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초상] 동경제대 공학도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한근(金翰根) 게시기간 : 2023-02-03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3-02-02 14:14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미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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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신안 행정구역에 속하지만 1919년 3월 18일 당시 무안 장산도에서 섬 지역 가운데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났다. 광주·전남 지역 시위의 시발점이 된 광주 3·1운동이 이보다 약간 이른 3월 10일 일어난 것과 비교해보더라도 장산도에서의 시위가 얼마나 빠른 시기에 일어났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이틀 뒤인 3월 20일 일어난 무안읍 시위도 단 하루 시위로 징역형 24명, 그 가운데 독립 유공자만 22명으로 전국 어느 시위에 비해 뒤지지 않는 항쟁의 에너지를 분출했다. 무안의 두 지역에서 이틀 간격으로 일어난 시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시위의 촉발에 주도적인 역할을 무안읍 출신 경성 유학생 김한근이 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 많지 않다. 그것은 무안 3·1운동이 항소를 한 정순홍·박상규 양인의 재판 기록에 의지하여 시위를 분석한 탓에 전체적인 윤곽이 드러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몇 년 전 광주를 포함하여 광주 전남 23개 시군에서 3·1운동을 살피면서, 시위를 주도한 이들의 판결문을 ‘판결문으로 본 광주 전남 3·1운동’으로 출간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무안, 신안의 3·1운동은 두 지역이 동시에 계획이 되었고,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하였다. 특히 이 시위를 김한근이라는 유학생이 추진하였다는 점은 흥미를 갖게 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장산면 도창리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는 장산면 출신으로 당시 27세였단 장병준(본명: 홍채)이 주도하였다. 그런데 장병준을 만나 시위가 이루어지게 한 이가 무안읍 출신으로 당시 휘문의숙 2학년 재학 중인 김한근이었다. 김한근은 휘문의숙에서 공부하며 경성의전과 함께 대표적인 의학전문학교인 선교사가 세운 세브란스 의전을 진학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김한근이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려 하였던 까닭은 1918년 유럽을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이 조선에 상륙하여 많은 조선인이 사망한 데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에 나와 있던 일본인들은 서양 의술의 도움을 받아 상대적으로 사망률이 낮았다. 이러한 민족적 차별이 김한근과 같은 젊은 조선 청년의 애국심을 자극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것은 일제 식민지 정책의 모순을 이들이 많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1902년 무안군 무안읍 교촌리에서 태어난 김한근은 휘문의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휘문의숙은 많은 재학생이 3·1운동에 참여한 대표적인 학교로 민족의식을 교육하고 있었다. 그는 3월 1일 시위와 경성의전을 중심으로 서울의 학생들이 주도한 3월 5일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를 이끌었다. 한편 서울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한근의 부친은, 아들이 시위에 휩쓸리는 것을 염려하여 ‘조부 위독’이라는 전보를 보내 급히 무안으로 내려오게 하였다. 부친의 전보를 받은 한근은 부친의 전보가 본인을 무안에 내려오게 하려는 것임을 눈치챘으나 부친의 전보를 무시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한근은,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무안 일대에 시위를 확산시키는 것도 중요하겠다고 판단하여 3월 9일 무안으로 내려왔다. 무안에 내려온 한근은 바로 장산도에 거주하는 장병준을 찾아갔다. 장병준은 그가 경성에서 공부할 때 가깝게 지내던 고향 선배 장병상(장홍협)의 형이었다. 장병상은 1898년생으로 한근보다는 다섯 살 위였다. 그때 장병상은 중동학교 재학 중이었다. 장병상도 경성에서 일어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한근이 고향에 내려간다는 얘기를 들은 장병상은 고향에 있는 큰형 병준을 찾아가게 하였다.2) 김한근 경성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병준에게 보여주며 그곳에서 있었던 시위 규모를 설명하였다. 이에 장병준3)은 장산면 대리에 있는 활터에서 같은 동리에 사는 고제빈·김극태 등과 시위를 모의하였다. 그는 고종황제 안장식에 모인 수십 명 군중 앞에서 손병희의 천도교처럼 시위하자고 외치며 군중들을 이끌었다. 장병준, 고제빈, 김극태 등이 이끄는 시위대는 장산면 도창리,공수리 등을 행진하며 시위를 하였다. 고제빈은 징역 4월을 선고받았다. 체포를 면한 장병준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장병준은 1920년 서울에 잠입하여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시위를 모의하였다. 