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잔치자리라고 마냥 칭양(稱揚)만 할 수는 없지 게시기간 : 2023-01-2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1-25 10:5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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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창계 임영(1649-1696)이 정명공주를 위해 썼다. 정명공주(1603~1685)는 선조의 딸이다. 어머니 김씨는 김제남(金悌南) 딸로 인목대비이다. 공주의 동생은 계축옥사로 인해 강화도에서 죽은 영창대군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때 경운궁에 갇혀 지내다가 폐비되었다.정명공주 15세 즈음의 일이었다. 공주도 어머니와 함께 서인의 처지로 강등되었다. 어려서부터 자기를 예뻐하던 이복 오빠에 의해 공주 신분에서 평범한 백성 신분으로 떨어졌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늘 부족하여 심한 고생을 겪었다. 다행히 인조반정으로 인해 공주의 신분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곧 홍주원과 결혼했다. 그녀가 결혼할 때 인조는 200칸짜리 집을 지을 수 있는 재목과 기와를 선물했다. 조선시대 공주의 집은 50칸이 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당시 신하들이 ‘50칸 넘는’일이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인조는 정명공주에게 파격적인 결혼 선물을 주었다. 이후 그녀는 공주이며 사대부 집안 여성으로 살았다. 조선시대로서는 꽤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83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인조, 효종, 현종 등이 즉위하고 또 사망했다. 실록에 의하면 숙종은 정명공주를 극진하게 대접했던 듯하다. 1677년에 ‘선조 임금의 공주로서 정명공주만 있는데 75세’가 되었으므로 특전을 내려야겠다면서 잔치를 내려주었다. 시의 서문에 의하면 이 때 숙종은 정명공주 수연에 1등의 연악(宴樂)을 내려주었다. 잔치의 흥을 돋울 음악대로 1등은 악사 1명, 여기(女妓) 20명, 악공 10명으로 구성된 악대이다. 이후에도 수연 때마다 많은 물품을 하사하자 승정원에서는 흉년 때에 백성들을 위한 일이 아니라면서 만류하기도 했다. <정명공주의 집에 잔치를 내려준 데 대한 시-서문과 함께(貞明公主第賜宴詩幷書)> 칭송과 경계(警戒)를 잘 버무려서 위 시는 1680년에 썼다. 정명공주 셋쩨 아들인 홍만희(洪萬熙)는 어머니 수연을 맞아 친구와 당대 문인들로부터 축하시를 받았다. 임영에게도 편지를 보내 수연 사실을 알리고 축하해주기를 요청했다. 임영은 홍만희의 편지를 받고 정명공주 수연 축하시를 지어 보냈다. 수연에 참석한 이들은 잔치 주인의 장수를 축하하면서 또 오래 살기를 기원해준다. 잔치를 주관한 사람이 참석자들에게 송축시를 요구하면 이에 부응하여 지어주었다. 수연에서 송축하는 작품들은 조선 중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지어졌다. 수연과 관련한 수서(壽序)도 유행했다. 수연을 축하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수시(壽詩)나 수서는 모두 송축하는 작품들이다. 송축은 작품의 대상이 되는 인물의 덕성, 업적을 칭송하는데 그 결과로 ‘장수’한다는 뜻을 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잔치 주인의 자손들이 현달하여 가문이 창성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넣는다. 그러다보니 서로 비슷한 어휘들로 채워진다. 특히 잔치를 주관하는 이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칭송 일색으로 흐르기도 했다. 그래서 정범조는 ‘부화한 말, 아첨하는 말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글’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임영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정명공주의 장수, 공주에 대한 숙종의 무한한 공경심과 애정 등을 한껏 치올려 말했다. 