한 평가를 하였다. ‘삼사’는 90리를 뜻한다. 곧, 이항복은 시 창작 능력이 뛰어난 임제는 자신과 대비했을 때 거리상 90리 정도의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만일 맹주를 세운다면, 임제가 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임제의 시 창작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은 말로,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은 감성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했다 생각한다. 따라서 「말없이 이별하다」 시 창작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말없이 이별하다」 시 속 화자는 분명히 여성(소녀)이다. 임제가 만일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소녀 감성을 담은 시를 창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유분방한 사고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 창작을 했기에 시 속의 충만한 감성이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자유분방한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3. 시풍(詩風)과의 연결과 그 계승 정랑(正郞) 백호 임제는 시를 지음에 번천(樊川)을 배웠는데, 명성이 세상에 높았다. 손곡(蓀谷)이 일찍이 사람들의 시품(詩品)을 논하다 백호에 이르자 그를 ‘능수(能手)’라고 지목했고 듣는 사람들은 모두 잘된 비유라고 하였다.
(양경우, 『제호집』 권9, 「시화」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인용) 이 글은 양경우가 쓴 「제호시화(霽湖詩話)」 중 일부분이다. 양경우는 이 글을 통해 임제 시의 시풍 특성과 시 창작의 수준을 언급하였다. 시풍과 관련해 “번천을 배웠는데”라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번천은 만당(晩唐) 때 시인 겸 병법가 두목(杜牧)의 호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풍류적이며, 역사적 고사를 노래하고, 시사를 드러냈으며, 요염하고 미려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두목의 시를 임제가 배웠다는 것은 곧, 만당풍의 시를 창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성 작가인 임제가 「말없이 이별하다」와 같이 여성성을 드러낸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던 것도 요염하고 미려한 것을 추구한 만당풍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양경우는 손곡 이달(李達)이 언급한 ‘능수’라는 말을 빌려 임제의 시 창작 수준을 언급하였다. 이달은 당대 삼당파(三唐派) 중 한 사람으로, 당시풍(唐詩風)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임제를 가리켜 ‘능수’라고 지칭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능수’는 ‘명인’, ‘명수’라는 말로 바꿀 수 있는데, 시 창작 능력이 특별히 뛰어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말없이 이별하다」 시는 후대 사람들이 사랑하는 작품으로 남아 시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 예로 가령, 담헌(澹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이하곤은 시 제목에서 「나는 일찍이 임자순의 “열다섯 월계녀”라는 절구를 사랑하였는데, 말뜻은 초절하다. 다만 그 크게 시원하고 심오하며 아득한 뜻이 부족한 것이 한스러워 그 뜻을 이렇게 지어 시연하니,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이하곤은 임제가 지은 「말없이 이별하다」 시를 평소 사랑하여 시를 많이 읽고 그 특성을 파악한 듯하다. 그래서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비슷한 시 한 편을 지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임제의 「말없이 이별하다」 시 속의 여성 화자는 마지막 구절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이하곤의 시 속 미인은 수줍어하기는 하나 이별의 눈물을 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임제 시 속의 여성은 집으로 돌아가 겹문을 닫고 배꽃 사이의 달 보며 눈물만 흘릴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데, 이하곤 시 속의 여성은 서쪽 행랑채 달에 절하며 마음속 일을 말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임제 시 속의 여성은 소극적인 반면, 이하곤 시 속의 여성은 적극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하곤은 임제 시 속의 여성을 적극적인 여성으로 변모시켜 새롭게 계승한 것이다.
<참고 자료> 양경우, 『제호집』
이하곤, 『두타초』 임 제, 『임백호집』 허 균, 『국조시산』 강석중, 「백호 임제의 시세계」, 『한국한시작가연구』 7, 태학사, 103~118쪽. 신호열ㆍ임형택 공역, 『역주 백호전집』, 창작과비평사, 1997. 장선희ㆍ정경운, 「방랑과 탈속의 풍운아」, 『호남문학기행』, 도서출판 박이정, 2000, 120~135쪽. 중국인물사전(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37795&cid=62066&categoryId=62066) 검색일 : 2022.12.19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