그는 2월 27일 표성천을 통해 목포의 서태석에게 태극기, 선언문 등을 전달하게 하였다. 2월 28일 시위 물품을 전달받은 서태석은 2월 29일 밤 목포 송도공원과 목포역전앞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선언서 등을 살포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장병준은 죄가 병합되어 징역 3년, 서태석은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무안에 내려오자마자 장산도로 건너가 그곳의 시위를 추진한 한근은, 곧바로 무안으로 돌아와 고향 친구들과 시위를 계획하였다. 무안읍 청년들에게 18일의 장산면 시위는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22세 청년 정순홍은 강기석·박상규·김득근 등 십여 명의 청년들과 함께 3월 19일 밤 김순기 집에 모여 다음 날인 20일 무안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하자고 하였다. 밤을 세워 태극기와 포고문 등 격문을 만들었다. 판결문에는 19일 밤 하루 만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시위 준비가 체계적으로 준비되고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아 무안에 내려온 직후부터 1주일 넘게 차분히 준비되었다고 여겨진다. 20일 새벽 ‘친일파의 반성·자숙과 민중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경고문과 격문을 읍내 곳곳에 붙였다. 친일관리들의 자진사퇴를 종용하는 협박 격문이 4월 상순부터 나타났다고 전남헌병대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3월 중순에 이미 포고문을 발표한 무안시위는 그 효시라 하겠다. 김한근 등 시위 주도세력은 100여 명의 군민과 함께 20일 오전 11시 무안읍 남산에 올라가 독립 경축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김한근, 정순홍 등은 읍내 방면으로 시위대의 행진을 이끌었다. 오후 1시 무렵 무안보통학교 교정까지 진출한 시위대는 저지하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 읍내 장터까지 나아갔다. 그곳에 모인 수백 명이 넘는 군중들의 우렁찬 함성 열기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하나의 목소리 같았다.’는 재판 기록처럼 무안의 영산(靈山) 승달산을 달구었다. 재판 기록에 수백 명이라 한 것으로 보아 천 명은 족히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로 정리한 박은식이 무안에서 ‘300명’이 시위에 참여한 시위 규모를 훨씬 뛰어넘었다. 무안 경찰병력으로 시위 진압이 불가능해지자 인근 목포경찰서에서 서장 지휘아래 헌병대가 출동하여 해산 작전에 나섰다. 이때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국가기록원 소장 ‘3·1운동 희생자 명부’에 무안 남산에서 안동일이 시위 당시 피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명단이나 기타 자료 등에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아 심층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시위 당일 피살되었다는 증언으로 보아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이날 시위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시위 당일 연행된 사람이 57명이었다는 사실에서 짐작된다.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1919년 5월 1일 자) ‘무안 소요 사건 관련자 공판’ 보도 내용을 보면, 김순기·김한근·정신섭·박선규·정순홍·김득근·안판신·정태연·안동선·정규식·윤호영 등이 징역 1년 6월, 정순정·양화순·박상규·정치언·정순선·이동천(매일신보에는 이천)·정규수·정윤조·박용규·정순재·정규태·정인철·강지석 등이 징역 6월 등 24명 전원이 실형을 받았다. 정규태는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후 8개월 만에 순국하니 그의 나이 32세였다. 한반도의 서남단 작은 고을에서 단 하루 일어났던 시위에 일제가 이렇듯 대규모 사법처리를 하였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무안시위를 일제가 얼마나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김한근 등 무안 청년들이 철저히 준비하여 1천여 명이 넘는 군중들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뜨거운 외침을 쏟아 낸 것은 식민지배의 모순을 무안 지역 주민들은 더욱 느끼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이웃 섬들에서도 시위가 이어지고 4월 8일 목포 지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가능하였던 것도 무안지역시위의 영향이었다. 무안 출신 3·1운동 유공자가 고제빈을 포함하여 23명이다. (장병준은 임시정부 요인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그 또한 3·1운동 관련자이다) 이렇듯 3월 20일 실형 받은 24명 가운데 무려 22명이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실형 받은 대부분이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이들 대부분이 일제의 회유 협박을 이겨내며 광복 그날까지 항쟁 의지를 불태웠음을 알려준다. 1920년 목포 3·1운동을 이끌다가 징역 1년을 복역한 서태석이 1923년 암태도 소작쟁의를 이끌었던 것도 신안·무안의 3·1운동의 영향 때문이라 하겠다. 한편 시위 당일 연행된 사람이 57명이라고 한다. 현재 무안 3·1운동 관련자로 파악되어 있는 인물은 판결문(정순홍, 박상규)과 매일신보에 보도되어 파악된 24명이다. 그러나 당시 형집행원부를 통해 무안 3·1운동 관련하여 체포되었던 인물로, 강치숙, 안성용, 김영래, 김영래 등을 최근 추가로 필자가 확인하였다. 이밖에도 필자에게 무안 3·1운동과 관련 참여 사실을 증언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무안 3·1운동의 정확한 실체가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목포 형무소에 복역 중이던 김한근은 1년이 지난 4월 28일 특사로 풀려났다. 이때 김한근을 비롯하여 무안, 완도, 목포 등 여러 곳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징역형으로 복역 중이던 많은 이들도 함께 풀려났다. 이들이 풀려났을 때의 모습이 당시 신문에 보도되고 있다. 당시 출옥한 이들을 환영한 인파가 ‘인산인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엄청난 인파가 목포 형무소 앞에 모여 이들의 빛나는 독립운동을 뜨겁게 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은사(恩赦)로 출옥된 목포만세 범인