무엇보다 숙종이 왕족의 최고 어른을 공경하고 잘 섬기는 사실부터 말했다. 왕의 덕행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리라. 나중에야 길에서 듣고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하나의 일을 통해서 성상께서 연로한 이를 받들고 존귀한 이를 높이며 친속을 가까이하시는 의리를 알겠구나. 전(傳)에서는 ‘윗사람이 연로한 이를 받들면 백성들이 효성을 일으킨다.’고 말했고, 달효(達孝)를 칭탄(稱歎)하면서 ‘선조가 존경하던 이를 공경하고 선조가 친애하던 이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바로 나라를 바르게 하는 근본이다. 이 의리를 미루어 나간다면 정사하는 일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정명공주의 수연을 축하하는 글이지만 임영은 정명공주보다 먼저 숙종의 덕행부터 말했다. 실제로 시는 정명공주의 수연 때마다 숙종이 얼마나 성대한 은총을 베풀었는지를 보여준다. 풍요로운 잔치 자리로 만들기 위해 내린 많은 물자들, 궁궐에서 쓰는 최고의 맛과 품질을 가진 좋은 술, 화려한 비단 장막과 자리, 방석, 궁중 또는 왕을 위해서나 연주되는 음악 등이 나온다. 사대부 집안사람이 된 공주에게 왕이 누리는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준 숙종의 인자함을 보여준다. 조선시대는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 잔치 규모, 복식까지 차이가 있었다. 옷 색깔도 신분에 따라 달라야했다. 상민들은 흰색 두루마기만 입을 수 있었고, 중인으로 정3품의 관리라면 홍포를 입을 수 있었다. 탈 것에도 등급을 두어 왕족이 탈 수 있는 가마와 평민이 탈 수 있는 가마도 달랐다. 장희빈이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어머니가 옥교(屋轎)를 타고 궁에 들어간일로 시끄러워진 적도 있다. 옥교는 지붕이 있고 사방을 휘장으로 쳐 놓은 가마다. 왕비 어머니나 적어도 정1품에 속하는 부부인들만 탈 수 있다. 구한말 때 스님이 갓을 쓴 것을 보고 신분 질서가 무너졌다고 한탄한 이도 있었다. 그 만큼 신분의 차이는 일상의 여러 곳에서 차이를 만들었다. 정명공주가 왕족으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사대부 집안으로 시집갔으므로 사대부급으로 살아야 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왕족급에 가까운 대우를 해주었다. 숙종의 마음씀씀이, 두터운 덕성을 부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숙종만 치켜세운 건 아니다. 정명공주가 수연의 주인공이므로 당연히 칭송해야 한다. 임영은 그것을 에둘러서 말했다. 정명공주에 대한 숙종의 곡진한 마음과 그 마음을 다 담지 못한 선물을 받아 누리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한 개인이 왕의 특별한 대우를 받는 일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까. 정명공주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큼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 영광을 차지할 자격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을 칭송할 수 있는 최적의 표현이다. 임영은 공주를 칭송하고 크게 드러내는 데서 끝내지 않는다. 공주의 자손들을 향해 직접 말한다. 하늘 같은 임금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보답할 길을 찾으며 대대로 충성하라고. 공주께서는 지극히 존귀하므로 감히 언급할 수 없지만 공주 가문의 자손들은 어떻게 성상의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심과 사랑하는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생겨난다. 존귀하고 친근하며 은혜나 총애를 더 받았다고 해서 권장받거나 힘쓰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가까운 친속일수록 받는 은혜가 더 큰 법이니 보답하는 일에 더 힘써야 하지 않을까. 공주의 자손들이 마음을 다잡고 학문에 힘써, 물러나 있을 때에는 수양하는 선비가 되고 벼슬에 나아가서 충성스러운 신하가 된다면 임금의 교화하는 정사를 도와 잘 이루게 할 것이다. 공주께서 성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공자께서 효는 입신(立身)에서 끝난다고 하셨으니 임금을 이처럼 섬기면 충과 효의 도리에 딱 맞을 것이다.