대한청년단 출영, 경찰서 문앞은 인산인해 목포경찰서에서는 지난 28일 밤 정치범의 특사란 특전(特電)을 접하고, 동 29일 목포경찰서 직원이 목포 분감에 도착해 목포에 배치문·곽우영, 무안에 박선규·안판신·정규식· 정태연·김순한·정신섭·안동선·김한근·김득근·윤호영, 완도 정학균·이현렬, 제주에 강봉환 등 15명을 경찰서에 데리고 와 서장실에서 서장으로부터 일장훈시가 있은 후 사진을 찍었다. 오후 4시 무렵 경찰서 앞에는 방면된 사람을 출영하기 위해 친족 및 목포청년단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목포청년단은 일양정(一陽亭)에 다과를 준비하여 두고 방면자의 위로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경찰의 제지로 부득이 되지 못하고 방면된 15명은 경찰서 직원에 호송되어 즉시 덕흥여관으로 갔다. 목포청년단은 일양정에 준비한 다과를 덕흥여관으로 가져와 방면자 15인을 위로하였다. 그때 방면된 안동선은 의복이 곤란한지라 이를 본 목포 죽동여관 주인 안인규씨가 옥양목 주의(周衣 두루마기) 1건, 바지 1건을 동선에게 기부하였다. 모임을 마치니 오후 6시가 되었다. 방면된 무안 거주자 10명은 4명의 목포경찰서 직원에게 호송되어 4시 45분 열차로 학교리에 하차하여 2대 자동차로 무안읍내로 향하였다. (매일신보, 1920년 5월 4일)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며 김한근은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이유이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일본 최고(最高)의 명문대학인 동경제국대학 화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에서 1년 동안 공사장 일을 하며 학비를 벌어 대학진학을 준비하였다. 그가 화학을 공부하려 한 것은, 당시 가난한 우리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특히 민족산업을 일으켜 독립운동의 기초를 닦고자 하는 간절함도 바탕에 깔려 있었다. 김한근은 동경제대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의 높은 학문적 열기에 놀란 일본인 교수는 일본에 남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그는 경성방직에 취업하였다. 그리고 곧 공장장까지 승진하였다. 이때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 여학교의 하나인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졸업생인 여성을 만나 혼인하였다. 1910년생인 박귀길, 2남 1녀의 외동딸이었다. 박귀길의 부친은 개성에서 진사 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김한근은 경성제국대학 화학과 출신답게 매우 실력 있는 엔지니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내의 최고의 미학 전문가이기도 하였다. 그가 1937년 6월 27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색채론(色彩論)’은 지금 읽어 보아도 전문적 얘기를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글 일부를 인용하여 본다. 색채론(色彩論) -제품에 특히 필요-
1. 색채와 우리의 생활 우주 사이 만물은 각양 각색의 색체로 조화가 되어 있다. 즉 푸른 하늘로부터 산야의 수목 및 화초에 이르기까지 천연물은 모두 색채로 꾸며 있다. 기타 주택 및 회사 같은 검축물이며 길가에 즐비한 상점 등에도 각양의 색채로 조화를 이루어 그 미관을 더하고 우리의 의복은 물론 식물에까지도 색채를 더하여 식욕을 유인하게 한다. 특히 아동들은 색채를 좋아하므로 완구류, 잡지류에도 미려(美麗)한 색채를 더하여 아동들의 눈을 곱게 한다.(중략) 이러한 색채와 우리의 일상생활과의 관계는 일일이 열거하기 곤란함으로 생략하고 다음으로 색채와 가장 밀접한 태양의 광선과 우리의 안목의 작용 등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2. 태양의 광선 우리의 오감은 외계의 자극에 의하여 OO한다. 안목으로 물체를 보는 것은 광선의 자극에 의함이다. 고로 우리는 그 자극의 근원이 되는 광선에 관한 성질을 먼저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하략) 그는 방적공장에서 옷감을 만들어 낼 때 실용성은 물론이고, 옷감이 햇빛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움을 뽐내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방적공장에서 옷감을 생산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신안, 무안의 3·1운동을 추진한 영웅답게 한순간도 민족의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제에 의한 강제 수탈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일제는 김한근이 운영하는 방적공장에서 군용 양말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납품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그는 양말이 쉽게 낡아 삭아 버리는 소재를 사용하였다. 곧 일본군이 동상에 걸려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꿈에도 그리던 독립이 되었다. 하지만 분단이 되고 새로운 정부 수립 및 좌, 우 이념 대립 등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그는 방적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장래의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을 하였다. 이 무렵 목포에서 직물회사를 경영하던 경성제국대학 동기생 천독근이 고향에 내려와 함께 일하자고 제의하였다. 천독근은 목포가 낳은 유명한 소설가인 박화성의 남편이었다. 박화성은 첫 번째 남편 김국진과 헤어진 후 1937년 일본 동경공대를 졸업하고 1934년 목포직물회사를 창업한 천독근과 재혼하였다.4) 동기생의 제안을 받은 김한근은 목포로 내려와 용당동 근처의 방적공장에서 회사를 운영하였다. 천독근이 영업을 담당하였고, 김한근이 공장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회사 경영이 여의치 않아 얼마 후 공장 문을 닫게 되었다. 김한근이 회사를 그만두자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교수직으로 들어올 것을 제안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전남교육계로 뛰어든 그는, 무안중, 장흥중, 여수여중 등에서 학교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일본 동경제국대학 학력에다 방적공장을 경영한 전문가로서의 높은 식견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독립운동가 출신의 자랑스런 전남의 스승답게 거치는 학교마다 올바른 민족정체성을 확립하는 교육에 앞장섰다. 1961년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박정희 군사정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약점을 극복하려고 상훈법을 제정하여 독립유공자를 서훈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이때 김한근을 비롯하여 광주 학생운동의 영웅 이경채 등 훌륭한 애국지사들이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 대통령이 수여하는 훈장을 받을 수 없다고 하여 신청을 거부하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김한근이 지닌 자존감이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에 대한 건국훈장이 점차 사회적으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는 데다 이미 서훈을 받은 장병준이 김한근에게 서훈신청을 할 것을 종용하였다. 마침 그의 건강도 악화되고 있어 서훈신청을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의 판결문이 발견되지 않아 서훈심사가 여의치 않았다. 당시에는 이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한 매일신보 기사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공훈심사를 통과하는 과정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욕을 느꼈다. 그렇게 하여 받은 것이 건국훈장도 아니고 ‘대통령표창’이었다. 1980년 일이었다. 그가 광주 시민회관에 표창장 전수식에 다녀왔는데, 마침 그 자리에 감옥도 다녀오지 않은 이가 ‘애국장’ 서훈을 받는 것을 보고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시름시름 앓다가 1983년 5월 25일 눈을 감았다. 이러한 사실을 조선대 미대 학장을 역임한 그의 차남 대원이 증언하였다. “일제에 맞서다 온갖 고문으로 피폐해진 그의 부친의 자존감이 유공자 선정 전후의 겪은 심정 갈등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하며 안타까워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사후인 1990년 그의 공적을 다시 심사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현재 김한근의 묘는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런데 김한근과 장병준 집안은 사돈으로 엮어져 있다. 김한근의 차남인 대원의 아내 그러니까 며느리가 장하경으로 한양대학교 가정과 출신으로 광주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장하경은 장병준의 아우인 장병준의 손녀 딸이었다. 김대원은 처음에는 이를 알지 못하였는데, 묘비에 장홍염 얘기에 있는 것을 발견한 아내가 종조부라 하여 알게 되었다고 한다. 두 집안의 인연이 필연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김영우(金永佑)로 나오고 김한근은 이명이라 하였다. 차남 대원에게 확인한 결과 한근이 본명이고, 영우는 뒤에 개명한 것이라 한다.
2) 김한근의 차남인 김대원(전 조선대 미술대학 학장 역임)은 장병준의 막내 아우인 장홍염과 김한근이 휘문의숙 친구였다고 하였다. 장홍염이 휘문의숙 다닌 것은 사실 관계가 맞지 않다. 더구나 장홍염은 1910년생으로 3·1운동 당시 아홉 살 내외로 그가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장홍염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휘문고보 학생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상해로 망명을 떠났다가 1930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인천항으로 밀입국하다 체포되었다. 장홍염의 작은 형 장홍협과 장홍염이 이름이 비슷하여 혼돈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3) 장병준은 훗날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획책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상여를 메고 시위에 나서 4·19 혁명을 촉발시켰던 유명한 인물이다. 4) 유명한 소설가 천승세는 천독근과 박화성 사이에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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