어머니가 임금의 은총을 넘치게 받고 있으므로 자손들은 그것을 광영으로만 여겨 남에게 뻐겨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신하로서 임금을 위해 충성하는 것은 당연하고 더구나 왕과 친속이므로 보답하는 일에 더욱더 힘써야 한다고 경계한다. 임영은 서문과 시를 통해 정명공주의 광영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서 오히려 자손들에게 경계하고 은근히 타이른다. 임금에 대한 충성으로 가문을 빛내고 창성하게 하라고. 직언하는 태도를 송축시에도 담아 임영은 1649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30세가 되도록 벼슬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고향인 나주의 회진에 와 학문에 매진하기도 했다. 이 시는 그가 막 30세가 되었을 때 지었다. 그때 그는 지방에 있었다. 그래서 바닷가 궁벽한 곳에 살고 있으므로 공주의 성대한 수연, 숙종의 넘치는 은총 사실 등을 듣지 못했노라고 말한다. 30세 이후로 벼슬에 나아가 정언, 지평, 승지 등 내직을 지내기도 했고 황해도 및 전라도 관찰사, 개성유수 등 외직을 거치기도 했다. 벼슬 자리 제의가 올 때마다 사양한 적이 많았고, 주변 사람들이 권유해서 벼슬에 나아갈 정도로 벼슬이나 세속적 출세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 책을 읽고 사색하며 기록하는 데에 관심이 많았다. 『독서차록(讀書箚錄)』은 그 결과물이다. 벼슬에 관심은 없었지만 임금의 정사에 대해서는 서슴지 않고 직언했다. 잦고 화려한 잔치를 경계했고, 명과 청이 대치하고 있는 중국의 형세를 세심히 살펴가면서 철저히 대비할 것, 왜구들의 동향도 주시할 것, 이를 위해 국가의 병력 양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어야 할 것 등을 강조했다. 임영은 이런 태도를 공주의 수연 축하시에서도 보여주었다. 조선시대 개인의 평균 수명은 30대 중반이었다고 한다. 나이 70은 ‘예부터 드물었다’는 고희(古稀)가 아닌가. 70세 이상 나이에 여는 수연은 넘치도록 축하할 만한 자리이다. 장수를 덕행의 결과로 생각하던 때였으므로 75세 이후의 수연은 잔치 주인의 인품이나 삶을 최대한 추어주고 칭송할 수 있다. 부화한 말을 엮어 아첨에 가깝게 들릴 수 있어도, 칭송 일색으로 시를 써도 크게 흠이 되지 않을 터이다. 그렇지만 임영은 생각 방향을 바꾸었다. 칭양하거나 개인의 복록을 기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장수함은 하늘이 내린 복으로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고, 성대한 잔치와 대우 또한 공주로서 받을 만하지만, 받은 만큼 보답을 생각하고, 그 만큼 임금에게 충성하라고 했다. 칭송에서 경계하는 자리로 바꾼 것이다. <도움 받은 글들> 임영, 『창계집』, 한국고전종합DB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https://archive.aks.ac.kr 이종범(2008), ‘창계 임영의 학문과 정론’, 『한국인물사연구』 9, 한국인물사연구회. 박래호(2001), ‘창계 임영 선생의 생애와 사상’, 『향토문화』 21, 향토문화개발협의회. 최재남(2008), ‘창계 임영의 삶과 시 세계’, 『한국한시작가연구』 12, 한국한시학회. 이의강(2008), ‘송축시의 연원 및 그 전형 수연시’, 『동방한문학』 37, 동방한문학회. 김우정(2011), ‘선조 연간 문풍의 변화와 수서’, 『동방한문학』 47, 동방한문학회. 김우정(2013), ‘한국 한문학에 있어서 수서의 전통과 문학적 변주 양상’, 『한국한문학연구』 51, 한국한문학회. 진재교(2020), 滄溪 林泳의 漢詩 硏究 -自己 省察과 求道의 情感-, 『한국고고문서학회』(1996), 『조선시대 생활사』, 역사비평사.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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